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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더 큰 생명, 더 큰 가정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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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290

더 큰 생명, 더 큰 가정을 향해

 

 

두 달 전에 둘째 아이를 보았다. 늦게 혼인을 한 탓인지 아내와 함께 기도도 드리고 이러저러하게 무척 공도 들였지만 아이가 잘 안 들어서다가 힘겹게 임신을 했다. 첫 아이 때는 제왕절개를 해야 했는데 둘째 아이는 다행히 자연분만을 해서 낳았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동네 큰 병원의 의사들도 완강히 고개를 흔들었다. 한 번 수술해서 낳으면 그 다음도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멀리 떨어진 병원을 하나 찾아냈고, 버스와 전철을 4번씩 갈아타가며 아내는 그렇게 10달을 버텨야 했다. 

 

출산 당일 아내 옆에서 손도 잡아주고 등도 쓸어주고 또 끙끙 힘도 같이 주면서, 첫 통증부터 아이가 나올 때까지 전 과정을 함께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는 아버지인 내가 탯줄도 자르게 해주었다. 고맙고도 복된 체험이었다. 말 그대로 젖먹던 힘까지 써서 힘줄이 툭툭 불거지고 피가 몰려 검붉어진 아내의 얼굴과, 잠시 뒤 내 손에 받쳐진 핏덩이 아이의 모습은 내가 지상에서 눈감을 때까지 잊지 못하리라. 아, 생명은 참 신비로운 것이라고, 더 없이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가정에 관한 한국교회의 시각 

 

누구나가 할 만한 체험을 좀 길게 얘기한 데는 까닭이 있다. 그 까닭은 좀 아꼈다가 이 글 말미에서 하기로 하고 이쯤에서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보자. 지난 6월 6-10일까지 대전교구 정하상 교육회관에서 열렸던 한 국제 포럼에 다녀왔다. ‘국제 가톨릭 지식인문화운동(ICMICA)’과 필자가 속한 ‘우리신학연구소’, 그리고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 여성 공동체’가 공동으로 연 심포지엄이었다. 해외에서 온 신학자, 교회 활동가만 30여 명이 되는 제법 규모 있는 회의였다. 

 

“평신도는 어떻게 참 교회 건설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이 국제 포럼에서는 평신도의 교회 참여뿐만 아니라 오는 8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제8차 총회 주제인 “생명을 지향하는 아시아 가정”에 대해서도 토론했다. 가정문제에 대한 논의는 주로 FABC에서 이번 총회 준비를 위해 미리 나눠준 ‘작업문서(working paper)’를 바탕으로 진행했다. 그러니까 필자가 참가했던 국제 포럼은 이 FABC 총회에 평신도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또 그 준비과정에 평신도의 참여를 도모하고자 조직한 회의였다. 이 포럼에서 필자가 한국의 가정문제에 대해 보고하기로 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어떤 사목정책 아래 어떻게 가정문제를 다뤘는지 자료도 찾고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여러 신학잡지를 뒤적였지만 가정에 관한 신학적인 글은 찾기 어려웠던 반면에, 주교회의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사목』에서는 여러 글들을 볼 수 있었다. 1996년-2003년 사이에 『사목』에 실린 가정 관련 글은 주로 가정폭력, 부부관계, 혼인과 이혼, 혼인 전후 교육, 가정 공동체, 가정 안에서의 전례, 가정 사도직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 주제들은 한국교회가 가정문제에 신학적으로 접근하는 대신 사목적인 대상으로 삼고 관심을 기울여왔음을 한눈에 알게 해주었다. 

 

또 이 글들을 읽으면서 필자는 한국교회가 가정문제를 사회구조적인 시각에서 보기보다는 『사목』에 실린 글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대부분 단위 가정이나 개인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글 가운데서 이런 관심을 잘 나타내는 한 글을 인용해 본다.

