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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제14차 청소년주일 교황 담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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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seoul] 쪽지 캡슐

1999-05-05 ㅣ No.6

1999년 제14차 청소년 주일 교황 담화문

(5월 30일)


"하느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요한 16,27 참조)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1.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희년을 바라보며, 1999년은 "신앙인들의 시야를 넓혀 그들이 그리스도의 전망 안에서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눈으로 사물을 보게 하려는"([제삼천년기], 49항) 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파견을 받으셨고 또 아버지께로 돌아가셨습니다"(같은 곳). 사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을(요한 20,17 참조) 향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기념할 수도 희년을 경축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도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되돌아가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은 주님이시다."(1고린 12,3) 하고 말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갈라 4,6)라고 부르며 그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저는 청소년 여러분에게 온 교회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나아가,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요한 16,27 참조)는 것을 알려 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에 감사와 경탄의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도록 당부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14차 청소년 주일의 주제로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하느님께서 먼저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1요한 4,19)을 받아들이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여러분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분께서 맺어 주신 평화의 계약도 결코 파기되지 않을 것입니다(이사 54,10 참조). 이러한 확신을 단단히 붙드십시오. 삶에 의미와 힘과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이 확신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새겨 두셨습니다(이사 49,16 참조).

 

2. 언제나 의식적이고 뚜렷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하느님을 향한 깊은 향수가 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그것을 이렇게 훌륭히 표현하였습니다. "나에게는 마음 속에서 '아버지께 오라.'고 속삭이는 생명수가 있습니다"(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간, 7항). 모세는 산 위에서 "주님,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출애 33,18)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께서 하느님을 알려 주셨습니다"(요한 1,18). 그렇다면 아버지를 알고자 할 때 아들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 필립보는 쉽게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합니다. 필립보의 끈질김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대답을 듣게 됩니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하느님의 아들께서 강생하신 다음에는,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인간의 얼굴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이에게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분을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한 13,20 참조). 그와 반대로 "그분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분의 아버지까지도 미워하는 것입니다"(요한 15,23 참조). 이렇게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새로운 관계, 곧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가능해집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알고 싶어하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들의 인생에 힘이 되도록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복음 전체의 요약"(테르툴리아누스, [기도론], 1항)인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이 기도에서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신분이 확인되고 있습니다(루가 11,1-4 참조). "한편으로, 이 기도의 말씀을 통하여 외아들께서는 성부께 받으신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기도의 스승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으로 당신의 형제 자매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이를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기도의 모범이십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765항).

 

요한 복음서는 우리에게 성자의 생애에 대하여 직접 증언을 하면서 아버지를 알기 위하여 따라야 할 길을 가리켜 줍니다. "아버지"께 대한 청원은 예수님의 비결이고 숨결이며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외아들이자 맏아들이시며, 만물이 지향하는 목적이시고, 세상이 있기 전부터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와 똑같은 영광을 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까?(요한 17,5 참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모든 것을 다스릴 권한(요한 17,2 참조)과 선포할 메시지(요한 12,49 참조)와 완수하여야 할 일(요한 14,31 참조)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들조차도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제자들을 주시며(요한 17,9 참조)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들을 악에서 보호할 임무를 맡기신(요한 18,9 참조) 분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실 시간을 앞두고 바치신 "사제 기도"는 아들의 마음을 잘 드러내 줍니다. "아버지,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 곁에서 제가 누리던 그 영광을 아버지와 같이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5). 그리스도께서는 최고의 영원한 대사제로서 구원받은 이들의 끝없는 대열 맨 앞에 자리잡고 계십니다. 수많은 형제들의 맏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흩어진 양 떼들을 한 우리에 모으심으로써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하셨습니다"(요한 10,16 참조). 

 

