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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몸의 신학8: 자발적으로 봉헌된 독신과 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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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4 ㅣ No.765

[몸의 신학] 자발적으로 봉헌된 독신과 혼인


몸과 혼인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가르침 (8)

 

 

시작하며

 

“사제의 기쁨을 특히 기념하는 올해 어린양들에 대한 성추행을 비롯한 성직자들의 죄상이 드러났습니다.” 지난 6월 11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사제의 해’ 폐막미사 때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성추행에) 관련된 사람들의 용서를 절실하게 구하며, 그러한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 가능한 모든 일을 할 것을 약속합니다.” ‘아직도 죄 중에 있는’ 사제들을 향한 ‘준엄한 경고’로도 들립니다.

 

“차라리 결혼이나 시켜주시지….”라며 탄원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일부가 교육-심리학적 이유 등을 들어 독신생활이 미성숙한 인격을 형성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독신’ 또는 ‘동정’의 삶은 이제 무의미해졌는가? 사제성소가 부족한 오늘날에도 독신제도는 계속해야 하는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그 해답을 ‘하늘나라를 위한 고자’에서 그리고 ‘바오로식의 자발적 금욕’에서 찾아내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고자’의 의미

 

교황님께서는 ‘부활의 몸’에서 출발하시는데, 지난 호에서 소개한 것처럼, 그 몸은 영만 있는 ‘하느님의 천사’가 아니라 영-육이 온전히 통합되어 영성화된 몸, 혼인할 필요가 없는 “하느님의 자녀”(루카 20,36)의 그런 몸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교황님께서 자주 애용하시는 핵심 표현에 따르면, ‘자발적인 상호 자기증여’를 통해서만이, “자신을 아낌없이 선물함”(사목헌장, 24항 3)으로써만이 가능합니다.

 

교황님께서 단언해 주시는 것은 굳이 ‘스스로 고자’가 될 이유는 오로지 “하늘나라 때문”(마태 19,12)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발적 고자의 상태는 ‘하늘나라 속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며, 부부가 선익을 선택할 책임과 동시에 혼인의 선익을 포기할 ‘자기 희생’도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굳이 덜 고상한 단어 ‘고자’를 채택하신 이유는 혼인을 절대가치로 여기는 옛 계약의 전통(판관 11,37-38 참조)에 지배받는 이들에게 독신생활을 전격적으로 소개해 주시는 방법,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던 셈입니다.

 

사실, 당시에는 “성령으로부터 온”(마태 1,20) 마리아의 잉태가 “다윗의 자손” “목수의 아들”이란 표현으로 숨겨져야 했고, 그리고 나중에 그리스도의 모범을 통해 마리아의 평생 동정과 요셉의 금욕의 신비로운 계시가 단계적으로 밝혀졌던 것입니다.

 

 

봉헌된 독신과 혼인 간의 상호 보완적인 가치

 

교황님의 기본 전제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어 “사람이 생명체가 됨”(창세 2,7)으로써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존재론적 소명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혼자”서 고독하게 “일구고 돌보는”(창세 2,15) 소명만이 아니라 인간의 ‘이중적인 양태’ 아래서 하느님처럼 ‘삼위일체적인 친교’에 참여할 수명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이미 설정된 부부행위를 통해서 삼위일체적인 친교에 참여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늘나라 때문에”, 다시 말해, 지상에서 일해야 할 주님의 포도밭이며 영원히 머물러야 할 아버지의 집을 준비하기 위해서 선택하게 된 자발적 금욕행위를 통해서도 그런 친교에 참여해야 할 소명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봉헌된 독신과 혼인은 각각 인간 공동체의 실존과 그 종말론적 운명을 서로에게 설명해 주고 완성시켜 줍니다. 상호 축소 - 대립 관계가 아니라 상호 확장 - 보완 관계를 가지기에, 각자는 자신에게 고유한 부르심에 따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이고”(마태 19,12) 또한 “이 사람은 이런 은사, 저 사람은 저런 은사, 저마다 하느님에게서 고유한 은사를 받아”(1코린 7,7) 살아도 서로가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혼인보다 자발적 금욕이 우월함에 대한 근거

 

그럼에도 혼인에 비해 자발적 금욕이 우월성을 가지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표현해 주는 대목은 바오로 사도의 ‘경험 어린 교도권적인 해석’(1코린 7,25 참조)에서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자기 약혼녀와 혼인하는 사람도 잘하는 것이지만, 혼인하지 않는 사람은 더 잘하는 것입니다”(1코린 7,38). 그러나 “잘” 하는 것과 “더 잘” 하는 것에 대한 가치서열은 혼인행위와 출산을 부정하는 마니교적인 시각 때문에서가 아니라 명백하게 “하늘나라 때문에” 드러납니다. 곧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마태 19,21) 금욕생활에서가 아니라 ‘애덕의 법칙’에서 그 길을 찾아야 합니다.

