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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교회와 인터넷 시대의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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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265

교회와 인터넷 시대의 인권

 

 

1. 서론

 

정보 사회의 총아인 인터넷이 담론의 수준을 넘어 현대 후기 산업 사회의 주도적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은 것이 시간적으로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인터넷이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을 범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하게 된 것은 1990년 10월 '유럽 핵물리학 연구소'(CERN)의 베르너스 리(Tim Berners-Lee)가 WWW(World Wide Web)를 명명한 이후이다. 이로부터 인터넷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wysiwyg'(what you see is what you get)적인 그래픽 인터페이스(graphic interface)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인터넷에 접근하는 데 전문적 지식이 필요했으므로 인터넷이 문자 그대로 대중의 매체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곧 인터넷이 '제대로' 사회적인 자리 매김을 한 것은 이제 1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정보 공학(IT)이 미래 산업의 선두 주자로서의 자리는 이미 생명 공학(BT)과 나노 공학(NT)에게 내어 주고 있지만, 사회 현상으로서의 인터넷은 이제 그 확고한 자리 매김을 끝낸 상태로 보인다. 그래서 현대 후기 산업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인터넷은 기술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 또는 일상적인 생활양식(modus vivendi)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인터넷 없이는 현대 사회가 그 기능을 더 이상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인터넷이 짧은 시간에 사회 변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현대인들의 의식의 변화와 조화를 이루지 못해 여러 곳에서 불협화음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보 격차(digital divide)의 심화에 따른 사회 정의의 문제가 심각한 과제로 대두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터넷에서의 인권을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약자인 '컴맹'을 상대로 한 경제적 착취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성적 착취뿐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사생활 침해 등의 구조적 폭력 현상은 인권의 문제를 논하지 않고는 정확한 분석을 하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인터넷과 인권의 문제를 교회의 시각에서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에 관해 논해 보기로 한다.

 

 

2. 교회의 인권에 관한 역사

 

사실 인권이라는 개념은 전체 교회의 역사에서 보면 낯선 개념이다. 그래서 미국 독립과 프랑스 혁명으로 구체화된 시민의 권리에 대한 의식이 시대정신으로 드러난 후에도 한동안 교회에서는 인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 '인권' 항목에 소개된 바대로, 적어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교회는 인권에 대해 부정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반포한 교황 레오 13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근대적 의미의 인권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16세기에 저 불길하고 한탄스러운 개혁열이 유행했기 때문에 먼저 종교 문제에 대한 혼란이 발생했다. 이어서 당연한 것인 양 철학이나 시민 사회의 질서 전체도 곧바로 그 속으로 말려들어 갔다. 이것이 근대의 제멋대로의 자유 교설의 출발점이어서 이 자유 교설은 전 세기의 광란 속에서 튕겨 나와 새로운 법의 원리, 대명제로 선언되었다. 이 같은 법은 그 이전에 누구도 알지 못했던 것이고, 많은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법, 자연법과도 이질적인 것이다." 

 

불변하는 진리에 대한 확신은 이렇게 노동자들의 권리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교황조차도 변화와 개혁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교회는 인권에 대한 태도에 근본적 변화를 갖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교황 비오 12세는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한 교회의 직무를 강조하였고, 교황 요한 23세는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에서 1948년 유엔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에서 언급한 인권 조항들을 수용한다.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 '종교 자유 선언' 등을 통해서 교회의 인권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된다.

 

결국 시대가 바뀌고 그에 따라 교회의 대사회적 자세도 변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자 교회에서는 인권에 대한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대두되었고, 교회는 이러한 시대정신을 바르게 읽어 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특히 관심을 두게 된 것이 그리스도 정신과도 일치하는 억눌린 자들의 권리였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구조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경제 정의에 대한 관심은 가장 우선시되는 과제였다. 

