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신학ㅣ사회사목

[문화사목] 문화에 대한 사목적 접근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9 ㅣ No.242

문화에 대한 '사목적' 접근 (상)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다. 공산권의 몰락과 탈냉전 시대의 등장으로 자유 민주주의가 보편화하고, 디지털화에 따른 인터넷·통신 위성과 같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출현으로 세계화(Globalization)가 가속화하고 있다. 또한 점진적인 탈규제화(Deregulation) 정책은 미디어 기업 간의 인수와 합병을 촉진시켜 디즈니, AOL-TimeWarner, News Corporations와 같은 글로벌 미디어 기업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문화의 세계화는 새로운 소비 문화 공간의 확산, 새로운 세대 문화의 출현, 다양한 문화 취향과 감수성, 문화의 일상화 등으로 이 시대를 변화·유지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화의 세계화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세대는 MTV에서 들려주는 노래를 듣고,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을 즐기며,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먹고, CNN을 들으면서 영어 공부를 한다. 케이블 텔레비전과 TV 위성 방송이 수십 개의 채널을 통해 쏟아내는 외국 프로그램이나 홈쇼핑 프로그램은 우리를 전 지구적 소비자로 재생산하고 있다. 사람들은 인터넷 게임, 쇼핑몰, 전자 상거래, 교육, 채팅이라는 새로운 문화적 현상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각종 레저, 스포츠 산업의 발달과 새로운 음주, 오락 문화 공간의 출현에 따라 소비와 여가 문화가 대중화하고 있다.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문화는 교회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터넷과 같은 뉴미디어의 수용은 교회 내 커뮤니케이션도 수평적이고 쌍방향적으로 변화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신앙 교육 방식도 문자 위주가 아닌 멀티미디어 중심의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소비와 여가를 중시하고, 주5일 근무제가 부분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상황은 주일 미사나 기도라는 신앙생활에서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전 지구적 문화는 비복음적이고 반생명적인 죽음의 문화를 확대 재생산한다. 

 

우리 주변에는 생명을 위협하고 도덕성을 변질시키는 죽음의 문화가 만연해 있다. 사형 제도, 낙태, 안락사, 인간 복제 기술, 생태계 위협 등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문화 현상에 대해 교회는 방관하지 말고 예언자적 자세로 비판과 고발, 저항해야 하며, 생명과 사랑의 대안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특히 죽음의 문화 중에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것뿐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삶에 천천히 해악을 미치면서 끊임없이 잘못된 가치관이나 허위 의식을 심어 주는 각종 매스미디어가 있다. 교회는 이런 왜곡된 매스미디어들에 대해서도 비판 의식과 대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런 문화의 해악이 직접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목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은 오늘날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대 문화의 복음화를 살펴보고자 문화 사목의 세 번째 방식인 '문화에 대한 사목적 접근'을 기술하고자 한다. 이 접근 방식은 문화를 일종의 사목 대상으로 삼는다. 곧 복음적 가치관이라는 해석 틀에 따라 문화를 읽고, 분석 과정을 통해 문화에 대한 복음화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 목적을 둔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이 논문은 우선적으로 문화를 읽기 위한 준거 틀인 복음적 가치관을 제시한다. 둘째로 이 논문은 문화에 대한 복음화를 천명하는 교회 문헌들을 살펴본다. 셋째로 복음적 가치관에 따른 현대 문화의 분석으로서, 먼저 '죽음의 문화'에 대한 개념화를 시도하고, 그 문화적 현상을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이 논문은 죽음의 문화에 대한 대안 문화를 소개한다.

 

 

1. 문화 읽기의 해석 틀인 복음적 가치관

 

1) 문화 읽기의 가능성:능동적 수용자

 

문화는 창조되고 생산되어 주어진 것이면서도 동시에 재생산되어 새로운 문화로 창조되기도 한다. 문화를 인류학적 의미에서 이미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재창조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문화는 항상 변화한다. 의미화(Signification)의 과정으로서 문화는 문화 생산자와 수용자 사이의 의미 투쟁의 장이다. 문화를 통해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의 갈등과 충돌이 생겨나고, 결과적으로 문화적 헤게모니가 주어진다.

 

과거 대중 사회에서는 문화 생산자만이 의미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문화 생산물에 주입하였고, 수용자는 이미 선호된 의미나 지배 이데올로기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문화적 봉'(cultural dupe)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정보 사회나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용자는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 부상한다. 단순히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자율적 의미 해독 능력을 지닌 사회적 주체로 인식되는 것이다. 곧 해독(Decoding) 과정에서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의미 창출자의 모습으로 수용자가 부각되는 것이다. 

 

수용자는 나름대로 자신의 역사와 가치관을 바탕으로 문화를 해석할 수 있는 고유한 해석 틀을 가지고 있다. 문화를 비평할 수 있는 것도 해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율성에 기인한다. 영국의 문화 연구에 커다란 공헌을 한 스튜어트 홀은 해독의 세 가지 차원을 주장한다. 지배적 해독, 교섭적 해독, 그리고 대립적 해독이 그것이다.1) 

 

지배적 해독은 생산자가 미리 선택한 의미를 수용자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발생하고, 교섭적 해독은 지배적 의미를 공유하지만 개별 이슈나 특정 상황에 대한 적용에서는 지배적 의미에 전적으로 매이지 않고 타협적으로 해독하는 경우에 나타난다. 대립적 해독은 지배적 의미를 전복시켜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수용자가 의미를 창출하는 경우는 두 번째와 세 번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해석 틀만이 아니라 수용자의 사회성에 따른 '해석 공동체'(Inter-pretive Communities)2) 개념도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시공간적으로 흩어져 있는 다양한 집단과 개인들이 동일한 미디어 수용 형태를 보임으로써 새로운 공동체, 곧 해석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예컨대, 가톨릭 교회는 모든 신앙인이 공유할 '복음적 가치관'을 선포하는데, 문화에 대한 복음화를 위한 문화 읽기는 이 교회를 '해석 공동체'로 전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전 지구적 대중문화의 범람 속에서도 가톨릭 교회는 복음적 가치관에 입각한 해석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복음적 가치관'이라는 해석 틀을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확고한 믿음과 실천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와 그 구성원들은 상업주의, 소비주의, 물질 만능주의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먼저 복음적 가치관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2) 복음적 가치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적 가치관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을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소명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자신이 살고 있는 세속 문화와 갈등을 일으키며 살고 있다. 가정, 직장, 사회 어디서건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에 살면서 동시에 세속에 속하지 않고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요한 17,16). 다음에 열거되는 내용들은 성서에 기반을 둔 그리스도교적 가치들이다.