 

유일한 신랑 그리스도께 대해 유일한 신부 교회가 충실하게 자신을 선물해 주는 사랑을 통해 완전해지듯이(에페 5,25-27 참조), 부부생활이나 금욕생활의 ‘더’ 또는 ‘덜’ 완전함은 전 생애 동안 “자신을 아낌없이 선물”해 줄 사랑의 대소를 통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자발적 금욕의 바오로식 의미와 그 에토스

 

바오로 사도가 자발적 금욕을 권고하게 된 근거에 대해서 교황님께서는 주목하십니다. 첫째, “혼인하는 이들은 육[현세]의 고통을 겪을 것”(1코린 7,28)이기 때문이라고 보십니다.

 

그러나 그 “육[현세]의 고통”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혼인생활에서 마주칠 어려움 때문에라도 금욕을 선택하도록 압력을 넣으려는 의도는 아닌 듯합니다. 그렇다면 둘째,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1코린 7,31)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 존재의 소멸성과 현세적 세상의 무상함 그리고 창조된 모든 것의 우연적 본성이 지배하기에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저 세상”(루카 20,35)으로 가야 할 종말론적인 목표가 제시됩니다. 곧 고자가 아닌 ‘혼인하지 않은 남자(agamos)’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1코린 7,32). 또한 ‘남편이 없는 여자와 처녀’는 “몸으로나 영으로나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1코린 7,33).

 

“주님의 일(ta tou kyriou)”은, 교황님에 따르면,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이 주님의 것”(1코린 10,26)이라는 대목에서 보듯이, ‘세상 전체’가 그 일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나라와 그분의 몸인 교회의 일’이 그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일”(요한 8,29),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주님을 기쁘게 할 사람은 자기를 ‘폐쇄’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모두에게, 곧 그리스도께 인도해 줄 세상 모든 것에게 자신을 ‘개방’시키는 그런 사람입니다.

 

전통적인 신학용어로 ‘정욕을 치료’하려고 혼인을 이용하는, 그런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1코린 7,31)이 아닙니다. “몸으로나 영으로나 거룩해지는” 그런 사람은 “마음이 갈라지지”(1코린 7,34) 않도록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자발적인 금욕의 상태 속에 온전히 투신하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황님의 가장 중요한 가치들 가운데 한 대목이 여기에 있으니, 바로 ‘부부간의 상호적인 성적 권리’와 ‘부부간의 합의된 일시적 금욕’에 관한 대목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의무를 이행하고, 마찬가지로 아내는 남편에게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아내의 몸은 아내가 아니라 남편의 것이고, 마찬가지로 남편의 몸은 남편이 아니라 아내의 것입니다. 서로 상대방의 요구를 물리치지 마십시오. 다만 기도에 전념하려고 얼마 동안 합의한 경우는 예외입니다. 그 뒤에 다시 합치십시오”(1코린 7,3-5).

 

이것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 그리고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를 보장해야 할 부부다운 에토스에 관해 언급해 주며, 또한 “얼마 동안 합의한 경우”를 의미하는 ‘부부 스스로 정한 자발적이고 정기적인 성적 절제’가 이미 혼인한 부부들의 몸을 ‘정결’하게 해줄 근거, 그래서 동물들과 달리 몸을 가진 인간성이 존엄할 수 있는 그런 근거가 되어줍니다.

 

이 대목은 ‘몸의 신학’ 후반부에 해당하는 “인간 생명” 회칙 중 ‘자연적인 피임 실천’에 관한 설명에서 아주 중요한 원리로 작용합니다.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마무리하며

 

아동 성추행에 대한 “성직자들의 죄상”을 만천하에 고백하신 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그러나 가톨릭 성직자들의 독신 전통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하게 ‘재확인’해 주셨습니다. “성직자의 독신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헌신을 드러내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국내에서 성폭행 범죄에 대한 국민 여론이 악화되면서 이른바 ‘화학적 거세’를 선택적인 형벌로 부과할 수 있도록 입법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도 범죄에 대해 ‘손목 자르기’를 부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손이 없으면 발로라도 훔칩니다.

 

성폭행 범죄의 성격도 비슷한 것이, ‘성욕’이 아니라 ‘지배욕’에서 나오는 정신-심리적 질환이라고 보이기에 ‘화학적 거세’의 약발이 떨어지면 또 성폭행을 저지를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을 사는 사제들에게도 “몸으로나 영으로나 거룩해지려는” 순결한 사람들에게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몸의 신학’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가장 확실한 대안이 되어줍니다. ‘마음으로 행하는 범죄’도 확실히 ‘치유’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호에서는 에페소서 안에서 ‘부부와 교회’ 신비 그리고 혼인의 성사성에 대한 가르침을 소개할까 합니다.

 

* ‘사상적 배경’은 필자가 중심 문헌으로 삼고 있는 영어 증보판(2006년)의 번역 책임자, 마이클 발트슈타인(Michael Waldstein) 교수가 작성한 서문의 일부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경향잡지, 2010년 8월호, 이동호 프란치스코 신부(가톨릭 대학교 윤리신학 교수, 가톨릭교리신학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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