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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몸의 신학9: 부부와 교회의 이중적 신비, 혼인의 성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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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0-02 ㅣ No.776

[몸의 신학] 부부와 교회의 이중적 신비, 혼인의 ‘성사성’


몸과 혼인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가르침 (9)

 

 

시작하며

 

혹시, 회혼례(回婚禮)란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낳은 자녀들에게 사망도 이혼도 장애도 없이 부부가 혼인 60주년을 맞이할 때 거행한다니, 거의 ‘기적’에 가깝지요? 그래서 다산 정약용도 부인 홍씨에게 보낸 자신의 회혼시(詩)에서 ‘주은(主恩)’을 고백하나봅니다.

 

“육십 년 세월, 눈 깜짝할 사이 날아갔으니 / 복사꽃 무성한 봄빛은 신혼 때 같구려. / 살아 이별, 죽어 이별에 사람이 늙지만 /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주{성}은에 감사하오. //  이 밤 목란사 노래 소리 유난히도 좋으니 / 옛날의 하피첩은 먹 흔적이 아직 남았소 / 나뉘었다 다시 합함은 참으로 우리의 모습 / 한 쌍의 표주박을 남겨 자손에게 주노라(六十風輪轉眼翩 ?桃春色似新婚 生離死別催人老 戚短歡長感主恩 此夜蘭詞聲更好 舊時霞?墨猶痕 剖而復合眞吾象 留取雙瓢付子孫)”(“뜬 세상의 아름다움” 중에서).

 

여기서 “옛날의 하피첩”은 부인이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 치마였는데 색깔이 다 바랬기에 잘라 묶은 재활용 공책이랍니다.

 

어머니의 혼례복 치마로 만든 그 공책에다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간곡한 교훈’을 써주었는데, 특히 시집간 외동딸에게 ‘행복한 혼인’을 기원하는 시를 써서 보냈다니….

 

남녀의 ‘몸’으로 맺고 살면서 또 자녀에게도 물려줄 혼인, 그야말로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요, ‘천상의 창조 성사’일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오로지 혼인과 부부행위의 가치를 재조명하시려고 ‘몸의 신학’을 전개하시는데, 크게 보아 네 개의 단(團)으로 구성하십니다.

 

그 첫째는 “처음”(마태 19,4; 마르 10,6)에 대해, 둘째는 “마음”(마태 5,28)에 대해, 셋째는 “부활”(마태 22,30; 마르 12,25; 루카 20,35)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 단으로 넷째는 “혼인”(에페 5,21-33)에 대해 다루십니다.

 

이번 호에서는 그 마지막 단의 시작으로서 에페소서에서의 ‘부부와 교회’의 이중적인 신비 그리고 혼인의 ‘성사성’에 대한 가르침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에페 5,21-33의 분석을 위한 ‘성사’ 개념

 

교황님께서는 먼저, 바오로 사도의 이름으로 전해진 에페소서의 친저성(親著性)에 대한 성서-신학적 논란을 중도적인 입장 속에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주십니다.

 

곧, 바오로 사도가 일부 개념을 자신의 비서에게 맡겨주었고 그 비서가 개념을 발전시키고 정제(精製)한 것이 에페소서라는 것입니다.

 

주된 관심은 혼인 행위의 ‘성사성’에 대한 반성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성서적 용어론으로 접근하시는데, ‘성사(sacramentum)’가 ‘신비(mysterion)’ 용어와 함께 시작되었고 때로는 혼용됨(지혜 2,22; 에페 5,32 참조)을 지적하십니다.

 

‘신비’ 개념이 왕의 군사적인 ‘비밀 계획’(유딧 2,2 참조)에서 ‘하느님의 창조 계획’ 또는 ‘세상에 부여해 준 목적’으로 의미가 확장(지혜 2,22; 다니 2,27 참조)되는데, 단 한 번 언급되는 복음말씀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다.”(마르 4,11과 병행구절)에서보다는 로마서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음을 읽어내십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또 오랜 세월 감추어두셨던 신비…. 이제는 모습을 드러낸 이 신비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예언자들의 글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로마 16,25-26).

 

반면, ‘성사’는 원래 로마군단에서 행한 ‘군사적 맹세’를 의미했는데, ‘새로운 생활형식을 시작함’, ‘무제한적인 위임’, ‘죽음의 위험에서도 충실한 복무’ 등의 양상들을 테르툴리아노 교부가 세례와 견진, 성체 등의 성격에서도 찾아냄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관한 신비’ 개념에도 적용되었습니다.

 

또한 성 아우구스티노는 ‘은총의 사효(事效)적인 표징’으로서 스콜라학파적인 정의를 만드는 데 기여해 줍니다.

 

교황님께서는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라, 성사를 ‘영적이고 초월적이며 신적인 실재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표징’이라고 규정하시면서, 성사의 표징이 ‘하느님 당신의 초월적 진리와 사랑 속에서 당신 스스로를 인간에게 건네주시는 수단’이기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효과 있는 표징’이라고 단언해 주십니다. 하느님 안에서 감춰진 ‘신적인 신비’를 보여줄 수 있는 성사, 그래서 “성사는 곧 신비”라고 역설하십니다.

