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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살며 배우는 사회교리: 전쟁 그리고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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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21 ㅣ No.888

[살며 배우는 사회교리] 전쟁 그리고 평화


아버지의 고향은 평양이다. 아버지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 · 25전쟁으로 이산가족이 되셨는데 1951년 1 · 4후퇴 때 할아버지와 함께 전쟁의 참화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셨다.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신 아버지

고향을 떠나기 전날 아버지는 고향집 뒷산에 작은아버지와 함께 소를 끌고 올라가셨다. 살을 에는 듯한 추운 겨울바람에 아직 어린아이였던 작은아버지는 할머니와 고향에 남기로 결정하셨다.

할머니와 작은아버지, 그리고 아직 갓난아이였던 고모 몇 분이 함께 고향에 남으셨다. 아버지는 사흘만 지나면 다시 국군이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피난보따리도 별로 없이 고향을 떠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벌써 60년이란 길고 긴 시간이 흘러버렸다.

아버지는 전쟁 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약학전문학교에 가서 약사가 되는 것이 꿈이셨다. 그러나 피난 뒤 정착한 인천에서 아버지는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들이 군에 입대하셨고, 아버지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남은 남자였다.

가장 역할을 한 아버지는 인천 연안부두에서 전쟁 물품을 나르면서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공부에 대한 열망은 억누를 수 없어 일을 하면서도 한국무선고등학교라고 불리던 학교에서 공부를 계속 하셨다. 당신이 꿈꾸던 세상과 달리 하루하루 벌어 먹고살아야 했기에 고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석학이었지만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새롭게 정착한 인천은 전쟁 뒤라 여러 가지 일자리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 피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주로 단순 노무직에 해당되는 것들이었다. 고향에서는 집성촌에 대가족이 모여 함께 살며 농사를 짓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정착한 인천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들이 제대할 때까지 가족들을 돌보아야만 했다.

전쟁이 끝나고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들이 무사히 돌아오시자 아버지는 나이가 차서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자신의 꿈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군대에서 제대하신 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시다가 어머니를 만났다.

같은 고향 사람의 소개로 만난 어머니 역시 고향을 떠나 남쪽에 정착하신 피난민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셨다. 아버지는 이렇게 어머니를 만나 가족을 이루셨다.


어머니의 고향도 평양이다

나의 어머니 역시 평양 사람이다. 어머니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피난을 오셨을 때 나이가 열두 살이셨다고 한다. 어머니께선 자손이 귀한 집안에 맏딸로 태어나셔서 어머니의 할머니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셨다.

그러나 그러한 할머니의 관심과 사랑도 잠시, 행복했던 어머니의 가정 역시 전쟁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외할아버지 역시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족들과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셨는데 전쟁이 모든 것을 뒤바꿔 버리고 만 것이다.

고향에는 땅도 있고 재산도 있었지만 외할아버지는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농사를 지으며 사셨던 외할아버지께서 새롭게 정착한 서울에서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역 근처에서 등짐을 날라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셨고 청량리역 근처 판자촌에서 사셨다.

그리고 나중에는 서울 근교에서 목장을 하셨다. 공부를 많이 못하셨던 것이 한으로 남으셨던 외할머니께서는 어머니만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셔서 고등학교에 어머니를 보내셨다.

초등학교 졸업은 전쟁 통이라 건너뛰고 중학교도 2년만 공부한 뒤 어머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셨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공부보다는 다른 부분에 재능이 있으셨단다.

고등학생 때에는 학교 대표 배구선수도 하셨고 학도호국단 단장도 하신 멋쟁이 어머니는 서울 청량리 근처에 있는 정화여고를 2회로 졸업하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같은 고향 사람이란 이유로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한 아버지를 만나 가정을 꾸리셨다.


풍파가 심할지라도 내게는 평화 있네

전쟁의 참화는 두 가정을 고통 속에 밀어 넣었지만 이 전쟁 때문에 내가 태어났다. 우리 형제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성실한 아버지와 인정 넘치고 사랑스러운 어머니 덕분에 제2의 고향인 인천에서 행복함을 누리며 살았다.