 

“가정은 사회의 기초 공동체로서 교회와 사회의 미래는 이 가정에 달려있고, 사회의 제반 문제는 이 가정에서 파급되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나아가 가정의 정체성이 낙태와 이혼 증가로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으며 ‘죽음의 문화’의 뿌리가 낙태라고 단정한다. 따라서 “가정은 죽음의 문화라고 불리는 것에 반대하여 생명문화의 중심을 이루며, 가정의 기본임무는 생명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을 인용해 강조한다. 

 

한국교회에서 가정문제를 다룰 때 늘 “생명” 문제가 따라다니는 것은 이런 관점 때문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가정문제를 말하면 으레 생명 또는 낙태 문제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요 상식이 된 느낌이다.

 

이 글들의 논리대로라면, 가정문제는 사회적이고 구조적 시각보다는 수태순간에서 비롯하는 “생명”에서 시작해 “나-가정-교회-사회-세계”라는 단계론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교회와 사회의 모든 문제는 가정에서 나오고 가정 내 모든 문제는 낙태와 같은 반생명적 행태에서 나오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도덕적, 종교적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사회 구조적 악과 아무런 관계도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가정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도 사회구조적 대응보다는 개인의 도덕 차원에 머물고 만다. 

 

그러나 한국교회에는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20년 전에 있었던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은 가정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의안 ‘지역사목’ 6항은 “교회의 사목이란 … ‘인간구원을 위한 봉사’ 활동이며 교회가 ‘지금 이곳’에서 처한 세상과 관련을 맺는 모든 활동”이라고 사목의 개념을 폭넓게 정의한다. 또 교회가 지금 처해 있는 세상이 사목활동의 영역이며 따라서 사목의 대상은 종교, 인종, 이념, 국가를 초월한 모든 인간이라고 강조한다. 

 

의안 ‘가정사목’에서도 위에서 살핀 『사목』의 관점과는 다른 시각을 보인다. “가정을 하나의 세포로 고립시켜 그 가정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아무 연관도 없이 가정을 복음화하기는 불가능하다. 가정의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것이 대부분 사회환경에서 나온 것이다.”(1장 6항)라고 말함으로써 『사목』의 단계론적 논리를 뒤집는다. 나아가 28항에서는 “가정은 본질상 더 큰 공동체의 회원 공동체이며 … 그러므로 더 큰 신앙 공동체와 세계 공동체의 생활과 영적 보화와 그 배려가 참여하지 않는다면 가정의 성사적 본성은 가정을 성화시키고 건전하게 하기란 불가능하게 된다. 이웃의 구원을 위한 활동은 자신들의 구원의 보증인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가족 개념의 확장 

 

그동안 한국 천주교회는 『사목』의 글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가정사목’을 낙태나 피임, 혼인 전후 교육, 부부관계 등 가정 내 문제로 풀어왔던 것이 사실이고 또 여전히 이를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런 개인적인 도덕의 문제는 언제나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시아의 현실, 곧 그리스도교 말고도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세계 주요 종교가 뿌리내린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다른 종교인의 가정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과, 또 한편으로는 이주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의 문제가 아시아의 심각한 현안으로 떠오르는 아시아의 상황에서 교회가 더 이상 가정문제를 개인문제로만 제한한다면 적절한 사목 정책을 세우기는 지극히 어려워 보인다. 

 

특히 한국교회는 분단이라는 역사적 특수성 아래 북한 동포의 가족과 또 탈북자들의 가족도 사목적 배려의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한 겹의 더 어려운 과제를 싸안고 있다고 했을 때, 가정문제를 개인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로는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기 어렵다고 본다. 

