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말기 환자의 치료 중단: 가톨릭 윤리신학의 측면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70

말기 환자의 치료 중단 - 가톨릭 윤리신학의 측면

 

 

시작하는 글

 

말기 환자의 치료 중단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인간적 죽음의 문제와 직접 관련되는 주제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교황청 신앙 교리성이 발표한 다음의 내용은 우리의 토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오늘날 남용될 위험을 안고 있는 기술 위주의 태도에서, 임종의 순간에 그리스도교적 삶의 개념과 인간의 존엄성 모두를 수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권리'를 말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손에 의하여 혹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서 죽음을 획득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그리고 그리스도교적인 존엄성을 지니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치료 수단의 사용은 가끔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서 교황청 신앙교리성이 제기하는 문제는 말기 환자의 치료 중단이 때로는 품위있는 인간적 죽음을 위한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관점이다. 의학의 놀라운 진보와 발전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다시 생기있게 해주거나, 생명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더 연장시키거나 하면서, 단순하게 생명을 길게만 연장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어떤 환자의 상황이 거의 죽어가는 상태라든가,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상황에서라도 생명을 더 연장시키기 위한 의료 집착이 가능해진 현실에서 과연 그와 같은 의료 집착적 치료 수단이 그 환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도움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의 문제 제기이다. 

 

 

1. 인간적 죽음 

 

문제는 인간적 죽음은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죽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피할 수 없는 사건'이다.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고 따라서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죽음으로 운명지어진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은 조건에 처해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존재이며, 또한 그 "죽음" 속에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인간은 '인격적 존재'로서 불리움을 받았으며, 또한 양심을 가지고, 자유롭게, 책임감을 가지고 인간됨을 실현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기 위한 (죽음까지도 살기 위한) 존재로 불리움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적 품위"를 지니고 죽는다는 것은 인간 존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고도 거절할 수 없는 요소이며, 이런 의미에서 품위를 지닌 죽음이란 인간 생명 전체를 요약하는 것이고, 또한 완전하게 되는 순간으로서의 평화로움과 용기를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책임성있는 자유와 의식을 통해서 받아들여져야 하며, 나아가 각자의 고유한 삶을 통해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이란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 존엄성을 지니는 죽음이어야 하며, 죽음에 대해 순응하면서 살아가기를 요구하는 하나의 신앙 행위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에 대한 정당성, 아니 그보다는 그 필요성이 제기 되며, 이는 기본적인 윤리 원칙으로서 죽는 과정의 고유한 인간적 영역을 도와주는 것이다. 따라서 죽어가는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인간적인 그리고 그리스도적 품위를 지니고 죽을 수 있도록 도와줌을 의미한다. 위에서 인용한 신앙교리성의 문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건강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고 다른 사람의 간호를 요구할 의무가 있다. 병자를 돌볼 임무를 지닌 사람들은 양심적으로 간호해야 하며 필요하고 유용한 의약을 투여해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가능한 모든 의약을 사용할 필요가 있겠는가?". 

 

곧 환자는 건강에 도움을 받기 위하여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이 먼저 제시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건강 유지에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으뜸가는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적합한 의료적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권리에 속한다는 점을 기초로 하면서 임종자의 환경에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실천적인 두 가지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 고통의 완화와 치료 중단 

 

교황청 신앙교리성이 제기하고 있는 두 가지 문제 중 첫째 측면은 진통제의 투약으로 중환자나 임종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이고, 또 다른 측면은 소위 말하는 '의료 집착 행위'를 포기하거나 거절하는 측면, 곧 치료 중단의 측면이다. 