 

근세 이후 더 이상 사회의 중심에 서 있지 못한 교회가 노동자들을 공산주의에 빼앗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수수방관할 수는 없었다. 결국 공산주의가 붕괴한 이후에도 인권의 문제는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고 이에 대한 교회의 관심도 더욱 깊어지고 있다. 특히 1971년에 발표된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의 문헌 「세계 정의에 관하여」(De Iustitia in Mundo)에서는 생명권, 생계권, 사회 경제적 권리, 정치 문화적 권리, 종교 자유의 권리 등을 적시하여 교회가 인권을 사회적 시민권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교회는 1970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일반 사회적인 통념상의 인권에 대한 이해와 궤를 같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특히 생명권을 강조하여 태어나지 않은 인간의 권리까지 언급하며 교회의 독자적인 인권관을 제시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3. 인터넷 시대의 인간의 정체성

 

교회가 인권에 느리게 반응한 것만큼 일반 사회에서도 '모든 인간'의 인권 존중이 시대정신으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미 18세기의 미국 독립 선언과 프랑스 혁명 때 각각 '독립 선언서'(declaration of independence)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declaration des droits de i'homme et de citoyen)을 통해 인권이 언급되었었다. 그러나 이때 인권의 주체는 사회적 약자를 포괄한 '모든' 인간의 인권을 논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기득권층에 대항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계층의 정치 경제적 권리 보장의 차원에서 인권이 논해진 것이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모든 인간의 인권이 논해진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8년이다. 그것도 당초에는 유엔 헌장에 삽입할 예정이었으나 논란 끝에 별도의 선언문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세계 각처에서 모든 인간의 인권이 법과 현실 사회 모두에서 보장받게 된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말 전 세계를 휩쓴 학생 혁명 이후, 서구에서는 국가보다 개인의 행복이 앞선다는 인식이 인권 개념 안에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후발 산업 국가들, 특히 아시아의 신흥 산업 국가들에서 인권은 1990년대 이후에나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인권은 헌법에 시민의 기본권인 자유권, 평등권, 참정권, 청구권, 생존권, 행복 추구권 등으로 명시된다. 한국의 헌법에도 이러한 기본권이 명기되어 있고 그 중에 인터넷과 관련된 것은 헌법 17, 18조이다. 그리고 법률로는 '신용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23조, 24조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법과 현실의 괴리는 여전히 실존적 문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0년대 경제와 기술 개혁의 선두로 부상하게 된 인터넷은 인권에 대한 사회적 태도를 더욱 모호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인터넷은 더 이상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가 아니다. 인터넷은 현대인의 삶의 일부이며, 특히 N세대에게 인터넷은 그들 의식 형성의 주요 환경이다. 그리고 인터넷의 사이버 공간에서는 인간의 정체성도 용해(aufl뾱en)되어 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사회학자 미드(G.H.Mead)가 말한 것처럼 'I'와 'Me'의 역동적 관계가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되는 장이 마련된 것이다. 곧 본래의 나로서의 'I'는 사이버 공간 밖에 여전히 물리적인 육체와 더불어 남아 있지만 타인과의 역동적인 관계를 통해 성립되는 'Me'는 사이버 공간 안팎을 드나들며 한 인간의 정체성과 인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특히 사이버 공간 안에서의 'Me1'(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 'Me2'(남이 나라고 생각하는 나), 'Me3'(내가 되고 싶은 나) 사이의 역동성은 현대인의 의식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사람들은 사이버 공간에 'Me1', 'Me3'를 투기(投企, project)한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의 구조상 그 안에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Me2'밖에 없다. 곧 타인의 의식 구조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하는 내 자아의 일부만이 사이버 공간 안에서 유통되는 것이다. 이때에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는 사이버 공간 밖(off-line)에서만 머물 수밖에 없는 'I'와 이 'Me2'와의 불일치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이 부정적으로 강화될 경우 자아 분열이 발생하게 되고 이렇게 분열된 자아는 현실 생활에서의 바른 성장에 결정적 방해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사이버 공간 안에 용해되는 'Me2'가 'I'와의 실존적 연관성 없이 자생력을 가진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이버 공간에 자료를 올린 '갑'이라는 'I'가 현실 세계에서 사망하여도 그 자료는 'Me2'로서 사이버 공간 안에서 인터넷이 활성화되는 한 영원히 '살아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이버 공간과 역동적 관계를 맺고 있는 의식의 주인공이 현대인들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N세대'는 인류 역사상 이러한 사이버 공간의 특성 속에서 자아를 형성한 첫 세대이다.

