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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명절의 변천과 사람들의 의식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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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234

명절의 변천과 사람들의 의식 변화

 

 

1. 명절, 되돌아옴의 의미

 

한 사내가 연락선 떠나는 부둣가에서 보퉁이를 품에 안고 머뭇거린다. 사내는 연신 사람의 눈길을 피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뱃고동 소리에만 귀를 기울인다. 그날 저녁 땅거미가 질 무렵에 사내는 작은 섬의 동산에 오른다. 사내는 보퉁이에서 소주 한 병과 명태 포, 과일 따위를 주섬주섬 끌어내어 어느 한적한 무덤 앞에 차려 놓는다. 소주를 한 잔 따라 놓고 말없이 절을 올린다. 타향 떠돌기 십여 년, 지난 겨울 대전 교도소에서 출옥한 뒤 첫 바깥 나들이. 조상의 뼈를 묻고 자신의 태를 묻은 섬으로 돌아와, 살아 생전에는 죄를 지어 차마 만날 수 없었던 어머니 무덤에 엎드려 절하는 중이다. 그날은 설날이었다.

 

누구나 이 같은 장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 않을까. 너무도 상투적인 구성으로 영화, TV, 소설 할 것 없이 익숙하게 등장한다. 고향을 떠난 한 인간이 되돌아가야 할 시점으로 많은 이들이 명절을 꼽는다. 명절만큼은 집 떠난 모든 이들이 돌아와야 할 것만 같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그날만은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린다. 그래서 나는 한국인의 명절을 이렇게 정의한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우리 모두 되돌아가는 날.”

 

귀향, 회귀, 회향 따위를 화두로 하는 ‘명절의 사회사’는 명확히 20세기가 만들어 낸 정치적 산물이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고향을 등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토지에 얽매어 꼼짝없이 살아야 했던 대다수 농민에게 떠남과 되돌아옴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당대에도 명절에 조상 차례를 모시기 위하여 객지에서 돌아옴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떠남이 일상화되어 버린 근현대의 삶과 어찌 비교하리요.

 

일제 식민지 시대에 북간도로, 남양 반도 대동아 전선으로, 이렇게 저렇게 많은 이들이 유민이 되어 떠돌았다. 무엇보다 한국 전쟁은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전 국토가 뒤죽박죽이 되었고, 이산 가족을 필두로 한 ‘뿌리뽑힌’ 사람들을 대거 양산해 냈다. 그들은 50년 세월이 넘었건만 지금껏 휴전선 철책에 나가서 차례를 지낸다.

 

1960년대 산업화는 마을에 있던 ‘순이와 철수’네들을 도시 변두리의 산업 전선으로 내몰았다. 거대한 뿌리를 확장해 가는 메트로폴리스에서 도시의 유랑민들은 끊임없이 방황하며 들개처럼 살아갔다. 황석영의 소설 [객지]가 생생하게 증언하듯이 ‘객지’는 또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20세기를 끝내는 이 순간, 명절마다 귀환하는 사람들로 도로가 넘쳐 나고 ‘살인적인 도로 체증’이라는 말이 연례 행사로 되어 버린 현실은 바로 이 같은 근현대 역사성 속에서 주어진다. 어찌 그 고생하면서 고향 찾는 이들의 심정을 탓하리요. 그렇게라도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아주 절박한 역사적 뿌리가 명절을 둘러싸고 대다수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탓이다.

 

 

2. 명절을 둘러싼 정치적 패러다임

 

1904년 정초, 좀더 정확하게 말하여 양력 1월 1일, 고종 황제는 개국 이래 처음으로 양력설로 설날 명절을 맞이한다. 광무 연호를 선포하고 대한제국을 연 고종 황제는 그렇게 해서라도 서양식으로 동도서기(東道西器)하지 않으면 개화, 부국, 강병 따위를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임금이 양력을 선포했다손치더라도 대다수 민중의 삶이 양력과 무관하였음은 물론이다.

 

반면에 명치 유신으로 일찍이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서구 형식을 받아들이는 데서 어쩌면 서구보다 더 철저할 정도로 서구화시켰다. 물론 일본의 그 같은 서구 지향에는 일본 열도 콤플렉스가 도사리고 있다. 명치 유신과 더불어 모든 풍습을 철저하게 양력에 맞추었다.