 

(1)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

 

예수님을 따르는 길, 곧 복음적 가치관은 존재의 삶, 존재를 향한 삶이다. 복음에서 부자 청년 이야기(마태 19,16-26)는 모든 소유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때 비로소 예수님의 추종자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소유욕에 사로잡히기 쉬운 현대 사회 현실에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예리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한 인간의 가치는 부와 소유, 소비의 정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결정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창조해 주셨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소중한 인권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모든 인간에게 당신의 은총인 보화를 담아 주셨다(2고린 4,7). 

 

현대 사회에서는 돈으로 무엇이든지 다 살 수 있다는 물질 만능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 사랑, 희생, 용서 등과 같은 복음적 가치관이 강조되어야 한다. 더 큰 곳간을 지으려다 갑자기 죽어 버린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루가 12,13-21)는 이웃과한 나누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재물에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경고이다. 

 

(2) 참된 행복은 자기 만족과 쾌락이 아닌 케노시스(자기 비움)

 

각종 소비 욕구는 육체적 쾌락과 자기 만족을 지향하며, 물질적 소유를 통해 행복을 얻으려는 경향을 부추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마태 16,24) 죽기까지 자신을 비우는 겸손의 덕을 실천할 것과(필립 2,6-8), 마음의 가난(마태 5,1-12)을 강조한다.

 

(3) 크고 빠른 것보다는 작고 느린 것

 

최고의 것을 찾고 빠른 것을 선호하는 세속의 가치보다는 작고 느린 것이 아름답다고 성서는 말한다. 작은 겨자씨의 비유 이야기(마르 4,30-32)나 어린이에 관한 이야기(마르 9,37)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것이 하느님 나라를 담고 있음을 알려 준다. 예수님께서는 매우 바쁘게 하루를 보내셨지만 자주 기도하는 시간과 휴식을 가지셨다(마르 6,31; 루가 9,18). 느리게 사는 방법은 또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게 한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25-37)의 비유 이야기에서 레위 사람이나 사제는 죽어 가는 사람에게 사랑의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지나치는 '바쁜 사람들'을 대표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치유해 주는 '느린 사람들'을 상징한다. 크고 빠름은 자칫 개인주의적이고, 자아 중심의 가치관을 만들어 '나만의 세계' '나만의 행복' '나만의 만족'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작은 것에서, 느림에서 이웃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으로 사랑, 치유, 관심, 나눔을 실천할 여유를 찾을 수 있다.

 

(4) 왕따가 아닌 상생

 

하느님께서는 사회적으로 주변화되고 소외된 이들을 먼저 선택하시어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 하느님은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시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하신다"(이사 42,3). 부러진 갈대, 깜박이는 심지는 사회적으로 생산성이 없는 쓸모없는 존재일지 모르나 하느님 편에서는 모두 귀중한 존재를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도 특히 가난한 이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지내시고, 그들을 위해서 당신의 일생을 바치셨다. 

 

(5) 폭력이 아닌 비폭력

 

사랑과 정의의 실현은 폭력이 아닌 비폭력으로 이루어진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 주어라"(루가 6,27-29). 세속의 논리는 선과 악의 투쟁에서 선의 승리를 위한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지만, 실제로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많다. 성서적으로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로움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용서가 따르는 정의를 말한다. 

 

(6) 상품화가 아닌 인간화

 

성서는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성, 동등성이라는 인간 존중의 가치관을 중시한다. 그러나 세속적 가치관은 육체적 젊음과 아름다움, 인간의 성과 인간 자체를 상품화시키는 비인간화와 인간적, 사회적 차별을 조장한다. 아름다움의 가치관에서도 복음적 가치관은 외모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한다.

 

 

2. 교회 문헌 고찰

 

교회는 이미 이 시대에 문화에 대한 복음화의 필요성을 느껴 왔고, 그에 해당하는 사목적 접근을 구체화하여 여러 문헌을 발표한 바 있다. 우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사목 헌장'은 죽음의 문화가 만연되어 있는 시대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있다.

 

"온갖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스르는 모든 행위; 지체의 상해, 육체와 정신을 해치는 고문, 심리적 억압과 같이 인간의 온전함에 폭력을 자행하는 모든 행위; 인간 이하의 생활 조건, 불법 감금, 추방, 노예화, 매매춘, 부녀자와 연소자의 인신매매와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 또한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이윤 추구의 단순한 도구로 취급당하는 굴욕적인 노동 조건; 이 모든 행위와 이 같은 다른 행위들은 참으로 치욕이다. 이는 인간 문명을 부패시키는 한편, 불의를 당하는 사람보다도 그러한 불의를 자행하는 자들을 더 더럽히며, 창조주의 영예를 극도로 모욕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반생명적인 불안 상황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특히 전쟁과 기아는 새로운 이주 현상을 만든다. 

 

"오늘날 세계에는 수백만 명의 피난민들이 있고 그 수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그들은 정치적 억압이나 비인간적 빈곤과 질병, 기아와 절망적인 한발을 피하여 나온 사람들이다. 교회는 그들을 사목적 배려에 포함시켜야 한다"(「교회의 선교 사명」, 37항).