 

이러한 자아의 분열 현상이 일어나는 사이버 공간 내의 인격과 사이버 공간 밖의 인격의 불일치는 인간의 인권 보호 문제를 더욱 어려운 과제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이 기계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어떻게 변화될지에 대한 정확한 예측은 아직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변화에 따라 사회적 패러다임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변화가 예측 불가능한 상황인데도 현대인의 삶이 그 상황에 종속되고 있다는 현실이 현대인의 정체성과 그 정체성을 가진 인간의 인권을 논하는 데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곧 우리가 이야기하는 인권이 과연 한 인간의, 또는 한 사회 구성원들의 어떤 정체성, 또는 자아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인권 보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4. 인터넷, 교회, 인권

 

인터넷은 아레오파고(Areopagus)라기보다는 아고라(Agora)로 파악하는 것이 일견 합리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현재 인터넷은 어떤 사안에 대하여 특정한 판정을 내리기보다는 자유롭고 열린 대화를 위한 일종의 토론 광장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어원적으로 '아레오파고'는 전쟁의 신(神)인 아레스(Ares)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여기서 아레스의 살인죄에 대한 최초의 재판이 이루어졌다. 실제로 이것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는 바위로 된 언덕이다. 그리고 이곳은 당시 장로들이 모여서 행정과 사법에 관련된 판결을 내리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아고라'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는 어원적인 의미 그대로 고대 그리스의 시민들이 모여 정치적 논의를 활발히 나눈 장소이다. 또한 이것은 언덕 위가 아니라 시내의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는 광장으로, 토론의 장이며 동시에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고라는 사실상 시장의 기능을 주로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 시대로 들어서서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의 기능을 포럼(forum)이 넘겨받게 되었다.

 

사실상 논의(discussion)는 판결보다는 의견을 수렴하려는 작업이다. 그래서 인터넷이 제공하는 사이버 공간에서는 아직 아무런 확정적인 판결을 내릴 수 없다. 현재 인터넷상에서는 많은 의견들이 종래의 대중 매체에 있었던 여과 장치 없이 개진되고 있다. 또한 관련 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달하고 있어 인터넷에 대한 확정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교회는 「교회와 인터넷」에서 인터넷을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의사소통) "매체가 현대의 첫째가는 아레오파고"(the first Areopagus of the modern age)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여 교회 나름대로의 인터넷에 대한 시각을 이미 확립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교회와 인터넷」(The Church and Internet)과 「인터넷 윤리」(Ethics in Internet)는 교황청 사목홍보평의회에서 2002년 2월 22일 발표한 문헌인데, 이 문서에서 교회는 전반적으로 인터넷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더 나아가 「인터넷 윤리」에서는 교회가 인터넷과 연관한 두 가지 공헌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로는 인간 존엄에 대한 교회의 투신, 두 번째로는 교회가 오래 간직해 온 도덕적 지혜가 그것이다. 여기서 말한 인간 존엄이 인권과 직결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교회는 여기에서 인터넷과 인권에 대한 구체적 언급을 더 이상 하고 있지 않다.

 