 

이번 국제 포럼에서도 이주자 문제가 터져나왔고 FABC 작업문서가 이 문제의 원인이나 심각성을 제대로 짚어내지도 못했고 따라서 사목적 제안이나 실천계획도 엉성하기 이를 데 없다고 참가자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큼 이 문서는 아시아의 현실을 다루고는 있지만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주민 문제는 보편교회나 지역교회에서 쉽게 공식적 입장을 내놓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은 영토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는, 다시 말해 꼭 속지적 민족이나 인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입장을 살려나가면 이 문제는 풀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2004년 1월 18일 세계 이민의 날을 맞아 주교회의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강우일 주교를 비롯해 각 교구의 국내 외국인 사목 담당자들은, 체류 기간이 만기된 불법 이주 노동자를 내쫓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정부에 촉구하며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에서 교회는 오래전부터 이민의 권리를 옹호했으며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신 지구의 재화를 아무도 독점할 권리를 갖지 못하며” 이를 이주민과도 나누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가톨릭의 가장 귀중한 전통 가운데 하나인 연대성(solidarity)이다. 선진국과 후진국, 강대국과 약소국의 연대, 나아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강조한 노동자와의 연대가 아시아의 현안인 이주민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가정문제는 낙태, 청소년, 부부관계나 교육 등 가정 내부 문제로 묶어두지 말고 시야를 확 넓혀서 이웃, 지역, 나아가 타민족인 이주민도 ‘우리 가족’이라고 선포하고 그것을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개인 도덕성 중심의 생명담론에 상황성, 맥락화를 부여하자는 말이다.

 

 

새로운 생명관의 정립 

 

이 생명의 상황화는 구체적인 사목적 실천의 차원에서 몇몇 의지 있는 사목자의 선의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지극히 임의적이고 개별적이라서 지속성이 없고 또 교회 전체가 참여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생명의 맥락화를 집단적 운동 차원으로 이끌려면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 곧 신학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가 이웃, 타인, 타민족을 ‘한 가족’이라고 선포하자면 기존의 신학적 풍토에서는 어려움이 따른다. 

 

다시 말해 이웃과 지역을 복음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파트너로 동등하게 인정하고 대화 과정 자체를 복음화라고 여기기는 지극히 어려워 보인다. 그 까닭은 “교회는 복음이요 문화는 복음의 대상이라는 기본관념(norm)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씨)이므로 기존 문화 속에서 말씀으로 육화해서(incarnated) 그 문화에 도전하고 바꿔야 한다는 관념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육화하심으로써 이미 모든 피조물이 성화됐다는 육화 신학(theology of incarnation)을 충분히 성찰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화신학을 창조신학에 입각해 전 우주로 확대해 이해하지 않으면, 그만큼 교회 안에서 생명의 상황화는 힘을 얻기 어렵다. 신학자들의 예언자적인 태도와 노력이 요청되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육화 신학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맞물려 이제는 생명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다시 규정해야 하는 것은 이제 ‘시대의 징표’로까지 읽힌다. 우리는 생명을 현대철학에서도 부정된 데카르트적 ‘나’, 곧 세계와 고립된 개별 자아(individual)로서의 나를 전제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열린 시스템’(관계)으로서 파악하는 인식 틀의 전환을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명 역시 신진대사에서 보듯 외부의 물질과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는 열린 시스템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생명은 그 바탕에서부터 ‘관계성의 총화’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가 내 어머니요 형제냐?”

 

그러나 앞에서 말한 필자의 경험처럼,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명은 개별적인 단위로서 ‘체험’된다. 아내의 절규에 가까운 신음 끝에 내 손에 놓인 핏덩이는 이미 이성 이전의 감각적 확신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 새끼 귀여운 것을 감각적으로 배워 상식으로 나누고, 그저 그 정도씩만 자기 자식과 남의 자식을 나누어 사랑한다. 따라서 기존의 생명 개념을 뛰어넘으라는 요구는 ‘남의 가족’을 ‘내 가족’으로 여기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자연인에게 본성으로 굳어진 듯한 이런 부모-자식 관계를 확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극한 어려움이자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성서에서 예수님도 비슷한 요구를 하셨다.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펴실 때 제자들이 어머니와 인척이 찾아온 것을 알리자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요 형제냐고 되물으셨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또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진지하게 대답해야 할 때이다. 가정문제를 앞에 놓고, 가장 먼저 성실하게 대답해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던지신 이 물음이다. 문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준비가 되었는가에 있겠지만 말이다.

 

[사목, 2004년 7월호, 황경훈(사단법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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