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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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현대문화 트렌드: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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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6-15 ㅣ No.322

현대문화 트렌드 -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매체 환경의 변화가 인간관계의 양상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논의는, 인터넷이 보편적인 통신수단으로 자리 잡기 훨씬 전에 흔히 ‘PC 통신’으로 일컬어지던 텔넷 통신망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부터 이미 가시적인 전망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채팅’을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기계와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는 황폐하고 삭막한 취미쯤으로 여기는 막연한 이질감은 코미디의 소재로도 유치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짐짓 진지한 말투로 그것이 결코 기계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통신수단이 달라진 것뿐이라는 것을 강조해야만 했던 것이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초등학생들도 개인용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는 세상에서 설마 아직도 전화가 편지보다 무성의한 통신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실 전화에 밀려 사라질 것 같던 ‘편지’라는 오래된 통신 수단을 극적으로 되살려낸 것은, 오히려 전화보다 훨씬 더 진보된 전자우편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더 재미있는 것은, 마치 20여 년 전 “편지 한 줄 쓸 정성이 없어 전화만 삐죽 걸어오고 그만”이라는 어른들의 나무람을 고스란히 빼다박은 것처럼 “전화 한 통 하면 될 것을 이메일 달랑 던져놓고 만다.”고 아쉬워하는 풍경이다. 이것은 예컨대 목소리가 더 성의가 있는 것인지 글이 더 성의가 있는 것인지 따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방증이다. 흔한 말로, 통신수단이 어떠하든 중요한 것은 거기에 담긴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한 줄짜리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라고 해서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

 

이렇듯, 예컨대 고작 10년 전만 해도 ‘첨단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호출기가 어느 사이 골동품이 되어버릴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온 통신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사회의 변화를 어느 정도 반영하기도 하고, 또한 어느 정도 추동해 내기도 한다. 처음 텔넷이 보급되었을 때 이 새로운 매체의 문화적 전망에 긍정적이었던 이들은, 한국사회에서도 혈연이나 지연 또는 학연이라는 전통적인 관계망이 아니라 비로소 취향이나 정서, 나아가 삶을 대하는 태도나 정치·사회적 견해 따위를 매개로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고무되었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은 얼마나 다른가?

 

비록 인터넷이 도입되기 직전 텔넷망 서비스에서 가장 큰 규모로 운영되던 동호회들이 거의 대학 동호회였고, 인터넷이 도입되기가 무섭게 전무후무한 성장 신화를 만들어낸 서비스가 ‘동문 찾기’였다는 개운하지 못한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전까지는 전혀 아무런 연고가 없던 불특정한 사람들이 순전히 넷 위에서 흘러다니는 ‘정보’를 매개로 서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간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또 사라져간 숱한 ‘커뮤니티’들을 이제 와서 돌아보자면, 여기에는 한국사회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극단적인 양가성 사이의 일정한 긴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던 듯하다. 우리는 누구나, 온갖 연고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한국사회의 폐쇄적인 관계망을 벗어나 좀 더 개방된 환경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낯선 사람’과 접촉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연고망이 하루아침에 공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듯 정말로 ‘낯선 사람’을 ‘낯선’ 채로 남겨두는 것 또한 무척이나 정서적으로 불편해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야말로 아무런 전제 없이 순전히 ‘취향’이나 ‘정서적 태도’ 또는 ‘정치적 견해’만을 매개로 만났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자체를 또 하나의 폐쇄적인 연고로 만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종국에는 ‘동창’이나 ‘동향’ 또는 ‘종씨’라는 것과 ‘같은 동호회 사람’ 또는 ‘채팅 친구’라는 것이 전혀 다른 울림을 주지 않기에 이른다. 그 관계망의 바깥에 있는 국외자들이나 또는 뒤늦게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배타적인 양상을 띠게 되는 현상이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그것을 한사코 피한다면 그 커뮤니티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전근대적 연고에 기반한 인간관계에만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는 이것만으로도 매우 신기한 변화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기실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관계의 본질이 변화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우리는 여전히 ‘낯선 사람’과 대화하기를 두려워하고 관계 맺기를 불편해 한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서로의 정체(!)를 충분히 확인함으로써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을 때라야만 관계가 편안하게 유지될 수 있으며 대화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자기 배반’이야말로, ‘카페’라는 일반명사의 사용을 놓고 소송까지 불사해야 할 정도로 한동안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커뮤니티 서비스’가 몰락하게 된 배경이다. 가령 ‘동창회’처럼 애당초 오프라인에 이미 ‘커뮤니티’가 존재하고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면서 다만 접촉의 효율을 높이려는 보조적 수단으로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를 이용하던 부류들은, 휴대전화 등 다른 통신수단의 발달과 함께 굳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운영해야 하는 부담을 감수해야 할 필요가 서서히 사라져 갔을 것이다. 