사실상 현재 인터넷은 인권의 새로운 사각지대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주로 청소년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는 포르노 사이트와 자살 사이트, 폭력 사이트, 안티 사이트(hate site) 등에서 죽음의 문화를 퍼뜨리는 현상뿐 아니라 개인의 정보가 상품으로 거래되는 것을 중심으로 한 사생활 침해와 인간의 상품화, 곧 넓은 의미에서의 인권 침해 현상이 사이버 공간에서 급증하고 있다. 그런데도 법적 제도적 장치의 부족으로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인터넷의 문제에 대한 인권의 측면보다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정보의 비도덕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곧 「인터넷 윤리」에서 적시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는 정보 격차뿐 아니라 사이버 테러, 극단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지나친' 표현의 자유를 심각한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결국 관련자들에게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피해를 준다는 차원에서 인권과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현대인의 인권의 본질적 측면을 다루기 위한 단초가 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가 더 이상 사회 변혁의 주도자가 되지 못하는 시대에서 그 사회적 역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이렇게 교회는 현대 사회 변화의 주도권을 잃은 상황에서,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인간 소외와 직결되어 있는 인권 보호에 관한 대책을 급속히 변화하는 인터넷 시대에 알맞게 제시하여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구체적인 예로 사이버 공간 안의 포르노 사이트와 자살 사이트, 폭력 사이트, 안티 사이트 등 이른바 '죽음의 문화 사이트'에서 유통되는 정보화된 인간의 인격은 교회가 바라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 곧 교회에서 내세우는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서의 인간은 그러한 사이버 공간에서는 자리 매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앞에서 언급한 죽음의 문화 사이트는 근본적으로 가진 자, 힘 있는 자가 못 가진 자, 힘없는 자를 착취하는 폭력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포르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정보'들은 단순한 성도착자들의 반윤리적이고 비윤리적인 '기호'에 영합하는 '상품'이 아니다. 여기에서 제공하는 성적 상품은 저항할 능력이 없는 성적 대상들(주로 나이 어린 여성들)을 폭력적 구조 안에서 힘을 가진 자들(주로 포주나 폭력 조직)이 착취하는 구조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산물의 2차, 3차적 유통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들 중 상당수는 청소년)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이러한 폭력적 구조의 동조자 또는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화된 폭력의 관계 안에서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 모두가 인간이고, 이들이 인간인 이상 그 인격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당위가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려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쉽지 않은 적응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문제와 연관하여 교회가 인권 보호라는 화두에 접근하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곧 교회가 19세기 말부터 이미 수립한 가톨릭 사회론(katholische Soziallehre)에서 제기하는 공동선과 연대성의 원칙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회 윤리적 차원에서 지켜야 할 기본 원칙 수립의 바탕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사목 헌장'에 나온 대로 공동선이란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자기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이다. 곧 각 개인이 자신의 자아실현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모든 사회적 조건의 집합이 공동선인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공동선이 연대성의 원칙에 입각하여 추구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 연대성의 원칙은 단독으로 존립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인간의 본능적인 이기성을 극복하고 존재가 당위를 규정하는 연대성의 원칙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원칙을 필요로 한다. 예수회 소속 신부이며 윤리 신학 교수인 케르버(Walter Kerber)는 바로 이러한 추가적인 원칙인 연대성의 원칙과 함께 보조성의 원칙, 민주주의의 원칙을 가톨릭 사회 윤리의 세 가지 원칙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연대성의 원칙은 인간의 본질적인 사회성과 연관을 맺는 것이다. 곧 인간은 사회적 존재(Sein)이며 이 '사회적으로 존재함'이 바로 인간이 더불어 살고 일체감과 공동체 의식을 느껴야 하는 당위(Sollen)의 근거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이 연대성의 개념은 프랑스 사회학자인 콩트(August Comte)가 공리주의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개념이다. 그러나 콩트는 이 연대성의 개념을 단순히 인과론적, 곧 기능적인 것으로만 사용했다. 프랑스의 사회주의자였던 푸르동(Pierre-Joseph Proudhon)은 연대성을 이기주의가 철저히 배제된 '공동체 의식'이 지배하는 상태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이 공동체의 개념을 사회 철학의 체계 안에 정립시킨 예수회 신부 페쉬(Heinrch Pesch)에 따르면 연대주의(Solidarismus)는 개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 배격하는 것이다.

 

둘째, 보조성의 원칙은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인 「사십주년」(Quadragesimo Anno)에서 최초로 등장한 개념인데, 원래 로마의 군사 용어인 'subsidium'(보조하다)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그래서 개인은 사회 전체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고 전체는 개인이 요구하는 도움을 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의 원칙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각 개인이 사회적인 '사안'(Sache)에 대해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곧 그 사안이 피상적으로는 그 개인과 직접 연관이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는 일이기에 수수방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동선과 가톨릭 사회 윤리의 세 원칙이라는 그물에 인터넷이 지배하는 현대 후기 산업 사회의 인권, 나아가 인권 보호라는 물고기가 걸려드는 것이 과연 보장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열린 질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교회의 입장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직도 모두 밝혀지지 않은 인간 본질의 신비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곧 인간은 기본적인 식욕, 색욕과 마찬가지로 성스러움(Heiligkeit)을 지향하는 '종교성'을 가진 존재이고, 그 종교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진리를 보존, 전승하는 교회가 해 줄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설사 인간의 정체성과 자아가 사이버 공간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된다 해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 인권 보장의 근간이 되는 공동선과 사회 윤리의 원칙이 실현되려면 인간의 자유 의지에서 나온, 곧 순수하게 자발적인 동의에 입각한 권위가 전제되어야만 하는데, 이러한 권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목, 2003년 7월호, 이종범(주교회의 한국사목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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