 

회칙 「생명의 복음」은 생명과 죽음의 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제공한다. 이 회칙은 "'생명의 문화'와 '죽음의 문화' 사이의 투쟁이 지닌 깊은 뿌리를 (…) 하느님 의식과 인간 의식의 실종"(21항)에서 찾고 있다. 또한 이 회칙은 "하느님 의식과 인간 의식의 실종은 실천적 유물론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으며, 이 유물론은 개인주의, 실용주의, 쾌락주의를 낳는다."(23항)고 주장한다. 궁극적으로 "'생명의 문화'와 '죽음의 문화'가 극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는 현재 우리 사회의 상황 속에서는, 참된 가치와 진정한 필요성을 분별할 수 있는 예리한 비판적 감각을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95항).

 

이미 1975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교회가 죽음의 문화에 대항하여 문화의 복음화를 실천할 것을 천명한 바 있다.

"교회가 복음 선교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더 넓은 지역에서 또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반대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데 있다"(19항).

 

여기서 말하는 문화의 복음화는 문화에 '대한' 복음화를 의미한다. 역전시켜 바로잡아야 하는 문화 내용은 잘못된 삶의 방식(낙태, 자살, 안락사 등)뿐만 아니라 가치관이나 사상이라는 비가시적 권력의 원천인 이데올로기를 뜻한다. 이데올로기 자체도 복음화의 대상이 됨을 이 회칙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문화에 대한 복음화의 구체적인 예로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인 「백주년」(1991년)은 소비 사회의 잘못된 관행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더욱 잘 살기를 원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존재보다는 소유로 향할 때, 더욱 (인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향락을 목적으로 살기 위하여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할 때, 이것을 나은 것이라고 여기는 생활양식이 잘못이다(36항). 

 

현대 문화 가운데 영향력이 가장 막강한 것은 매스미디어이다. 여론을 선도하고 의제를 설정하며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 내는 매스미디어에 대한 사목적 접근이 여러 교회 문헌으로 제시된 바 있다.3) 특별히 교황청 사회 커뮤니케이션 위원회에서 1992년에 발표한 사목 훈령인 「새로운 시대」에서 매스미디어의 의무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자유를 수호하는 일, 개인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일, 그리고 온갖 형태의 독점이나 조작을 단호하고도 과감하게 배척하여 사람들 사이에 진솔한 문화를 진작시키는 일 등을 의무로 생각하고 있다"(13항).

 

매스미디어에 관해 회칙 「사회적 관심」(1987년)도 선진국의 정보 독점과 제3세계의 불공평한 정보 흐름을 비판하고 있다.

 

"사회 홍보의 영역에서도 일어나는 문제로서, (정보 관련 사업들은) 대개 북반구에 있는 센터들이 운영하기 때문에 이러한 국가들(개발도상국들)에 대해서는 우선을 거의 두지 않을뿐더러 그 국가들이 처한 문제 또는 그들의 문화적 특질에 관해서도 합당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회 홍보를 장악하고 있는 기관들은 생활과 인간에 관하여 빈번하게 왜곡된 관점을 강요하기가 예사이며, 따라서 참다운 개발의 필요에 호응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22항).

 

 

3. 현대 문화 읽기

 

1) 현대 문화의 이해

 

현대 문화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대 대중 문화'를 일컫는다. 그것은 근대화를 가속화시킨 산업화, 도시화를 통해 형성해 온 대중 사회를 기반으로 성립된 문화이다. 초기의 대중문화는 소수 엘리트들이 즐기던 고급 문화에 반대되는 저급 문화로 여겨졌다. 그러나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가능해지면서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문화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현대의 매스미디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대량으로 복제되고 생산되는 문화가 되었다. 

 

더구나 고급 문화의 대중화로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 사이의 이분법적 구별이 사라지게 되었다. 최근 문화의 세계화 추세에 따라 대중문화는 전 지구적 문화(Global culture), 지역 문화(Local culture), 또는 잡종 문화(Hybrid culture) 등 다양한 형태로 생산, 유통, 소비되고 있다.

 

다양화된 대중문화는 전 지구적으로뿐만 아니라 지역적인 차원에서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영향력은 긍정적이면서도 동시에 부정적인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대중문화라는 밭에 밀과 가라지(마태 13,24-30)가 공존하고 있다고 보겠다. 대중문화는 다양한 문화적 접근과 교류를 발생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는 가운데 새로운 문화의 창조를 이루는 긍정적인 면을 갖는다. 반면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른 문화의 세계화가 가속화하면서 대중문화는 소수의 거대 글로벌 미디어 기업들에 의해 장악당하는 가운데 더욱 상업주의와 소비주의로 치닫고 있다. 

 

현대 문화의 읽기는 이러한 대중문화의 양면성을 정확히 인지하면서 대중문화의 긍정적인 가치관을 살리고 부정적인 것은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다. 흔히 교회는 현대 문화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음악이나 미술 같은 이른바 고급 문화만을 '문화'로 인정하고, 대중문화를 저질이며 저속한 것으로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대중문화의 긍정적인 면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하거나 아예 관심의 여지가 없었고, 오로지 부정적인 면을 비판하기만 했다. 그러나 진정한 '문화에 대한 복음화'는 대중문화의 양면성을 수용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긍정적인 면을 격려·개발·확산시키고, 부정적인 면을 비판·저항·정화하려는 '문화에 대한 사목적 접근'을 적극적으로 실천한다. 

 

2) 현대 문화의 순기능

 

과학 기술 문명의 발달은 다양한 현대 문화를 낳아 왔다. 현대 문화, 곧 현대 대중문화는 사회와 개인의 삶을 형성하고 유지 발전시키는 데에 많은 영향을 주어 왔다. 각종 미디어 문화는 정보와 오락을 제공하고 새로운 소비와 여가 문화를 창출하여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또한 대중문화는 개인과 집단 간의 문화적 통합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 대회'는 스포츠 문화를 통해 전 세계인들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축제였다. 대중문화는 누구라도 자유롭게 문화를 향유하고 즐기는 것이므로 민주화, 평등화를 통한 문화 민주주의를 실현시킨다. 인터넷의 쌍방향적이고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양쪽의 동등한 입장을 전제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삶의 방식도 민주적인 형태로 전이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질 수 있다. 