 

가톨릭 교회의 윤리는 중환자나 임종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진통제 사용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가르친다. 그러한 방법이 결과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마지막을 서두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환자의 극심한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환자 자신이 고통 때문에 인간적 품위의 가장 큰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자유를 제한 당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장기적으로는 보다 큰 선과 이익의 성취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인격의 온전성이라는 측면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1995년 교황청 보건사목평의회가 발표한 가톨릭 교회의 공식 문헌인 [의료인 헌장]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고통이 너무 클 때에는 정신에 대한 통제력이 감소되거나 약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의료인이 고통을 막거나, 경감시키고 제거하는 행위는 정당하며, 고통이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설 때에는 의무적이다. 연구자가 고통을 인간적 통제 아래 두도록 노력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그렇지만 환자의 고통 경감을 위한 진통제의 사용이 단순히 무의식 중에 있는 중환자들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라든가 혹은 그러한 환자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 곧 의사, 간호사, 가족들이 느끼는 매우 어렵고 불편한 관계를 현명하게 피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환자의 선을 위하기보다는 오히려 죽어가는 환자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 - 의사들, 간호원들, 그리고 가족들 -이 느끼는 아주 어렵고 불편한 관계를 현명하게 피하기 위해 체계적인 투약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전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한 경우에 찾는 그와 같은 방법은 절대로 환자의 선(善)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고 그것을 도피하고자 하는 사회의 애매모호한 방어 방법이기 때문이다. 

 

고통의 경감을 위한 진통제 사용 문제의 기초에는 무엇보다도 말기 환자가 의식을 가지고 죽음을 맞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위대한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행위를 윤리성을 평가할 수 있는 행위와 윤리성이 평가될 수 없는 행위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곧 윤리성을 평가할 수 있는 행위에만 선과 악이라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며, 이 가치 평가에 따라 인간 행위에 대한 윤리성을 평가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인간 행위를 인간적 행위(Actus humanus)라고 칭하였으며, 인간의 행위는 이 인간적 행위일 때에만 윤리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고통 중에 있는 말기 환자에게 있어서 현재 그 환자가 겪고 있는 엄청난 고통이 그 환자로 하여금 정상적인 사고 행위를 가로막고 인간적인 자유 의지를 빼앗아 버림으로써 인간적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 있는 환자가 인간적인 품위를 되찾고, 인간다운 정상적인 의식으로 되돌아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일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더 복잡하고 더구나 피할 수 없는 문제는 소위 '의료 집착의 포기' 혹은 치료 중단이라는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다. 

 

 

3. 치료중단의 문제 

 

가톨릭 윤리신학이 말기 환자의 치료 중단의 문제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은 비오 12세가 1957년에 의사들과의 담화에서 언급한 내용에 그 기초를 둔다. 비오 12세는 이 담화에서 말기 환자에게 정상적인 간호 행위라든가 영양 공급 등 일반적인 치료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적이지만, 특수한 수단의 사용은 비록 정당하기는 하지만 항상 의무는 아니라고 가르친다. 비오 12세의 이러한 언급은 일반적인 치료 수단에 의한 정상적 치료 방법과 특수한 치료 방법에 의한 예외적 치료 방법의 구분이며, 신학자들은 적용할 의무가 없는 방법에다 "예외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비오 12세의 이러한 개념 구분은 1995년에 교황청 보건사목평의회가 반포한 "의료인 헌장"에서는 균형적 방법과 불균형적 방법으로 언급되고 있다. 곧 보건사목평의회가 제시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환자의 상태를 고려하여, 그와같은 치료 방법들을 사용할 때에 사용된 수단 과 의도한 목적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존재할 때에 균형적이라고 판단하며, 균형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는 불균형적이라고 간주한다." 

 

이 두가지 개념의 구분, 즉 정상적 혹은 균형적 방법 그리고 예외적 혹은 불균형적 방법의 구분에서 가톨릭 윤리신학은 후자의 방법으로서의 치료 방법을 중단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그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먼저 이 기준들은 각기 구체적인 경우에 따라서 적용되어야 한다. 그중의 일부는 객관적 기준이다 : 예컨대 주어진 요법의 관용이 얼마나 되느냐, 그런 요법을 이용하는 것이 적당하냐, 그런 요법을 이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정의의 대안은 무엇이냐 등, 요법의 본성에 관한 것들이다. 또 다른 기준은 주관적 기준이다. 예컨대 어떤 환자에게는 심리적 충격이나 불안이나 불편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 등이다. 치료방법을 결정할 때에 어느 정도로까지 그 수단을 사용하고 그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적정한가를 확정한다는 것은 언제나 문제가 된다. 

