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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몸의 신학7: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사상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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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7-16 ㅣ No.750

[몸의 신학]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사상적 배경*


몸과 혼인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가르침 (7)

 

 

시작하며

 

“여자를 당당하게 리드함으로써, 그 남편은 그녀로부터 가장 정중한 숭배를 받아 마땅한 진정한 신이 된다.” 인공피임을 해서 임신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진정한 신’처럼 숭배받을 거라고 마거릿 생거(Margaret Sanger)가 한 말입니다. 원치 않는 임신-출산으로 혹사당하는 가난한 여성들의 여권을 위해 1921년 처음으로 산아제한연맹과 이어 그 전문병원을 세운 그녀는 피임하는 애정생활이야말로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생활보다 더 깊은 의미를 여성들에게 준다고도 했습니다.

 

“행복한 삶의 핵심은 성적 행복이며… 성 에너지를 억압하면… 심지어 기본적인 생명 기능마저 손상되고… 전쟁태세, 광기, 신비주의 등이 세상에 판친다.” ‘성 혁명’의 선봉을 자처한 프로이트의 문하생,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의 주장입니다. 그리하여 이들과 동조자들은 ‘인간 발전’과 ‘인격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는 ‘인공피임’이 필수라고 외치며 세상에 피임약품을 보급하는 데 앞장서다 갔습니다.

 

그런데 동시대를 살았던 카롤 보이티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참된 진보, 인격의 발전’을 위해서는 오히려 ‘자연피임’이 필수라고 외치며 세상에 ‘몸의 신학’을 보급하는 데 앞장서다 가셨습니다. 이중에 과연 누가 옳았을까요? 누가 진리에 봉사했을까요?

 

예고 드린 대로, 이번 호에서는 전반부를 정리해 보는 의미에서 ‘몸의 신학’ 속에서 작용하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사상적인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고, 그리고 ‘산 이들의 하느님’과 ‘몸의 부활’에 대한 문헌의 소개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인격의 참된 진보를 위한 ‘선물함의 자유’

 

생거가 인공피임을 하지 않는 한, 곧 “여성 자신의 몸을 소유하지 않고 통제하지 않는 한 자신을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고 하며 여성의 ‘개인적인 자유’를 말한 반면, 교황님께서는 ‘개인적 자율성보다 더 큰 자유’, 곧 “선물함의 자유”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몸을 소유하고 통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철학적이며 동시에 신학적인 신념은 “행동하는 인간” 속에서, 본성과 자유, 인격과 자율, 더 나아가 성과 혼인에 대해 칸트식의 인격주의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 그리고 가치와 윤리적 선에 대해 막스 쉘러(Max Scheler)의 본질주의적인 인격주의의 한계를 지적해 내심으로써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제한된 여건상, 생략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카르멜식 인격주의와 청년 보이티야의 만남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 24항 3구절이 교황님의 작품 전체, 곧 박사 학위논문(1948년)에서 마지막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2003년)까지 그 속에 흐르는 포괄적인 ‘선물의 신학’ 특히 ‘몸의 신학’의 핵심 메시지라고 여겨집니다.

 

“더욱이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요한 17,21-22) 하시며 성부께 기도하실 때 인간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시야를 열어주셨으며, 진리와 사랑 안에 있는 하느님 자녀들의 결합과 신적 위격{위격들}의 결합이 지닌 어떤 유사성을 가리켜주셨다.

 

이 유사성은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지 않으면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루카 17,33 참조)”(사목헌장, 24항 3).

 

바로 여기서, 교황님의 기본 원리 두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인간 존재가 자기 자신의 선익을 위해주기를 바라신다는 점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원리를 ‘인격주의적 규범’이라 부르시며 인격들이 단순한 수단이 될 수 없는 근거를 여기서 찾으십니다. 둘째는 인격들이 오직 자기를 아낌없이 선물함으로써만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원리에서 독특한 삼각형 구도(표 참조)가 나오게 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랑은 자신을 선물하는 것.’이라는 논제에서 하나의 화살표가 ‘(2) 남녀의 혼인적인 사랑은 자신을 총체적으로 선물해 주는 전형.’이라는 논제를 향해 수평으로 뻗어가며, 또 다른 화살표는 ‘(3) 삼위일체는 사랑과 선물의 모범.’이라는 논제를 향해 대각선으로 뻗어갑니다.

