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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몸의 신학4: 마음으로 한 간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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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4-30 ㅣ No.733

[몸의 신학] 마음으로 한 간음


몸과 혼인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가르침 (4)

 

 

시작하며

 

“사이버 애인들과 바람피웠다.” 이혼소송을 제기한 어떤 슈퍼모델의 사연을 2008년 미국의 어느 월간지가 소개해 주었습니다. 과연, 육체적으로 전혀 접촉한 적이 없는 사람과 간통이 성립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아닌 그의 이미지를 단지 ‘바라봄’으로써 간통(adultery)이나 사음(fornication)은 성립되는 것일까요?

 

그럴 가능성과 조건에 대해, 교황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마음으로 한 간음’의 의미, 인간 ‘욕정’의 의미, 그리고 ‘완고한 마음’의 의미 등을 설명해 주시는 가운데, 이번 호에서도 당신의 혜안과 그 호소력을 우리가 ‘살짝’ 맛보게 해주실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마음으로 한 간음’의 의미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욕망{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

 

이 말씀의 깊은 취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황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산상설교 전체의 맥락을 파악해야 하며 그래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라는 말씀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라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22.28.32.34.39.44)라는 선언 형식에서 인간 도덕성의 내적 형식으로서, 입법자이신 하느님을 존중하면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윤리(ethics)로부터 예수님 산상설교의 그런 에토스(ethos)를 발견해 내도록 하십니다.

 

교황님께서는, 구약 율법에 대한 결의론적인 입장은 외적인 판단 기준들에 따라 ‘몸의 행위’만을 통제하고 그 ‘틈새’를 합법적으로 허용해 주려는데 골몰하고 있다고 지적하시며, 그런 태도야말로 입법자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신 계명의 취지와 인간학적인 측면도 왜곡시킨다고 지적해 내십니다. 바로 인간학적인 또 다른 구성요소인 ‘마음의 행위’의 차원을 누락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반복된 선언 속의 ‘너희’는 단지 산상설교 현장에 있던 청자(聽者)들만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행위’를 무시한 채 ‘몸의 행위’만을 다루려는 사람들도, 바오로 사도께서 표현하신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가 자신들의 마음에 쓰여있는”(로마 2,15) 사람들도,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인간 존재들도 다 해당됩니다. 그래서 ‘몸의 행위’와 함께 ‘마음의 행위’에 대한 도덕성도 동시에 다뤄 줄(로마 7,23 참조) ‘온전하면서도 적절한 인간학’을 강력히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교황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간음 금지를 말씀하실 때 “욕망을 품고 바라보는 자”(예를 들어, 2사무 11,2 참조)에 의해 바라보아진 ‘여자의 신분’을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음을 주목하십니다. ‘여자’의 신분이 ‘바라본 남자의 아내’인 경우, ‘또 다른 남자의 아내’인 경우, 그리고 ‘아무의 아내도 아닌 여자’인 경우 등에서, 외적인 행위로 ‘간음’이 발생하려면 그녀가 그 남자의 아내가 아닌 경우여야 합니다.

 

교황님에게 더 중요한 것은 ‘욕망을 품고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라는 말씀에는 부부 관계든 아니든, 남자든 여자든 모든 인간 존재들이 다 해당된다는 점입니다. 결론적으로, 산상설교의 에토스에 입각해, ‘몸의 행위’로만 실천했던 율법 계명을 ‘마음의 행위’로도 실천해야 ‘능가하는 의로움’에 비로소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욕정’의 의미

 

문제는 ‘욕망’을 품은 남자입니다. 우리말 새 번역 “성경”에서는 “음욕(lust)”으로 번역되었지만, 교황님께서는 분명하게, “욕정(concupiscence)”이 아닌 “욕망(desire)”으로 반복하여 표현해 주십니다. 그리고 육의 욕정, 눈의 욕정, 그리고 세상의 욕정, 이런 삼중적인 욕정에 주목하십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정{욕망}과 눈의 욕정{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정{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6-17).

 

이 욕정은 창세기 1장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 “하느님께서 세상{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좋았고 …참 좋았다.”에서처럼 ‘좋음’의 세상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통해 하느님을 의지적으로 거스르게 된 세상, 죄의 결과가 지배하는 그 세상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런 욕정을 품은 인간은, 교황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 창조의 원천이었던 좋음[善], 그 ‘원초적인 선물’의 원천이었던 사랑으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간 인간입니다. 동시에 창조의 신비 속에서 즐겨왔던, 가시적인 세상의 것들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자신의 그 능력에 대한 의식마저도 어느 정도는 상실해 버린 인간이며, 하느님의 모습이 원초적으로 충만했던 ‘원초적인 알몸’을 두려움으로 생긴 부끄러움 때문에 스스로 가리고 싶은 인간, 그런 결핍된 존재입니다.

