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목자] 본당 사제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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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7 ㅣ No.306

본당 사제의 영성

 

 

영성이란 하느님 체험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주는 정신이다.

 

교회 안에서 많은 경우 영성은 기도 중심적으로 수도회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수도회는 자신들의 카리스마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내적 원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세상과는 분리되어 따로 공동체를 이루면서 무엇보다도 기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본당 사제의 영성은 본당이라는 지역교회의 사목자로서 복음화라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정신을 말한다.

 

하느님 체험은 기도만이 아닌 활동과 함께 두 가지 불가분의 요소로 이루어진다. 기도와 활동(삶)은 참된 영성의 본질적인 요소다. 참된 기도는 현실 삶에 투신하도록 이끌고, 현실 삶은 강력한 기도를 필요로 한다. 참된 영성으로 하느님 체험을 갖게 되면 우리는 자기 신원에 맞는 삶을 힘 있게 살 수 있으며 기쁘게 투신하게 된다.

 

사제는 세상에 속해있으면서도 세상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 「사제품」, 3항 참조). 이것은 본당 사제의 영성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본당 사제들은 세상 속에서 복음화라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고자 존재한다. 한마디로 본당 사제의 영성은 복음화를 위한 영성이요 사목자의 영성이다. 사목자로서 요구되는 두 가지 불림을 살펴보고 중요한 요점 세 가지를 밝혀보겠다.

 

 

1. 사목자로서 요구되는 두 가지(제자와 목자) 불림

 

1)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1) 본당 사목자로서 우리의 확신은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삶 속에 현존하시는 분이시요,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사제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기도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기 위한 관상이요 기도이다. 세상을 떠나 관상에 잠기는 것이 아니다.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차리려면 더욱 깊은 기도가 요청된다.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깊은 친교를 이루시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할 뿐, 다른 것은 없다고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우리의 활동은 먼저 성부로부터 파견된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데서 시작된다.

 

(2) 본당 사제의 영성은 그리스도론적이고 복음적어야 한다. 모든 사목은 예수 그리스도를 앎에서 시작된다. 그 앎이 깊이를 더하면 더할수록 복음화란 교회의 사명은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한 복음 연구와 개인적인 관상은 우리를 기능적인 사제직에서 해방시켜 준다. 그리스도야말로 본당 사제들에게 사목생활의 원리이며 원천이다. 사제는 기도로써 그리스도의 신비 속에 잠기지 않으면 안 된다. 사제생활의 중심이며 근원인 미사성제를 비롯하여 행해지는 각종 성사가 사제 자신 안에 내재화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사제품」, 14항 참조).

 

(3) 여러 성사와 전례의 집전자로서 사제 직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성사의 집전자로서 사제는 먼저 성사의 은총을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한다. 말하자면 고해성사의 은총을 깨달을 때, 기쁘게 성사에 임할 수 있으며, 성체성사의 경우에는 먹히는 존재로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주님의 그 마음으로 들어가야 한다. 곧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현존하시면서 우리에게 오시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속죄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와 사제는 긴밀히 일치하여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봉헌하는 것이지만 사제는 자기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르침으로, 자신의 기도로, 자신의 모범으로, 자신의 삶으로, 온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 죽어야 한다.

 

아르스의 비안네 성인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었다. 기능적으로 문제가 없는 성무집행으로는 부족하다. 선포하고 깨달은 바, 그 깊은 의미를 살아야 한다. 곧 직무를 통해 개인 성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2)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착한 목자

 

(1) 교회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이를 실현하는 유일한 길은 가장 약하고 버려진 한 사람까지 품에 안는 것이다. 루가 복음 15장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모습이다. 여기서도 사목자는 자신이 목자이기 전에 길 잃은 한 마리 양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그분의 처신에 감사드리고 감격에 찬 찬미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아울러 그분의 음성에 자신의 모든 존재를 내어맡기고 한 발 한 발 내딛는 겸손한 사목자가 될 것이다. 하나를 받아들이면 전부를 얻게 되고 하나를 잃어버리면 전부를 잃어버리는 하나와 전부의 역설적인 역동성을 깨달아야 한다.

