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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회와 세상 안에서 남녀의 협력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에 대한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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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5 ㅣ No.503

교회문헌 해설 - 가톨릭 페미니즘 대 평등 페미니즘


"교회와 세상 안에서 남녀의 협력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에 대한 해설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발표한 이 서한은 인간 존엄의 평등뿐만 아니라 두 성(性)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인간 존엄과 인간성 측면에서는 평등하지만 생물학적 차이 말고도 훨씬 심오한 차원의 차이를 갖고 있다. 인격체로서 두 성(性) 간의 평등도 중요하지만 육체적 존재론적 차이 또한 중요하다.

 

 

여성이란 무엇인가?

 

성(性)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단순한 생물학적 환원주의나 사회 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성(性)에 관한 가톨릭 인간학을 연구하여, 가정과 여성 정책 분야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가톨릭의 인간관은 남성과 여성을 생물학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보고 있다. 부모는 단순히 생물학적 아버지와 어머니이지만,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역할은 차이가 있으며 서로 보완적이다. 생물학적 차이만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관점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 사회 구성주의 또한 부모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부정한다. 이들은 모성애와 부성애를 해체될 수 있는 사회적 역할로 이해하기 때문에 아이의 삶은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더 근본적으로 남녀관계(그리고 사실상 그리스도인 삶 자체)는 한 가지만을 목표로 한다. 곧 다른 이를 위한 자기 증여와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 시대에 이 이상(理想)은 제대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남녀관계를 권력 투쟁과 분쟁으로 특징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위와 같은 생각은 극복될 수 있고, 자기 증여의 이상이 남녀관계에서 어우러질 수 있다.

 

더군다나 여자는 임신과 출산 그리고 양육을 통해 자기 증여라는 특별한 능력을 갖는다. 이 능력은 여성성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여성의 모습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행동의 본보기이다.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여자는 가정과 사회 그리고 정치를 ‘인간화’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으며, 자기 증여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다. 여성들은 이 자기 증여라는 삶의 방식을 실천함으로써 사회에 영향을 줄 것이며 남성들은 여성들을 본받아 사랑의 방식을 배우게 될 것이다.

 

남성과 여성 모두 자기 증여의 사랑이라는 그리스도교적 능력을 공유하고 있지만, 교회는 모성애를 들어 여자들이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능력을 발휘한다고 강조한다. 모성애는 단순히 육체적인 것이 아니다. 여성들은 진정으로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소명을 실천함으로써, 교회와 가정 그리고 사회 안에서 특권적 위치에 서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이 교황청 신앙교리성 서한은 그리스도교에서 여성들의 지위가 남성들보다 약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여성인 마리아는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최고의 본보기이다.

 

그렇다면 가정과 사회생활, 그리고 정치 안에서 그리스도교 인간학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인가?

 

 

오늘날 여성의 위치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서구사회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전례 없이 향상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점차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여성들도 교육을 받고 사회에서 전문 직업을 갖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유럽의 학교 제도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변함없이 여성 교육에 힘써왔으며, 최근에는 개발도상국에서도 교육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그 시작부터 유다인 사회나 로마 사회와 비교하여 전례 없는 방식으로 남성과 여성을 평등하게 만들었다. 교육은 전통적인 성 역할 유형 변화의 주된 원동력이었다. 여성의 전문직 참여와 정치 참여는 새롭고 혁명적인 일이었다. 여성들이 처음으로 투표권을 획득한 시기를 생각해 보자. 여성들은 최근에 들어서야 평등한 정치권을 획득했으며, 이 과정에서 온갖 저항과 반대에 부딪힌 바 있다.

 

핀란드는 1906년 최초로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허락했으며, 노르웨이는 1913년, 프랑스는 1946년, 그리고 스위스 아펜젤 주는 1986년에서야 여성들의 투표권을 인정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여성의 전문직 참여에서도 볼 수 있다. 여성들이 전문 직종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불과 최근 몇 십 년 전부터이다. 그러나 오늘날 여성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정치인, 전문인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생 가운데서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들이 취업 경쟁과 직장생활에서 늘 온전한 평등을 인정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기준은 남성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여성들은 어머니 역할과 직장생활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묵시적으로 강요받는다. 개발도상국 여성들이 직면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개발도상국의 여성들은 장시간 노동 속에서, 그리고 가난과 굶주림 가운데서 가정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책임져야 한다. “여자 한 명을 교육시키는 것은 마을 전체를 교육시키는 것과 같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교회는 여성 교육에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그러나 빈곤과 건강에서 초래된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가톨릭 페미니즘

 

