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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2003년 사순시기 교황 담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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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seoul] 쪽지 캡슐

1999-02-04 ㅣ No.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1999년 사순시기 담화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시리라(이사 25,6 참조)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지내려고 하는 사순시기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또 하나의 은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으로 성령 안에서 창조되고 새로워진 당신 자녀라는 것을 재발견하도록 도와 주시고자 하십니다.

 

1.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번 사순시기 담화의 주제인 이 말씀은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모든 사람에 대한 은총의 섭리를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섭리를 바로 창조 활동 안에서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참조)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섭리는 하느님께서 구원 활동을 시작하시고자 당신 백성으로 뽑으신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특별한 관계에서 확인됩니다. 마침내 이 은총의 섭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충만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복을 함께 나누고, 신앙을 통하여 우리는 성령을 약속 받았습니다(갈라 3,14 참조).

 

사순시기는 주님께서 모든 시대의 인류를 위하여 이루어 주신 놀라운 일과 특히 당신 아드님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로마 8,32 참조) 구원에 대하여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기에 좋은 때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사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할 때 우리는 회개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고 하느님을 찬미 찬양하게 됩니다. 성 바오로 사도와 함께 우리는 거듭 찬양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에페 1,3-4).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참회와 내적 정화의 여정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라고 권유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 패배를 겪을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비할 데 없는 사랑을 다시 한 번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여 주시는 사랑을 체험한 우리의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차게 됩니다.

 

2. 사순시기의 여정으로 우리는 우리 구원의 신비인 그리스도의 파스카 기념을 준비합니다. 이 신비를 미리 맛보는 잔치가 바로 주님께서 성목요일에 제자들과 함께 거행하셨던 잔치,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성찬례입니다. 제가 교황교서 <주님의 날>(Dies Domini)에서 말하였듯이, 성찬례 거행 안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실제로 실체적으로 영원히 현존하시며, 생명의 빵이 미래의 영광에 대한 보증으로 주어집니다"(39항).

 

잔치는 기쁨의 상징입니다. 잔치에 참가하는 모든 이가 긴밀한 친교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찬례는 예언자 이사야가 예언한 모든 민족을 위한 잔치(이사 25,6 참조)를 구현하는 것이며, 우리는 거기에서 종말론적인 의미를 깨닫습니다. 신앙을 통하여 우리는 파스카 신비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압니다. 그러나 그 신비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지금 충만하게 성취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파스카 신비 안에서 시작되지만 천국의 영원한 부활절에 결정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형제 자매들이 곤경과 질병의 비참한 처지를 견디어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언젠가는 천국의 영원한 잔치에 부름받게 되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시기는 우리의 시선이 현재를 넘어 역사와 이 세상의 지평을 넘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이루는 완전하고 영원한 친교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복은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생명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문을 우리에게 열어 줍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행복합니다"(묵시 19,9).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미리 맛보는 이 잔치에 우리 삶의 궁극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지상 생활에 새로운 품위를 얻어 주셨고, 무엇보다도 당신과 함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지위를 얻어 주셨습니다. 사순시기는 이 세상의 실재들을 결정적인 것으로 보는 유혹에서 벗어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필립 3,20)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초대합니다.

 

 

3.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 놀라운 초대를 묵상할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해 2000년 대희년의 준비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 자신의 생명을 우리와 나누시는 아버지이시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하여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에서 우리는 새로운 열정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1요한 4,10 이하 참조). 사랑은 제가 교황교서 <제삼천년기>에서 신자들에게 1999년 한 해 동안 더욱더 철저하게 실천하도록 강조하였던 향주덕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열린 마음으로 형제 자매들에 대한 봉사와 연대의 정신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게 됩니다. 교회가 세기를 이어오며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해 온 영역은 참으로 넓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여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활동 영역은 무한합니다. 많은 이의 가슴을 짓누르는 새로운 형태의 빈곤과 절박한 문제들은 구체적이고 적절한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폭력의 희생자들,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의 사랑과 보살핌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부터 모든 사람을 당신 마음 속에 간직하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복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4. 하느님 아버지를 바라보며 사순시기를 살아간다면, 이 시기는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자선 행위 안에서 드러나는 소중한 사랑의 때가 될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날마다 소비주의의 향연에서 소외된 이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의 문을 두드리는 라자로와 같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진보가 가져다 준 물질적 혜택을 함께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칠 줄 모르는 이 빈곤 상황들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괴롭힐 수밖에 없으며, 개인으로든 단체로든 이러한 상황들에 대처하여야 할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려는 마음을 보여 줄 기회가 개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국제 기구, 각국 정부, 세계 경제를 통제하는 기관들은 모두 개별 국가에서만이 아니라 국제 관계에서도 지상의 재화를 더욱 공정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과감한 계획과 사업들을 추진하여야 합니다.

