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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생명의 존엄성과 낙태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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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15

생명의 존엄성과 낙태문제

 

 

I. 서론

 

행동과학 연구소의 1972년도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15-44세 된 한국의 기혼 여성 5명 중 1명은 적어도 한번의 인공유산을 체험하였다.1)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공낙태를, 원치 않는 임신의 중지방법이나 인구증가의 억제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공유산을 체험한 여성 중에는 태아도 인간이며 낙태는 살인이라고 믿는 이도 있을 것이고, 달리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행동의 죄악성을 인정하면서도 범행하기도 하므로, 이상의 사실은 한국의 기혼여성 20%가 태아의 인간성을 부인한다는 증거는 못된다. 이 글의 목표는 태아의 인간성과 낙태에 관한 가톨릭의 공식입장을 상세히 설명하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증을 제시하는 것이다. 태아는 인간이고 낙태는 살인이므로, 낙태는 죄악적 행동이란 것이 가톨릭의 입장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있다. 세부적인 문제를 취급할 경우에 가톨릭의 입장은 그렇게 명료하고 단순하지가 않다. 그래서 이 글은 가톨릭의 입장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세부적 문제의 성격과 그런 문제에 대한 가톨릭의 태도를 설명하고자 한다. 또한 가톨릭의 주장과 상반된 주장은 어느 점에서 차이점을 갖는지도 해명해 보겠다.

 

 

II. 기본 명제

 

인공낙태를 반대하는 가톨릭 입장의 기반이 되는 것은 두 개의 기본명제이다.2) 첫째 명제는 태아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둘째 명제는 인간생명은 절대적 가치를 가지므로, 무죄한 인간생명을 의도적으로 죽이는 행동을 정당화할 만큼 높고 훌륭한 목표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공유산에 관해서 가톨릭의 견해와 다른 모든 견해는 이성의 기본명제에 대해서 상이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무죄한 인간생명을 의도적으로 죽이는 것이 언제나 죄악이란 명제가 문제시되고 반대에 부딪칠 수도 있으나 그런 반대와 의문은 태아의 완전한 인간성을 부정하는 견해에 뿌리박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첫째 명제가 더욱 기본적인 것이고 태아의 인간성이 문제이다.

 

첫째 문제는 태아가 인간인가 하는 것이다. 태아는 언제부터 완전한 인간이 되는가? 많은 현대인들은 이런 해답은 과학이, 이 경우에는 의학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사들은 이 과업을 맡으려 하지 않는다. 실제로 의학이 단독으로 이 질문을 다룰 능력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해답을 하자면 우선 인간이 무엇인지 즉 인간의 본질적 구성요소를 규명하고서, 그 요소들이 언제부터 태아에게서 발견되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무엇인지 정확히 규명할 능력이 의학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인간의 기본요소를 규명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중에 정신적 요소가 있다면 그 정신적 요소가 태아에게 있다는 것을 어떻게 관찰하는가? 태아의 인간성에 대한 과학적 해답이 없다고 해서, 이 질문을 무시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 이 문제를 제쳐놓고 행동해도 그 행동은 태아도 인간이란 입장이거나 반대입장을 내포하는 행동이 되고 말 것이다. 중립적 행동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난처한 문제에 관해서 자신의 주장과 사유를 밝혀야 한다.

 