 

양력을 맹신하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우리의 명절은 이때부터 야누스적인 행보를 하게 되었다. 일제 시대 관공서에 다니거나 총독부에 부쳐살던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음력설을 명절로 여전히 쇠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공식 명절은 양력설이었다. 음력설에 떡 방앗간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등 탄압이 잇따랐다. 민중들은 음력설을 쇠는 일이 애국이요, 양력설은 매국이라고까지 받아들였다.

 

해방이 되고도 사태는 변하지 않았다. 개신교를 비롯한 미국 문화의 대두는 필연적으로 양력 중심의 사고를 더욱 고착시켰다. 반은 미국인이라 할 수 있는 우리의 첫 대통령 운남 이승만 자신이 철저하게 양력 신봉자였다. 양력설은 1949년 6월 4일, 새해를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사흘 연휴로 정해진 뒤 1950년부터 1989년까지 줄곧 사흘 연휴로 유지되었다. 양력설과 음력설의 병존으로 이중 과세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도 양력 신봉자였다. 이중 과세는 문화적 탄압의 대상이었다. 대다수 민중들은 음력설을 선호하였는데, 마치 양력에도 놀고 음력에도 노는 ‘놀쇠’로 지탄받으며 양력설을 지내도록 강요당하였다.

 

1970년대 초반, 중학교 시절의 추억 한 토막이다.

 

음력 설날 학교는 여전히 쉬지 않고 수업을 진행하였다. 3개년 개근 상장이 지고한 존엄의 대상이던 시절인지라 나 역시 등교하였다. 그러나 선생이나 학생이나 어색하기는 마찬가지. 수업도 없이 우두커니 교실에 한두 시간 앉아 있다가 교장 이하 모든 선생과 학생들이 일찍 ‘퇴근’하였다.

 

아, 우리 명절의 근현대사에서 1985년 1월 21일은 참으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날 전두환 대통령은 참으로 엄숙히 음력설을 ‘민속 명절’로 선포하였다. 정권 창출의 부도덕성 때문에 대다수 민중에게 ‘부담’되고 ‘죄송’할 수밖에 없었던 5공화국이 ‘대국민 아부용 선물’로 민속 명절이라는 절충안을 내놓은 것이다. 당시에 민속학자들이 “설날이면 설날이지 민속 명절은 뭐람.” 하면서 푸념을 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민속 명절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권력이 설날을 과도기적이나마 공식적으로 인정한 20세기의 첫 번째 해이기에 감격스러운(?) 것이다.

 

1989년 2월 1일 대통령령인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여 설날과 추석 연휴를 이틀에서 각각 사흘로 늘리고, 대신에 신정은 사흘 연휴를 이틀로 줄였다. 차츰 전통적 설날이 살아날 조짐을 보인 것도 이때부터다. 1999년 1월 1일, 어려운 경제 사정을 이유로 대부분의 관공서는 그날 하루만 쉬고 2일부터 정상 출근하였다. 21세기 직전에 이른바 ‘신정’이 완벽하게 밀려나고 ‘구정’이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음력설이 제자리를 찾는 데 근 100여 년 세월이 걸렸다.

 

나는 이를 이름하여, ‘민족 명절의 100여 년에 걸친 대장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렇듯 명절에서조차 정치적 배경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며, 이에 따라 민중의 명절 관행도 왔다갔다를 반복해 온 셈이다. 동아일보사가 한솔 PCS와 공동으로 1998년 초반에 조사한 결과를 보면 설문 조사 응답자의 84.4%가, “설 연휴보다는 신정 연휴를 줄이거나 없애는 것이 낫다.”고 응답했다. 민중의 의지가 승리하는 대목이 아닐까.

 

 

3. 쇠퇴하는 4대 명절과 절기

 

설날, 단오, 한식, 추석을 꼽아 4대 명절이라 이름하였다. 명절은 4대 절기를 가려서 뽑았다. 절기란 본디 세(歲)  / 일(日) / 월(月) / 성진(星辰)을 율력으로 계산하고 이 율력을 계산하는 방법으로 10간 12지를 사용한 데서 비롯하였다. 이에 따라 1년을 24절기인 입춘(立春) / 우수(雨水) / 경칩(驚蟄) / 춘분(春分) / 청명(淸明) / 곡우(穀雨) / 입하(立夏) / 소만(小滿) / 망종(亡種) / 하지(夏至) / 소서(小署) / 대서(大暑) / 입추(立秋) / 처서(處暑) / 백로(白露) / 추분(秋分) / 한로(寒路) / 설강(雪降) / 입동(立冬) / 소설(小雪) / 대설(大雪) / 동지(冬至) / 소한(小寒) / 대한(大寒)으로 제정한 것이다.