 

5.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사순시기의 여정을 시작하며 보내는 이 담화로 저는 회개의 길을 걸어가시는 여러분을 격려하고자 합니다. 그 길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마련해 두신 선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여 줄 것입니다. 자비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회개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주시기를 빕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계획을 아시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신 첫 번째 사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믿으셨기에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루가 1,42)이 되셨고, 고통 속에서도 순종하셨기에 하느님 자녀의 영광을 누리는 첫 번째 사람이 되셨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어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또한 "확실한 희망의 표징"(교회 헌장, 68항)이 되어 주시고,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풍성히 내리도록 전구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바티칸에서,

1998년 10월 1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2000년 사순 시기 담화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2000년 대희년에 맞이하는 올해의 사순 시기는 회개와 화해의 시간으로 특별한 성격을 띱니다. 사순 시기는 사실상 회개와 화해 여정의 절정이며, 주님의 은총의 해인 희년은 모든 신자에게 이 여정을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충실하고 새 천년에는 새로운 열정으로 그분의 구원의 신비를 선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사순 시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원으로부터 감추어져 온 신비”(에페 3,9)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과 마주하도록 도와 주고,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성령의 구원 활동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합니다.  

 

2. 바오로 성인은, 그리스도 없는 인간의 상황을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에페 2,5 참조)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스스로 인성을 취하시어 그 인성을 죄와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날마다 이러한 노예 상태를 경험하면서 자기 마음 깊이 죄가 뿌리박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마태 7,11 참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집단과 개인을 잔인한 폭력의 희생자로 만들면서 그들의 삶에 깊은 상처를 남겼던 20세기의 커다란 비극들에서 보았던 것처럼, 인간의 죄는 때때로 극단적이고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강제 이주, 조직적인 민족 말살, 인간의 기본권 무시와 같은 행위들은 오늘날에도 인류를 모욕하는 비극들입니다. 일상 생활에서도 우리는 온갖 형태의 기만과 증오, 살인, 거짓을 보게 됩니다. 인간은 그 희생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인류는 죄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 비극적 상황은 바오로 사도가 사람들에게 외친 경고를 상기시켜 줍니다. “올바른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로마 3,10; 시편 14,3 참조).

 

3. 죄의 어둠과 혼자 힘으로는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는 인간의 무능 앞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는 그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로마 3,25).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던 어린양이십니다(요한 1,29 참조). 그분께서는 인간 생명에 동참하심으로써 인간을 악의 노예 상태에서 구하시고 인류에게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녔던 본래의 존엄성을 되찾아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필립 2,8) 하셨습니다. 이러한 파스카 신비 안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납니다. 부활 대축일 부속가에서 노래하듯이, 생명과 죽음의 싸움은 생명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교회의 교부들은 악마가 전 인류를 공격하여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 가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는 부활에서 오는 승리의 힘으로 죽음에서 해방된다고 단언합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죽음의 세력은 무너지고, 인류는 신앙을 통하여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성령을 “첫 열매”(감사기도 제4양식)로 보내 주시어,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 구원은 세상을 새롭게 하고, 하느님과 인류, 사람들을 서로 화해시킵니다.

 

4. 희년은 성자 안에서 인간이 되시기까지 당신을 낮추신 성부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위대한 선물인 화해를 특별히 마음 깊이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따라서 올해는 그리스도인 아니라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도 용서하시고 화해시키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지닌 쇄신의 힘을 경험하게 해줄 소중한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미온적인 사람과 의심하는 사람까지도 포함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보잘 것 없는 것과 그릇된 희망에 지쳐버린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충만한 생명에 이르는 길로 나설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0년 성년의 사순 시기는 탁월한 “자비의 때이며 …… 구원의 날”(2고린 6,2)이고, “하느님과 화해할”(2고린 5,20)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입니다.

