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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몸의 신학2: 창세기의 처음과 원초적 알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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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4-04 ㅣ No.722

[몸의 신학] 창세기의 ‘처음’과 원초적 알몸


몸과 혼인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가르침 (2)

 

 

시작하며

 

‘11번의 결혼과 11번의 이혼!’ 53세 된 미국 여인의 경력인데, 책까지 출판했노라고 2008년 5월 23일자 국내 언론을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그 경력 가운데서도 눈에 번쩍 띄는 것은 한 남자와 3번씩이나 혼인을 한 것인데, 그 남자의 ‘심성’이 절대 변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3번 모두 이혼해 버렸답니다. 이쯤 되면, 변화시켜야 했던 것은 정작 그녀 자신의 심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녀가 그토록 찾던 ‘남성의 심성’, 포기해 버린 혼인의 ‘본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그 본래의 모습을 창세기의 “처음”에서 제시해 주십니다.

 

 

“처음”의 의미는?

 

교황님께서는 출발점으로서 ‘모세의 이혼 규정’에 대한 예수님과 바리사이들과의 대담 전체(마태 19,3-8)를 인용하면서, 특별히 예수님께서 ‘혼인의 불가해소성’에 대한 근거로서 창세기의 “처음”에다 두 번씩이나 호소하셨음에 주목하십니다. ‘모세의 율법’이 지닌 결의론적인 불완전성과는 비교할 수 없게 ‘창세기의 처음’이 내포하고 있는 인간학적인 온전성을 지적해 주시는 바, 그 “처음”의 요소는 첫째, “창조주께서는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세 1,27)는 것, 둘째,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27)는 것, 그리고 셋째,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는 것, 세 가지입니다.

 

여기에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께서 부여해 주신 계명적인 의미 속에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의 규정에 관한 ‘영원법’의 근거가 있음을 교황님은 밝혀주십니다. 성서 비판론은 “처음”의 상태와 관련된 인간 창조의 기사를 둘로 구분해 주는 바, 이제 본격적으로 성경 구절들에 대한 교황님의 심오하며 일관되고 주옥같은 성찰 내용이 청 · 독자들 눈과 귀에 쏟아져 나옵니다.

 

첫 번째 기사(창세 1,1-2,4)는 두 번째 것보다 시기적으로 더 나중에 쓰였고 논리적으로 더 정연하며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칠일주기’로 된 세상 창조를 다루어주는 제관계 전승과, 하느님을 ‘엘로힘’이라 부르는 이른바 엘로힘계 전승을 따릅니다. 세상 창조의 최고 절정으로서 창조된 인간이 ‘남자와 여자’라는 이중성을 가진 ‘우연적 존재’라는 점, 그래서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는”(창세 1,28) 축복을 사명으로 받았다는 점, 더 나아가 “하느님의 모습으로 된”(창세 1,27) 창조물이 바로 인간의 정체라는 점, 마침내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감탄을 통하여, 창조된 ‘존재’와 좋은 ‘선’은 서로 바꿀 수 있다(Ens  et bonum convertuntur)는 인간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이고 윤리학적인 공식이 확인된다는 점이 제시됩니다.

 

두 번째 기사(창세 2,5 이하)는 인격주의적인 입장에서 하느님을 의인화해서 주관적으로 인간 창조를 다루어 주며 하느님을 ‘야훼’로 부르는 이른바 야훼계 전승을 따릅니다. 원시적인 ‘신화’의 방식이긴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욱 풍요롭게, 인간에 관한 철학적 핵심 요소들을 제시해 줍니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각각 창조된 별도의 과정 속에서, ‘사람’인 ‘아담’이 ‘남자’인 ‘이쉬’로 바뀌는 시점이 바로 ‘여자’인 ‘이쉬샤’가 출현한 그 시점이라는 점, 그래서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려서”(창세 2,23) 서로 ‘구별되는 존재’이며 동시에 “내 뼈에서 … 내 살에서 나온”(창세 2,23) ‘동종의 존재’라는 점, 그래서 떠나서 결합해 한 몸이 되어,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창세 2,25), ‘원초적인 결백’의 상태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십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세 2,17)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처음”의 상황에 심각한 변화가 생기는데, 그 나무로 말미암아 전사(前史)로서의 인간의 ‘원초적인 결백 - 행복’과 역사(歷史)로서의 인간의 ‘첫 번째 타락’ 사이에 경계선이 설정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온전한 본성의 경험과 타락된 본성의 경험 간에는 단절되지 않고 일관된 상관관계가 있는 바, 창세 3,15 이른바 ‘원(原)복음’에서 구속(救贖)될 약속과 함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 인간의 “몸이 속량될”(로마 8,23) 날을 바랄 수도 있음을 강조해 주십니다. 그래서 절박한 심정으로 ‘몸의 신학’, 곧‘속량될 가능성을 지닌 몸’에 관한 신학에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원초적 고독과 인간의 정의는?

