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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대중음악: 섞임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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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7 ㅣ No.310

문화비평 - 섞임의 시대

 

 

‘퓨전(fusion)’이라는 말이 사람들 귀에 익숙하게 된 것도 꽤 오래전 일이다. 이제는 퓨전과 함께 ‘하이브리드(hybrid)’라는 말도 쓰인다. 하이브리드는 퓨전보다 더 적극적이다. 그것은 이미 ‘잡종’이 되어버린 것이니까. 하이브리드 현상은 문화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반 현상의 하나이다. 요즘은 특히 더 그렇다. 교회에서도 교회 문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개념의 하나가 ‘하이브리드’가 아닌가 싶다. 

 

가톨릭 문화, 또는 더 넓게 그리스도교 문화는 서양에서 온 문화이다. 선교활동은 필연적으로 이질적인 생각과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옛날의 방식은 조금 직선적이고 무조건적으로 가톨릭 문화를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었던 반면, 지금은 가톨릭 문화와 토착 문화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에 관한 상당한 논의가 있었다고 본다.

 

과거의 ‘문화적 섞임’이 상당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일어나는 과정이었다면 요즘의 섞임은 그렇지 않다. 인터넷만 해도, 다양한 문화가 즉각적으로 만나 그 즉시 새롭게 전개될 가능성들을 얼마든지 잠재적으로 품고 있다. 섞임이나 ‘퓨전’을 이해하고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섞임은 음악의 본질적 요소

 

음악에서의 섞임, 곧 퓨전은 음악의 탄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음악은 먼저 비트(beat)와 멜로디의 섞임이다. 비트는 점이고 멜로디는 선이다. 점은 찍는 것, 선은 풀어놓는 것이다. 둘의 상반된 성질이 섞임으로써 음악은 가던 것을 멈추게 하고 멈추어있던 것을 가게 한다. 그 둘의 섞임 속에서 음악은 심장 박동이 되고 상념의 흐름이 되기도 하며, 길고 짧은 호흡이 되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우주의 리듬과 흐름이 된다.

 

음악의 본질이 이렇다면 음악에서의 섞임은 기본적인 것이 된다. 이 섞임은 음악적인 것이기도 하고 문화적인 것이기도 하다. 몸에서부터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섞임은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 하나가 아닌 여럿, 그 공존이 섞임을 낳는다. 섞임은 다른 것들끼리의 소통이다. 이른바 ‘퓨전’이라는 개념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추세인데, 퓨전을 다른 말로 하면 그냥 ‘섞임’이다. 

 

섞임은 섞임 이전의 요소들이 녹아 새로운 것이 탄생함을 의미한다. ‘섞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것과 통한다. 서로 다른 몸이 만나 새 사람이 나오고 다른 문화가 만나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듯, 서로 다른 비트와 멜로디가 만나 새로운 박동과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 밑에 깔린 다양함, 서로 다른 몸들, 그 아름다운 차이들이 서로를 내놓고 서로 얼싸안아야 새것이 나온다.

 