 

성년 동안 교회는 개인과 공동체 차원의 화해를 위한 다양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각 교구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러 갈 수 있는 특별한 장소들을 지정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빛 안에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또 고해성사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성지와 로마의 순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 두 곳은 구원 역사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역할 때문에 하느님과 만나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2천년 전 주님의 행로를 목격하였던 그 성지로 우리는 적어도 영적으로 순례를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곳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요한 1,14)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루가 2,52).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마태 9,35).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부께서 당신께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셨으며(요한 19,30 참조), 초기 교회에 성령을 가득 부어 주셨습니다(요한 20,22 참조).

 

저는 또한 바로 이 2000년 사순 시기 동안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었던 성지의 순례자가 되어 그리스도 강생 2000주년을 기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기도로써 저와 동행하여 주시기를 부탁 드리며, 저 자신은 순례의 단계마다 교회의 자녀들과 온 인류를 위하여 용서와 화해를 청할 것입니다.

 

5. 회개의 길은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고 충만한 생활 곧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생활에 이르게 합니다. 이 세 가지 덕은 신비 안에 계신 하느님과 직접 관련되기 때문에 “대신덕”이라 하며, 대희년 준비 3년 동안 특별 연구의 주제가 되어 왔습니다. 성년 거행은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덕들을 더욱 충만하고 더욱 의식적으로 실천하고 증언하도록 요구합니다.

 

희년의 은총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하도록 촉구합니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의 선포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날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바치며,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을 받아들입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각자가 “예” 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각자의 “아멘”입니다.

 

유다인, 그리스도인, 이슬람교인 모두에게 아브라함은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미지의 땅으로 떠나라고 명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따릅니다. 신앙은 우리가 피조물 안에서, 사람들 안에서, 역사적 사건들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활동과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현존을 보여 주는 표징들을 발견하도록 도와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나 겉모습에 얽매이지 말고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 주는 저 초월성을 지향하도록 고무하십니다.

 

희년의 은총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희망을 새롭게 하도록 권유하십니다. 실제로 시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으며, 하느님과 끝없는 기쁨과 충만한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은 성찬의 식탁에서 날마다 미리 맛보는 영원한 혼인 잔치에 대한 기대로 특징지어집니다. 영원한 잔치를 기다리면서, “성령과 신부가 ‘오소서’ 하고 말씀하시며”(묵시 22,17), 시간을 단순한 반복에서 해방시켜 그것에 실제적인 의미를 부여해 주는 희망을 북돋아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희망의 덕을 통하여, 역사는 모든 악과 한계를 초월하여 그 자체 안에 선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씨앗이 온전히 싹트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 없이 새 천년기를 바라보며, 주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확신 안에서 미래의 도전과 기대에 마주합니다.

 

마지막으로, 희년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불을 다시 지피라고 부탁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시간의 종말에 눈부신 빛으로 보여 주실 나라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 이미 현존합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뚜렷한 표징인 친교와 평화와 사랑을 증언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명을 안고 있는 교회 공동체는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야고 2,17 참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세상 끝날까지”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단순한 몸짓이나 이상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지속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순 시기 동안,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든 이가 아낌없는 자선 활동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도록 권유받고 있습니다. 이 희년 동안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특별히 궁핍하게 살거나 기아와 폭력과 불의에 시달리는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서에 나오는 해방과 형제애의 이상, 성년이 우리 앞에 다시 한 번 제시하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옛 유다의 희년은 사실상 노예를 풀어 주고, 빚을 탕감해 주며,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새로운 형태의 노예 생활과 더욱 비극적인 형태의 빈곤이 수많은 사람들, 특히 제3세계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희년의 길을 걷는 모든 이들은 이 고통과 절망의 외침에 귀기울이고 응답하여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필요에 무감각하면서, 또 모든 이가 인간다운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갖추도록 일하지 않고서 우리가 어찌 희년의 은총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시작되는 이 천년기에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마저도 갖지 못한 수많은 우리 형제 자매들의 절규를 듣고 거기에 자애로이 응답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빕니다. 모든 계층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원의 공정한 분배와 인간 개개인의 전인적 발전을 촉진하고 보장하는 실질적 활동을 벌여 나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6.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랑의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할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2000년의 이 사순 시기 동안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비로운 사랑의 산 징표이며 유효한 징표로 삼으시려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성부께 되돌아가라고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권유하십니다.

 

고통받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이시며 천상 자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우리의 지향과 결심을 맡겨 드립니다. 그분께서 새 천년기를 걸어가는 우리의 여정에 밝은 샛별이 되어 주시기를 빕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저는 모든 분에게 하느님의 강복을 청합니다. 한 분이시고 삼위이시며,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마침이신 하느님께 우리는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찬양과 찬미의 노래를 불러 드릴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아멘.”

