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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우리 시대에 절박한 부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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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23 ㅣ No.648

[경향 돋보기] 우리 시대에 절박한 부활 신앙

 

 

무분별한 개발과 소비로 온난화가 가속화되고 급기야 인간이 살 수 없는 지구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시대의 절박한 부활 신앙은 생태계를 보존하는 일이다. 개발과 성장, 풍요와 편리는 생태계의 적이다. 돈이라는 우상을 신봉하는 개발과 성장의 무덤에서 해방되는 길만이 우리 시대의 부활 신앙이며 영원한 부활의 삶의 아닐까.

 

 

죽음에서 시작하는 부활

 

부활의 계절 봄이다. 겨울이라는 십자가를 통해 봄이 부활한 것이다. 그러기에 겨울은 봄의 시작이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지 못한다. 죽은 라자로의 소생 역시 무덤에 묻혀 썩은 냄새가 나는 죽음에서 시작되었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씨앗 안에 생명이 간직되어 있듯이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다시 부활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죽음은 비움이다. 생명까지도 비우는 것이다. 밀알은 자신의 생명을 썩히는 비움 없이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없다. 예수님의 죽음인 십자가는 비움의 완성이다.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비우는 십자가의 고통이 없었으면 예수님은 부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은 빈 무덤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부활은 비움인데 이기와 탐욕은 물론 풍요와 편리마저도 채움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기와 탐욕은 풍요와 편리로 위장되고 합리화되고 있다. 풍요와 편리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고 있는 돈, 신앙인에게마저도 돈이 삶의 중심을 차지한 지 오래다. 돈에게 하느님의 자리까지 빼앗겨버린 것이다. 특히 한국인들에게 돈은 신보다 위에 있는 것이다. 돈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개발과 성장의 우상이 그러하다. 돈을 많이 벌어 잘살 수 있다면 양심도 헌신짝처럼 버린다. 신앙의 절대가치도 돈 앞에서는 무기력할 때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돈과 자녀는 하느님의 축복이며 은총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축복과 은총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방법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돈은 추악한 것이 되고 자녀는 부모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된다. 그 어느 부모도 자식에게 나쁜 짓을 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쁜 방법으로 출세나 돈을 벌라고도 말하지도 않는다. 설령 부모가 나쁜 방법이나 편법으로 세상일을 처리해도 자식은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에게 나쁜 방법을 가르치는 것도 모자라 그 나쁜 짓을 감추려고 수십 명의 변호사를 수백억의 봉급을 주며 고용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나쁜 짓이 탄로 나지 않도록 사회 각계각층에 뇌물을 주어 입막음을 하는 행위는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떡값을 달라고 사무실까지 찾아간 사람이 버젓이 고위공직자가 되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돈의 우상은 우리 사회를 장악하고 있다. 교회마저도 돈의 우상에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돈의 우상에 사로잡힌 우리 사회와 교회에 부활신앙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돈의 우상에 사로잡힌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부활은 생명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생명을 죽이는 불의한 세력에 맞서 싸우는 실천적 행동이며 영적인 싸움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인 희망의 죽음이 아니라 절망의 죽음으로 몰아가는 부활의 적은 이기와 탐욕이다. 돈을 더 벌기 위한 인간의 이기와 탐욕으로 자연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다. 낮은 곳으로 흐르며 생명을 키우는 물길이 막히고, 땅을 투기장으로 만들고도 양이 차지 않아 바다까지 막아서 갯벌을 죽이며 투기장으로 만들고 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다. 그 극적인 사랑을 노래한 생활성가 ‘내 발을 씻기신 예수’는 이렇게 노래한다.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우리는 당신이 아파하는 곳과 당신 손길이 필요한 곳에 가서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우리의 몸과 행동이 따르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 시대에 하느님께서 가장 아파하시는 곳이 어디일까? 또한 당신 손길이 가장 필요한 곳은 어디일까? 여러 곳이 있겠지만 가장 아프고 손길이 필요한 곳은 자연일 것이다. 개발과 성장으로 자연은 너무도 많은 착취와 파괴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연보다 더 아프고 더 손길이 필요한 곳은 어딜까? 자연을 아무렇지 않게 파괴하는, 돈의 우상에 결박당한 이기와 탐욕에 찌든 인간의 마음일 것이다. 구원의 장소인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국가는 물론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도 그렇게 신음하고 죽어가는 자연에 대해 침묵하는 것 같다.