 

교황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주겠다.”(창세 2,18)라는 선언에도 주목하십니다. 야훼계 전승에서는, ‘혼자 있어 좋지 않은’ 인간의 고독이이중적인 의미로 인간을 정의해 주는데,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흙을 일구고”(창세 2,5) “동산을 돌보며”(창세 2,15) ‘노동’하는 인간으로서 그 협력자의 부재에 대한 고독이 그 첫 번째의 의미이며, 성(sex)과는 무관하게 세상의 사물과 동 · 식물과는 다른 몸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성 자체가 겪는 고독이 그 두 번째의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의 모습으로 만들어진”(창세 1,26) 존재, 각각의 ‘이름’을 붙여주고 그것들의 차이점도 인식할 줄 아는 ‘이성적 존재’, 게다가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된 금령을 지켜서 생명을 선택할 수도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창세 2,17) ‘비실존적인’ 상황을 스스로 초래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라고 정의됩니다.

 

 

원초적 단일성의 의미는?

 

“둘이 한 몸이 되기”(창세 2,24; 마태 19,5) 위해서는 인간이 자신의 고독을 통해 먼저 이중적인 성성(sexuality)의 구조를 인식하고 협력자의 출현을 기다리게 되는데, 교황님께서는 ‘잠’을 주목하십니다.

 

잠에서 깨어난 인간은 ‘남성’으로 ‘여성’으로 각각 눈을 뜨게 되며, 자신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동종성’, 그런 ‘닮음’이 주는 기쁨의 탄성이 바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창세 2,23)인 것입니다. 그렇게 알아본 ‘알맞은 협력자’ 자기 아내와는 몸으로 ‘인격들의 친교(communion  of persons)’를 긴밀하게 나누고 성적으로 자기를 증여하는 ‘온전한 혼인 행위’를 통해 비로소 ‘한 몸’을 이룹니다. 교황님께서는 이때, 신성한 ‘위격들의 친교(communion  of Persons)’를 누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의 닮음’이 실현된다고 보십니다.

 

 

원초적 알몸의 진정한 의미는?

 

교황님께서는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라는 상태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창세 3,7)라는 상태로 일방적으로 진행한다고 보지 않으십니다. ‘부끄럽지 않은 알몸’은 온전한 자기 인격을 ‘사심 없이’ 자신과 같은 동종성을 지닌 배우자 앞에 드러낸, 그래서 ‘두려움이 없게 된 알몸’을 의미하는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금령에 대한 불순종으로, 곧 하느님의 창조적 의지 전반에 대한 존경심의 결핍으로, 충만하던 알몸이 부끄러움으로 결핍된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거꾸로, 그런 금령에 다시 순종하고 하느님의 창조적 의지 전반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기만 하면, 다시 ‘부끄럽지 않은 알몸’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고 ‘처음’의 원초적 결백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음도 뜻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앎’을 몸으로 된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외적인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그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 변화’의 차원으로 보십니다. 인격적인 행위와 성을 통해 결정하는 행위 간에 아무런 불화와 대립을 ‘알지 못하는’ 것,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라는 창조주의 ‘시선’처럼 피조물인 알몸과 그 성을 평화로운 ‘내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런 차원 말입니다.  그리하여 교황님께서는 몸으로 된 남성과 여성의 상호적인 보완성에 대한 앎과, 몸으로 된 인격들의 공동체적인 친교의 나눔 그리고 자기를 전달하는 것을 몸의 “혼인적인” 의미라고 칭하십니다.

 

 

마무리하며

 

서두에서 소개한 11번 결혼하고 이혼한 여성은 자신의 소회를 한마디로 정리해 주는데, “좋은 남자를 찾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Fabricando  fit faber!’ 유명한 라틴어 속담인데, 대략 ‘나무를 많이 만지다보면 목수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미 혼인 - 이혼의 ‘달인’이 되었을 그녀의 결론은 “결혼은 신중히!”랍니다. 하지만, 11번씩이나 했던 결혼을 몽땅 다 이혼해 버린 그녀에게는 오히려, ‘이혼은 신중히!’가 더 적확한 것은 아닐까요?

 

문헌의 방대한 양과 질을 요약해 놓고 보니, 필자 능력의 초라함 때문에 교황님께는 너무나 송구스럽고 독자들에게는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기다려주시는 독자의 격려로 용기를 끄집어내어, 다음 호에서는 선물(내어줌)로서의 몸의 혼인 의미, 원초적인 결백의 의미, ‘앎’과 출산의 순환적인 의미,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온전한 시각’으로서 제1장의 결론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인내하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경향잡지, 2010년 2월호, 이동호 프란치스코 신부(가톨릭 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가톨릭교리신학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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