 

(2) 본당 사목자인 우리는 강생하신 예수님처럼 세상에 투신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마구간에서 이루어진 것만이 아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계속되었다. 사람들 속에서 가르치고 먹고 마시며 사람들을 벗으로 여겨 그들 생활 속으로 들어가셨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 속에 머무르시기를 원하셨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자캐오의 집에 묵으셨고 나환자 시몬의 집에서 임종을 준비하셨다(마르 14,3).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당시 유다 사회를 놀라게 했고 당황하게 했다. 이처럼 가난한 이에 대한 우리의 우선적인 선택은 이 시대에도 도전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힘이 되며, 핵심이다. 이 선택은 복음적이며 영성생활과 하느님 체험의 출발점이다. 이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그 영성은 착각이다. 우리 사회에서 배척받는 이, 보살핌이 필요한 이들이 누구인가? 적어도 자기 관할구역 내에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가장 가난한 이로 오신다면 어디에 오실지 둘러봐야 한다. 무의탁 노인, 버려진 어린이,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결손 가정 등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의 활동 현장이다. 그 삶의 현장은 바로 우리가 투신해야 될 사목 현장인 것이다.

 

(3) 이런 사목자의 삶은 세상의 고달픈 삶을 사는 백성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된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어려운 삶을 교회에 알리고, 사목자의 도움을 받고 위로와 힘을 얻고 있는가? 점집을 찾는 등 다른 곳에서 갈증을 해소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본당은 전례가 거행되고 삶과는 무관하게 모임과 행사가 진행되는 곳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목자라면 백성들을 찾아나서야 한다. 이와 같은 동참은 본당 사목자 영성의 본질적 요소이고 사목생활의 정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 속에서 고통과 기쁨을 나누는 것이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주님의 현존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 1항 참조).

 

필자 개인적인 실천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렇다. 소공동체 방문과 가정 방문을 주간에 한 번은 하려고 한다. 상가(喪家) 방문 연도는 빠뜨리지 않는다. 사제에게 장례 미사는 의무지만 상가 방문은 형제적 사랑이다. 백성들의 삶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것이다. 많은 고통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서로 용서하며 더불어 사는 교우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목자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한 개인(가정)을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결코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앎으로 작용하며, 안정감을 가지고 힘찬 사목자의 태도를 가질 수 있게 한다. 가정 방문은 어떤 전제 없이 인격적인 만남이 되도록 하였고, 소공동체 방문은 순시로 느끼지 않도록 한 군데를 3-4회 방문한다. 소공동체 모임에서는 교우와 똑같은 입장에서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삶을 나눈다.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서 편하다. 누구보다도 먼저 나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든 기쁜 소식이 된다.

 

(4) 착한 목자는 백성들과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로 나아간다.

 

착한 목자는 어버이 마음으로 백성을 대한다. 자녀가 어렸을 때, 부모와 자녀는 일방적인 수혜의 관계로 부모가 모든 것을 먹여주는 식이다. 그러나 자녀들이 커나가면 차츰 어버이는 자녀들에게 자유의 여백을 준다. 스스로 하게 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성숙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고 함께 책임을 지는 관계로 나아간다. 본당일도 마찬가지이다. 신자들이 주인의식을 갖도록 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를 활용한다. 본당의 재무 관리도 함께할 수 있다. 이것이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겠다. 벗이라 부르겠다”(요한 15,15).

 

 

2. 중요한 요점 세 가지

 

(1) 공동체로서 당신을 계시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은 모든 영성의 기본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모든 사도적 활동은 공동체 생활에 근거한다고 강조했다. 누구보다도 독신 사제인 우리에게 공동생활은 필요하다. 사제 독신제가 존재하는 한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본당 사제들이 본당에서 함께 살지만 공동생활은 아니다. ‘백성들과 함께’는 너무 추상적이고 범위가 넓다. ‘사제단’도 마찬가지다. 수도회 형태는 아니면서 헐거운 공동생활이 있다. 인근 본당 사제들이 함께 숙식하며 기도와 사목을 나누는 공동생활도 있겠다. 사목적인 지향이 같은 사제들이 정기적으로 만나 사목적인 나눔을 하는 것도 공동생활이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적어도 본당의 사제와 수도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복음 나눔을 하는 것이다. 한 주님을 믿고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는 사람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게 된다. 일보다 사람이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영신적 가족이요, 대체 가정이다.

 

결국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 신앙에 우리의 모든 것이 기초하고 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 서로 존중하고 서로를 기꺼이 내어주는 공동체로서 당신 모습을 우리에게 계시한다면 우리 역시 그 신비를 살아야 한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온 인류를 가슴에 품는 것보다 더 어렵고 절실하고 중요하다.

 

(2) 평신도와 함께하는 공동체를 통한 복음화는 시대적인 요청이다.

 

본당 사제는 공동체를 건설하고 공동체를 활기차게 만들어야 한다(「사제품」, 6항). 공동체를 통한 복음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이때 평신도를 신뢰하고 평신도와 함께 평신도를 선두로 해야 한다. 평신도 사도 양성은 우리 사목자의 중요한 역할이다.