가끔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전쟁이라는 불행한 사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날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의 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한참이던 시절, 아버지는 텔레비전에서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것을 보시며 말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고향 땅에 두고 온 어머니와 동생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나 역시 내 가족과 친척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버지와 함께 마음속으로 울곤 했었다. 난 그 이후로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어머니께서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우리형제들 모두 신자가 되었고 가장 늦게 아버지께서 신자가 되셨다. 비록 늦은 나이에 신앙생활에 입문하셨지만 아버지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다. 본당 사목회 활동도 열심히 하셨고 본당에서 생긴 여러 가지 궂은일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으시고 봉사하셨다.

뒤에 내가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는 나보다 더 기뻐해 주셨다. 심지어는 당신이 결혼 전에 신앙생활을 했었더라면 신학교에 당신이 갔을 것이라고 농담을 하시기도 했는데, 그 농담이 진담처럼 들렸다. 그만큼 아버지께선 내가 사제가 되는 것에 대해 당신 일처럼 기뻐하셨던 것이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제일 좋아하셨던 성가 59번 ‘주께선 나의 피난처’를 부를 때면 생전의 아버지 모습이 떠오른다. 성가를 힘 있게 부르시던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은 아버지에게 그야말로 힘들고 어려운 타향살이를 이겨내실 수 있게 했던 버팀목이자 피난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풍파가 심할지라도 내게는 평화 있네.”라는 구절은 아버지의 삶을 지탱해 주었던 구절이었고 그러한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바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던 아버지가 7년 전 지병으로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 땅을 바라보면서 지금은 파주에 있는 이북5도민 묘역에 누워 계신다.


참된 의미의 평화는?

과연 평화로운 조국, 통일된 조국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산가족들이 자기 맘대로 고향 땅을 방문할 수 있는 날은 과연 올것인가?

요즘 같은 상황에선 이러한 일들이 매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순간이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평화로운 통일을,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하느님 안에서 꿈꾸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평화에 대한 이해이다. 평화가 단순히 전쟁이 중단된 지금과 같은 정전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통한 종전상태 뒤에 오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면 우리에게 선사되는 평화는 그야말로 참된 평화가 될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평화에 대하여 “평화는 바로 하느님 안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의 이성적 도덕적 질서 위에 세워진 가치이며 보편적인 의무”(「간추린 사회교리」, 494항)라고 가르친다. 사실 우리 사회가평화의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참된 의미의 평화가 이 땅에 도달하는 것은 그리 요원한 일도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러한 평화는 한순간에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평화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의 추구를 통해 날마다 조금씩 이룩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평화 증진에 대한 책임을 인식할 때에만 꽃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495항 참조).


용서와 화해

또한 교회는 진정한 평화의 조건으로 용서와 화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실 전쟁과 분쟁의 참혹한 결과를 마주할 때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더군다나 전쟁 안에서 행해진 심각한 폭력은 특히 그것이 잔인성과 고통의 가장 밑바닥에 이를 때, 고통의 무거운 짐을 지우기 때문에 전쟁 피해자들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러한 고통은 전쟁 당사자 모두의 깊고 진실하며 용기 있는 반성과 참회로 현재의 어려움에 맞설 수 있는 반성을 통해서만 없어질 수 있다. 용서받을 수 없는 과거의 짐은 오직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을 때에만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은 길고 힘든 과정이지만, 불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간추린 사회교리」, 517항 참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나는 아버지와 아주 중요한 약속을 했다. 그것은 바로 평화통일이 이룩되면 아버지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서 본당신부로 사는 것이다. 비록 늦은 나이에 신자가 되셨지만 아버지는 나를 통해서 당신이 꿈꾸던 세상을 기대하셨는지도 모르겠다.

힘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나 우리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식민지 조국의 아픔과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겪었던 우리네 부모님들의 삶 속에서 나는 평화로운 조국을 꿈꾼다. 그러나 이러한 꿈이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자꾸 드는 것은 꿈꾸는 자에게만 허락된 희망의 메시지가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통일된 평화로운 조국을 꿈꾸며 사는 것이 과연 허황된 일일까!

* 황창희 알베르토 - 인천교구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1997년에 사제품을 받고, 로마 알폰소신학원에서 석사,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에서 사회교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 인천가톨릭대학교 교학처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12월호, 황창희 알베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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