 

모든 판단기준 중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할 것은 치료에 의하여 건져지고 살아나가게 될 생명의 성질이다. 가톨릭 의사협회의 국제연맹총회에 보낸 빌로 추기경의 서한은 이 문제에 관하여 매우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의사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동시에 의사에게는 죽음과 싸우기 위하여 자기 의술의 모든 수단을 다 이용할 의무가 있다는 것은 생명의 신성성에서 연유한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사에게 과학의 끊임없는 창의적 활동에 의하여 주어지고 있는 생명유지 기술을 모두 사용할 의무가 지워져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불치병의 마지막 단계 동안에 식물적 생명을 거듭 되살릴 의무가 부과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무용한 하나의 고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생명의 성질이라는 기준은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관적인 고려사항들을 참작해서 무슨 치료를 시행하고 무슨 치료를 시행하지 않을 지에 관해서 적절하게 신중히 판단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기본요점은 가족에게 어떠한 결과가 미치게 될 것인가를 포함하여 여러가지로 다양한 상황의 제측면들을 충분히 고려한 합리적인 근거에 따라서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따라야 할 원칙은 예외적 치료를 실시할 윤리적 의무가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의사는 환자가 그런 요법을 거부할 경우에 환자의 소망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이른바 '최소한'이라고 부르는 그런 치료수단을 적용할 의무는 언제나 엄격히 남아있다. 즉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정상적이며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그런 수단(영양공급, 수혈, 주사 등)은 언제나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최소한의 처치마저 중단해 버린다는 것은 사실상 환자의 생명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울러, 교회는 이러한 일반 원칙의 적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다음의 설명을 추가한다. 

 

- 여타의 충분한 치료법이 없다면 그러한 수단이 아직 실험 단계에 있고 어떤 위험이 없지 않다 하더라도, 가장 진보된 의학기술에 의하여 제공된 수단들을, 환자의 동의 하에 사용하는 것은 허용된다. 그 수단들을 받아들일 때, 환자는 인간성에 대한 봉사 안에서 아량까지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 또한 그 결과가 기대에 너무 미치지 못할 때, 환자의 동의 하에 그러한 수단들을 중단하는 것은 허용된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 방면에 특히 유능한 의사들의 조언은 물론, 환자와 환자 가족들의 온당한 소망을 참작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전문의사들은 설비 및 인적 투자가, 예상되는 결과에 비해 균형을 잃느냐는 문제를 판단할 수 있고, 적용되는 기술이 그러한 시술에서 환자가 가질 수 있는 이해에 상반되는 고통이나 노고를 환자에게 강요하느냐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 

 

- 또한 의학이 제공할 수 있는 정상적인 수단으로 대용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위험을 수반하는 난사(難事)만 될 뿐인 기용(旣用)의 기술에 의지해야 할 의무를 어느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거부는 자살과 같지 않다; 그와는 반대로, 인간조건의 수용으로서 간주되어야 하며, 기대할 수 있는 결과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의학적 가료를 회피하려는 원의나 가족 혹은 공동체에 과도한 부담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원의로 간주되어야 한다. 

 

- 사용되는 수단에도 불구하고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임박할 때,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운 생명의 연장을 보호해 줄 뿐인 치료법을 거부할 수 있는 결정은 양심 안에서 허용된다. 단, 유사한 병증의 환자에게 요구되는 정상적인 간호는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위험 중에 있는 사람을 돕지 못한 일로 의사가 자책할 이유는 없다. 

 

여기서 잠깐 인공호흡기의 장치 및 제거에 대해서 살펴볼 때, 특수한 치료로서의 인공 호흡기 장치는 누구에게나 항상 의무적인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의사도 꼭 그러한 수단을 사용할 의무는 없는 것이다. 위험 중에 있는 사람을 돕지 못한 일로 의사가 자책할 이유는 없다. 