 

현대 대중문화의 순기능은 오늘날 교회가 수행하는 선교와 사목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교회는 세속화의 물결을 따라 사적 영역으로 밀려나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대중문화는 종교적 기능을 대신 수행하기도 한다. 대중문화는 다양한 상징과 이미지를 통해 종교적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에 수용자에게 복음적 가치관을 전할 수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이며 신학자인 앤드류 그릴리는 대중문화의 신학적 차원을 긍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대중문화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신학적 자리'(locus theologicus)이다. 대중문화는 하느님을 경험하고 그분에 대해 말하거나 또는 하느님에 대해 배우고 가르치는 기회를 제공한다."4)

 

대중문화는 믿음에 힘과 에너지를 주는 원천인 '종교적 상상력'(a religious imagination)을 담아 낸다. 이것은 이야기와 이미지를 통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일상 문화를 이루는 상징, 신화, 그 밖의 자료들을 제공한다. 

 

이러한 역할은 그리스도교에서 강론의 기능을 대신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직접적인 종교적 내용이 거의 표현되지 않지만, 탄생, 사랑, 결혼, 죽음 등 가톨릭의 일곱 성사와 연결되는 거대한 주제들은 자연스럽게 종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들이 복음적 의미와 가치를 삶의 현장에서 발견하거나 깨닫도록 문화(또는 미디어) 교육을 실행해야 한다. 

 

세계화와 정보화에 따라 새롭게 등장하는 대중문화와 매스미디어는 쌍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교회의 쇄신에 일조할 수 있다. 이 시대에 부적합한 전통적인 사목 형태에 대한 논란이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권위주의의 산물로서 한국 교회의 '성직자 중심주의'는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일방통행식, 상명하달식 사목 형태의 난맥상은 이미 한국 교회 구성원 전체가 공감한 부분이기도 하다."5) 한국 교회가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제도적인 교회관의 단점을 대중문화는 분명히 드러내고 보완하도록 도전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새로운 시대」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과 여론을 "교회의 특징인 일치를 구체적으로 인식시키는 한 방법"(10항)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중문화는 교회에 새로운 형태의 문화 공동체를 형성시키는 역할을 한다. 전통적 사목에서는 단지 믿음, 사랑, 봉사에 입각한 교회 공동체를 구성해 왔지만, 대중문화의 다양성은 교회 안에서 여러 형태의 새로운 공동체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매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이 집전하는 부활 대축일과 성탄 대축일 미사는 위성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로 중계된다. 이러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서 전 세계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는 가운데 믿음의 공동체를 느끼고 이 미디어 사건에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6)

 

또한 최근 급속도로 확산되는 인터넷은 가상 공간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새로운 공동체와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인터넷은 거리와 고립을 극복하고, 마음이 맞는 선의의 사람들끼리 만나 가상의 신앙 공동체에서 서로 격려하고 지지해 줄 수 있도록 하는 특별한 힘이 있다"(「교회와 인터넷」, 5항). 본당 주임 신부로서 필자는 얼마 전에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신자들에게 알려 주었고, 많은 신자들과 온라인 상에서 대화와 상담을 나누며 활발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 오프 라인에서는 바쁘거나 인간적 친근감이 별로 없어 만나서 대화하거나 상담할 수 없었지만, 온라인에서는 그러한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곧 개설되는 본당 홈페이지가 지속적으로 관리된다면 본당 신부와 신자들, 신자들 서로 간에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루어서 신앙 공동체를 더욱 확고히 다지고 발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최근의 여가와 소비 문화에 대한 하위 문화의 급증 역시 교회 안에서 다양한 문화 공동체를 형성시키고 있다. 여가를 즐기려는 욕구가 늘어나고 주5일 근무제가 제도적으로 확산되면서 신자들 사이에서도 자발적인 동호회나 동아리가 생겨나고 있다. 필자가 사목하는 본당은 기존의 '신성회'라는 축구 동호회를 비롯하여 최근 탁구, 테니스, 인라인 스케이트 등의 스포츠 동호회를 만들고 있다. 신자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동호회를 선택하여 스포츠를 즐기는 가운데 신앙 안에서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게 될 것이다.

 

----------------------------------------

1) Stuart Hall, "Encoding/Decoding", Culture, Media and Language, Hall, S. et al. eds., London:Huntchinson, 1980년, 136-138면 참조.

2) J. Radway, "Interpretive Communities and Variable Literacies : The Functions of Romance Reading", Daedalus 113, 1984년, 49-73면 참조.

3) 「매스미디어 교령」(1963년), 「일치와 발전」(1971년), 「새로운 시대」(1992년), 「광고 윤리」(1997년), 「매스커뮤니케이션 윤리」(2000년), 「교회와 인터넷」(2002년), 「인터넷 윤리」(2002년), 그리고 매년 홍보 주일에 발표되는 교황 담화문, 그 밖의 여러 가지 교황 메시지들이 있다.

4) Andrew M. Greeley, God in Popular Culture, The Thomas More Press: Chicago, Illinois, 1988년, 9면.

5) 「가톨릭 신문」, "한국 교회의 반성", 1999년 12월 5일. 

6) 「커뮤니케이션 윤리」(2000년) 제11항 참조.

 

[사목, 2003년 7월호, 김민수(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 · 서울대교구 신수동 본당 주임 신부)]

 

 

문화에 '대한' 사목적 접근 (하)

 

 

3) 현대문화의 역기능 

 

현대 대중문화라는 밭에는 유용한 '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악을 끼치는 '가라지'도 있다. 이 유해한 가라지는 근본적으로 대중문화가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오늘날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각종 문화물(특히 대중 문화물)들은 자본주의의 경제 논리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어서, 최대의 수익을 확보하기 위한 복잡한 장치를 두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신자유주의적 문화의 세계화 과정에 편승하여 성의 상품화, 물질주의적 가치관,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죽음의 문화'를 더욱더 양산하도록 대중문화를 몰아간다.

