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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윤리] 죄의 본질과 회개의 의미: 인간 구원의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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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28

죄의 본질과 회개의 의미 - 인간 구원의 관점에서

 

 

1. 서론 : 현대인의 죄의식

 

현대인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로 죄에 대한 무감각을 들 수 있다.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고 인간 지성이 무한한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시대에 살고있는 현대인은 이제 더 이상 죄라는 굴레에 자신을 묶어두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죄의식이란 약자의 소행일 뿐 아니라 인간을 인간 이하로 저락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현대 세계에는 인간을 죄에서 또 죄책감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가와 문필가들이 수없이 나타나서 활동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죄에 대한 올바른 의미를 점점 망각해 가고 있으며 더 나아가 죄에 대해 민감한 거부반응마저 일으키고 있다. 즉 죄에 대한 의식이 종교적 영역을 떠나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 게다가 현대인들은 심리학과 사회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죄의 현상과 문제를 단순히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한계의 결과로 규정지우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 결과 한 인간의 성격이나 그 외의 모든 것이 자신이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물려받은 유전적인 소인이나 자신이 성장한 주위 환경을 통해 각인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세상 안에 존재하고 있는 죄와 악에 대해서도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환경과 상황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인간은 죄인이 아니며, 결코 죄인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죄는 다만 인간이 책임을 질 수 없는 유전적 소인의 결과이며 잘못된 교육과 환경의 유산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죄인이 아니라 단지 치료를 필요로 하는 병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현대인은 죄를 단지 심리학적 또는 사회학적 현상이나 그 결과로 보고, 거기서부터 해방되려고, 더 정확하게는 무관하게 살고자 한다. 이러한 경향은 자연스럽게 종교적 분위기로부터 인간을 떠나게 하고, 인간 생활을 하느님과의 관계를 떠난 인간만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죄의 엄연한 실재성이다. 다시 말해 현대인들이 아무리 죄에 대해 의식적으로 도피하려고 시도한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 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새로운 학문과 시각으로 죄를 새롭게 이해한다 하더라도 죄에 대한 거부를 합리화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범죄로 인해 개인과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했을 때 그 개인이 느끼는 내적인 고통(양심의 가책)과 외부적인 압력은 여전히 체험적인 실재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더 원초적으로 볼 때 죄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단절을 통해서 체험되는 실재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 정상적이든 비정상적이든 - 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죄의 본질과 현상을 올바로 해명할 수 없다.

 

결국 죄는 인간 존재에 심각한 파괴를 가져오는 엄연한 현실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 현실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이와 무관하게 살면 모든 종교적 굴레나 윤리적 규범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엄연한 오해이다. 인간은 그 존재의 유한성으로 인해 무한자와의 관계를 배제할 수 없거니와, 그럴 경우 죄는 무한자와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리기에 극복할 대상으로 남게된다. 또한 인간은 독립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사회의 윤리나 자연법의 요청을 떠나 초연하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죄의 본질에 대한 성서적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죄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로 회개의 의미와 그 구성 요소에 대해 살펴보겠다. 그럼으로써 죄를 더 이상 일방적으로 거부하거나 자신과는 무관한 무엇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현대인 심성의 부당성을 밝히고, 참다운 인간 해방을 위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고찰해 보겠다. 

 

 

2. 죄의 본질

 

구약과 신약은 구원의 역사이며 또한 인간이 범죄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죄가 무엇인가를 말하기보다 인간이 어떻게 죄를 범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창세기 3장에서 원조의 범죄에 대해 알려주고 있는데, 아담의 죄는 본질적으로 불순종의 죄였다. 즉 하느님의 계명 중 하나를 의식적이며 고의적으로 깨뜨리고 하느님을 거역한 불순종이었다(창세 3,3). 그러나 성서는 첫 조상의 하느님께 대한 반역의 외적 행위 뒤에 숨어 있는 내적 행위를 명백히 지적하고 있다. 즉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은 그들이 뱀의 유혹에 빠져서 “선과 악을 아시는 하느님과 같이 되기를”(창세 3,5) 원한 데서부터 출발한다. 이 성경 말씀의 가장 일반적인 해석에 의하면 자기들이 하느님을 대신하여 선과 악을 결정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자기를 자기 운명의 유일한 주인으로 놓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자기들의 창조주께 종속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인간을 하느님께 결속시키는 끈을 버린 것이다. 