 

 

에페 5,21-33에서 ‘이중적인’ 신비

 

‘일차적인 신비’로서, 교황님께서 읽어내시는 것은 ‘머리-그리스도’와 ‘몸-교회’의 유기체적인 결합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순종’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데, 그 목적은 교회를 ‘말씀’과 ‘물’로 ‘세례’를 주어, ‘간통한 처녀’ 이스라엘과는 달리, 교회를 도덕적으로 ‘티’도 없게, 죄스러운 사람으로서의 ‘늙은이’(로마 6,6 참조) 다운 ‘주름’도 없게, 깨끗하며 아름답게 해주시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연민적인 사랑” 때문입니다(이사 54,4-10 참조).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이기에…”(교회헌장, 1항), 그 자체로 ‘성사’이기도 합니다. 말씀(형식)과 물(질료)로 재현된 세례 행위를 통하여, 교회의 그 구성원들이 ‘정결한 신부’로 새로 그리고 거듭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차적인 신비’로서 읽어내시는 것은 일차적인 그 신비에서 흘러나온 ‘머리-남편’과 ‘몸-아내’의 결합입니다. 그 신비의 내용은 바로 창세기의 “처음”,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그런 처음의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교황님께서 단언해 주시기를, 부부의 혼인 행위가 하느님 ‘삼위의 친교’를 드러내주는 ‘원초적인 한 몸’의 일치 신비를 드러내주기에, 혼인 행위는 그야말로 ‘원시적인 성사’인 것입니다. ‘교회의 성사’로서의 효과는 훨씬 뒤에서 설명이 됩니다.

 

 

“빛의 자녀”의 참모습

 

교황님께서는 그 “계획”을 따르는 ‘교회 공동체’의 생활 지침을 읽어내십니다. ‘하느님을 본받을 것’,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갈 것’, ‘빛의 자녀로 살 것’, ‘술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해질 것’, ‘주님께 노래하며 찬양할 것’, ‘모든 일에 언제나 감사를 드릴 것’, 그리고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할 것’(에페 5,1-2. 8. 17-19. 20-21 참조) 등입니다.

 

‘가사 공동체’(가정)의 생활 지침도 읽어내십니다.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에페 6,1-4)와 주인과 노예 간의 관계(에페 6,5-9)도,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명’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도 모두, ‘교회 공동체’의 생활 지침처럼,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해야 할”(에페 5,21) 기본 지침에서 나옵니다.

 

교황님께서는 이것이 “영적 전투”(에페 6,10-20)를 향한 부르심이며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소명’과 연계되었음을 일깨워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신비를 알려주는 바로 그 계시 안에서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고 인간에게 그 지고의 소명을 밝혀주신다”(사목헌장, 22항).

 

더 나아가, 이런 소명에 충실히 응답함으로써, “처음”의 상태인 ‘원초적인 결백’으로 단순 복귀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일깨워주십니다. 곧, 혼인이라는 ‘창조의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처음”의 상태보다는 더 좋은 “하느님의 자녀”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승격되는데, 이는 “처음”의 ‘원초적인 결백’보다 더 좋은, ‘첫 번째 아담’조차도 누리지 못했던 그런 ‘새로운 상태’이며, 그리스도의 속량행위를 통한 ‘새로운 창조’, 곧 부활의 새로운 운명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신비”입니다. 그래서 그에 걸맞은 ‘새로운 에토스’가 필요한 것입니다.

 

 

부부간의 ‘상호 순종’

 

교황님께서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에페 5,22)라는 지침 속에서도 혼인의 고유한 ‘상호 인격적 계약’을 읽어내십니다. 왜냐하면 곧바로 “남편은 …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라는 지침이 남편에게도 부과되기 때문입니다. 얼핏 보면, 사실상, ‘가부장적인 질서’를 말하려는 듯이 보입니다. 참으로 탁월하신 안목입니다. 상호 예속되고 서로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에페 5,21)에서 근거합니다.

 

교황님에 따르면, 이 경외심은 악의 위협 앞에서 가지는 방어적인 태도로서 ‘두려움’이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존중함’이기에, 구약의 언어로는 “하느님을 두려워함”(시편 103,11; 잠언 1,7; 23,17; 집회 1,11-16)에 해당합니다. 그런 ‘상호 예속성’은 성령칠은 중 ‘효경(piety)’에서 나오며, ‘상호적인 자기-증여 사랑(reciprocal self-giving love)’ 행위로,  특히 부부에게는 ‘한 몸’이 되기 위한 ‘온 몸’의 행위로 그렇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마무리하며

 

“…청춘 호시절 초입에 / 일찌감치 결혼할 수 있었던 것도 복이요 /  반려와 더불어 / 육십갑자를 다 누리며 / 해로동혈하는 것도 복이요 / 자식들을 여럿 고루 두었으되 / 하나도 앞세우지 않고 / 두루 효성을 받으며 사는 것도 복일지니…”(지요하, “타고난 복도 가꾸기 나름이니” - 회혼 축시 중에서)

 

그런데, ‘기적’처럼 드물게 보는 회혼부부들의 ‘삼중적인 복’도 이미 모두에게 예정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에페 1,11).

 

다음 호에서는 이런 ‘한몫’을 얻는 과정을 몸 구원을 위한 성사로서 몸의 언어와 혼인의 불가해소성에 대해 소개할까 합니다.

 

[경향잡지, 2010년 9월호, 이동호 프란치스코 신부(가톨릭 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가톨릭교리신학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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