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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11세 교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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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2-08 ㅣ No.22

굿뉴스 통합검색으로 찾아보았습니다. 아래 신문 기사 하단 쪽에 보시면 교황 비오 11세는 가톨릭 액션의 교황이라 불릴 정도로 가톨릭 운동 대중화에 앞장 섰던 분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래 기사 전문을 참조하십시오.

 

 

전례쇄신운동과 성서보급운동(평화신문, 1999-11-21) 
 
유럽교회 중심쇄신의 물결 '출렁'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 유럽의 교회에는 폭넓고 깊은 변화와 쇄신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비오 9세(재위 1846∼1878)를 비롯해 레오  13세(1878∼1903), 비오 10세(1903∼1914) 와 같은 역대 교황들이  교권을 수호하고 교회공동체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취한 노력들이 그 결실을 얻기 시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전쟁 체험을 들 수 있다. 3700만명이라는 엄청난 사상자를 낸 전쟁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계몽주의 사조 이후 발전한다고 믿어왔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지성주의 문화의 붕괴를 체험했다.  초월적인 계시 진리를 부인하고 인간 합리성을 제일로  믿었던 것이 잘못임을  깨닫게 되면서 교회생활을 통해서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고자 했다.

 

이런 체험들은 교회 안에서의 자각과 합치되면서 교회쇄신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20세기 초반의 전례 쇄신  운동과 성서보급운동, 그리고 평신도 운동이었다. 이 운동들은 그러나  개별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19세기부터 국지적으로 일어났던 쇄신 노력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확산되어 나갔다. 그리고 이 운동들은 금세기 최대의 교회쇄신 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쇄신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전례쇄신운동

 

전례쇄신운동은 19세기말 벨기에의 베네딕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시작되면서 20세기에 들어와 유럽 전역으로 확산돼 나갔다. 벨기에에서는 1882년 일반 신자들을 위한 미사전례서가 출판되면서 “교회  기도의 ‘보물단지’인 전례에 신자들이 더 쉽게 그리고 친숙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교황 비오 10세는 1903년에 발표한 교서에서  신자들의 쇄신을 위해서는 성사생활과 교회의 공적인 기도(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라고 권고한데 이어 1905년 교령을 통해서 신자들이  자주 미사에 참례하여 영성체할 것을 권고했다. 또 1910년에는 첫영성체를 할  수 있는 나이를 앞당길 수  있도록 했다.

 

한편 1909년에는 벨기에의 멕헬른에서 가톨릭 신도대회가 열렸는데 당시 대회를 소집한 메르시에 추기경은 미사전례서가  기도서로 보급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신자들이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적어도 미사전례 본문과 주일 저녁기도는 자국어로 번역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교회의 공식 전례서가 모두 라틴어로만 씌어져 있는 상황에서 이같은 주장은 엄청난  영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런 쇄신노력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으로 파급되어 나갔다.

 

특히 독일에서는 가톨릭 청년운동을 중심으로 전례쇄신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독일 청소년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는 수많은 저술과 강연을 통해서  전례정신을 배양했다. 과르디니는 또  신앙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해석해야 한다면서 성서를 읽고 묵상할 것을 강조했다.

 

이렇게 확산되기 시작한 전례쇄신운동은 평신도들은 물론 많은 젊은 성직자들에게도 전례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주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등 사회적으로 어려운 시절에 전례를 통해서 영적인 힘과 활력을 얻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 전례행위에 있어서 공동체가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성이 강조되면서 교회는 개별신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새로운 교회상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교회당국은 전례운동이 급속도로 파급되면서 주저하기도  했지만 교황 비오 12세(재위 1939∼1958)가 1943년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설명한 회칙 ‘신비체’와 1947년 전례에 관한 회칙  ‘중재자이신 하느님’을 발표함으로써 이 운동에 개방적인 자세를 취했다. 특히 교황은 1947년 회칙에서 “전례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하신  성부께 바치는 공적인 예배”라면서 전례에 대한 “능동적이고 인격적인 참여”를 강조했다.