 

이런 ‘내재적인 부끄러움’이 ‘성적인 부끄러움’으로 표현되는 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던”(창세 3,7) 것입니다. 이런 ‘욕정의 인간’은 마침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몸으로써 수행해 갈 ‘협력자’로서의 서로 구별되는 상호적인 역할들 속에서, 몸의 일치적인 의미에 대한 의식에도, 남녀간에 누리던 인격적인 친교에도 의심을 품게 되고 불만족해 하게도 되었습니다.

 

그런 인간은 자신을 인격적으로 자기-통제만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여자의 ‘출산의 고통’(창세 3,16)보다도 남녀의 인격적 관계가 여자에 대한 남자의 지배 관계로, 더 나아가, 상호 주종 관계로 환원되어 버릴 위험입니다. “너는 네 남편을 욕망{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 3,16)라는 말씀에서처럼, 몸과 성 때문에, 일치의 의미와 출산의 의미를 동시에 가진 몸이 구현해 내었던 ‘한 몸’의 인격적 친교의 부부 관계가 위협받게 된 것입니다.

 

교황님 가르침의 강조점은 이것입니다. ‘아내들의 욕정’도 인격적 주체를 대상으로 환원시키고자 ‘욕망을 품고 남자를 바라보도록’ 자극을 줍니다. 같은 원리로, ‘남편들의 욕정’도 ‘아내를 욕망하도록’ 자극해 줍니다. 그 결과, 아내도 그 남편의 ‘주인’이 되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욕정’은 교황님께서 사용하시는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인 ‘환원적인 욕망(reductive desire)’으로 정의됩니다.

 

 

‘완고한 마음’의 의미

 

이제 교황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의 몸이 혼인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부정하게 되는 이유가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마태 19,8)이라고 밝혀주신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하십니다.

 

교황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마음’은 몸의 그런 성격을 구현해 줄 태도를 인간의 몸에다 적용시켜 주는 ‘척도’이기에, 욕정의 지배를 받아 ‘완고해진 마음’은 선물이 되려는 내적 자유를 상실하게 하고 ‘그 자체를 위해 원해진 주체’를 ‘타인을 위한 대상’으로 그리고 상호적인 ‘선물의 관계’를 ‘소유의 관계’로 환원시킨 다음, 마침내는 ‘향락의 관계’로 만들어 몸의 혼인적인 의미를 근본적으로 훼손해 버립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자유롭게 상호 선물이 되도록 해줄 ‘사랑’과 서로의 인격을 주종 관계로 환원(변질)시켜 버리게 해줄 ‘욕정’이 대립하는 전장(戰場)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선물하지{내어주지} 않으면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없는”(“기쁨과 희망”, 24항) 존재인 것입니다.

 

 

마무리하며

 

‘포르노 간통’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측은 “남성의 신체적 특성상 포르노를 즐기는 것은 간통이 아닌 가상적 성생활에 불과하다.”고 한답니다. 교황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런 주장은 인간에 대한 ‘온전하지도 못하고’ ‘적절하지도 못한’ 가치관에서 나옵니다. 남성의 특성이 포르노를 즐기도록 되어있다고 진정 믿는다면, 그런 ‘당당한’ 남성들이 자신의 ‘정당한’ 특성을 몰래 숨어서 발휘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렇게까지 하면서 흙먼지로 소멸해 버릴 ‘지나가는 세상’(1요한 2,17)을 살아내기에는 그 경쟁의 삶이 너무 치열하지는 않나요? 밥숟가락을 빨리 놓을수록 손해를 덜 볼지 모르겠습니다.

 

교황님의 ‘몸의 신학’에서는, ‘욕정’은 항상 부정적으로 쓰이지만, ‘욕망’은 부정적인 가치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가치로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욕망’이라는 단어 앞에다 원하는 의도를 표현해 줄 ‘형용사’를 붙여야 더욱 확실해집니다.

 

필자뿐만이 아니라, 필자가 처음 접했던,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사도좌 관보)의 영어 번역본을 출판한 1997년도 바오로딸 출판사의 그 출판본도 그래서 ‘결코 작지 않은’ 혼란과 오류를 범했던 것입니다. 다음 호에서 다룰 주제들, ‘욕망을 품고 바라봄’, 몸의 단죄 이론, 의심에 찬 마음, 에로스와 에토스, 몸의 속량 등에서도 또 나옵니다. 고맙습니다.

 

[경향잡지, 2010년 4월호, 이동호 프란치스코(서울대교구 신부, 가톨릭 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가톨릭교리신학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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