 

1999년 9월 21일, 카스텔 간돌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2001년 사순 시기 담화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1고린 13,5)

 

 

1.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마르 10,33).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며 제자들에게 당신과 함께 길을 떠나자고 초대하십니다. 그 길은 갈릴래아에서 출발하여 주님께서 구원 사명을 완수하시게 될 장소에 이르는 길입니다. 복음사가들이 예수님의 지상 여정의 절정으로 제시하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스승을 따르고자 애쓰는 그리스도인의 표본입니다. 또한 현대인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요청을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특히 사순 시기에 이러한 요청을 하십니다. 사순 시기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주님과 완전한 친교를 이루며,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깊이 참여하기에 알맞은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순 시기는 신자들이 삶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깊이 성찰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현대 세계에는, 복음에 대한 헌신적인 증인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나라는 벅찬 요구에 냉담하게 거부하거나 때때로 공공연히 반항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기도 생활을 피상적으로 하여 하느님 말씀이 삶 속에 깊이 스며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해성사조차도 무의미하게 생각하고 주일 전례 참여는 단지 의무로 여기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순 시기에 우리에게 하시는 회개의 초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진정한 삶의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감동을 주는 전례 메시지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부활절로 인도하는 이 시기는 주님께서 섭리하시는 은혜로서, 우리 내부로 시선을 돌려 우리 안에 울리는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2. 일부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진리를 절박하게 직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영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고도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방해받지 않으려고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어라.”(루가 6,27)하시는 말씀은 흘려버리거나 무시합니다. 그들에게 이러한 말씀은 받아들이기도 어려울뿐더러 삶에서 일관되게 실천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려면 철저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욕을 받거나 상처를 입을 때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권유를 무시하고 자기 연민이나 복수 같은 심리 작용에 굴복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일상사는 용서와 화해가 진정한 인간적 쇄신과 사회적 쇄신을 가져오는 데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명백히 증명합니다. 이는 대인 관계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3. 인류를 괴롭히는 수많은 비극적 갈등은 때때로 종교적 오해에서 비롯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갈등은 민족들 사이에 증오와 폭력에서 비롯되는 상처를 남겨 놓았습니다. 이따금 한 민족 내에서 집단이나 파벌 간에 그러한 갈등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따금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믿었던 사소한 분쟁들에 서글픈 무력감을 안고 다시 휘말려 들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일부의 사람이 구체적인 해결책을 계획하지도 않고 희생에 희생을 낳게 될 멈출 수 없는 폭력의 악순환에 말려들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평화에 대한 염원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며, 원하는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듯합니다.

 

이처럼 경종을 울리는 상황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무관심하게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얼마 전 폐막된 대희년에 저는 교회와 교회의 자녀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소리 높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죄가 티없이 깨끗한 얼굴을 다소 어둡게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얼굴에서 악을 생각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신뢰할 때, 또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 길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죄 많고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 하느님과 완전한 친교를 회복할 때 가장 잘 드러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억의 정화”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를 새로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새로운 확신을 가지고 다양한 차원에서 그러한 고백을 매번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도록 요청받습니다.

 

4. 평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용서입니다. 용서를 받고 용서를 함으로써 새로운 인간 관계가 가능해지고, 증오와 복수의 악순환이 중단되며,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옥죄고 있는 악의 사슬이 끊어집니다. 화해를 추구하고 개인과 민족 간의 평화 공존을 희망하는 국가들에게는 용서받고 용서해 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4-45). 주님의 이 말씀 속에서 울려 퍼지는 가르침은 얼마나 유익하고 풍부합니까! 당신을 공격하는 상대방을 사랑할 때, 상대는 적의를 풀게 되고 전쟁터는 상호 지원과 협력의  장소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전은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 민족, 온 인류와 관련되며, 특히 가정과 관련이 됩니다. 자신의 마음을 돌려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자기 자신에게 죄가 있을 때 화해하기는 이미 어려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죄가 있을 때 화해하는 것은 부당한 굴욕으로까지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길을 받아들이려면 내적 회개를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겸손하게 복종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이간질시키는 사람뿐 아니라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도 화해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마태 5,23-24 참조). 그리스도인은 부당하게 모욕을 받고 공격을 받았다고 느낄 때조차도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행동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따름으로써 형제적 구원에 협력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 시대에, 용서는 진정한 사회 쇄신과 세계 평화 증진에 점점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선포하면서, 교회는 서로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을 모든 인류의 영적 유산 안에 고취시켜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소 힘들지만 희망으로 가득한 방식입니다. 이 때 교회는 어려운 시기에 처하여 당신을 향하는 사람을 결코 저버리시지 않는 주님의 도움에 의지할 줄 압니다.

