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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부부관계 해체의 대응: 젠더 파트너십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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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284

부부관계 해체의 대응 - 젠더 파트너십의 필요성

 

 

한국사회의 가정문제를 진단한다고 할 때 흔히 지적되는 문제가 이혼율이다. 이혼이라는 것이 곧 가정의 해체로 연결되는 것이니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난해 하루 평균 458쌍이 이혼을 했다는 통계를 들춰보면 이혼평균연령이 남자는 41.3세, 여자는 37.9세이고, 이혼부부의 평균 동거 기간은 11.4년으로 나타난다. 20년 이상을 함께 살다가 헤어지는 황혼이혼도 전체 이혼건수의 15%를 육박해 가고 있다. 

 

한 경제학자는 이혼을 기업의 부도에 비교하기도 하였다. 기업이 파산을 했을 때 결국 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는 피고용자들의 문제를 예로 들며 가정이 해체될 때 자녀들의 문제가 사회적 위기로 연결되는 부분을 지적하였다. 10년 정도 살다가 이혼을 하면 어른이야 그렇다 쳐도 아이들의 나이는 아직도 누군가의 보호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때인데, 이혼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과연 누가 담당할 것인지 반문한다. 이는 사회발전의 불안정 요인에 연결된다는 것이 결론이다. 

 

어떤 경로로 접근을 해도 이혼이 결코 한 가정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가정이 사적 영역의 대표적인 공간으로 인식되다가 정부가 개입할 수밖에 없는 공적 영역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이유이다.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이요, 정치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일반의 상식으로 패러다임 전환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정해체의 근본원인을 진단할 때 여러 가지 주요 요인이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출발점에서 놓치지 말고 던져봐야 할 질문은 ‘왜 함께 살기를 포기하는가?’ 하는 것이다. 남자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룬 것이니, 그 둘이 관계 유지를 포기한다면 가족관계는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관계 유지를 포기하는가, 관계를 포기하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는 가정해체의 대책들은 선언에 불과한 것이다. 

 

부부가 갈라서는 사유로 성격차이(45.3%)와 경제문제(16.4%)가 가장 크게 나타났다. 고부갈등과 같은 가족불화(13.0%)와 배우자 부정(7.3%)은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다.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상식일 것이고, 나와 다른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래도 일생을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결혼이라는 어마어마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반문은, 왜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왜 그 차이를 수용하지 못하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가 가지고 있는 ‘차이를 이해하고 드러내는 방식’에 대한 의문이 나오게 된다. 다름은 그 차이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때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이해를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소통’이 출발점이 된다. 부부간의 의사소통 문제는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직접적인 변수가 되는 것이다. 

 

뭔가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대상에 대한 특정한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은 일종의 편견이고 선입견이 된다. 상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상대에 대한 감정, 지각, 기대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대처방식과 행동이 채택된다. 더불어 의사소통방식은 양자간에 깔려있는 권력관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를 해석하는 방식이 남녀의 관계를 구성하고 이것이 결혼과 가족제도 안에서 둘의 위치를 규정한다. 우리 사회가 남성중심적 특성을 갖는 가부장제 사회라는 것에는 큰 이의가 없다. 아주 쉬운 예로 ‘왜 딸보다 아들을 선호하는가’, ‘왜 여자보다 남자를 가치 있다고 여기는가’ 하는 질문의 답을 모아보면 이 안에 남성중심적 사회로서의 다양한 모습들이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성별이 일종의 신분으로 해석되고 있다. 신분이라는 것은 다분히 귀속적인 특성을 갖는다. 갖고 태어나는 성별 특성으로 사람의 ‘급’을 분류하는 것이다. 급에 따라 존재의 가치가 달리 읽혀지고 누릴 수 있는 권한의 범주가 달라진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은 주변인으로 위치한다. 자신에게마저 타자로 의미화되는 사회문화적 학습을 꾸준하게 한다. 여성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소통을 할 때 남성과 여성은 주객의 관계로 만나게 되고 여성의 언어는 남성의 언어로 규정된다. 여기에 우리 사회에서 학습한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개입된다. 고정관념은 지각의 틀을 경직시킨다. 내 자신의 틀이 경직되어 있으면 상대방이 다양하게 반응하고 행동함에도 많은 경우에 상대방을 단면적으로 판단하고 비판하게 된다. 특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틀이 부정적일 때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고정관념이나 편견이라는 것 자체가 긍정성보다는 부정성이 더 크기는 하지만, 특히 여성에 대해 구성되어 있는 고정관념에는 존재를 비하하고 폄하하는 가치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강하다는 것은 곧 여성비하적 의식(지각되지 않는 무의식의 영역까지 포함하여)의 정도가 강한 것과도 비례한다. 특히 스스로에게 인식되지 않는 의식은 일상의 사소한 관계에서 적나라하게 표출된다.

 

“요즘 남자들 직장생활하는 것이 참 힘들잖아요. 오륙도 사오정 이야기 나온 지도 벌써 오래고요. 언젠가 남편이 무슨 일이 있는가 싶게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일 때가 있었어요. 눈치만 보다가 하루는 신경 써서 저녁밥상을 차려주고 물어봤어요. 행여 직장에서 무슨 힘든 일이 있냐고. 그랬더니 대뜸 한다는 말이 ‘말하면 아냐고, 말하면 아냐고’ 하면서 ‘니 할 일이나 제대로 하라’는 거예요. 순간 오만 정이 다 떨어지고…….”