예수님의 구원 활동으로, 삼위일체 안에 있는 그 사랑의 관계가 아버지와 구원받은 인간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간청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제자들에게 쏟아부어 주신(요한 14,16 참조) 성령의 활동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러한 사랑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영원하신 말씀께서 시간 속에 강생하시어 세례를 통하여 당신과 하나가 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어 주신 것도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활동이 없다면 결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3.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요한 3,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세상이 그 사랑을 거부한다 하여도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을 언제까지나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이것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진리입니다. "극히 단순하며 심오한 이 진리를 교회는 인간에게 선포하여야 합니다"([평신도 그리스도인], 34항 참조). 성자께서 단지 이 말씀만 들려 주셨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3,1).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고 있으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을 우리는 어떻게 선포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요한 6,45) 아버지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요한 14,23 참조)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습니다."(요한 17,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를 온전히"(요한 16,13)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활동입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와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말과 모범으로 이러한 근본적이고 위안이 되는 확신을 선포할 줄 아는 "선교사"들을 필요로 합니다. 새로운 천년기에 어른이 될 오늘날의 청소년 여러분은 이 사실을 깨달아 예수님의 학교에서 "배우십시오." 교회 안에서, 그리고 여러분이 일상 생활의 다양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증언하는 믿음직한 증거자가 되십시오! 또한 여러분의 선택과 태도를 통하여,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섬기며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존중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십시오.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처럼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요한 14,21) 하시는 확신에 찬 말씀을 듣는 사람은 그 마음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놀라운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겪는 갖가지 형태의 부성애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비쳐 주고 있습니다. 저는 특히 하느님의 협조자가 되어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고 여러분을 돌보아 주신 여러분의 부모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출애 20,12) 부모님께 감사하십시오! 또한 저는 사제들을 비롯하여 주님께 봉헌된 사람들도 생각합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믿음을 발전시켜 주고 기쁨을 더해 주기 위하여"(필립 1,25) 여러분에게 친구이자 증거자이며 인생의 스승이 되어 주었습니다. 끝으로 저는 자신들의 사랑과 지혜와 신앙으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또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큰 기여를 해 주신 참된 교육자들을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인생 길에 함께 해 준 이러한 훌륭한 사람들을 주신 데 대하여 항상 주님께 감사 드리십시오. 

 

4.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을 깨달은 신자는 "인간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 굳게 매달려 진정한 회개의 여정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깊은 의미에서, 고해성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욱 강도 높은 거행을 위한 본연의 맥락입니다"([제삼천년기], 50항). 

 

"죄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들이 당신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주신 자유를 오용하는 것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87항). 죄는 세례 때에 받은 하느님의 생명에 따라 살기를 거부하고 참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모든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방해할 수 있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 의지에 기원을 두고 있는(마르 7,20 참조) 죄는 진정한 사랑의 실패입니다. 죄는 이기적인 태도와 말과 행동으로 인간의 본성에 상처를 입히고 인간의 연대성을 손상시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849-1850항 참조).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인간은 자유로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원한 드라마입니다. 인간은 흔히 굴종을 택하고 두려움과 변덕, 잘못된 태도에 굴복하며 자신을 지배하는 우상과 인간성을 타락시키는 이념을 만들어 냅니다. 요한 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다"(요한 8,34).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진정한 회개의 기원에는 죄인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이 있습니다. 그 시선은 사랑에 찬 눈길이 되고 열정이 되며 마침내 십자가의 수난이 됩니다. 또한 무질서에 빠져있는 죄인에게도 변함없이 존중과 사랑을 보이시며 생활 방식을 바꾸도록 결단을 촉구하시는, 용서를 해 주시겠다는 의지가 됩니다. 레위(마르 2,13-17 참조), 자캐오(루가 19,1-10 참조),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자(요한 8,1-11 참조), 죄수(루가 23,39-43 참조), 사마리아 여인(요한 4,1-30) 등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인간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랑을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할 때, 사랑에 깊이 참여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도 불가해한 존재로 남게 되며 인생은 의미를 잃고 맙니다"([인간의 구원자], 10항).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을 발견하고 체험한 인간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자비로우신 하느님], 13항 참조). 

 

"돌아가 다시는 죄짓지 말아라"(요한 8,11). 용서는 거저 주어지지만, 용서받은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진지한 노력으로 응답하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이 더욱 크게 드러날 때 죄인들이 결국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은 끊임없는 용서를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잃었던 아들'의 비유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순간부터 아버지는 근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바라며 먼 지평선을 바라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괴로워합니다. 아들이 드디어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달려가 꼭 껴안으며 기쁨에 겨워 하인들에게 명령합니다. "내 아들에게 가락지를 끼우고 - 계약의 상징 -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 새로운 삶의 상징 - 신을 신겨 주고 - 되찾은 존엄의 상징 - 먹고 즐기자!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루가 15,11-32 참조).

 

5.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올라가시기 전에 교회에 화해의 직무를 맡기셨습니다(요한 20,23 참조). 그러므로 마음 속으로만 한 참회는 하느님의 용서를 얻는 데에 불충분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려면 교회 공동체와 화해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성사 행위를 통하여 죄를 인정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의 교역자 앞에서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불행히도 오늘날 사람들의 죄 인식은 무디어만 가고, 하느님의 용서에 의지하는 경우도 드물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많은 문제점과 어려움의 원인입니다. 저는 올해 여러분이 '잃었던 아들'의 비유를 주의 깊게 다시 읽고 고해성사로 받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은총을 다시 찾도록 당부합니다. 이 비유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죄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기도와 묵상, 감탄과 확신의 자세로 말씀에 귀기울이며 하느님께 말씀 드리십시오. "저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저는 존재하고 살아가기 위하여 하느님을 의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의 죄보다 더 강하십니다. 저는 저의 삶을 이끄시는 하느님의 힘을 믿습니다. 지금처럼 하느님께서 저를 구원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저를 기억하소서. 저를 용서하여 주소서!"         