 

또한 구약성서에서 죄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을 위배하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되고 그분과 계약을 맺게 되는데, 그 계약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 편에서 야훼 하느님께 성실해야 하고 그분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되었다. 그러기에 구약성서에서 죄란 구체적으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파괴하는 범법 행위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구약에서 죄를 뜻하는 용어로 ?hata?라는 히브리어가 사용되는데 그 의미는 대부분은 도덕적 의미로 사용되어 잘못을 저질렀다던가(창세 20,9; 1사무 26,21) 더 나아가서는 야훼를 거슬려 죄를 범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죄란 법조문을 그대로 준수하지 아니했다는 것보다 야훼 하느님을 반대해서 저항하고 그에게 불성실하며 그를 멸시하고 그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그를 모욕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말하자면 하느님과 맺은 사랑의 계약을 잊어버리고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성서는 “인간을 죄에서 구하기 위하여”(이사 53,11) 오신 이 ‘야훼의 종’이 다름아닌 하느님의 친아들이시라는 것을 계시한다. 따라서 신약성서에서도 구약성서에서와 같이 죄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신약성서는 죄를 쳐 이기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하신 사랑의 역사를 남김없이 계시함으로써, 죄의 정체를 더 명확히 밝혀 주었고, 아울러 죄가 하느님의 예지의 계획 안에서 차지하는 역할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데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내면화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따. 죄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은 법이나 규율을 외적으로만 준수할 것이 아니라 내적 자세를 갖추어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적 자세란 하느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요한 8,24). 즉 죄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인간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메시아로서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불신앙은 하느님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수평적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의 계명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죄로 명백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랑의 이중계명에 위배되는 모든 죄는 인간을 자기 안에 폐쇄시킨다. 또 타인과의 모든 관계를 끊게 하는 이기주의와 자기만족과 탐욕은 하느님 나라 건설의 장애물이 되며, 인간을 하느님으로부터 그리고 이웃으로부터 고립케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죄의 상태에서 유일한 해방의 길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이러한 성서의 정신에 기초해서 전통적으로 가톨릭 교회에서는 죄를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서 피조물로 향하는 것’(Aversio a Deo, conversio ad creaturam)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피조물을 벗어나야 하고 따라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을 이탈해야 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십자가 사건의 참된 의미를 생각할 때 이는 분명히 그릇된 판단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구원의 잔치로 초대하셨기 때문이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셨고, 제자들을 통해 지금 이 순간도 계속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의 실재를 인정하고 인간의 구원과 해방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한다면, 죄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 책임을 전가시킬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자유결단의 결과이다. 죄는 단순히 인간의 나약과 부주의에 의한 결과가 아니다. 하느님을 거스려 반항하는 인격적이고 자유스러운 행위의 결과이다. 또한 죄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성립되며 죄는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이고 하느님이 정한 자연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 죄를 순수 도덕악으로만 간주한다면 죄인은 잘못한 것을 뉘우치고 개선하기만 하면 되지만, 죄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만이 근원적인 용서를 주실 수 있고, 우리는 그분의 자비를 청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보다 먼저 자기 죄를 바로 알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느님께 자신의 죄를 드러내고 고백한다는 것이 자신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격을 향상시키고 완성시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동시에 인간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죄고발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죄 그 자체만을 논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구원 역사의 전체적 맥락 속에서 죄의 본질을 이해하고 죄로부터 돌아서는 회개와 연결시켜 고찰해야만 그 의미가 온전히 드러난다. 