 

위 사례가 남성의 입장에서는 고달픈 일상에서 빚어질 수 있는 사소한 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여성의 입장에서는 존재 자체가 거부되고 무시되어 깊은 상처를 받는 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일일이 어떻게 상대의 기분을 맞추느냐는 반문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 차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전제를 생각해 볼 때, 행여 자신의 의도와 달리 전달되어 갈등이 유발되는 일에서는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의사소통을 잘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모든 이론이나 훈련 프로그램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출발한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방법으로 상대방의 행동을 유발하는 감추어진 기대, 두려움, 가정(假定), 성장배경, 능력, 선택 가능한 다른 방법 등의 요소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에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이런 측면들로 만들어지는 대처방식과 행동들이 특정의 틀로 이름 붙여지면서 고정된 시각으로 해석되곤 한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본인 또한 이해되지 못하는 일상이 거듭되면 가장 큰 원인이 서로의 성격 차이 때문인 것으로 대부분 결론짓는다. 그러나 근본원인은 성격차이가 아닌 성적 차이(gender difference)에 있음을 봐야 한다. 여성과 남성의 경험은 단일한 하나의 틀로 결코 읽혀질 수 없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성별 구분이 신분적 질서로까지 연결되는 특성이 강한 사회에서는 성의 사회화 과정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인다. 

 

하나의 예로 전통적인 성에 대한 고정관념 아래서 남성에게 감정이라는 정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그 어떤 것으로 치부되어 지속적으로 거세당하며 성장한다. 그러나 여성에게 감정이라는 정서는 여성성을 확인시켜 주는 의미있는 장치로 자리한다. 또 하나,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성별 특성으로 여성은 알게 모르게 일상에서 주변인이 되는 경험을 반복한다. 주변인이기에 받는 보호에도 익숙해지고 이 과정에서 의존성을 발달시킨다. 

 

반면 남성은 우리 사회 기준점이 남성이 되고 있음을 학습하고 특히 여성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중심에 위치해야 마땅함을 주입받는다. 이 결과 쉽게 피해의식에 젖는 결론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내가 마땅히 할 수 있는 표현이나 주장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마누라에게서까지 무시받는다는 왜곡된 지각을 형성하고, 아내의 생계를 책임져 주는 일을 사랑이라는 잣대로 측정하려는 왜곡된 감정을 만들어간다. 왜곡된 지각과 감정, 기대와 열망 속에서 상대방에게 공감될 수 있는 행동을 표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상대방에 대해 이기적이라는 감정과 더불어 자신이 도구나 수단으로밖에는 의미화되지 못함에 갈등하게 된다. 

 

부부간의 파트너십을 위해서는 각자의 성(gender)을 중심으로 형성된 경험과정에 민감하고 이를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여성과 남성이 화성과 금성이라는 다른 별에서 온 것이 아니라 비슷한 속성을 가진 둘이 같은 곳에 와서 전혀 다른 영역에서 길들여지고 있음을 봐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차이를 민감하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성 인지력(gender awareness)이다. 부부간의 갈등과 일방향적인 가족관계, 경직된 가정문화를 변화시키는 데 성(gender) 이해는 필수적 전제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 덧붙여 부부관계를 둘러싼 잘못된 믿음을 새로운 신념으로 변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미신처럼 형성되어 있는 부부관계 신화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행복한 결혼생활에서는 불일치가 있을 수 없다. 가족들이 싸운다는 것은 가정에 갈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결혼생활은 완전히 행복해야 한다. 각 가족 구성원은 자기 가족에게서 만족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3) 부부는 모든 문제에 의견을 같이해야 하며 동일한 관점에 서야 한다. 

4) 성적 관계(sex relation)가 좋아야 결혼생활을 잘 할 수 있다. 

5) 부부는 서로 상대방의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서로 일일이 말로 확인할 필요가 없다. 

6)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해도 자녀가 생기면 나아진다. 

7) 결혼생활이 아무리 불행하여도 자녀를 위해 참아야 한다. 

8)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할 때 혼외정사, 이혼, 다른 사람과의 결혼이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가장 큰 만족감을 가질 수 있고, 언제나 함께라는 사실을 나눌 수 있고,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가정이라는 공간과 가족관계의 중심은 인간관계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인간관계는 꾸준한 노력 없이 성장할 수 없다. 노력은 어느 일인의 몫이 아니라 관계망 속에 있는 모든 이들의 공통의 몫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갈등이 있다는 것이 곧 불행이나 파탄의 징조는 아니다.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갈등은 발생한다. 일심동체라는 말로 만나는 ‘부부’라는 인간관계는 더더욱 갈등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부부간에 또는 가족관계에 갈등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갈등을 어떻게 해소해 가느냐가 관심의 한가운데 놓여져야 한다. 따라서 앞뒤 설명 없이 사랑의 결합체, 안식처 등의 말로 가정이 그려지면 작은 갈등도 받아내지 못하는 환상 속의 가정이 만들어질 수 있고 가족관계의 갈등이 곧 가정파탄이라는 극단의 이해로 치달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결혼의 장으로 들어왔을 때는 더 이상 감정과 정서만으로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없는 것도 또한 직시해야 한다. 제도라는 틀 안에 들어온 사랑은 관계 유지에 필요한 일정한 강제를 받게 된다. 연애관계에 있던 남녀가 결혼관계에서 부부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려면 사회적 관계에서 지켜져야 할 상식이 부부관계에서도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 공정한 정의의 법칙이 사랑과 배려의 윤리 안에서 적용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자와 남자라는 이유로 이러한 상식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부부관계는 상처와 갈등으로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다. 부부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위기에 대처하는 공동의 노력을 위해서는 분리된 성별을 깨뜨려 소통될 수 있는 언로를 만드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사목, 2004년 5월호, 이상화(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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