 

여러분의 "내면"을 들여다보십시오. 죄란 법이나 도덕 규범을 어기기에 앞서 하느님을 거스르고(시편 50[51], 6 참조) 형제 자매들과 여러분 자신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시며 모든 형제 자매의 모범이신 그리스도 앞에 서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자기 자신과 화해하기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이웃과 사회와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그것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복음이십니다.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그 하나에 대한 충실성은 곧 다른 하나에 대한 충실성을 보여 주는 척도입니다. 

 

신뢰하는 마음으로 고해성사를 보십시오. 죄의 고백은 자신의 불충을 인정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평화를 되찾고 많은 결실을 맺으려면 회개와 화해의 필요성을 인정하여야 하며, 죄의 시련을 겪는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연대 의식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445항 참조). 

 

끝으로 사제가 베푸는 사죄를 감사의 마음으로 받으십시오. 이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회개하는 죄인에게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하시며 생명을 주는 말씀을 선포하는 순간입니다. 사랑의 샘은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여 우리가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더욱 열렬히 다시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6.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37-40). 예수님께서는 둘째 계명이 첫째 계명과 동등하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두 계명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켰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까지 지킨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계명이 각각 나름대로 중요하므로 둘 다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계명을 나란히 놓고 말씀하신 것은 두 계명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계명은 무시하고 다른 계명만 지킬 수는 없습니다. "이 두 계명의 불가분적인 일치를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삶 자체로 증언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명은 우리를 구원하는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아버지께 대한 그분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따로 떼어 놓을 수 없음을 나타내는 징표입니다"([진리의 광채], 14항).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알아보려면 우리가 참으로 이웃을 사랑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웃 사랑의 진실성을 알아보고자 한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지 자문해 보면 됩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4,20 참조).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요한 5,2).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에서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에 더 큰 역점을"(51항) 두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외적인 선택이 아니라 "우선적"인 선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세상 재화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인데도 부유하다는 나라에서조차 가난한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모든 빈곤 상황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랑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또한 사회적 정치적 노력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빈곤 문제는 구체적인 상황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문화를 건설하려는 선의를 지닌 모든 사람이 그 상황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빈곤 상황은 "죄의 구조"입니다. 타인을 착취하지 않고 남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를 버리는" 사람들, 남을 억누르지 않고 남을 "섬기는" 사람들의 협력 없이 이 죄의 구조는 결코 극복될 수 없습니다([사회적 관심], 38항 참조).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저는 특히 여러분에게 가장 가난한 사람들 곁에서 그들과 함께 구체적인 연대와 나눔을 실천하도록 당부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여러분의 또래들이 펼치는 우애와 연대의 활동에 적극 동참하십시오. 이는 주님께서 좀더 운이 좋은 여러분에게 주신 많은 것 가운데에서 작은 것이나마 가난한 사람들을 통하여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근본적인 선택에 대한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표현이 될 것이며,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명확한 방향 설정을 하는 것입니다.

 

7. 성모 마리아께서는 교회의 전신비를 당신 자신 안에서 드러내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총애를 받으시는 딸"([제삼천년기], 54항)로서 하느님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그 은총에 선뜻 응답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딸"로서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7) 하고 대답하신 마리아께서는 성자의 어머니가 될 자격이 있으셨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진정 하느님 아버지의 딸이시기에,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고자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도와 주시려는 바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극히 다정하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끊임없이 신자들을 예수님께 인도하시어,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처럼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이든지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참조) 하고 당부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이것이 바로 "인자하신 아버지"(2고린 1,3 참조)의 집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올해 각 지역 교회에서 거행할 제14차 청소년 주일은 다가오는 대희년을 앞둔 마지막 청소년 주일이므로, 2000년 성년 준비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저는 이번 청소년 주일이 여러분 각자에게 생명의 주님과 또 그분의 교회와 새롭게 만나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여정을 성모님께 맡겨 드리며, 여러분이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을 선뜻 받아들여 그 사랑의 증거자가 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준비시켜 달라고 성모님께 간청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저는 여러분이 신앙과 복음화 노력에서 풍부한 결실을 거두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진심으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바티칸에서,

1999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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