 

이들 절기들은 우리 나라 농경 생활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발전되어 왔다. 바로 농경 생활의 현실적 요구에 따라 절기들이 알맞게 배치되고 변화 발전을 거듭하여 온 것이다. 24절기는 태양력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태음력을 기반으로 하는 세시 풍속에 영향을 미친다. 이 역시 농사와 연관된다.

 

태음력은 본래 순전한 음력이 아니라 계절과 역일의 조화를 고려하여 태양력을 가미한 태음력과 태양력의 혼합이다. 동양에서는 계절을 올바로 알기 위하여 12절기와 12중기(中氣)로 된 24절기를 음력의 역일에 배당하여 썼던 것인데 그 중에는 세시 절일로 설정된 것도 있다.

 

이들 각 절기에는 각각의 농사력이 존재하며 세시 풍속이 전해진다. 특히 세시 풍속은 해마다 같은 시기에 반복되는 주기 전승의 생활 문화로서 각 절기마다 다양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농경 의례이기도 한 세시 풍속은 농사가 복잡하고 다양한 만큼이나 종류도 많고 그 내용에도 복합성을 띠고 있다. 농사력 역시 다양할 뿐더러 파종, 성장, 수확의 농사 주기가 각기 다르다. 음력 정월의 준비기를 거쳐서 2월부터 4월까지의 파종기, 5월부터 7월까지의 성장기, 8월부터 10월까지의 수확기, 11월부터 12월까지의 저장기로 대략 가른다. 그렇다면, 이같이 절기를 지켜 갔던 민족 명절이 쇠퇴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그러한 쇠퇴가 민중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4. 농경 문화의 소멸과 도시 문화의 확산

 

사람들은 쌀과 밀은 먹어도 쌀과 밀을 만들어 내는 농민을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농경 문화는 사라지거나 쇠퇴할 아무런 이유도 없고,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는 생산량 자체로 볼 때도 결코 사라진 문화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경공업, 중공업 또는 도시 문화 따위의 화두에 몸담고 있는 관계로 일단 농경 문화는 쇠퇴한 것으로 본다.

 

설날을 하나의 예로 들어 보자. 사람들은 설날의 개념을 음력 1월 1일 하루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곤 하는데 사실은 대보름까지 이어진 일련의 긴 축제 기간이다. 지금이야 바쁜 도시 생활로 축제를 즐길 여유조차 없지만, 농경 사회에서는 정초부터 대보름까지 마음껏 놀아 버리는 축제 기간이 설정되었다. 축제가 사라져 버린 데서 명절이 쇠퇴한 가장 큰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때때옷으로 설빔을 차려 입고 세배를 다니면서 떡국을 먹는 설날이 지나면 대보름이 금새 다가온다. 정월 보름은 작은보름(14일)과 대보름(15일)으로 가른다. 보름날이야말로 우리 나라 세시 절기 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풍성한 명절이다. 이른바 민속 놀이의 대부분이 바로 이 시기에 펼쳐지는 탓이다. 이날을 상원(上元)이라고도 부른다. 농경 민족에게 만월은 풍요를 상징하게 된다. 농사력으로 볼 때도 설날부터 대보름에 이르는 기간이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다가 농사철로 접어드는 시점이다.

 

보름날 아이들은 바람개비, 꼬꼬매, 실싸움, 돈치기, 쥐불놀이, 장치기 등을 하며 논다. 어른들은 다리밟이, 편싸움, 횃불싸움, 줄다리기, 동채싸움, 놋다리밟기 등을 즐긴다. 물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함께 놀기도 한다. 이날은 액막이연이라 하여 설날부터 즐겨 온 연을 마지막으로 띄우면서 한해의 액운을 멀리 창공으로 날려보낸다. 이 같은 놀이에는 마을 집단의 안녕을 기원하고 농사의 풍요를 비는 적극적 의미가 담겨 있다. 줄다리기 같은 놀이 하나만 살펴보아도 얼마나 공동체의 염원이 깃들여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정초부터 대보름 사이에는 곳곳에서 마을 굿이 열린다. 제관을 뽑고 제물을 준비하여 마을 공동체의 신앙을 모시게 된다. 당산제나 골매기굿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풍농을 위해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볏가리를 세운다. 수수대를 물감으로 채색하여 벼, 보리, 밀, 옥수수, 목화 등을 매달아 짚단에 꽂아 긴 장대에 묶어서 집 옆에 세운다. 이는 낟가리를 상징한 것으로 그 해 오곡이 풍성하게 여물어 줄 것을 바라면서 즐기는 행사다. 보리 풍년을 위해서는 보리 뿌리를 헤아려 보리 뿌리 점을 친다. 동산에 올라 횃불을 놓으면서 달맞이를 하는 것도 같은 연유에서다.

