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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총선거 관련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담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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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63

4.13 총선거 관련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담화문


국민이 바로 서야 정치가 바로 섭니다

 

 

1. 2000년 대희년(大禧年) 사순 시기에 우리 국민은 제16대 국회의원을 뽑는 4·13 총선거를 치르게 되어, 이미 선거열기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는 우리 나라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가운데 여야간의 수평적,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선례를 남기면서 민주 국가로 새롭게 출발한 이후 처음으로 실시하는 총선거라는 점에서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이번 선거가 새 천년기(千年紀)를 위한 국가 장래의 시금석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에서 더욱 큰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번 선거 과정을 통해 국민 모두 한 단계 높은 성숙한 민주 역량을 보여주기 바라며, 회개와 은총의 사순 시기를 맞이한 신자들로서는 그리스도 정신을 현세 정치질서에 불어넣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2.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이 유권자의 정치의식에 달려 있는 만큼 선거에 임하는 유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숙한 정치의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올바른 의식을 위해 '길〔道〕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생명, 진리, 사랑」의 가치를 제시합니다. 이 가치들은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각인(刻印)된 것들로서 사람이면 누구나 갈망하는 것입니다. 각 정당의 정책이나 후보자의 공약과 인격은 물론, 유권자 자신의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도 이 가치들은 유용한 잣대가 될 것입니다. 「생명, 진리, 사랑」이 4·13 총선거에 임하는 모든 이의 판단 기준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생명에 대한 권리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권리입니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 주지 않는 나라는 비록 조국이라도 버리고 떠난다."고 말한 어느 젊은 어머니의 절규를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낙태와 안락사 등 '죽음의 문화'에 대항하여, 태아에서부터 장애자와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이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생명에 대한 존중은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폭력을 막을 수 있는 정책들을 요구합니다. 환경오염 방지를 위한 정책을 비롯하여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과 가정파탄에 이른 실직자들, 인신매매와 각종 성폭행과 마약 등으로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품위를 손상당한 모든 사람의 고통에 귀기울이는 정치인이 필요합니다. 인간생명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이미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입니다.

 

4. 우리는 국가가 진리 위에 건설되기를 바랍니다. 만일 정치활동을 이끌어가고 통제할 최후의 진리가 없다면 정치인들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이념이나 정책을 조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정책과 선거공약은 진리에 의해 검증되어야 합니다.지역감정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입니다. 지역감정에 따라 행동할 것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행동할 때에 바른 행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진리 위에 건설되고 진리 안에서 진정한 자유에 개방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혈연, 지연, 학연 등 정(情)에 이끌리기보다는 엄격한 객관적 진리에 따라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정직한 정치인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우리를 진리 안에서 살지 못하게 하는 유혹이 참으로 많습니다. 특히 재물에 대한 인간 탐욕이 선거 분위기를 혼탁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바른 정치를 위해서는 유권자나 후보자 모두 재물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5. 사랑의 봉사정신은 정치권력 행사의 근본요소입니다. 훌륭한 정책이나 진실한 인품은 헌신적인 사랑의 봉사로 빛을 보게 됩니다. 사랑에서 정의가 나오기 때문에 사랑의 봉사활동에는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활동이 따르게 됩니다. 이러한 헌신적인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는 도덕적인 힘이 필요하고, 여러 가지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해 거짓과 불신을 조장하고 싶은 유혹이나, 부당하고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고 싶은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6.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정부와 의회 지도자, 각 분야의 지배 계층이나 정당인들 중에는 국민의 비판을 받고 있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개인적인 영달과 당리당략에 급급한 이기주의자, 권력에 대한 우상숭배자, 출세제일주의자, 재물에 집착한 부패 정치인으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치참여 자체를 거부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정치참여를 회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리스도 정신을 이 사회에 불어넣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사도적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 42항 참조).

 

7. 정치생활의 근본원리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전체와 개인이 정치생활의 목적이요 거기 참여하는 주역입니다"([평신도 그리스도인], 42항).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선을 위해 함께 연대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유권자가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하여 이 나라의 정치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선의의 모든 사람이 연대하여 함께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선택이며 유권자 자신의 결단입니다. 신성한 주권을 포기하지 말고 바르게 행사해야 바른 정치가 확립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총선거를 통하여 「생명과 진리와 사랑」안에서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수행해서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천년기를 향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8. 우리는 생명과 승리의 부활 대축일을 열흘 앞두고 실시되는 4·13 총선거를 제대로 치르기 위해서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첫날부터 몸과 마음가짐을 합당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랑의 복음을 실천할 때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온 나라가 잘못된 선거 열기 속에 뒤흔들린다 해도, 많은 선의의 사람들은 이 바람이 일으킨 먼지 속에서도 조용하게 새로운 생명이 움터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특히 신자들은 대희년에 맞이한 올 사순 시기의 특별한 의미를 되새겨서 모든 사람이 서로 화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하느님 사랑의 힘을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사순 시기와 겹친 총선 시기가 우리의 기도와 보속과 희생을 통하여 민족 구원과 화합의 때가 되게 하여, 진정 이번 총선거가 국가적 축제가 되게 합시다.

 

2000년 3월 8일, 재의 수요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박석희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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