 

상업주의와 소비주의, 개인주의와 상대적 윤리관이 팽배해지면서 무한경쟁과 그에 따른 각종 현대의 신화들(성공 신화, 아름다움의 신화, 성장 신화, 과학 신화, 학벌 신화 등등)이 양산되고 있다. 이러한 신화들은 사회와 개인을 지배하고 조작하여 부정부패의 온상을 제공하고, 서로 차별화시키며, 권력과 자본의 소유와 지배욕 등을 낳게 하는 역할을 한다. 대중문화는 이러한 신화들을 확대 재생산하여 사회와 개인을 '보이지 않는 폭력'에 길들게 함으로써 인간성의 상실을 몰고 온다.

 

신자유주의적 문화의 세계화는 맥월드(McWorld),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 코카콜라화(CoCacola-dization)와 같은 문화의 동질화를 초래하고, 또한 문화적 지배를 심화시키면서 문화 제국주의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1) 특히 자유, 경쟁, 이윤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강조는 문화의 상품화를 심화시키고 민족, 성, 계급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은 전 지구적 소비자로 수렴"2)되는 경향이 짙다. 

 

매스미디어 문화도 공익성을 지향하기보다 상업적으로 기울어지면서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이 증가하고 있다. 권력화된 언론은 안보 상업주의를 띤 보수성, 불공정 보도에 의한 편파성, 사안의 본질을 오도하거나 명백한 오보의 행태, 하이에나식 또는 용두사미식의 물타기 보도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언론사의 사적 소유 구조나 권력과의 유착관계에서 연유한다. 또한 매스미디어로서 인터넷은 생산적인 '정보의 바다'이기보다는 포르노, 자살, 성매매, 게임 중독과 같은 '죽음의 바다'로 나아가는 것 같다. 

 

소비문화와 여가문화의 필요성이 중요하게 제기되고 있지만, 지나친 소비 행태는 생태계를 크게 오염시키고 있고, 여가 형태가 일부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밤 문화, 음주문화, 접대문화 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비복음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현대 대중문화의 역기능을 여러 방향에서 고찰해 보았다. 결국 현재의 대중문화는 많은 면에서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적 가치관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죽음의 문화'를 양산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죽음의 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비판을 통해 잘못된 가치관을 밝히고, 복음적인 사랑과 생명의 대안문화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여기에서는 자주 언급되는 '죽음의 문화'를 개념화하고, 이에 비추어 구체적인 사례들을 분석, 비판하고자 한다.

 

4) '죽음의 문화'의 개념화

 

우리는 현대문화가 생명을 위협하고 도덕성을 변질시키는 죽음의 문화를 만들어낸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그러나 죽음의 문화를 언급하는 사람마다 그 개념적 차이가 있다. 곧 많은 경우에 이 개념을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죽음, 곧 생물학적이고 의학적인 죽음을 초래하는 현상에 국한시킴으로써 죽음의 문화를 매우 협소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생명의 복음」에서 죽음의 문화로 빈번히 다루어지는 내용들은 사형제도, 낙태, 안락사, 자살이다. 또한 교회는 최근에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나타난 인간복제 기술을 죽음의 문화로 비판하고 있다. 

 

협의적인 죽음의 문화 현상은 직접적이고 의학적인 인간생명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문화 중에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삶에 천천히 해악을 미치면서 잘못된 가치관이나 허위의식을 심어줌으로써 '보이지 않는 테러'를 지속적으로 가하는 각종 대중문화도 있다. 잘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천천히 죽음으로 몰아가는 문화들도 넓은 의미에서 죽음의 문화에 속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런 문화의 해악이 직접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목 대상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죽음의 문화를 올바로 개념화하려면 협의적이면서도 광의적인 죽음의 문화 개념을 수용해야 한다. 특히 의식이나 가치관을 오염시키는 문화현상들은 궁극적으로 직접적인 죽음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면에서 더욱 그렇다.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원 원장인 박종대 교수는 죽음의 문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국내외적으로 강요된 죽음, 폭력에 의한 죽음, 잘못된 이데올로기와 사회의 모순된 구조에 의한 죽음 따위가 만들어내는 반사회적, 반인간적, 반자연적인 문화이다. 죽음의 문화는 온 생명을 경시하는 의식과 풍조에서 싹트고, 이기주의, 쾌락주의, 공리주의, 물질주의, 소비주의가 그 온상이다.3)

 

이와 같은 개념화에는 직접적이고 생물학적인 죽음의 문화뿐만 아니라 간접적이고 정신적인 죽음의 문화를 동시에 포함한다. 이기주의, 쾌락주의, 공리주의, 소비주의 등이 죽음의 문화를 낳게 하는 잘못된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뿌리는 다름 아닌 합리성에 함몰된 '미완의 근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과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성은 모든 사회 분야에서 제도적 합리화의 과정을 통해 발전해 왔다. 그러나 '어떻게'만을 묻는 '도구적 이성(the Instrumental Reason)'에 치우치면서 인간은 '맥도날드화의 쇠감옥'4)에 갇혀 '일차원적 인간'5)으로 비인간화되었고, 진보와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20세기는 그야말로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폭력의 세기'6)로 점철되어 왔다. 

 

합리성과 효율성이 오히려 인간의 생명을 말살하게 했던 극단적인 예를 "완벽하게 합리적인 사회의 건설 (…) 유대인이 없는 사회"7)를 목표로 한 유대인 대학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대학살의 원리는 오늘날도 낙태, 자살, 사형제도, 사회적 소외자들에 대한 차별에서부터 생태계 파괴, 폭력, 각종 부정부패, 정신적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도구적 이성으로 치달은 근대성은 죽음의 문화를 생산하는 자궁 역할을 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미완의 근대성을 완성하는 데에는 '실천적 이성(The Practical Reason)'이 필요하다. 실천적 이성에서 "이성은 단지 '어떻게(how)'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왜(why)'까지도 묻는 것이며 도덕과 가치에 관련8) 되어 있다." 이 점에서 교회는 21세기에도 복음적 가치관을 통해 윤리적 파수꾼의 역할을 해야 한다.