 

아이들이 논두렁을 태우는 쥐불놀이도 한해 병충해를 없애고자 하는 염원에서 시작되었다. 다리를 밟으면서 다리가 튼튼하게 해 달라고 빌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날 부럼을 깨물게 된다. 밤이나 호두를 깨물면 깨지는 소리에 귀신이 놀라서 달아나게 되고 일년 동안 부스럼도 없고 치아가 튼튼해진다고 믿는다. 잣으로 잣불을 밝히기도 한다. 새벽에 귀밝이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눈이 잘 보이게 된다고 믿는다. 또한 이날은 나무 아홉 짐을 하고 오곡밥 아홉 번을 먹게 된다. 지난해 갈무리해 두었던 묵은 나물들을 먹음으로써 겨울철에 부족하기 마련인 비타민을 보충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이날은 각 지역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시 놀이들이 펼쳐진다. 한해의 출발점에서 새로운 힘을 충전하고 일년 계획을 준비하는 기점에서 농민들 특유의 마을 축제를 펼친 것이다.

 

이들 풍습들에는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도 반드시 되살려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일본의 지배와 해방 이후 외래 문화의 홍수 속에서 이같이 아름다운 우리네 미풍 양속들이 많이 사라졌다. 이제 우리 문화를 중심에 두고서 줏대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이들 세시 놀이들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리 민족의 기름지고 풍성한, 어려운 살림 속에서 낙천적으로 살아 나간 삶의 역사를 알려 줄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설날은 우리 나라 최대의 명절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이다.

 

농경 사회에 기초를 두고 있는 세시 명절들은 농업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을 반영하면서 유구한 역사 속에서 민중들의 축제 문화로 자리잡아 왔다. 정초의 설날과 대보름, 한식, 4월 초파일과 단오, 칠월 칠석과 백중, 추석, 시월 상달, 동지 등에 이르도록 모든 절기에는 그에 따른 농사 준비와 더불어 축제들이 겸해졌다. 우리 나라 대부분 민속 놀이들이 대개 이들 세시 명절 차림의 일환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사회는 바뀌었다. 더 이상 농업이 모든 생업의 주종도 아니거니와 이른바 현대인의 생활 구조를 보아도 음력에 기초한 세시 명절과 반드시 일치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전통 문화를 보존하고 전승하려는 노력들 가운데는 이들 명절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세시 명절과 축제는 바로 바늘과 실같이 끈끈한 관계이기에 모든 세시의 축소, 소멸과 더불어 전래의 축제도 사라진 것이다. 오늘의 사회 현상에 알맞은 다양한 축제를 살리려는 노력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무게 중심의 하나로서 민족 전래의 단오 같은 명절을 세우려는 노력은 의외로 적은 것도 사실이다. 죽어 버린 전통은 이미 전통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전통은 박제된 고정물이 아니라 거듭 새롭게 정의되고, 그 당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향유되면서 새로운 내용과 형식이 가감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창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5. 어정쩡하게 사라진 단오

 

농경의 쇠퇴는 당연한 세계적 추세라고 보아도 되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단오 명절이다. 본격적으로 날이 풀려서 양기가 가장 그득하다는 날인 단오는 고래로 민족의 축제로 자리잡아 왔다. 그네뛰기나 씨름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도 바로 이 절기이다. 그러나 단오절을 이제는 거의 지내지 않는다. 겨우 강릉의 단오제 정도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단오 명절의 쇠퇴와 더불어 단오절 행사인 그네뛰기 같은 민속 놀이들도 쇠퇴한 것이다.