 

교황 비오 12세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죽음의 순간을 결정하는 것은 철학이나 신학이 아니라 의학이라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특별한 경우에 죽음을 증명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 대답이 어떤 종교적, 윤리적 원칙으로부터 연역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으로 보아 그것은 교회의 권능에 속하는 일이 아니다". 곧 오늘날 의학이 뇌사를 죽음의 기준으로 받아들인다면 교회도 이에 동의한다는 입장이다.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사람이 인공호흡장치를 하고 있는 반면 그보다 회복이 가능한 사람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의사는 사랑의 차원에서 그에게 인공호흡장치를 중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의사는 깊은 윤리적 통찰을 가져야 한다. 

 

 

마치는 글 

 

지금까지 말기 환자의 치료 중단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그 구체적 적용의 문제는 항상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곧 객관적 기준의 적용이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 어려운 문제의 궁극적인 열쇠는 유능한 의료인의 '지식과 양심'에 달려있다고 본다. 어떠한 의료 행위가 어느 때 가장 유익하고 또 어느 때 무익한가?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과, 또한 의료 행위가 언제부터 예외적인 형태의 의료 집착이라고 정의되어지는 순간으로 변화되는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의사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점은 확실히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의사들이 그들의 의료 행위 안에서 유용성, 혹은 무익성에 대해 결정해야만 할 때나 치료를 계속 한다거나 중지한다는 결정을 내려야될 때 '지식과 양심'을 통해서 진실되게 행동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개별 환자에게 지금까지 이야기한 객관적 기준들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때, 의사는 전문가들의 가르침과 인간적인 지혜를 따라야 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진단이나 의학적 판단에 있어서 실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환자에게 무익하고 고통을 줄 수 있는 수단들을 일시 중지하는 임의적 결정이 환자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환자들에게는 분명히 일상적인 보살핌이 지속되어야만 하며, 또한 환자가 느끼고 있는 죽음이나 번민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확실한 느낌을 환자에게 줄 수 있어야만 한다. 

 

의사는 그 자신이 항상 치료를 하도록 불리움을 받았는지, 혹은 그렇지 못한지를 잘 알고 있다. 가끔 의사들에게는 치료될 수 없는 환자들이 주어지기도 한다. 치료될 수 없는 환자란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환자라는 뜻은 아니다. 이제 환자를 보살피는 데 있어서 - 이는 의사의 임무 중에서 가장 이해가 쉽게 되고 또한 가장 기초적인 임무이다 - 의사도 역시 환자의 고뇌와 죽음의 시간에 함께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의사는 환자에게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도움과 함께 가장 적절하고 효과있는 개입을 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또한 동시에 기술적이고 의학적인 문제를 떠나서 환자와의 정신적이고 인간적인 동참과 현존을 느끼게 해 주는 사람이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이는 심리적으로 어떤 도피라는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특별히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의사는 '이제 더 이상 시도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절망을 선고받은 환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적절한 문화적 차원에서의 시도들은 죽음의 의미에 대한 재교육이라는 면에서 강조되어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예술,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의 의미를 발견케 하는 교육적 측면이 강조되고 재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가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예술은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도 하며, 또한 출생 첫 순간부터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까지,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선물이며 과제로서의 자기네의 삶을 이해하게끔 하는 교육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현하고 표현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완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의 생(生)과 사(死)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이 '사랑을 향한 길'이 됨으로써 그 궁극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사도 바울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사실 우리 중에서 아무도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이도 없고 또 자신만을 위해서 죽는 이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며 죽어도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거나 죽거나 주님의 것입니다" (로마 14,7-8).

 

[한국호스피스, 완화의료학회 심포지움(서울대학교 의과대학, 1999년 12월 11일, 한국호스피스. 완화의료학회지), 이동익(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윤리신학)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60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