 

성서보급운동

 

18세기초에 이르러 독일과 영국·미국의  개신교에서는 다양한 성서학회들이 생겨나 성서연구 및 보급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의 성서연구는 기본적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성서신학에 대응하는 일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 1870년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도 교회는 성서에 대한 참다운 의미와 해석에 대한 권한을 교회만이 가지고 있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신자들이 자국어로 번역된 성서를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교회의 허가 없이 성서를 함부로 보급하는 일은 금지됐다. 19세기말까지 가톨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성서연구와 보급에 비해 상당히 뒤쳐져 있었다.

 

그러나 교황 레오 13세가 1893년에 회칙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통해 신자들에게 성서를 읽도록 장려하고 1898년에는  성서를 읽는 신자들에게 대사를 부여하면서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1902년에는 로마에 성 예로니모 학회가 창립되고 1910년에 비오 10세에  의해 로마성서학회가 설립되면서 가톨릭의 성서연구와 성서보급도 점차 활발해졌다. 이와 함께  전례쇄신운동이 확산되고 당시에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둔 성서 연구 결과들이 밝혀지면서 신앙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관심이 높아져 성서보급이 활발히 이뤄졌다.

 

특히 비오 10세는 단지 성서에 대한 더욱  깊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서가 주는 종교적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 신앙쇄신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취지에서 성서 읽기를 장려했다. 이런 관심은 전례쇄신운동과  맞물려 성서보급을 확산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비오 10세는 교회에  근대주의 사조가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염려해 당시에 성서학자들 사이에서 사용되던 근대적 성서연구 방법론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지만 도래한 것은 교회였다’는 말로 유명한 프랑스의 성서학자 알프레드 르와지
의 저서들이 금서로 규정된 것도 비오 10세 때였다.

 

이후 성서읽기와 보급은 계속 장려됐지만  근대적인 성서연구방법론이 가톨릭 교회에 의해 수용된 것은 1943년 비오 12세가 회칙 ‘디비노 아플란테 스리피투’를 발표함으로써였다. 교황은 이  회칙에서 당시 성서학자들의  방법론을 대부분 수용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성서연구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교황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성서를 주신 것은 단지 인간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나 또는 학문적인 연구조사의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라며 가톨릭 성서연구의 방향을 제시했다.

 

평신도운동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흐름은 ‘가톨릭 액션’이라고 부르는 평신도들의 조직적인 사도직 활동이 빠르게 확산돼 나갔다는 점이다. 이미 19세기 초부터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에서는 가톨릭 평신도들이 주축이 된 자선활동과 사회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독일 가톨릭 협의회, 이탈리아 가톨릭 청년회 등이 조직되면서  회원들의 신앙교육과 그리스도교적 생활쇄신을 도모했다.

 

이런 평신도 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 교황 비오 10세가  1906년 교서 ‘일페르모 프로포시토’를 통해 이탈리아의 ‘가톨릭 액션’을 격려하면서 가톨릭 신자들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도록 권고함으로써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후임 비오 11세(재위 1922∼1939)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크게 활성화됐다.

 

특히 비오 11세는 ‘가톨릭 액션의 교황’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톨릭 액션 을 대중화시켰다.

 

‘가톨릭 액션’은 이탈리아를  모델로 해서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남녀 청년들이 중심이 돼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벨기에의  조셉 카르딘 신부(1882∼1967, 1965년에 추기경이 됨)가  1925년에 시작한 가톨릭 노동청년운동(J. O. C)이었는데 비오 11세는 이 노동청년운동을 가톨릭 액션의 모델로 삼도록 격려하기도 했다. 교황은 나아가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하고 쇄신하는 데 적극 활동하라”며  평신도 운동을 장려하면서  가톨릭 액션을 “교회의 교계적 사도직에 대한 평신도들의  협력과 참여”라고까지 표현했다.  평신도의 이런 사도직 개념은 이후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을 새롭게 고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가톨릭 액션은 주교의 위임을 받은  조직적이고 사도적인 평신도 활동으로서 각 나라로 강력하게  퍼져나가 1951년에는 평신도  사도직 운동을 위한 제1차 세계회의가, 1957년에는 제2차 세계회의가 각각 로마에서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헌장’과 ‘평신도  사도직 교령’ 등을 통해서 평신도의 위상과 사명이 새롭게  이해되면서 ‘가톨릭 액션’이란 이름의 평신도 운동은 차츰 설 자리를 잃었지만 그보다 훨씬 다양한 형태의 평신도 사도직 활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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