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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한국의 국가복지가 낙후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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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24

한국의 국가복지가 낙후한 이유

 

 

우리나라가 선진국들의 단체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지만 국가복지의 수준이 매우 낮은 복지후진국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건국 이래 지금까지 사회복지가 발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국가복지 성적은 경제협력개발기구 30개 국가 가운데 29위에 그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복지비 지출은 적게는 3-4%, 많게는 11-12% 정도로 계측된다. 이것은 국가지출 가운데 어떤 항목을 사회복지비에 포함시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어떻게 계산을 한다 해도 서구 복지국가들이 우리나라의 경제수준(1인당 국내총생산 1만 달러) 단계에 있었을 때의 사회복지비 지출에 현격하게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와 경제수준이 비슷한 나라들의 사회복지비 지출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이다. 

 

비교적 관점에서, 국내총생산 대비 사회복지비 지출이 적어도 20-30% 정도는 되어야 경제와 복지의 균형이 맞는다고 하겠다. 게다가 사회복지비 지출에서도 연금이나 건강보험 급여 지출에서 국가가 부담하는 부분은 없다. 가입자들과 사용자들이 낸 보험료에서 지출되는 것이다. 순수하게 국가 부담분에서 지출되는 사회복지비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같은 공공부조와 민간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지원금이 고작이다. 우리나라의 국가복지 수준은 너무 낮아 다른 사회 영역과 극심한 불균형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예를 보면, 대개 산업화를 계기로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고자 국가의 적극적 개입으로 사회복지제도가 발전해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산업화를 시작한 이래 4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복지 수준이 낮다. 그런데 묘하게도 대학의 사회복지학과는 양적으로 팽창하여 정확한 통계조차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학에서 사회복지학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한국 사회복지사 협회에 사회복지사 자격증 발급을 신청하는 사람이 1년에 1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이 또한 대단한 불균형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복지수준이 낮으며, 왜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가? 우선, 서구 복지국가의 발전 요인들을 살펴보고, 우리나라의 국가복지가 이처럼 발전하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보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는 앞으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과제들을 암시해 준다.

 

 

1. 서구 복지국가의 발전 요인

 

서구 복지국가가 발전한 역사적 배경과 과정을 보면, 적어도 사회적 평화유지, 정치적 민주주의, 발달한 시장경제 등 공통적인 전제조건이 있었다. 물론, 많은 서구 국가들이 식민지를 지배했던 제국이었기 때문에 식민지에서 발생한 경제적 잉여를 바탕으로 복지국가를 이룰 수 있었지만, 이것이 필수적인 조건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위험이 사라지고 사회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가운데, 보수정당에서 계급정당까지 다양한 분포를 갖는 정당정치가 합리적인 선거제도를 통하여 갈등을 제도화하고, 호경기가 지속되면서 경제성장이 꾸준하게 이루어진 결과 복지국가가 출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과 더불어 복지국가가 성장하고 발달하게 된 구체적인 요인은 어디에 있을까? 각 국가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문화적 조건들이 다르기 때문에 학자들도 다양한 요인들을 제시한다. 산업화 논리, 관료제의 발달, 노동계급의 투쟁,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른 양보 등 다양한 요인들이 여기서 열거된다. 구체적인 수준에서는 서로 다른 요인들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 산업화에 따른 사회변동, 노동계급의 투쟁, 국가개입이 서로 맞물려 복지국가가 가능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산업화를 추진해 왔으며, 노동조합의 투쟁이 이어져 왔고, 나름대로 강력한 국가개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왜 우리나라는 국가복지 수준이 정체되어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이러한 보편적 구조 외에 우리 사회의 역사적 특수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경제성장 논리의 과도한 지배

 

해방과 건국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전쟁을 겪었고 경제적으로 절대빈곤의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박정희 정권에서 본격화한 경제성장 정책은 신화와 비극을 동시에 가져왔다. 경제성장으로 물질적 풍요는 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계층, 지역, 세대 사이의 갈등이 함께 나타났다. 급속한 경제성장은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를 가져왔으며 상당한 정도의 거품도 만들어냈다. 