 

5.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1고린 13,5).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의 이 말씀에서, 사도 바오로는 용서가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고귀한 형태 가운데 하나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사순 시기는 이 용서라는 덕의 의미를 더욱 깊게  새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하여, 성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용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는 우리를 사랑 안에 살아가게 하며, 다른 사람을 적이 아니라 형제로 여기게 해 줍니다.

 

참회와 화해의 이 사순 시기에 신자들이 모든 인간적 차원을 망라하는 진정한 사랑의 표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마음의 태도는 그들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어(갈라 5,22 참조),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새로운 마음으로 물질적 도움을 주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하는 마음은 관대한 마음입니다. 이 거룩한 사순 시기에, “베풂”은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단지 양심의 짐을 덜고자 남는 것의 일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형제 자매들의 고통스런 얼굴과 비참한 상황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최소한 우리가 가진 것의 일부만이라도 나누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순 시기의 베품은 이를 행하는 사람이 하느님과 또 형제 자매들과 친교를 맺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인 원한과 냉담함에서 벗어나 있을 때, 더욱 풍부한 의미를 지닙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말과 행동으로 친교와 연대의 증인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 요한의 말씀은 밝은 빛을 던져 줍니다.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1요한 3,17)

 

형제 자매 여러분!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을 설명할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험난한 길과 희생에 대하여 일러 주셨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는 “자기”를 버리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격과 맺는 친교를 통하여”(「그리스 교부 총서」, 58, 619)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움에 의지할 수 있을 때, 그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순 시기에 저는 모든 신자에게 주님께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도록 권유 하고 싶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은 주님의 자비를 새로이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선물만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즐거이 또 아낌없이 받아들이고 그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1고린 13,5-6).

 

이러한 마음으로 저는 모든 신자 공동체의 사순 여정에 자비의 어머니의 보호를 간구하며, 여러분 각자에게 사도로서 진심어린 축복을 보내 드립니다.

 

바티칸에서, 2001년 1월 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2002년 사순 시기 담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우리는 핵심적인 신앙의 신비, 곧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대한 장엄한 기념으로 나아가는 사순 시기의 여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교회가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구원 사업을 묵상하도록 권고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기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구원 계획은 독생 성자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기꺼이 그리고 완전히 내어 주심으로써 완성되었습니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요한 10,18) 하신 예수님의 선언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생명을 바치시려는 결심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구세주께서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말씀하시며 참으로 위대한 사랑의 선물을 확인해 주십니다.

 

회개를 위한 섭리의 시기인 사순 시기는 우리가 이러한 놀라운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도록 도와 줍니다. 우리는 신앙의 뿌리로 되돌아가 구원이라는 엄청난 은총의 선물을 묵상함으로써,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도록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하신 주님의 말씀을 올해 사순 시기 담화의 주제로 선택하였습니다.

 

2.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과연 누가 이러한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로마 3,23-24).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 때문에 생긴 통탄할 분열 상태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이 우리의 나약함을 굽어보시고, 오히려 그 나약함 때문에 더욱더 당신 사랑을 새로이 풍성하게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이러한 무한한 자비의 신비를 선포하며, 인간을 단죄하기보다는 인간을 당신께 되돌리시어 당신과 친교를 맺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의지와 바람을 찬양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부활 주일까지 참회의 순례를 계속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 한가운데에 이 복음 말씀이 울려 퍼지기를 빕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되새기는 이 사순 시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음 속 깊이 그러한 위대한 선물의 신비를 경이롭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의 온 삶이 바로 하느님 자비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시작과 놀라운 성장, 이것이 바로 선물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생명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인간을 생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생명은 선물이기 때문에 결코 소유물이나 사유 재산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의학과 생명 공학의 업적에 도취된 인간은 때때로 자기 자신을 창조주로 여기고, “생명 나무”(창세 3,24)에 손을 대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기술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면서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과학 연구는 치하할 만하지만, 고통과 한계를 지녔더라도 인간의 생명은 선물이며 소중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은 언제든 받아들이고 소중히 하며, 거저 받아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거저 내어 주는 선물입니다.