 

단오 굿은 하나의 난장 벌림이었다. 지금도 해마다 이맘 때면 강릉에서는 강릉 단오제가 열린다. 며칠을 두고서 대관령 국사 성황님을 모시고 남대천 모래밭에서 축제가 열린다. 수만의 구경꾼들이 들끓는 속에 서낭님 모신 굿판이 벌어지고, 그 주변에는 씨름판, 그네판, 풍물판, 강릉 관노탈판 등 민속 축제가 열리고 서커스, 가무단, 약장수 등 흥행 단체들이 천막을 치고 놀이와 장사를 겸하는가 하면 수많은 장사꾼들이 모여 문자 그대로 난장판을 벌인다. 지금까지 꽉 짜여졌던 질서가 일시 일탈되는 해방력은 바로 열려진 연극의 한 토막으로 꼽아도 될 것이다. 운영상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강릉 단오제는 중소 도시 지역 문화의 본거지로서 그 나름의 지역적, 역사적 문화 현상을 재현하는 데에 민족 문화의 선도적 우위성을 적용시켜 낼 수 있는 대표적인 문화 틀이며, 굿판의 난장이 전체 시민 문화의 판 벌림으로 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단오 명절에 나들이를 나온 할머니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말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전통 문화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일년 내내 단오 굿판만 기다렸지. 꽉 맥힌 걸 확 뚫고 골메기님 공덕두 받구 놀구 나면 십 년은 젊어지지 …” 

 

그러나 전국적으로 볼 때, 단오 명절이 제대로 치러지는 곳은 매우 드물다. 5월의 푸르고 화창한 날에 넓은 야외에서 그네를 타고 씨름판에서 신명을 즐기고 여인들이 군무를 즐기면서 해방의 축제를 펼쳤던 단오의 현장은 거의 쇠퇴하였다.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명절에 관한 국가 정책의 실패 때문이다. 설날과 추석은 연휴가 되어 온 국민이 움직이는 날이 되어 있으나 단오는 그러하질 못 하다. 저마다 직장과 학교로 출근하는 마당에 명절 분위기가 살아날 턱이 없다.

 

절기상으로도 설날은 한해의 시작, 추석은 한해 농사를 다 지어 놓고 여름을 끝낸 상태에서의 축제라는 의미가 있음에 반하여 단오는 날짜조차 모르고 지나치기 마련이다. 게다가 추석과 설날에는 조상 차례를 지내나 단오는 그냥 지나친다. 따라서 단오는 어디 한군데도 설자리를 잃어 버렸다. 단옷날 하루라도 쉬게 하였더라면 대뜸 명절이 되살아 날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 하다.

 

 

6. 혼미해진 마음, 쫓기는 사람들

 

사람들은 작정을 한 것 같다. 일단 며칠을 노는 명절이니 만큼 차를 몰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데는 대략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도로가 넘쳐 나든 체증으로 숨이 막히든 그건 알 바 아니다. 귀향은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모든 매스콤이 떠들어댄다. 차분하게 명절을 보내자고 말만 그럴듯하게 할 뿐. 모든 매스콤이 선동하고 시민들을 거리로 내몬다. 사람들의 마음은 늘 불안하다. 또한 민중들은 이날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놀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 관념조차 생긴다.

 

농경의 수확물을 신에게 바치고 조상에게 올리는 관행은 형식으로만 남고, 사람들은 백화점의 선전 문구에 더 귀기울인다. 백화점의 상혼은 명절 분위기를 온통 상품 판매 절기로 만들어 낸다. 명절날이라도 물건을 많이 팔아서 경기를 진작시키겠다는 의도를 나무랄 일은 못 되지만 문제는 정도다. 사람들은 저마다 명절 차림에 차라리 내몰린다는 표현이 맞다.

 

우리에게 국적도 불분명한 ‘발렌타인 데이’같은 날, ‘초콜릿 장사’들이 개입되고 백화점의 상혼이 파고든 서양의 축제를 들여다가 수선을 피우는 일들을 우려 깊게 생각한다. 거리에는 어느덧 할로윈 데이 같은 미국 축제가 스며들었고, 사람들은 그게 무슨 절대적인 세련미를 지닌 것인 양 착각을 하기도 한다.

 

내 생각이 무슨 복고주의인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이미 있어 왔고, 대다수 민중들의 심성 속에 자리잡고 있으나 많은 쇠퇴와 영락을 면하지 못한 여러 명절들을 다시 세우는 노력이 중요하다. 얼마 전에 설날을 복권시킨 뒤로 정초의 민속 놀이나 대보름 행사들이 새롭게 부흥해 가고 있는 현장이 전국적으로 많이 눈에 띄었다. 이 점은 명절을 매개로 자리 매김한 새로운 축제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외국에 있는 다양한 명절과 그에 수반되는 아름다운 행렬, 놀이와 의례가 연속되는 축제를 부러워하기 전에 우리의 현주소를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사목, 1999년 2월호, 주강현(민족 문화 유산 연구소 소장, 민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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