 

5) 죽음의 문화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

 

(1) 직접적인 죽임의 문화

 

교회가 가장 빈번히 죽임의 문화로 다루고 있는 이슈는 낙태, 사형제도, 인간복제, 생태계 파괴일 것이다. 한국사회의 낙태 현황은 참으로 심각하다. 매년 평균 150여 만의 태아가 살해당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불명예스럽게도 이 분야에서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다. 2001년 가족보건복지협의회 조사에서 드러난 기혼여성의 낙태 경험률은 약 39%이며, 여기에 전체 낙태 시술 30%를 차지하는 미혼 여성 사례까지 포함하면 그 수치는 엄청나다. 더욱 심각한 현실은 전체 낙태 당사자들 중에서 60% 정도가 10`-20대 초반의 청소년들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교회 내 신자들의 낙태에 대한 인식과 시술 경험도 일반인들과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지난 2000년 서울대교구 가정사목부가 교구 내 70개 본당 신자 1,77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10명 중 4명이 낙태를 경험했으며, 2번 이상 낙태를 경험한 사람이 60% 이상이었다. 사회 경제적 이유에서 생명을 죽일 수 있다는 잘못된 의식 역시 합리성과 효율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태아에 대한 살인 행위가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이 현실 사회에서도 생명경시로 이어지고 있음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형제도는 제도적인 살인이라 할 수 있다. 사형제도는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반생명적인 제도일 뿐 아니라 범죄예방의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비효율적인 제도라는 것은 이미 드러나고 있다. 국제사면위원회에 따르면, 현재 86개국이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폐지한 국가는 109개 국가에 이른다. 한국은 아직도 유지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사형은 속죄의 가능성을 단호하게 빼앗는 것이며, 사형이라는 응보와 보복 정의만을 강조할 때 우리 사회에는 사랑과 용서가 존재할 수 없으며 인간은 법 준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인간복제를 목적으로 하는 회사가 생겨나고, 인간복제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에는 물론 미래에도 인류는 윤리적 대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윤리성을 거부한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신체적 사회적 결핍과 욕망을 충족시킬지는 모르지만 또 다른 윤리적 문제를 일으킨다. 

 

교황청 생명학술원은 1997년 "인간복제에 관한 성찰"을 교회의 공식 입장으로 발표했다. 이 문헌은 복제 과정 자체가 인간을 산업 생산의 논리로 이끌며, 친자관계, 친족관계, 혈족관계 등 인간의 기본적인 관계를 혼란시키고 파괴한다고 경고한다. 또 인간복제가 몇몇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지배하고 그들의 생물학적 본질을 마음대로 선별하고 계획할 수 있다는 생각을 조장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인간 존엄성 문제가 발생한다. 복제된 인간일지라도 하느님의 생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생태계의 파괴는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을 통해 가속화되고 있다. 오존층 파괴, 기상 이변, 생물종 감소 등 전 지구적 차원의 환경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랐고, 국내적으로도 난개발에 따른 홍수 피해, 주요 상수원의 수질 오염, 환경 호르몬, 다이옥신 등 새로운 환경 이슈가 등장하고 있다. 이제 환경문제는 '삶의 질' 향상에 앞서 '생존의 문제'로 다가왔다. 특히 소비와 환경 오염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무절제한 소비 증가에 따른 각종 쓰레기와 폐기물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이 가정과 식당에서 내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로 낭비하는 금액은 하루 404억 원, 한 해 동안 총 15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 정신적인 죽임의 문화

 

간접적으로 정신과 의식을 오염시키며 점점 더 사회와 개인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죽임의 문화는 매스미디어, 소비문화, 여가문화 등을 통해 양산되고 있다. 잘못된 의식과 삶의 방식은 정신적인 죽음을 초래하게 된다. 미국의 사회비평가인 닐 포스트먼(Neil Postman)은 정신적인 죽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대중들이 지엽적인 문제에 온통 정신이 팔리거나, 문화적인 삶이 끊임없는 오락거리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된다면 그 국가는 분명히 문화적인 죽음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9) 문화적 죽음이나 정신적 죽음은 국가와 개인을 멸망에 이르게 한다. 로마 제국의 몰락 원인 중 하나로 '정신적 죽음'을 주장한 모리스 버먼(Morris Berman)은 현재에도 같은 이유로 미국 문화의 몰락을 예견하고 있다.10)

 

신문과 텔레비전 매체는 시장 논리에 따른 시청률이나 구독률 경쟁으로 선정성과 폭력성을 드러낸다. 광고의 홍수는 지나친 소비주의와 잘못된 소비관행을 부추기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 장애인, 노인, 어린이 등의 사회적 약자를 문화적으로 소외시키며, 그들을 상품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폭력을 통한 정의 실현이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에서조차 자연스럽게 녹아있고, 지연, 학연, 혈연에 따른 차별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클르스테스 침대 이야기를 보면, 나그네가 침대보다 키가 크면 다리나 머리를 잘라 죽이고, 침대보다 작으면 잡아 늘여 몸을 찢어 죽인다. 우리를 지배하는 신화들이 바로 이 침대 이야기와 같다. 침대라는 신화는 그것에 맞는 똑같은 크기의 인간을 재단해 내고 있다. 그 신화들에 의해 세뇌되고 비인간화되어가는 폭력적 상황인데도 우리는 그저 저항 없이 순응하며 살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차별주의는 사회적 차별과 배타성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드러내고 있다. 예전에 주위에서 '왕따'당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한 어머니가 7살 난 장애인 아들의 목을 졸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장애인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절규하는 장애인 어머니의 빗나간 모정! 그러나 그 어머니를 이렇게 만든 사회적 차별과 편견도 무시할 수 없다. 사회에서 쓸모없고 귀찮은 존재, 그래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도 마땅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장애인들을 향해 '보이지 않는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참으로 "매스미디어는 흔히 오늘날 죽음의 문화의 바탕이 되는 윤리 상대주의와 실용주의를 보급시키고 있다"(「커뮤니케이션 윤리」, 15항). 또한 "매체는 피임, 불임 시술, 낙태, 심지어 안락사까지도 진보의 표시이며 자유의 승리로서 제시하는 그런 문화에는 공신력을 실어주면서, 반면에 무조건 생명을 옹호하는 입장들은 자유와 진보의 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생명의 복음」, 17항).