 

3. 사순 시기는 우리를 위하여 해골산에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가 그분 안에서 생명을 다시 얻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특별히 도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생명을 새롭게 하시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내밀한 생명으로 이끄시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처럼 고귀한 선물을 그리스도인들은 기쁘게 선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 사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라고 하였습니다. 이 생명은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우리는 기도와 성사 거행, 복음 증거를 통하여 개인으로서든 공동체로서든 우리가 받은 생명에 성실히 부응함으로써 그 생명을 지속적으로 키워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생명을 거저 받았기에, 우리도 형제 자매들에게 거저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당신의 증인으로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요청하신 것도 그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가장 먼저 주어야 할 선물은 거룩한 생명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그 사랑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순 시기의 여정이 모든 신자에게 우리의 이 특별한 소명에 더 깊이 참여하라는 끊임없는 부름이 되기를 빕니다. 우리 신자들은 하느님과 이웃에게 우리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줌으로써 ‘거저’ 받은 생명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4. 바오로 성인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 아닙니까?”(1고린 4,7) 하고 묻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형제 자매들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들을 도와 주어야 할 신자들의 의무는 더욱 절실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이기주의를 버리고 참된 복음적 사랑을 실천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시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명령은 분명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 5,46) 세상은 이기주의와 사리 사욕에 바탕을 둔 인간 관계를 높이 사고 있어서, 흔히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자기 중심적인 인생관을 부추깁니다. 모든 사람은 타고난 재능이 별로 없더라도 장점과 단점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환영받고 사랑 받아야 합니다. 사실 그들의 시련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그들에게 실질적인 사랑을 더 많이 베풀어야 합니다. 교회가 수많은 기관들을 통하여 병들고 소외되고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사랑을 증언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의 사도가 되고 사랑의 문화의 건설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매우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가까이 다가와 있는 하느님 나라가(마태 10,5 이하 참조) 제자들의 아낌없는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전파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의 사도들은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었으며, 사도들을 만난 사람들은 사도들을 위대한 메시지를 지닌 이들로 여겼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신자들의 선행은 신앙에 대한 징표이자 초대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의 어려움을 도와 주었을 때, 그들의 선행은 단순히 물질적인 도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이며, 생명과 바람과 사랑의 충만한 의미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5.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주변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베풀면서 이 사순 시기를 지낼 준비를 합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베풀어 주시는 수많은 선물에 보답하는 것임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거저 받았으니 우리도 거저 줍시다!

 

세상 사람들이 참으로 필요로 하는 거저 줌의 증거를 보여 주기에 사순 시기보다 더 좋은 시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그 사랑은 이번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도록 촉구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랑을 증언해 주시는 전세계의 모든 평신도, 수도자, 사제 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어떤 처지에서 살아가든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사랑을 증언하기를 빕니다.

 

아름다운 사랑과 희망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께서 올 사순 시기의 여정에 우리의 안내자가 되시고 힘이 되어 주시기를 빕니다. 저는 기도 중에 여러분을 사랑으로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드리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특히 날마다 자선 활동의 선봉에 서서 활동하시는 분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사도로서 축복을 보내 드립니다.

 

바티칸에서,

2001년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2003년 사순 시기 담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사순 시기는 열심히 기도하고 단식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시기입니다. 사순 시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일상 여정에 빛을 비춰 주는 하느님의 말씀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해 보면서 부활을 준비합니다.

 

올해 저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는 사도행전의 한 구절을 사순 시기의 성찰 주제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어떠한 도덕적 권유나 외부의 명령이 아닙니다. 주고 싶어하는 마음은 인간의 심성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무언가를 주고받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어 줌으로써 만족을 얻습니다.

 

2. 유감스럽게도 우리 시대는 인간 마음 안에 늘 도사리고 있는 이기심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일반 사회나 매체는 일시적이고 쾌락적인 것들을 공공연히 찬양하는 메시지들을 사람들에게 주입시키고 있습니다. 자연 재해나 전쟁, 그 밖의 비상 사태 때에는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이 분명히 드러나지만, 일반적으로는 연대의 문화를 구축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심 없이 자신을 내어 주고자 하는 우리의 내적 성향은 세속적인 정신에 오염되어 우리 자신의 특정한 이익만을 채우려 들며, 끊임없이 더 많이 가지려는 욕구를 부채질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과 수고로써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은 물론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지만, 지나친 소유욕은 인간을 자신의 창조주와 형제 자매들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바오로 성인이 디모테오에게 한 말씀은 어느 시대에나 들어맞는 말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1디모 6,10).