 

곧 사랑과 선물이 성자의 탄생과 성령의 발현하심을 통해 완벽하게 발생하기에 (1) 논제는 (3) 논제를 향해 유비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3) 논제에서 (2) 논제로 뻗어 내려가는 화살표는 창조된 인격들 간의 친교, 특히 남녀간의 혼인적인 사랑의 그 친교가 하느님의 삼위일체적인 친교에서 판박이처럼 흘러나옴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독특한 삼각형 구조를 처음 알게 해준 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며, 크라쿠프의 지하 신학교에 입학하기 1년 전인 1941년 당시 21세의 문학도였던 때 소개받았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저는 저의 영적 성장에서 그분께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그분을 알게 되었으며, 이 신앙의 스승과 그분의 언어와 그 사상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었고, 그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신앙’에 관한 저의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그분 안에서,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걷는 길에 어두움을 비춰주는 빛을 저에게 보여준 한 명의 친구이자 스승을 발견한 것입니다”(1982. 11. 4. 세고비아에서 행한 강론). 교황님의 인격주의의 영적이며 지적인 뿌리는 바로 가르멜회의 것이었습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 의미

 

교황님에 따르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과의 논쟁 전체(마태 22,24-30; 마르 12,18-27; 루카 10,27-40)는 몸으로 된 인간의 온전한 부활에 대해 밝혀줍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의 의미는 비록 인간끼리는 죽었을지라도 ‘하느님께는 죽은 사람들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잘못 이해한 것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존재와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능력’은 죄로 죽어야 하는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막아버리신 생명나무’(창세 1-3장)에 다시 접근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한 몸’의 상태는 인간이 “처음”에 참여했던 몸, 곧 “어버이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한 몸을 이루는” 그런 몸이 아닙니다.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몸의 상태로 변합니다. 그 상태는 ‘영성화(spiritualization)’된 몸으로서,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는” 몸도, 영-육이 분리되어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난 플라톤식의 비육화(非肉化)된 몸도, 육이 썩어 없어지고 영만이 외롭게 남아있는 이원론적인 비인간화(非人間化)된 몸도 아닙니다.

 

자발적인 상호 자기증여를 통해 ‘성인들의 친교’ 곧 ‘하느님의 삼위일체적인 친교’에 삼투됨으로써 ‘하느님의 천사’의 상태가 아니라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의 몸, “다른 세상”에서 ‘종말론적으로 영-육이 온전히 통합되는’ 그런 몸 상태인 것입니다.

 

 

‘바오로식의 속량된 몸’ 의미

 

교황님께서는 ‘부활한 몸’을 더 잘 설명해 주시려고 코린토 1서 15장의 ‘반대명제들’에 주목하십니다. 곧 “멸망할 종살이”의 몸은 “썩어 없어질 것이고… 약하며… 물질적이고… 비천한” 몸의 상태이며 ‘동물’을 포함한 우주 전체가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는” 피조물의 몸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자발적으로 자기증여를 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속량된 몸”은 이제 죽음이라는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누리는 몸인 것입니다.

 

 

마무리하며

 

마거릿 생거가 ‘꿈’에 그리며 개발을 직접 후원했던 호르몬 제재 피임약이 1960년에 미국 식약청의 승인을 받은 지 꼭 50년이 지났습니다. 값싸고 손쉬운 인공피임 수단들이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성 혁명’은 이제 ‘성 폭발’이 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을 진정 ‘숭배’하고 있습니까? 남편들은 ‘진정한 신’이 되었습니까? 임신의 공포가 사라진 오늘날, ‘행복한 삶’을 만끽하고 있습니까? 성 에너지를 충분히 발산하는 애정생활에서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삶보다 더 완전한 의미를 느낍니까? 세상에 전쟁태세,  광기 등등이 모두 사라졌습니까? 오히려, 성 혁명이 일어나 그 에너지를 자유롭게 표출하며 인공피임이 잘 보급된 지역, 그런 나라일수록 전쟁 태세와 시민 광기들이 더 판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음 호에서는 마태오의 ‘하늘나라를 위한 고자’로서의 독신, 바오로식의 금욕에 대해 소개할까 합니다.

 

* ‘사상적 배경’은 필자가 중심 문헌으로 삼고 있는 영어 증보판(2006년)의 번역 책임자, 마이클 발트슈타인(Michael Waldstein) 교수가 작성한 서문(Introduction)의 일부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경향잡지, 2010년 7월호, 이동호 프란치스코 신부(가톨릭 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가톨릭교리신학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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