성서는 인간의 존엄성, 무죄한 생명의 보호, 사랑의 계명을 가르치지만 낙태에 관하여 분명하게 가르치지는 않는다. 태아도 인간이라든지 낙태는 살인이라고 명백하게 말하는 성서구절은 없다. 그러나 사도시대부터 가톨릭 교회는 낙태를 엄하게 금하였으며 살인으로 간주하였다. 사도시대 이후에 교부들도 낙태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 살인이라고 불렀다. 성 예로니모와 아우구스티누스도 낙태를 살인으로 보아서 엄중히 금지하였다.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수정된 후 상당한 기간이 흘러야 영혼이 주입된다는 주장이 신학자들간에 퍼졌다.3) 성 토마스·아퀴나스 같은 학자도 수정 순간에 영혼주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영혼을 가진 태아를 살해하는 것은 살인이지만, 초기태아를 살해하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죄악이지 살인은 아니라고 하였다. 16세기에 가장 권위 있던 교회법 학자이고 세 교황 밑에서 윤리문제의 고문으로 있던 마르틴·아즈쁠리꾸에따(Martin Azplicueta)는 40일 이상 된 태아에는 영혼이 주입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40일이 못된 태아에는 영혼이 없고 그 경우의 낙태는 살인이 아니란 것이다. 이러한 학자들이 초기 태아 살해도 죄악이라고 보았으나 살인은 아니라고 간주하였으므로 어려운 경우에 낙태를 용인한 것이다. 초기 태아의 절대적 가치가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다른 큰 가치의 보호를 위해서 희생되어도 무방하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신학자들의 견해였고, 교회는 초세기부터 법령을 통해서 낙태를 엄중히 금지하였다. 신학자간에 있던 이견을 무시하고 교회법은 낙태를 엄중히 금지하였다. 초기 태아의 비인간성에 관한 신학자들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중세기에 발표된 교황 식스도 5세의 회칙(1588년 10월 29일)은 태아의 나이가 얼마이든지 모든 낙태를 처벌해야 한다고 하였다. 낙태자는 파문을 받으며 그것의 사죄권은 교황청에 유보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는 많은 신학자들의 주장과 교회의 가르침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고 그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1750년 경부터 사정은 변하였다. 그 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신학자들 거의 전부가 교회당국과 - 일치해서 태아살해를 살인으로 보았다. 이 입장은 최근에 발표된 교황청 문헌에서 발견된다. 1974년의 [인공유산 반대 선언문]에 이렇게 쓰여 있다. "영혼이 언제 부여되느냐에 대한 논쟁과는 별도로, 현대 유전학은 이 자명한 불변의 원리를 확인해 준다. 이 생명체가 자라나서 충분히 결정된 독자적 특성을 지닌 사람이 될 프로그램이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주입된다는 사실을 유전학은 증명해 주었다. …… 설령 태아가 인간이냐 아니냐에 관해서 의문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감히 살인을 무릅쓴다는 것은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객관적으로 중죄이다. '인간이 될 자는 이미 인간이다.'"4)

 

 

III. 초기태아의 인간성

 

초기태아의 살해도 살인이라고 하자면 그것도 인간임을 인정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영혼주입의 정확한 시기 즉 태아가 완전한 인간이 되는 시기에 관한 성서말씀은 없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교회의 확정된 교리도 없다.5) (1) 영혼주입의 시기에 관해서 교회가 교리를 확정한 적이 없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시기부터 낙태가 살인이 되는지 확정하지 않았다. (2) 교회법(2,350조)은 낙태자를 파문하지만 수정난자의 피하주입(implantation) 방해에 관련자를 파문하지 않는다. 피하주입은 수정난자가 약 3주 동안 자체의 영양으로 살다가, 모체와 연결을 맺고 모체에서 영양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3) 피하주입을 못하면 태아가 사망하지만, 피하주입의 방지를 살인이라고 교회가 단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피하주입 되었던 태아가 유산되면 세례를 주라고 가르친다. (4) 낙태를 금지하면서 "무죄한 인간생명은 언제나 보호받아야 한다"고 하였지만 언제 인간생명이 존재하기 시작하는지 식별할 기준이 제공되지 않았다.

 

이 모든 문제 해결에 바탕이 될 만한 계시된 성경말씀이 없기 때문에 교회는 의학의 발견과 철학사상에 의지하게 된다. 현대생물학의 발견은 피하주입의 방지가 살인이라고 주장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피하주입 전후의 태아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 발견되고 그 이전의 태아가 인간이란 주장에 상당한 의문을 제기한다. 거기에다 가족계획의 일환으로 인공낙태를 사용하려는 압력이 초기태아의 인간성 여부에 대하여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렇다고 과거의 학자들처럼 영혼주입의 시기가 수정 후 제 40일이나 제 80일이라고 단언하지는 못한다.