 

지난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계기로 경제성장이 꺾였으며 실직자와 노숙자의 양산, 가정해체 등의 사회문제가 발생하였다. 한편에서는 새로운 성장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분배와 복지정책을 구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전자는 신자유주의의 추종세력이었으며, 후자는 노동계와 시민사회계가 주축을 이루었다. 결국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라는 어정쩡한 방향으로 양자를 달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현 정부는 다시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청사진으로 제시하였다. 1만 달러 고지에 이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많은 문제들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경제성장의 신화를 기치로 내걸었다. 생활고를 비관한 가족들의 동반자살이 줄을 잇고 있는데 정부는 여전히 경제성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지난 40년간 우리나라는 경제성장 정책으로 일관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업을 지원하는 데에는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면서도 복지 부문에는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예산 할당으로 일관하였다. 해마다 사회복지 예산은 경제논리, 성장논리에 밀려 삭감되기 일쑤였다. 그나마 외환 위기 이후 사회안전망을 갖추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사회복지 예산이 다소 증액되었는데, 이것조차 신자유주의의 전도사인 국제통화기금(IMF)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하기에는 너무 취약한 우리의 사회보장제도를 강화할 것을 주문한 결과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경제성장이 국가정책의 기조였기 때문에, 이것은 국민들의 가치관과 의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연대, 평등, 공동체와 같은 가치보다는 경쟁, 승패, 자조와 같은 가치에 편향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권력이나 재산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 심하다. 따라서 국가의 정책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기심이나 경쟁심을 자극하는 경제성장 중심의 정책기조로 나타난 것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경제와 관련하여 항상 국가복지 확대를 반대하였다. 호경기에는 호경기이므로 굳이 국가가 복지제도를 강화할 필요가 없다고 보며, 불경기에는 불경기라서 국가가 복지제도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동안 우리나라도 경제성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화에 도취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복지는 남의 나라 얘기였다. 

 

 

3. 노동자 집단의 취약성

 

복지국가의 발달은 역사적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세기 서구에서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오히려 장인 계급이었다. 장인들은 새로운 자본에 의해 인간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전통적으로 누려오던 권리를 빼앗기자 투쟁에 나섰다. 이들은 나름대로 길드 조직 등을 통해 형성된 공동체 의식과 자기 헌신성을 토대로 투쟁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보면, 서구의 노동자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 연대의식, 자기희생의 정신적 유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이후 계급투쟁의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대변해 주는 정당을 창설하였으며, 이 정당이 의회에 진출하거나 집권에 성공하면서 복지국가를 실현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장인문화의 전통을 갖지도 못하였고, 따라서 노동자들이 공동체적인 규범이나 문화도 형성하지 못한 채 개별적인 노동자로서 국가와 자본에 예속되어야 했다. 더욱이 조선시대부터 뿌리박힌 사농공상의 이데올로기는 현대에까지 이어졌다. 

 

산업화 기간에도 노동자들은 매우 천한 계층으로 낙인 찍혔던 것이 사실이다. ‘공돌이, 공순이’와 같은 호칭이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당시 산발적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지만 조직적이지 못했고, 임금이나 근로조건보다도 인간적인 처우라는 문화적인 요구가 더 강하였다. 그만큼 노동자들은 인간적으로 멸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노동자들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투쟁을 대대적으로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였다. 비로소 조직적이고 힘있는 노동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노동운동은 임금과 근로조건, 사업장 내의 민주화 등과 관련된 경제투쟁 위주에서 이제 정치투쟁으로 옮겨왔다. 최근 외환위기를 계기로 사회보장이나 생존권 요구 등 사회적인 공공의 쟁점에 비중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을 창당하여 지방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 약진하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한국노총이 사회민주당을 창당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해 줄 정당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 노동당이 1900년에 시작되었으니 이와 비교하면 우리는 1세기 정도 뒤늦게 출발한 것이다. 서구 복지국가 역사에서 노동계급의 투쟁이 핵심적인 요인이었던 점을 상기해 본다면, 우리는 이제 막 시작한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곧바로 복지국가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하기 시작한 역사가 아직 일천하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4. 남북 분단에 따른 이념적 왜곡