이 부분에서는 ‘가톨릭 페미니즘’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앞으로 논의할 일반적인 ‘평등 유형’과의 차이를 강조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가톨릭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에 이 용어는 엄밀하게 정의된 것은 아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특별히 여성을 위한 정치적 프로그램이 없다. 더군다나 여자만 선별하여 페미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 이유도 없다. 여기서는 단지 여자만이 아니라 여자와 남자, 그리고 이들의 협력과 차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신앙교리성 서한에서 ‘새로운’ 페미니즘에 대해 권고하는 것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여성들은 온종일 가정 안에서 일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 또한 전문 직업과 아이를 갖는 문제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가정은 중요도에서 우선순위에 있다. 사회와 정치는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의 결과일 뿐이다. 이는 보조성의 원리에 따라 국가와 사회의 보조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가정은 국가의 ‘고객’이 아니며, 국가와 사회는 도덕적으로 건전한 시민을 길러내는 가정의 역할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여자와 남자는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신앙교리성 서한은 여자와 남자는 다르고, 여자들은 자신들이 마치 남자인 것처럼 대우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1970년대 선진국의 페미니즘은 두 성(性) 간의 동등한 대우를 주장하며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차별은 같은 존재가 불평등한 방식으로 대우받을 경우에 일어날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가 같은 방식으로 대우받을 때도 발생한다. 남녀의 역할과 관련한 이 시대의 정책들은 남자와 여자를 너무나도 엄격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하면서 이것을 평등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정책들은 분명히 직장생활을 하는 많은 여성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녀의 차이에 관한 중요한 문제는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다. 여성들은 남성들을 모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모성을 고려한 정책을 얻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또한 여성들은 남성들과 다른 방식으로 지도자의 임무를 수행한다는 사실을 반영한 정책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적극적인 지도자 유형이 협력에 도움이 된다면 이 유형을 모방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이처럼 행동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여성 지도자에게 자신의 모습 그 자체로, 여성이라는 용어의 권위로 존경받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는 경험과 교육을 통해 가능하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여자는 남자가 아니므로 남자를 모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여성성은 모성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평등 페미니즘

 

평등 페미니즘의 선구적인 예라 할 수 있는 북유럽의 페미니즘은 모든 직업과 정치 생활에서 여성을 위한 길을 열어두고 있지만, 여성들은 아이들을 돌보며 가정 안에서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정치제도는 여성들이 직장생활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데만 중점을 둔 나머지, 전통적인 가정주부와 ‘가부장적인’ 가족 구조를 없애려고 한다.

 

여성들은 출산 뒤 일 년 동안 출산휴가 수당을 받을 수 있지만, 유럽 사회의 세금 제도는 가족 단위를 고려하지 않고, 개인 소득만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부부 가운데 한 사람이 가정에서 일하는 것이 무척 힘들다. 여성들은 아이가 한 살이 될 때까지는 모성애를 발휘할 수 있지만 그 뒤에는 탁아소나 유치원에 아이를 맡기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노르웨이 기독교 민주당에서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기를 희망하는 부모(보통 어머니)들에게 보상제도, 곧 국가가 유치원에 지불하는 육아 비용을 가사 노동을 하는 주부에게 주는 법안을 발의하자 사회주의자들의 반발이 빗발쳤다. “여성들은 ‘가정주부 역할’로 돌아가도록 강요받고 있다! 페미니즘이 퇴보하고 있다!” 실제로 수많은 어머니들이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기 바란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현재도 그러하다. 이러한 페미니즘 유형은 분명히 불완전하다. 그럼에도 이 유형은 서구 사회, 특히 유럽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이와 관련하여 북유럽에서 시작된 이념들과 경향들은 경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신앙교리성 서한은 현대사회에서 남녀 간 협력을 달성하는 데 주요 장애가 되는 태도들(경향, 사고방식, 정부 정책)에 대해 언급한다. 최근 유럽 사회의 흐름과 정책들은 하루 종일 가정에서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대하며,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유럽 사회의 급격한 출생률 감소 때문에 정부가 가정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이 또한 그 효력을 발휘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가정은 ‘가족권’을 획득하려는 동성애 단체들 때문에 정체성에 위협을 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주의자들은 가정을 억압적인 ‘부르주아’ 제도로 보고 있다. 이러한 가정에서 가장 무시받는 사람들은 자연히 가정주부이다. 가정주부는 사회생활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며, 일상생활에서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위해 봉사한다.

 

여성들을 가정에서 ‘해방시키고’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에 중요성과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의 중심 주제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눈에 띄는 두 가지 경향을 볼 수 있다. 첫째, 하나의 단일체로서 가정의 중요성이 급격히 줄어든 결과로 개인 각자의 권리는 증진되었다. 둘째, 지위를 측정할 수 있는 직업은 바로 권력이나 돈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가정과 가사 노동은 권력의 위계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사 노동을 한다고 해서 돈과 힘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사 노동은 ‘단지’ 다른 이를 위한 봉사이다. 여성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권과 사회의 중요한 위치에서 여자가 최소한 50%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여성 할당 제도가 소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정치 분야와 전문 직종 분야에만 중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 가정생활은 여자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펼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아이를 갖는 것이 여자들에게는 불리할 수 있다. 심지어 고용주들은 여자들에게 자녀가 있는지, 출산 계획이 있는지, 그리고 몇 명이나 출산할 계획인지 물어보면서, 남자들에게는 결코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에 부모들은(물론 아버지와 어머니) 평등한 노동과 가정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과 서로를 위해 필요한 시간과 관심의 중요성을 재발견하고 있다.