 

이를 위해 먼저 가정 공동체를 튼튼히 해야 한다. 작은 교회, 가정들이 모여서 하나의 지역 소공동체를 이루고, 그 다음 소공동체가 모여 본당 공동체를 이룬다.

 

세상의 복음화가 교회의 사명이라면, 세상 속에서 일상을 사는 평신도들은 그 주역이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삶의 자리는 가정과 이웃 그리고 일터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목자들은 너무 지나친 성당 중심의 사목으로 일관해 왔다. 여기서 탈피해야 한다.

 

성당은 어느 면에서는 하나의 에너지 공급소요, 잘못된 곳을 수리하는 수리 센터이다. 복음의 일꾼으로 힘을 받으려면 꼭 필요한 곳이지만 늘 그곳에 머물 이유는 없다. 평신도들의 활동 현장은 바로 그들 삶의 자리이다. 복음화의 열매는 본당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맺는다.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소공동체 운동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에 비추어 삶의 모든 부분을 나누면서 복음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소공동체 사목은 ‘신앙 따로, 삶 따로’인 신앙생활에서 신앙과 삶이 통합된 삶을 살게 하는 대안이다.

 

(3) 예언적인 복음 선포는 진전된 복음화로 영성의 심화가 필요하다.

 

“복음화란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기타 성사를 베푸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현장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구체적인 변혁과 역전이 전개되도록 하는 것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17-19항 참조).

 

신자 비율만을 따지는 복음화라면 본당 내에서 교리와 성사만 베푼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렇지 않고 사람들의 생활과 구체적 환경을 변혁시키는 것이라면 세상 전체를 하나의 국면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사회의 가치관, 법과 제도, 관습 등이 복음에 합치하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특히 분열된 양상을 띤 사회문제를 판단하는 사목자는, 어떤 이는 일으켜 세우지만 어떤 이들은 넘어뜨리게 된다. 이라크 파병, 국가보안법 철폐, 인권문제, 신자유주의 등, 정치·경제·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나 불의에 대해 복음적인 식별을 해야 한다. 본당 사목자의 활동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침묵을 지키든 말을 하든) 정치적인 색채를 띠게 되어있다.

 

정교분리 원칙은 교회가 정치적인 문제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복음적인 식별을 통해 예언자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복음 선포요, 분명한 복음화 활동이다. 정치·경제·문화·사회의 복음화를 말할 수 있다. 1891년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기점으로 반포된 많은 교황청의 사회 회칙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원래 정치는 사회를 통합하기 위한 것이고 정치의 과제 역시 약한 이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데 있다. 물론 우리의 시선은 현실에 머물지는 않는다. 저 멀리 두고 있다. 그러나 가시적인 하느님 나라의 표지를 ‘지금 여기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3. 마무리

 

- 본당 사제는 단순한 성사 집행자로서의 교회 공무원이 아니다.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이고 내면적인 우정으로 맺어지는 참다운 제자다. 그래야만 복음화의 사도가 된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19-20).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것, 세상의 복음화는 우리 신앙의 본질이다.

 

- 본당 사제는 한 지역의 복음화를 책임진 사목자로서 효과적인 복음화 전략과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시도해야 한다. 복음화의 일선에 있는 본당은 지역사회에 열려있어야 한다. 지역사회의 필요에 응답하는 차원에서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집, 가정상담소, 아이들 집, 장애인 집 등을 운영할 수도 있겠다. 작은 이, 한 사람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바로 목자의 마음을 갖게 한다. 사람들의 삶 속에 육화하고 약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착한 목자는 그 자체로 훌륭한 복음 선포이다.

 

신자 개인적으로 일상(가정)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수행법과 나눔, 기도 등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실천적인 신앙의 면모를 살려, 삶이 바로 영성생활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 자기 몸집만 키우는 교회, 지나친 본당 중심의 사목에서 탈피하여 백성들의 삶의 현장을 중요하게 여긴다. 사목자는 복음화의 주역인 평신도와 함께 가난한 이와 연대하며 바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여기 와있음을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 본당 사목자의 활동, 특히 예언적인 복음화 활동은 원하지 않아도 정치적 색채를 띠고 반대받는 표적이 될 수 있다. 결국 사제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표지가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 모든 교회 지체와 함께하는 공동체를 통한 복음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사랑의 영성, 그 신비로 이 세상 모든 이를 초대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목표요 참된 복음화다.

 

[사목, 2004년 11월호, 서춘배(의정부교구 구리본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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