 

선진 복지국가에서도 국방비와 사회복지비는 매우 밀접한 역(逆)상관관계를 가진다. 곧 국방비가 큰 비중을 차지하면 복지비는 증가할 수 없다. 반면에 군축이 이루어지고 국방비가 감액되면 사회복지비 지출이 증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예산 배분에서 “Guns or Butter?”라는 유명한 문구는 국방비와 사회복지비의 갈등관계를 나타내는 수사적 질문이다.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나라에서 국방비는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며 또한 함부로 감액을 주장할 수 없을 정도로 경직된 예산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남북한이 군비를 축소하는 것은 국민들의 복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분단문제는 비단 국가예산의 문제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데, 이것이 국가의 사회복지 확대에 더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반공주의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서구 복지국가를 견인했던 사회민주주의나 사회주의 정당들의 정책을 주장하는 것은 용납되기 어려웠다. 대개는 좌경 또는 용공으로 매도되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보적이거나 민주적인 사상이나 이념을 선택하는 데 실질적인 어려움이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선거에 따라 구성되는 정부는 보수적인 이념을 지향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서구 복지국가들이 선택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도입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우며 색깔론 공세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일부 극우 보수층에서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보험이나 공공부조조차 사회주의 제도라고 매도하면서 국민들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행복추구를 억압하는 위헌적인 것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상식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도저히 성립되지 않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이 언론과 정부의 보수성을 자극하기 때문에 국가의 사회복지예산을 확충하거나 새로운 사회복지제도의 도입과 강화는 매우 어렵게 된다. 

 

실제로 국민의 정부 시절에 ‘생산적 복지’를 국정지표로 내세웠는데, 애초에 국가복지를 강화하려던 정책이었지만 자본과 보수적 정치집단 및 보수언론들이 사회주의 제도, 퍼주기 복지라며 반대가 심하여 그들을 달래기 위해 ‘생산적’이라는 조건을 달고 태어난 것이다. 특히 국민의 정부가 생산적 복지의 꽃이라고 내세웠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는 ‘조건부 수급’이라는 제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부양의무자는 없지만 근로능력이 있는 빈민들에게 일을 하는 것을 선행조건으로 하여 생계급여를 주는 제도이다. 

 

여기에는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일자리가 없어 가난하게 연명하는 사람들을 마치 일을 하기 싫어 가난해진 것인 양 비난하는 의미가 들어있다. 시장에서 받아줄 만한 근로능력이 없는 빈민들임에도 그들에게 그냥 생계급여를 주면 사회 전체적으로 근로의욕과 생산성을 해친다는 보수층의 강력한 문제제기 때문에, 생존권 보장이라는 미명 아래 그들의 근로의 자유권과 직업선택의 자유권을 박탈한 것이다. 

 

따라서 위헌의 소지가 있는 제도이다. 재벌과 부자들의 탈세와 각종 게이트에 등장하는 뇌물의 규모에 비하면 참으로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빈민들의 생존비용에 대해서 지나치게 인색한 것이다. 

 

이와 같이 왜곡되고 편향된 이념은 극빈층이나 취약계층의 복지를 확대하는 데 매우 인색하고 억압적이다. 오랜 기간의 분단으로 보수권력에 의해 강요된 이념이 사회 곳곳에 자리잡고 있어 국가의 복지를 확충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5. 전근대적 잔재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토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다 보니 농촌의 몰락, 도시의 과포화 현상 등 외형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나타났으며, 사람들의 의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전통적인 의식들 가운데 어떤 부분은 급격히 현대적으로 바뀌었으나 외형적인 현대성에 맞지 않게 여전히 전근대적인 부분들이 남아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이기주의적 속성이나 물질 만능주의는 비교적 급속하게 자리잡은 반면 혈연주의, 연고주의, 형식주의 같은 전통적인 사고는 오히려 강화되어 남아있다. 이러한 두 가지 경향은 서로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극단적 이기주의 또는 냉소주의를 가져왔고, 심지어 부정부패의 연결고리로 작용하는 면도 있다. 