 

인터넷이라는 뉴미디어도 사회와 개인에게 해악을 끼치는 경우가 상당하다. 「인터넷 윤리」는 인터넷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인터넷의 보급은 사생활 침해, 자료의 보안과 기밀 유지, 저작권과 지적 재산에 관한 법률, 음란물, 안티 사이트, 뉴스를 가장한 뜬소문의 유포와 인신공격 등 여러 가지 다른 윤리적 문제를 일으킨다"(6항).

 

서울가정법원에서 올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3명이 인터넷 채팅 중에 성매매 제의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제의를 받은 청소년 중 16%는 실제로 성매매에 응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카드 빚 때문에 비관 자살하는 경우 인터넷 자살 사이트가 한 몫을 하고 있다. 또한 방에 틀어박혀 채팅이나 게임, 도박, 쇼핑 등 인터넷에 중독될 경우 가정이 파탄나는 경우도 나타난다.

 

왜곡된 밤 문화는 '술, 접대, 러브호텔 등을 권하는 사회'로 치닫게 하고 있다. 국토의 대부분이 밤이 되면 홍등가로 변하면서 단란주점, 비즈니스 클럽, 룸싸롱, 러브호텔, 나이트클럽이 성행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서, 주택가에까지 파고 든 러브호텔은 등하교를 하는 초등학생과 청소년들의 교육환경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4. 죽음의 문화에 대한 교회의 대안

 

문화의 복음화는 죽음의 문화에서 생명의 문화로 변화시키는 노력에서 드러난다. 교회는 복음적 가치관에 따라 죽음의 문화를 비판하고 그것을 성화시키는 문화에 대한 복음화를 옹호해야 한다. 교회는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며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유지하고자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투신을 해왔다. 죽음의 문화에 대해 교회는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 바람직한 새로운 대안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생명 교육

 

서울대교구에서 1992년부터 운영해 오던 '참생명 학교'는 점점 참가자가 줄어들다가 지난해부터 안타깝게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가톨릭 대학교 생명윤리연구소의 생명윤리 단기연수과정이 연 4회 정기적으로 생명윤리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고 바람직한 생명윤리 의식을 심어주고자 실시되고 있다. 현실적으로 신자들도 생명윤리에 대한 인식과 실천이 저조한 편이다. 교구에서뿐만 아니라 본당 단위로도 더 폭넓은 생명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 문화 교육

 

생명 교육과도 관련된 대안이지만, 특히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과 같은 매스미디어를 제대로 읽고 수용할 능력과 태도를 형성하기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한국 주교회의 매스컴 위원회에서 간헐적으로 이런 교육이 이루어지지만, 교구나 본당 차원에서 지속적인 문화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3) 생명 31 운동

 

주교회의는 2003년 2월 7일 생명 31 운동을 선포하고 생명문화 건설을 향한 교회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날 공식 선포된 생명 31 운동은 모자보건법 제정 30주년을 맞아 생명경시풍조를 낳아온 반생명적 문화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생명문화를 건설하는 원년으로 삼자는 뜻을 담아 교회가 범국민적 차원에서 펼쳐나갈 생명운동이다. 특히 범종교적인 연대를 통해 확산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보겠다. 이러한 생명운동에 낙태와 같은 직접적인 죽음을 초래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전반에 걸쳐 죽음을 강요하는 비복음적 가치관에 대한 정화 노력도 포함된다면 더욱 바람직한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4) 아나바다 운동

 

아나바다 운동은 IMF 시대를 극복하고자 일부 천주교 환경단체와 본당이 중심이 되어 수년 전부터 전개해 오는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운동이다. 환경을 생각하며 재활용과 나눔의 차원에서 전개되어 온 이 운동은 교회 내에서 상설매장 형태로까지 발전해 왔다. 서울대교구 화곡본동본당 '아나바다' 매장, 엠마우스 여성공동체, 신당종합사회복지관 '녹색가게'가 있으며, 성동 자활 후견기관 '녹색살림'과 강북평화의 집 '살림', 명동 하늘땅 물벗 매장 내 '살림'과 같은 공간은 일자리 창출의 의미까지 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신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홍보를 통해 더 많은 참여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 이 운동은 소비주의로 길들여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적절한 대안문화가 되고 있다.

 

5) 도덕성 회복 운동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는 새천년기를 맞아 신뢰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똑바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물질에 대한 풍요는 누리고 있지만 도덕성 상실과 윤리관의 부재로 비인간적인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다. 생명경시 풍조, 물질만능, 적당주의, 한탕주의 등에 의해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는 현실은 우리 모두가 똑바로 서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신도사도직협의회는 교구별로 그리고 전국 교회운동단체들을 통해 똑바로 운동을 펼치면서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이끌고 있다. 