 

 

3. 회개의 본질적 요소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 안에서 엄연한 죄의 실재를 느끼게 된다. 그럴 때 인간이 처음으로 느끼게 되는 감정은 초조와 불안감이다. 이는 죄로 인해 자신이 고발당하고 노출당했다는 마음이며, 동시에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게 됨을 의미한다. 무엇인가를 잃은 듯한 상태, 즉 하느님을 상실한 상태이기에,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의 필요성을 밝혀주는 현상이기도 하다. 두번째 단계로 도피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인정받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거기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데 기인한다. 그 첫 시도로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변호하게 되고, 그것이 실패했을 때 자신에 대한 이유없는 분노로 변하고, 그것이 극에 달했을 때는 자신을 거부하는 자살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분노가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세번째 단계는 해방과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갖게 된다. 비록 범죄로 인해 자신의 가치를 상실한 위기감을 맞게 되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부터 원상회복도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자세가 나온다. 그래서 해방과 자유를 얻는데 있어서 회개는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교회는 죄인의 회개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고백성사를 제정하였고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통회, 죄의 고백, 그리고 죄의 속죄(보속)라는 본질적인 요소가 요청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트리덴티노 공의회는 통회를 “앞으로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동반하는 영혼의 아픔이며, 이미 범한 죄에 대한 혐오”(DS 1676, 1705)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므로 통회는 단순한 심리적인 위안이 아니라 자신의 과오를 끊임없이 뉘우치면서 체험하는 자기 아픔이다. 인간은 통회를 통해 자신이 과거에 자유로이 행했던 행위를 부정한다. 그렇다고 이 부정이 과거의 죄스런 행위를 소멸시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거의 행위에 대해 결단을 내리고 기꺼이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과거의 실재를 거부할 수 없는 한, 유일한 방법은 과거의 사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과거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사랑 안에서 인간의 과오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께 조건없이 전향해야 할 통회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진정한 회개의 또 다른 본질적 요소는 죄의 고백이다. 오늘날 죄의 고백에 대한 의미를 회의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죄의 고백에 대한 회의는 과연 그것이 죄인인 인간에게 무슨 관계 또는 무슨 효용이 있는가? 하는 죄 고백의 목적에 대한 질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죄를 고백하는 일차적 목적은 회개에 있다. 이 회개는 단순한 의견의 수정이 아니라 삶의 철저한 전향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 모두를 방향바꿔 하느님께 향한다는 의미에서 죄의 고백은 신앙의 고백이 된다. 따라서 죄의 고백을 통해 인간은 자만하고자 하는 유혹을 포기하고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항복하게 되고, 이 항복을 통해 인간은 자신을 낮춤과 동시에 들어 높여지고, 하느님과 끝장을 내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기에 죄의 고백은 죄의 용서를 위한 자기 고발이다. 

 

이런 의미에서 죄의 고백은 법정에서 개최되는 죄에 대한 심문절차가 아니며, 건전한 정신과 판단력의 여부를 검사하는 정신병리학적 치료행위 또는 무의식적인 억압과 콤플렉스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정신요법적인 치료행위도 아니다. 그 대신 죄의 고백은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이 이루어지고,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며, 하느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은혜로운 상징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겸허한 죄의 고백은 참된 회개의 지름길이 된다. 그러므로 처벌에 대한 지나친 공포와 불안 때문에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한 신뢰에서 죄의 고백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통회와 고백만으로 회개가 완결되는 것은 아니다. 죄를 통해 야기된 손실을 보상하겠다는 속죄의 행위가 수반되지 않으면 안된다. 속죄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현재에 결단을 내리고, 그 결단은 과거의 행위에 소급되어 파급효과를 미친다. 사실 인간은 자신의 과오와 실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비록 통회와 죄의 고백을 통해 이기주의의 장벽을 뛰어 넘고 하느님과 새로운 차원에서 만나게 되지만 역사적 행위의 과오는 계속 남아 있게 된다. 예를들어 살인의 죄를 범한 사람이 진심으로 통회하고 죄를 고백했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오는 속죄행위를 통해 속죄되어질 수 있다. 죄스러운 과거는 부단한 속죄행위와 하느님의 자비로운 용서에 대한 희망 안에서 새롭게 출발할 때 속죄되어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자캐오와의 만남에서 그를 회개에로 초대하시면서 동시에 보상의 필요성에 대해 주지시키고 실행토록 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죄악을 보상하도록, 그리고나서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자캐오를 초대한 것이다. 