 

몇몇 나라에서는 어린 자녀들을 키우는 어머니들을 위해 탄력적인 노동 시간을 허용하는 가정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출발점은 가정 그 자체가 아니라 노동 상황이라는 점이다. 가정은 행복한 노동자가 되기 위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되고 있다.

 

요컨대, 권력의 논리와 남자와 여자는 같다는 평등에 대한 잘못된 관점 때문에 자녀와 가정은 여성의 자기완성에 장애가 되고 있다. 이 장애는 갖가지 정책들을 통해 해결될 수는 있지만, 이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러한 유형에서 남성은 전문 직종과 정치 분야의 본보기로 남아있지만 자신의 가정과 아버지로서의 의무는 결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은 임신, 출산, 양육을 하고 본래 아이를 돌본다는 사실은 여성의 완전한 ‘평등’ 실현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이는 분명 개선되어야 할 문제다.

 

이러한 페미니즘은 여성들을 위한 것이지만, 남성들을 그 본보기로 전제하고 있다. 두 성(性)이 동등한 곳에서는 남성의 노동생활과 정치생활을 모방할 수 있다. 여기서 그 토대가 되는 것은 힘의 논리이며, 여성은 평등권과 동등한 특권을 가져야 한다.

 

 

가톨릭 페미니즘의 원리

 

‘가톨릭 페미니즘’은 ‘평등 페미니즘’과는 매우 다른 원리를 토대로 하고 있다.

 

첫째, 인간 노동의 이상적인 원동력은 다른 이에 대한 봉사이다.

 

둘째, 인격의 평등을 제외하고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지 않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남녀는 단순히 생물학적 차이 말고도 그 이상의 차이를 갖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역할을 바꿀 수 없다. 그들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다. 곧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아이들이 어릴 때는 더욱 그렇다. 아이들과 관련하여 아버지의 보완적 위치 또한 매우 중요하지만 어머니는 어린 자녀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어떤 식으로든 부부는 가사일과 육아 문제를 배분할 수 있지만, 이러한 일은 자녀에게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부모는 자녀에게 다른 이에게 베푸는 행동을 보여주고, 자녀는 부모에게 봉사 정신을 배운다. 이 때문에 가정이 삶의 다른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다. 따라서 가정 안에서 사랑을 배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치는 자기 증여 방식으로 사랑을 배운 경우에만 ‘모방’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는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 정권 싸움밖에 되지 않는다. 봉사와 권력의 첨예한 차이는 가톨릭 페미니즘과 현대 페미니즘 사상의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한다.

 

가정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권 관련 문서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가정은 개인적인 선호에 따른 집합체가 아니라 유기적인 단일체이며, 사회의 근본적이고 자연적인 단위이다. 부부가 만일 아이를 갖게 되면─세계인권선언에서도 언급되었듯이─아이들은 자신들의 생물학적 부모를 알고 그들에게 양육받을 권리를 갖는다. 게다가 어머니와 아이는 세계인권선언에 따라 국가의 특별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가정을 지원할 의무가 있다.

 

인권 문서들은 가톨릭 페미니즘이 보여주고자 하는 이념을 담고 있다. 곧 국가와 사회에서 가정은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모성애를 강조한다. 가정은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보호받을 대상이며 국가의 특별 지원 대상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가정은 사회의 기초 단위라 할 수 있다. 현대의 페미니즘 정책들은 가정의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톨릭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페미니즘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곧 가정은 사회의 기초 단위이며 사회와 정치보다도 더욱 중요하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직업과 가정생활의 ‘균형’은 삶의 두 영역을 같은 차원으로 보기 때문에 가정의 중요한 역할을 간과하게 된다. 그러나 선량한 시민, 착한 고용자, 사회와 정치의 도덕성 등과 같은 문제를 모두 가정에서 기대한다면, 이 또한 분명히 정당하지 않다. 모성애의 중요한 역할을 이해하는 것은 가정을 사회의 ‘기초 단위’로 이해할 때만 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개념은 오늘날 서구 정치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가정과 관련한 서구사회의 현 정책들은 가정을 점점 더 정치적 법적 범주와 동등한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톨릭 페미니즘은 가정을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가장 중요한 중심 원리로 본다. 그러므로 아이를 갖고 양육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아이가 아주 어린 경우 어머니는 자녀 양육을 우선시한다. 아버지 역시 이와 동등하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행히도, 현대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역할에 점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오늘날 아버지들은 예전과 달리 자녀들과 함께하기를 원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 시간은 가정생활과 균등히 할애될 필요가 있다. 매일 밤늦게까지 일하면서 훌륭한 부모가 될 수는 없다. 봉사로서의 노동은 가사 노동을 매우 가치 있고 중요한 것으로 만든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가사 노동은 부과된 책임 그 이상이며, 서로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교육을 통해 여자들은 전문인이 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

 

* 출처 : Janne Haaland Matlary, “Men and Women in Family, society and Politics”, L’Osservatore Romano, N.2, 2005.1.12., 6-7면, 강한옥 편역.

* 『교회와 세상 안에서 남녀의 협력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 전문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제30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발행)에서 볼 수 있다.

 

[사목, 2005년 4월호, 얀느 할란 맷러리(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 정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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