 

또 그와는 달리 순수하게 온라인을 매개로 형성되었던 ‘커뮤니티’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심지어 활동이 왕성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오히려 점점 더 그와 비슷한 양상이 전개되면서 더 이상 온라인 커뮤니티로 존재할 필요가 없어진다. 요컨대, 온라인 커뮤니티가 온라인에서 유지되어야 할 유일한 존재 기반은, 그것이 언제나 ‘낯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애당초 그런 커뮤니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심리적 동인이 어느 정도 충족되고 나면 누구도 ‘낯선 사람’과 계속해서 부딪치는 ‘피곤’을 감수하려 들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온갖 연고망과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한국사회의 폐쇄적 일상 속에서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말 한마디 편하게 건넬 ‘친구’가 없다고 느낄 때, ‘낯선 사람’들 속에서라도 친구를 발견하고 싶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낯섦’을 감당하는 것은 친구를 만들기 위한 불가피한 ‘비용’일 뿐이지 그 자체가 기껍고 즐거운 일은 아니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친구’를 만든다는 것, ‘낯선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심리적인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뜻한다. 나와는 다른 독립적 존재에 긴장하지 않고는 온라인에서건 오프라인에서건 어떤 관계 맺기도 불가능하다. 기실 한국사회의 폐쇄적인 일상이 많은 사람에게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간관계’로서의 실속이라곤 조금도 없는 이름뿐인 관계가 주는 것은 ‘구속’뿐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낯선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전혀 배우지 못했고, 오로지 자아가 지워진 집단의 구성원으로서만 호명되는 관계의 이름에 서로를 구속시키는 데만 익숙해지게 되었으며, 그것을 ‘인간관계’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서로 ‘친구’가 되는 데에 상당한 심리적 비용이 지불되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그 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똑같은, 어쩌면 그 이상의 심리적 비용을 지불하며 상대방의 자아에 긴장해야 한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게 무슨 친구냐?”고 발끈할 것이다. 

 

이미 ‘친구’가 되고 나면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긴장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낯선 사람’에게 긴장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상당히 ‘피곤’한 일이며, 이제 많은 사람은 애당초 주어져 있는 관계 바깥에서 스스로 친구를 새로 만드는 것조차 귀찮아하기에 이르렀다.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에서 명쾌한 문장으로 간파해 냈듯이, “사람들은 이제 모든 것을 상점에서 사지만, 친구를 파는 상점은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친구가 없게 된 것이다.”

 

 

미니홈피, 친구를 파는 상점?

 