 

언제부터였을까?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면서 우리의 모든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었다. 개발과 성장 일변도의 개발독재가 그러했다. 이틀이 멀다하게 기상이변과 온난화 소식이 방송과 신문을 장식하지만 더 개발하지 못해 안달이다. 더 높이 성장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한반도 대운하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 사회는 개발과 성장, 풍요와 편리의 우상의 감옥에 갇혀있다. 멈출 줄 모르는 풍요와 편리는 잠시 머물다 가는 세상을 아비규환의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다. 풍요와 편리를 따르는 것은 자연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배반하고 자연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다. 자연의 붕괴는 도미노처럼 인류의 삶을 붕괴하는 것을 넘어 지구의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인간의 이기와 탐욕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는 제트기처럼 빠른데 우리 인간의 지구 온난화를 막으려는 노력은 굼벵이보다 느리다.

 

 

지구 생태계 위기는 우리 구원의 위기

 

우리 시대에 생명을 살리는 부활 신앙은 가능한 것일까? 해마다 지구온난화로 피해가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제주도가 태풍 루사로 쑥대밭이 되었다. 3년 전 강릉에 900mm의 게릴라성 폭우가 하룻밤 사이에 내렸던 것처럼 앞으로 그런 일이 더 자주 일어날 것이다. 또한 빙하가 엄청나게 녹고 있다. 빙하의 땅 그린란드에도 이제 농사를 짓게 되었다. 지구 온난화가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향후 50년 뒤에 남한에서 소나무가 사라진다고 한다. 사과도 재배할 수가 없고, 이미 명태는 동해안에서 잡히지 않고 북한에서만 잡힌다. 지구 온난화로 바다 수온이 올라간 결과다. 지금 한반도는 다른 지역보다 바다 수온과 온도 상승이 두 배에 달하고 있다. 무분별한 개발과 성장 위주의 정책이 빚은, 하느님의 창조를 가르치고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교회의 침묵이 자초한 자업자득이 아닐 수 없다.

 

지구 생태계의 위기는 구원의 위기다. 구원의 장소인 지구에 인간이 살 수 없다면, 나라와 민족도, 단체와 기업, 성당과 수녀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 지구에 더 이상 살 수 없다면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구속사업은 끝장날 것이다. 21세기, 아니 다가올 모든 세대의 최대 현안 문제는 지구 온난화이다.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시대를 살고 있지만 달나라나 화성은 인간 구원의 장소가 될 수 없다. 지구 생태계를 보존하는 일은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속사업에 동참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지금 지구온난화에 대처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10년 안에 슈퍼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수십만, 수천만의 동물과 인간이 죽는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생태전문가들이 진단하고 있다. 그러한 끔찍한 슈퍼 바이러스의 재앙이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자연을 마구 파괴하고 소비한다면 인간은 쓰레기 더미에 앉게 될 것이다. 인간의 환경파괴로 인한 부메랑은 태풍과 허리케인, 폭우와 폭설로 되돌아와서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개발과 성장의 무덤에서 해방되어야

 

한국 사람들의 행복은 오로지 크고 화려한 삶에만 있는 것 같다. 작고 소박한 삶은 불행한 삶으로 몰아간다. 과연 그럴까. 행복은 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적인 가치에 있다. 돈이 행복이라고 말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가장 불행해야 한다. 그런데 미국 일본 사람들보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훨씬 행복하다. 그것도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다.

 

더 잘사는 부자가 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와 탐욕에서 해방되는 길만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부활의 삶이 아닐까. 상속받은 엄청난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스스로 가난한 삶을 선택한 프란치스코 성인. 해와 달, 새와 꽃들을 누이요형제로 섬긴 생태의 수호자, 자연을 향한 각별한 사랑,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태영성이 우리 시대에 절박한 부활 신앙이 아닐까.

 

지구가 두 개라면 좋겠지만 지구는 하나뿐이다. 인류가 지금 정도의 개발과 성장, 풍요와 편리를 누린다면 지구의 생태계는 얼마나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소비로 온난화가 가속화되고 급기야 인간이 살 수 없는 지구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이 사라진 지구는 더 이상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시대에 절박한 부활 신앙은 생태계를 보존하는 일이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듯이 지구 생태계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의 또 다른 이름인 개발과 성장, 풍요와 편리는 생태계의 적이다. 돈의 우상은 영원한 생명을 파괴하는 부활의 적이며 인류의 적이다. 돈이라는 우상을 신봉하는 개발과 성장의 무덤에서 해방되는 길만이 우리 시대의 부활 신앙이며 영원한 부활의 삶의 아닐까.

 

* 최종수 윤호 요셉 - 전주 팔복동성당 주임신부. 가난하지만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이웃들의 행복한 삶의 이야기와 이 땅의 산천을 파헤치려는 경부 대운하를 반대하는 ‘생명의 강을 모시는 순례단’의 모습을 취재하여 ‘가톨릭 인터넷 언론 지금여기’에 글을 싣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4월호, 최종수 윤호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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