재즈라는 음악만 해도 그렇다. 재즈는 원래 ‘혼혈’이다. 크레올(creole)이라 불리는, 흑인과 프랑스계(또는 스페인계) 백인 사이의 혼혈 인종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낸 음악이 재즈다. 재즈에는 드넓은 아프리카와 유럽과 목화 집산지인 미국의 항구 도시 뉴올리언스 홍등가의 붉은 불빛이 다 들어있다. 20세기 문화의 보편성이란 간단히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보편적인 정신의 구현과 현현이 그것을 담보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대신, 한 문화나 양식(예를 들어 재즈) 안에 들어있는 요소들이 포괄하는 영역이 넓은 만큼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재즈는 그래서 기본적으로 섞임의 음악인데, 재즈 역사상 여러 번의 ‘퓨전’이 시도되고 있는 게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1940년대의 비밥(bebop) 연주자들 중 일부가 카리브의 리듬을 받아들인 적이 있고, 1950년대 후반의 쿨 재즈 주자들은 클래식과의 섞임을 시도했다. 또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 곧 제3세계가 부상하던 시절에는 브라질의 리듬과 멜로디(보사노바)를 재즈 안으로 도입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1960년대의 프리재즈 운동 이후에는 전위음악적인 시도들과 재즈를 혼합하려는 경향이 재즈의 주된 흐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존 콜트레인은 인도와 아랍의 음악적 요소들을 재즈에 도입하려 했고, 오네트 콜먼은 현대 음악의 독특한 불협적 요소들을 재즈 사운드와 섞어내었다. 이러한 경향들 속에서 재즈의 일부가 전위음악의 흐름과 합류하는데, 그럼으로써 전위음악의 코드 안에서 현대 유럽의 전위음악, 세계의 민속음악, 재즈 등 세계의 여러 음악들이 한데 어우러져 진정한 세계 음악의 탐구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는 것이다. 또한 1970년대에는 1960년대의 록 음악을 재즈 안으로 들여와 이른바 ‘재즈 록’이 꽃을 피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퓨전재즈’라 지칭하는 스타일이 바로 여기서부터, 곧 1970년대의 재즈 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퓨전재즈는 광범위한 대중적 영향력 속에서 재즈와 팝의 섞임이라는 큰 흐름을 주도한다. 80년대 이후에는 재즈와 월드 뮤직, 그러니까 각국의 민속음악적 요소들을 섞어보려는 시도들이 많이 발견된다. 미국의 재즈 뮤지션들만이 아니라 각국의 독특한 지역적 전통을 몸에 가지고 있는 뮤지션들이 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다. 재즈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또 재즈의 바깥에서 중심으로 다양한 운동들이 교차하면서 재즈와 월드 뮤직의 어법들이 섞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존 존(John Zorn) 같은 사람은 재즈와 B급 영화음악의 사운드, 일본 음악, 전위적인 프리뮤직 등을 섞어 독특한 색깔의 자기 음악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레바논 출신의 라비 아부-칼릴은 아랍권의 전통 악기인 ‘우드’를 연주하는 뮤지션인데, 하드 밥(hard bop)적인 재즈와 자기 음악의 훌륭한 합일점을 찾아내고 있다. 트릴록 거투(Trilok Gurtu) 같은 타악기 주자 역시 재즈와 자기 몸에 새겨진 전통적인 어법을 잘 조화시켜 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알토 색소폰 주자 강태환은 프리재즈와 현대 음악, 그리고 한국적인 무속 선율 등이 어우러진 ‘프리뮤직’을 통해 세계 음악을 넓은 시야에서 조망하도록 해주는 깊이 있는 음악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리믹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뒤섞기

 

우리는 ‘리믹스(remix)’라는 것도 이와 같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음악에서 리믹스를 하는 사람들은 디제이(disc jockey)들이다. 그들은 작곡가나 연주자들처럼 자기 것을 만들고 또 자기 손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음악을 가지고 그것들을 자르고 이어붙임으로써 새로운 음악을 창출한다. 디제이 스푸키라는 유명한 미국 디제이는 ‘디제이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시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에 함축된 의미는 여러 가지이다. 

 

우선 디제이는 자기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음악을 ‘가지고’ 자기 음악을 재구성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정체성은 상당히 복잡하다. 누구의 음악인가? 그의 것인가? 아니다. 그의 것이 아닌가? 아니다. 창작행위란 무엇인가? 그가 만들었는가? 아니다. 그가 만들지 않았는가? 아니다. 디제이는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비평가다. 이것은 50년 된 로큰롤의 역사에 관한 일종의 분석행위이다. 디제이들은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누가 하는가? 내가? 아니면 턴테이블이? 턴테이블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엘피(LP) 속의 뮤지션이? 우리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사람들은 디제이가 각각의 분리된 대목들, 서로 불연속적인 그 사운드 자료들을 그저 병치하여 나열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물론 표면적으로, 방법적으로 우선 그 사운드 자료들은 ‘병치’된다. 그러나 이 사운드들은 평면적인 하나의 ‘부분’이 아니다. 각각의 사운드 자료들은 하나의 레이어(layer, 겹)이다. 그것들은 두께를 지니고 있으며, 입체적이고, 표면으로 올라왔다가 심층으로 사라진다. 심층으로 사라진 레이어가 자맥질하는 돌고래처럼 다시 등장했다가 영원히 사라지기도 한다. 심층에선 새로운 레이어들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것들이 제대로 준비되었을 때, 디제이는 비로소 그 레이어들을 끌어올리며 페이더를 밀어 제친다. 다른 시간대와 다른 공간에서 샘플링된 레이어들이 겹친다. 

 

스피드 개러지(Speed Garage)의 창시자이기도 한 아먼드 반 헬덴(Armand Van Helden)은 말한다. “내게 하우스 음악은 ‘다문화적 혼합(multicultural mix)’을 뜻한다. 예를 들어 스피드 개러지 스타일은 흑인적 요소를 클럽에 다시 끌어들인 음악이다. 나는 스피드 개러지를 그렇게 정의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는 진짜 중요한 것이다.”

 

그 혼돈의 다문화적이고 다시간적이며 다공간적인 레이어들 위로, 소음과도 비슷한 아날로그 신시사이저 소리가 떠돈다. 저자도 사라지고 연주자도 사라진다. 디제이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디제이 부스 안에서, 바늘과 페이더(fader)를 만지작거리는 손만이 있을 뿐이다. 그의 것은 두 개의 턴테이블과 하나의 페이더뿐이다. 그 자신의 음악은 없다. 음악들의 이름이 사라진다. 음악들은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내주고 영원한 하룻밤의 춤을 위한 긴 비트의 끈이 되어버린다. 디제이는 그 끈을 계속하여 꼬는 사람이다. 그가 꼬는 그 긴 끈은 그러나 그의 것이 아니다. 그는 없다.