 

똑바로 운동이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운동이라는 데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보겠다. 평신도들의 능동적 참여로 이루어지는 이 운동은 공명 선거, 성매매 근절을 위한 서명운동,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운동 등 범국민적 운동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사람들의 의식과 삶의 방식을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시키고, 우리 사회에서 폭넓게 확산되는 데는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 곧 생명과 사랑의 문화 건설을 위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문화 강좌, 매스미디어를 활용한 커뮤니케이션 과 자료, 문화 실천을 위한 체험과 참여의 장 마련 등등)이 계층이나 연령에 맞게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6) 환경운동

 

한국교회의 환경운동은 지난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본격화되기 시작해서, 주교회의와 각 교구의 환경운동 조직들이 자리잡고 대외적인 환경운동 참여와 연대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한국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환경단체들이 있다. 전국환경사제모임, 천주교환경연대, 서울대교구 환경관련단체(환경사목위원회,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새만금천주교모임, 천주교 여성생태모임 레헴), 인천교구의 가톨릭 환경연대, 수원교구의 환경센터, 그리고 각 교구마다 환경 살리기 모임이 존재한다.

 

환경운동은 또한 종교 환경단체들과 시민단체의 연대를 통해 확산되고 있다. 예를 들어, 2002년에는 종교 환경단체들은 '생태사회를 위한 종교인 대화 마당'을 열어 각 종교에 나타난 생태적 음식문화를 살펴보고 이를 실생활에 적용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또 다른 예로서, 천주교를 비롯한 각계 환경 관련 인사들은 올해 초에 모여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한 대화 마당을 열어 생명과 인간성을 파괴하는 새만금 간척사업의 중단을 주장하였고, 최근에 새만금 갯벌의 생명과 평화를 염원하며 삼보일배 순례단이 65일간의 기도 수행을 마치기도 하였다. 

 

가톨릭 환경운동이 교구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정작 일선 본당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 내 환경운동은 답보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교구의 환경단체는 본당에서 환경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본당과의 연계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하고, 본당 내에서도 환경교육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본당 상황과 신자들의 취향에 맞게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7) 지역 화폐 운동

 

지역 화폐 운동은 회원끼리 돈 없이도 재화와 서비스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제도(LETS:Local Exchange Trading System)를 실현하는 움직임이다. 사람은 누구나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꼭 돈이 아니더라도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사람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지역 화폐 운동은 전혀 새로운 운동이 아니고 이미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두레라든지 품앗이 등과 같은 공동체 부조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 화폐 운동이란 이런 물물교환을 현대에 맞게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노인이나 실업자들이 지역의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새로운 대안으로, 또는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교육 통화로서 지역 화폐 운동이 모색되고 있다. 

 

지역 화폐 운동은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한 대안으로서 노동과 임금 개념은 비슷하나,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 차별과 투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운동은 상업주의와 소비주의로 치달으며 경쟁과 최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탈자본주의' 형태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이 가톨릭 교회 안에서 실시된 적은 없지만, 앞으로 인근 본당 간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다면 공동체의 발전과 인간성 회복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8) 여가선용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

 

최근 한국사회가 여가 소비사회로 들어섰고, 주 5일 근무제가 점차 제도화되면서 신자들의 여가선용 문제가 떠오르고 있다. 쉬는 교우의 증가와 주일미사 참여율의 감소에 직면한 한국 가톨릭 교회는 피정이나 성지순례와 같은 가톨릭의 문화를 신자들의 다양한 욕구에 맞춰 개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원주교구 풍수원본당이 인근 지역을 테마 공원인 바이블 파크(Bible Park)로 조성하고 있음은 신자들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좋은 아이디어라고 본다. 

 

본당에서는 신자들과 지역사회의 다양한 문화 욕구에 맞게 문화공간의 확충과 문화 프로그램의 도입을 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여가의 종교적 의미를 부각시켜 속도를 위주로 하는 이 시대에 대안의 의미를 심어주고, 다양한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병원, 구청, 학교 등과 연결시켜 자신의 여가시간을 남에게 증여하는 체제를 통하여 여가의 공적 의미도 부각시켜야 한다. 

 

그리고 본당마다 근대사회의 방식대로 초등부, 중고등부 주일학교를 지금까지도 주말에 미사와 함께 수행하기 때문에 가족 위주의 여가활용이 보편화되고 있는 여가시대와는 걸맞지 않다고 본다. 주말에 모든 학년이 함께하는 주일학교 체제가 아니라 학년별로 평일에 교리교육이 이루어지고, 별도의 초등부, 중고등부 미사보다는 주일에 가족끼리 함께하는 가정 미사로 전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

1) 「커뮤니케이션 윤리」, 16항 참조.

2) 원용진, "문화 정체성과 매체 정경(media-scape)", 「현대사회의 인간 정체성 탐구 I : 정보기술 문명과 인간의 정체성」, 인간학연구소 제4회 심포지엄 자료집, 2002년, 10.30면.

3) 박종대, "'죽음의 문화'에 맞서 '생명의 문화' 드높이기", 「사목」 275호(2001.12.), 24면.

4) '맥도날드화'라는 것은 단지 햄버거 장사나 하는 패스트푸드점의 경영원리가 전 세계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러한 맥도날드화에 익숙해지는 것이고, 우리가 그러한 소비를 계속해 나갈수록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선택은 하지 못하고, 강요된 능동성에 맞게 움직여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합리화를 바탕으로 하는 맥도날드화는 효율성, 예측 가능성, 계산 가능성, 통제라는 이점이 있지만 이러한 근대성의 결과 '맥도날드화의 쇠감옥'이라는 비인간화의 위험성을 낳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더 자세한 것은 G. 리처,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김종덕 옮김, 시유시출판사, 1999년, 16면 참조.

5) H.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선진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 연구」, 박병진 옮김, 한마음사, 1993년.

6) H. 아렌트, 「폭력의 세기」, 이후출판사, 1999년. 

7) G. 리처, 앞의 책, 59면.

8) H. 콕스, 「현대사회로 돌아온 종교」, 이종윤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85년, 249면. 

9) 닐 포스트먼, 「죽도록 즐기기」, 정탁영·정준역 옮김, 참미디어, 1997년, 211면. 

10) 모리스 버먼, 「미국문화의 몰락」, 심현식 옮김, 황금가지, 2002년.

 

[사목, 2003년 8월호, 김민수(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 · 서울대교구 신수동 본당 주임 신부)]



54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