 

 

4. 결론 : 구원의 응답으로서의 회개

 

이상에서 죄의 본질과 참된 회개의 본질적 요소와 그 필요성에 대해 살펴 보았따. 그럼으로써 죄와 회개는 서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님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인이 죄에 대해 무관심하려 하고, 죄책감을 개인의 자유의지의 차원이 아닌 사회적, 환경적, 유전적 소인에 의한 결과로 이해하고 적용하려는 시도도 살펴보았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인간 존재의 한계성 앞에서 더 이상 자만할 수 없음도 보았다. 즉 단순히 죄와 회개의 문제를 놓고 볼 때는 그러한 시도를 통해 인간의 해방이 가능하다고 자위할 수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측면, 즉 참된 인간 구원의 편에서 볼 때 문제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자기 존재의 유한성과 부당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고, 또 거기서부터 파생되는 양심의 가책이나, 마음의 고통을 누구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치유받아야만 하는 병자라고 이해될 수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절대자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존재를 재정립하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로 다시 돌아가려는, 즉 구원을 열망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와 회개의 문제는 가장 우선적으로 인간 구원의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재림 사이의 시기에 살고 있다. 이 시기는 인간 편에서 본다면 은혜의 시기요 구원의 시기인 것이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죽음의 위험에 직면한 인간에게 刑의 선고가 유예된, 그리고 刑의 집행이 정지된 시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구원에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으며, 여기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계속해서 영원한 불안속에 살며 그 초대를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같은 양자택일의 순간에 직면해 있고 반드시 어떠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런 점에서 회개는 구원의 초대에 응답하는 첫걸음이다. 왜냐하면 회개의 필요성을 거부할 만큼 의로운 사람이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인간에게 빛과 희망을 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한 믿음만이 인간에게 참된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원죄로 인해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죄에로의 경향성을 지니고 있고, 이러한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잠시도 죄와 무관하게 살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죄의 실재에서 도피하는 것은 진정한 문제 해결의 방법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죄의 정체를 올바로 직시하고 죄의 극복을 위한 철저한 방향전환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방향전환, 새로운 출발이 바로 회개이며 참된 회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통회와 죄의 고백 그리고 보속의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고백성사가 인간에게 주는 유익인 동시에 그 필요성의 이유이다. 그리고 고백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현실적으로 죄인인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자기 존재의 참다운 완성, 즉 하느님과의 보다 긴밀한 일치 속에서 완성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불리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도록 신앙의 선택을 해야 한다. 진심으로 통해하고, 주님께 자신의 모든 과오를 드러내며, 그분의 자비로운 처사를 구할 때 비로소 인간 구원이 시작되는 것이다.

 

 

참고 문헌

 

1) 안명옥, 윤리신학의 단편적 이해, 서울(가톨릭대학 출판부) 1989, 142-151.

2) 김경환, “죄에 대한 신학적 소고”, 신학전망(1976, 34호), 3-13.

3) Guillet, J., “예수와 죄인들”, 박영식 역, 신학전망(1976, 34호), 63-69.

4) 김영환, “죄에서의 회개”, 신학전망(1976, 34호), 70-79.

5) Kertelge, K., “죄의 용서에 관한 신약성서신학적 고찰”, 이영헌 역, 신학전망(1990, 89호), 2-22.

6) Lyonnet, S., “죄”, 성서신학사전, 광주(광주가톨릭대학 전망편집부) 1984, 536-544.

7) Giblet, J. / Grelot, P., “회개, 참회”, 성서신학사전, 678-683.

 

[1992년 신학생 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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