 

사회복지 발전의 발목을 잡는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의식으로서 가장 심각한 것은 소집단 집합주의 문화가 아닐까 싶다. 혈연, 지연, 학연을 중심으로 하는 소집단 패거리주의는 정치, 경제를 비롯해 각종 사회 영역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전체 사회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공유될 때 사회복지의 제도화나 실천이 가능한 것인데, 우리의 의식과 문화가 소집단주의의 포로로 잡혀있다 보니 복지는 가족이나 연고집단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너무 강하게 남아있다. 부모와 자녀의 부양은 전적으로 가족에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에서도 일반적으로 어린이나 노인에 대한 복지를 강화하는 것은 효의 전통을 해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미 어린이나 노인을 가족이 부양하는 것이 한계에 와 있지만 정부와 사회는 여전히 효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해체된 가족에서 탈락한 어린이나 노인들을 위한 복지제도가 잘 갖춰져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생활상의 어려움을 겪게 될 경우, 사람들은 시장에서 해결하거나 소집단의 연고자들로부터 신세를 지는 방식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 또한 권력과 자본을 가진 집단일수록 연줄망이 넓고 견고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동원할 수 있는 소집단의 자원이 빈약한 현실이어서 불평등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외환위기로 많은 가족들이 해체되고 실직자와 노숙자가 증가했지만 실제로 가족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만큼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가족의 건강과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사회복지를 실시하지 않는 것의 방어논리로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봉건적인 의식은 농경사회의 문화적 의식수준을 반영한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근로능력이 없는 수급자와 근로능력이 있는 수급자를 선별하여 전자에게는 생계급여를, 후자에게는 근로를 전제로 조건부 생계급여를 제공한다. 이러한 근로능력 개념 역시 여전히 봉건시대 농경문화의 소산이다. 

 

이른바 후기 산업사회를 통과하는 현 시점에서는 정보화와 지식기반 경제가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농경사회나 산업사회에서는 근력을 기초로 하는 근로능력이 중요했으나 이제는 지적능력이 더 중요한 근로능력의 기준이 된다. 그런데도 여전히 육체적인 근로능력을 기준으로 대상자를 선별하는 것은 큰 문제다. 예를 들면, 학력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건강하다고 해도 그들의 일자리는 자꾸만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학력이 낮고 신체가 건강한 사람보다 컴퓨터를 잘 다루는 장애인이 근로능력이 더 많은 것이다. 그러나 현행 제도에서는 반대로 취급한다. 그것은 농경사회의 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농경사회에서는 일을 할 때 필요한 사람의 숫자가 엄격히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산업사회 이후에는 필요한 인력의 숫자가 정해져 있다. 따라서 일할 능력과 의지가 있어도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일자리와 일의 기회를 제공하는 정책은 실질적으로 마련되지 않고, 오히려 일하지 않아서 빈곤하다는 발상으로 복지정책을 수립하고 있으니 복지제도가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정책 당국, 언론, 자본 모두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의식에 매몰되어 있다. 

 

이러한 의식과 문화가 지배적인 환경에서는 타인을 돕거나 함께 나누는 것이 무척 어렵거나,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일회적이고 과시적일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이후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우리나라에도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자원봉사와 공동모금이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선진국 시민사회의 공동체성에 비하면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반면에 이러한 현상은 국가가 자신의 복지 책임을 민간에 전가하는 정책의 결과이기도 하다. 실제로 사회복지 관련법의 규정에는 거의 예외 없이 민간의 책임과 참여를 촉구하는 규정들이 삽입되어 있다. 가부장적인 국가라 할지라도 국민을 억압하고 통제하면서도 동시에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는데, 우리는 이마저도 충분하게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근대적인 의식에서 공동체 의식은 해체되고 개인과 가족만이 복지의 주체라는 의식이 여전히 확고하게 남아있고, 시장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게 농경사회적인 근로 개념과 능력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결국 국가복지 낙후성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사목, 2003년 10월호, 윤찬영(전주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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