최근 몇 년 사이에 전개된 매체의 변화 양상을 놓고, 많은 이들이 ‘개인성의 강화’라는 경향을 읽어내는 듯하다. 중요한 사례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블로그’와 ‘미니홈피’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사안을 피상적인 유사성에만 현혹되어 잘못 짚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블로그의 경우, 여전히 커뮤니케이션의 매개는 ‘메시지(정보)’이며, 이 메시지는 적어도 그 의미를 공유하는 불특정 다수의 ‘낯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1인 미디어인 블로그의 두드러진 특징은 어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나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마련인 ‘집단적 정체성’을 거절하고 다양한 ‘개인적 정체성’들의 중첩과 연대에만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오늘날 블로그는 사람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의 등장에 고무되었던 가장 핵심적인 이유인 ‘취향이나 정서, 나아가 삶을 대하는 태도나 정치·사회적 견해를 매개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구현하는 데 한 발 더 다가서 있으며, 그만큼 기존의 관계 맺기 양상과 주류문화에 훨씬 더 저항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니홈피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여기에는 ‘낯선 사람’의 존재를 견디며 그 존재감에 긴장하는 심리적 비용을 지불한다는 의미에서의 ‘인간관계’가 없다. 미니홈피 위에서 전개되는 그 무수한 관계망을 매개하는 것은, 시스템이 제공하는 관계망 그 자체이다. 미니홈피에서 새로운 관계의 매개가 되는 것은 운영자의 ‘메시지’가 아니라 운영자가 축적한 기존의 ‘관계망’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전혀 새로운 풍경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서 아직도 의연히 위력을 행사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전근대적이고 신분적인 관계망의 극단적인 양상이 첨단 통신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온라인 상으로 복제된 것뿐이다. 혈연적 연고의 친소를 따지는 ‘촌수’의 개념이 이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핵심 원리라는 것은 전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요컨대 미니홈피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포기할 수 없는 근원적인 ‘관계 맺기의 욕망’과 다른 한편에서 점점 더 완강하게 자리 잡아 가는 ‘참을 수 없는 인간관계의 귀찮음’이라는 모순된 감정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충돌 지점에서 그 엄청난 간극을 가장 효과적으로 채워줄 수 있는 도구로 고안된 것이다. 뜻 맞는 사람들과 ‘카페’를 운영하는 데에는 엄청난 시간적·정신적 노력이 들어감은 물론 상당한 수준의 ‘인간관계’ 노하우가 필요하다. 하다못해 블로그를 운영하는 데에 지속적으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생산해 내야 한다는 부담이 필요하다.

 

그러나 미니홈피는 과감하게 이 모든 부담을 면제시켜 준다. 대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부담은, 서비스 제공 업체에 ‘짭짤한’ 돈벌이로 귀결될 ‘아이템’들을 구매하는 것으로 대체된다. 이것은 특정한 상품의 소비를 매개로 ‘커뮤니티’를 만들어가는(그 상품을 소비하지 않으면 왕따를 시켜버리고 마는) 속물적인 소비 자본주의의 양상과 또 얼마나 닮은 꼴인가? 생텍쥐페리가 알면 놀라 넘어질 일이지만, 드디어 ‘친구를 파는 상점’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확히 말해 ‘친구를 파는 상점’이 아니라, ‘친구’라는 이름의 ‘허위의식’을 파는 상점이다. 그런 상점은 길게 보아 가부장적 혈연 가족의 성립 이래로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므로 새삼스럽게 놀랄 일은 아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가 껍데기뿐이고 자신에게는 여전히 ‘친구’가 필요하며 그것은 결코 상점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더 줄어들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매체 환경의 변화로 사람들, 특히나 앞으로 살날이 더 많은 젊은이들의 삶이 황폐해지고 있다고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낯선 사람’의 존재를 견디며 공존의 지혜를 찾지 못하고, 기어코 ‘집단’의 묵시 속으로 끌어들이거나 끝내 그렇게 되지 못할 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 채로 외면해 버린다. 그러나 ‘낯선 사람’을 불편해 하지 않고 기꺼이 그에 따른 긴장을 인간관계에 반드시 필요한 심리적 비용으로 감당할 줄 아는 삶의 지혜를 미처 가르쳐주지 못한 기성세대들은, 유감스럽게도 이토록 암울하기까지 한 현실을 개탄할 자격이 없다. 

 

미니홈피에 무섭게 탐닉하는 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친구’가 필요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친구’ 따위는 없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으며 그보다는 이런저런 연줄을 많이 확보하고 관리하는 게 더 중요한 ‘관계 맺기’라고, 그리고 그 연고망에 온전히 포섭되지 못하고 ‘낯선’ 채로 남아있으려는 사람은 결코 친구가 아니라고 가르쳐온 것은 그렇게밖에는 달리 사는 방법을 몰랐던 이 사회이다.

 

[사목, 2005년 2월호, 변정수(미디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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