 

다른 사람들에 대한 착취, 형제 자매들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 기본적인 도덕률의 침해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데서 빚어지는 결과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비극적이고 지속적인 빈곤 상황 앞에서, 우리는 맹목적인 이익 추구와 공동선에 대한 실질적이고 책임 있는 관심의 부족으로 막대한 자원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집중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가난과 무관심으로 고통받는 현상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면서, 저는 자명하지만 흔히 무시되고 있는 한 가지 원칙을 재확인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소수의 특권층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만 우리는 모든 사람의 희망인 진정한 정의와 연대의 세계 질서를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신자들이 아무 대가 없이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 주고자 하는 내적 충동에 따를 때, 그들은 깊은 내적 만족을 경험하게 됩니다.

 

정의를 증진하고자 노력하고, 약자들을 옹호하는 일에 투신하며,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인도주의 활동을 하고, 모든 응급 상황에서 병자들을 돌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드린 완전한 선물인 유일하고 무한한 사랑의 보화에서 힘을 얻습니다. 신자들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어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필립 2,6 이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완전한 사랑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겸손되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해골산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사람들에게 복되신 삼위일체의 사랑의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전달해 줍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최고의 선이신 하느님께서만 이 세상의 온갖 빈곤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은 하느님과 활발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얻는 열매여야 하며, 하느님을 변함 없는 준거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을 때 우리는 기쁨을 얻기 때문입니다(「신국론」[De Civitate Dei], X, 6; 「라틴 그리스도교 문학 전집」[Corpus Christinanorum Series Latina] 39: 1351 이하 참조).

 

4.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아무 것도 바라시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 “죄 많은 사람들”(로마 5,6)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순 시기를 이타심과 관대함을 바탕으로 용기 있는 결정을 하는 은총의 기회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순 시기는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물리치는 수단으로서 단식과 자선이라는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무기를 제공해 줍니다. 풍족함 가운데서 떼어 주는 것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 위하여 더 많은 것을 희생할 때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꼭 필요한 자제심이 길러집니다. 끊임없는 기도로 힘을 얻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하느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 속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하는 일에 영감과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도 형제 자매들의 참된 선익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사회 생활이나 정치 생활의 중요한 측면들을 향상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러한 변화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바오로 성인이 가르치듯이,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13).

 

5. 흔히 피상적이고 덧없는 삶에 불만스러워하며 참된 행복과 사랑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모범을 보여 주시며 당신을 따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에게 다른 이들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라고 호소하십니다. 이러한 희생은,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생명을 걸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전세계 곳곳의 남녀 선교사들의 감동적인 모범에서 볼 수 있듯이, 자아를 성취하고 기쁨을 얻는 원천입니다. 또한 신앙의 재촉을 받아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이바지하고자 사제직이나 수도 생활 성소를 받아들인 젊은이들의 대답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들과 노인들, 병자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도와 주는 일에 기꺼이 헌신하는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에게서도 이를 경험합니다.

 

최근, 우리는 유럽의 홍수, 라틴 아메리카와 이탈리아의 지진, 아프리카의 전염병, 필리핀의 화산 폭발 등으로 생긴 희생자들과, 증오와 폭력, 전쟁으로 일그러진 세계 다른 여러 지역들을 위한 장한 연대의 발로를 목격해 왔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발생할 때, 커뮤니케이션 매체는 우리가 재해와 재난의 희생자들과 일체감을 가지고 그들에게 신속히 도움을 주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흔히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계명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도와 주고자 하는 마음이 일게 하는 본연의 자비심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 주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은총을 얻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다비타라는 여신도가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9,36 이하 참조). 백인대장 고르넬리오는 고결한 마음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사도 10,2-31 참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섭리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웃에게 행한 선행을 몇 배로 되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마태 25,40 참조).

 

저는 신자들이 이번 사순 시기를 곳곳에 사랑의 복음을 증언할 좋은 기회로 삼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사랑의 소명은 모든 참된 복음화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저는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전구를 간청하며, 성모님께서 우리의 사순 시기 여정에 함께 해 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저의 사랑을 담아 사도로서 축복을 보냅니다.

 

바티칸에서,

2003년 1월 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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