 

 

모든 소리의 하이브리드

 

두 대의 턴테이블에 의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섞인다. 이미 존재하는 로큰롤의 다양한 가지들을 꺾고 다듬고 때로는 새로 심기도 하고 모으기도 하여 새 단지에 꽂아놓는다. 그것이 리믹스다. 이 리믹스가 요즘은 창조 자체보다 더 흥미롭고 창조적이다. 모방과 인용, 커팅과 믹스가 순수한 생산보다 더 창조적이다. 

 

“리믹스하기가 1990년대 예술의 상태라는 건 확실하다. 리믹스는 예전에 있었던 것들의 창을 통해 뭔가를 보고 벌레처럼 그것을 재구축하는 일을 수반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전망이 생긴다. 새로운 그림이 나타나는 것이다.”

 

30년 넘게 독일의 크라우트록 밴드 ‘캔(Can)’의 멤버로 활약해 온 베이시스트 홀거 추케이(Holger Czukay)의 말이다. 이 문명이 생산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미 텍스트화되어 있다. 아니, 어쩌면 텍스트라는 건 처음부터 그런 것이었으리라. 새로운 텍스트는, 자명하게, 없다. 순수한 생산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거나 일종의 사기일 뿐이다. 인기 작가들이 그 사기를 가장 많이 친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라는 텍스트를 같은 코스로 베끼거나 존재하는 텍스트들을 써먹는다. 자꾸 그 사기를 감추려하니 사기이다. 그 사기 자체가 얼마나 흥미로운 것인지 스스로 드러내 주었더라면! 

 

디제이는 바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다. 디제이가 하는 일은 매우 간단하다. 자기 바깥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자기를 지우는 일이다. 자기가 지워진 그 사람이 바로 그 파티의 사제다. 보이지 않는 그의 손이 그 파티를 만든다. 지워진 본명(디제이 누구 누구), 머리에 쓴 후드, 관객이 아니라 바이닐(Vinyl)에 고정된 시선, 헤드폰 속에서 준비되는 들리지 않는 그 다음, 그 모든 것을 리믹스하면서 디제이는 스스로를 지워나간다. 전설적인 일렉트로니카 뮤지션이자 프로듀서인 빌 라즈웰(Bill Laswell)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저작권을 믿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공짜여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이 음표 한 다발을 소유하고 있다는 걸 믿지 않는다. 만일 내가 작곡했다고 내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걸 누군가가 훔쳐갔다면? 글쎄. 어쨌거나 정말 그걸 내가 쓴 걸까? 나는 다른 어떤 기억 속에서, 또는 다른 시대로부터 그것을 옮겨왔을 뿐이다.”

 

 

소통, 열림, 나눔

 

이와 같이 재즈의 영역 하나만 해도 섞임은 하나의 대세라 할 수 있다. 테크노 같은 장르에서도 이러한 섞임은 빈번히 일어난다. 요즘의 ‘새로운 것’은 무조건 형식적 실험이나 전위적인 발상들 속에서만 생성되는 게 아니다. 그 대신 자기 몸에 들어있는 것을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있는 것과 솔직하게 조화시키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섞임은 이해와 관용을 전제로 한다. 내 영역에 속해있는 것들만을 고집해서는 절대 섞임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도 벌써 ‘세계화’라는 말을 한 게 몇 년 전이다. 사실 문화적 소통이 전 지구의 차원에서 지금처럼 자유롭고 편한 적은 없었다. 진짜 ‘세계 문화’의 등장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세계화라 해서 세계가 하나가 된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세계화가 될수록, 오히려 세계는 세밀하게 쪼개진다. 그 세밀한 세포 하나하나가 다 들여다보이게 되는 단계가 바로 세계화이다. 지역, 언어, 인종 등 그 모든 것의 다름이 자기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내놓고 또 다른 다름을 껴안을 준비를 하는 시대, 그리하여 세포들 하나하나가 서로 주고받고 커나가고 새롭게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하는 목숨의 과정, 그게 바로 세계화이다. 그러니까 세계화를 ‘소통’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통은 바로 섞임의 다른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퓨전은 지금 세계 문화의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복수(plural)’의 존재, 곧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한꺼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인정해 주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방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먼저 자기 마음을 여는 데서 출발한다. 자기 마음을 열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순간, 나눔이 시작된다. 그와 같은 나눔 없이는 새로운 것을 창출할 수가 없다.

 

[사목, 2004년 11월호, 성기완(대중음악 평론가, 밴드 3호선 버터 플라이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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