 

초기태아의 인간성 여부에 관하여 의문을 일으키는 생물학의 연구결과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하나의 수정난자는 분열하여 쌍둥이로 발전할 수가 있다. 두 사람으로 발전 가능한 상태에 있는 하나의 수정난자가 인간개체로서 확정되었는지는 의심스럽다. (2) 수정난자의 20-25%는 피하주입 전에 사망하는 것이 자연적 현상이다. (3) 정신작용에 필요한 기반 혹은 인간성의 출현의 표지는 중추신경 조직인 듯하다. 중추신경 조직을 향한 난자세포의 분화는 수정 후 20-40일 경에 이루어진다. 신경세포의 분화가 난자의 정상발전이나 소멸이 결정되는 시기이다.6)

 

물론 이 모든 발견에 기반을 두고서도 일정기간이 지나기 전에는 태아가 인간이 아니라고 결론할 수 없다. 생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현대인은 난자의 수정에서부터 출생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세밀하고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태아의 발전을 저해하거나 촉진하고 보장하기에 필요한 정확한 지식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과학은 한가지 질문에 대하여 해답하지 못한다. 완전한 인간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진 여러 단계에 놓여 있는 태아가 사회나 부모나 신과 관련해서 같은 가치를 가지는가의 문제에는 해답하지 못한다. 한 단계의 태아를 살해하는 것과 다른 단계에 있는 태아를 살해하는 것은 동일한 윤리적 의미를 갖는가? 무슨 이유를 위해서 어느 단계의 태아를 살해하는 것은 무방한가 등의 문제에 관해서는 생물학이 침묵을 지킨다.7) 그러나 태아의 영혼주입의 시기를 정확히 모른다고 자백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20일이 경과하면 태아는 하나의 개체이며 그 안에는 완전한 인간을 향해서 발전하는 생명의 원리가 있다. 이 개체는 우리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한다. 초기태아의 인간성 여부가 불확실하여도, 인간이 되어 가는 그 존재를 함부로 살해하는 것은 부당하다. 자라나는 이런 생명체를 함부로 중단시키는 것은 인간생명을 향한 희망을 제거하는 것이고, 또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살해할 위험을 안고 있다. 초기태아의 인간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가톨릭 윤리학자들도 초기태아의 살해는 살인이 분명히 아니라든지, 그래서 무방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개신교신학자 중에도 상당수가 이와 유사한 견해를 갖고 있으며 폴·램시(Paul Ramsey)8)가 그 대표자이다.

 

 

IV. 상이한 견해들

 

가톨릭 교회의 태도와 실천에 찬동하지 않고서 낙태자유화를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이 주장들의 근저에는 태아의 인간성에 대한 견해가 도사리고 있다. 그들이 태아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낙태를 살인이라고 보면서도 낙태자유화를 부르짖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 측의 어떤 글이나 선언문에는 자유주의자들이 낙태가 살인임을 인정하면서도 낙태를 자유화하자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상당수는 태아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가톨릭과 동의하면서도 낙태자유화를 부르짖는 모순적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첫째 기본명제인 태아의 인간성 여부에 관해서 이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태아의 인간성을 식별하는 데 특정한 기준을 사용하므로, 그 기준을 소개하고 당위성을 검토할 것이다.9)

 

가장 널리 인정되는 기준은 생존능력(viability)이라고 한다. 태아가 몇 달이 되기 전에는 생존능력을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태아가 모체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생존하지 못한다. 그것은 태아의 생명은 어머니의 생명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 의존성이 초기태아의 인간성을 부인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낙태자유화를 부르짖는 어떤 이는 생존능력이 없는 태아는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모체의 일부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한다. 그런 태아는 개체가 아니고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응집체라고 한다. 생존능력이 생길 때에 태아는 개체가 되고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생존능력 기준의 첫째 문제는 완전한 인공부화를 보장한다면 태아는 어느 단계에서든지 독립적으로 생존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생존능력의 시기가 유동적이며 태아의 나이가 생존능력의 정확한 척도가 못됨을 말하는 것이다. 많은 연구에 의하면 태아의 생존능력은 나이보다 기능적 발전, 길이와 무게로써 더욱 잘 나타나나, 길이와 무게는 변하는 것이다. 생존능력의 시기는 민족에 따라 다르며, 흑인태아는 더욱 빨리 생존능력을 갖는다. 이런 유동성 때문에 생존능력이 인간성의 표지가 되기는 어렵다. 더욱 큰 문제는 생존능력이 생겨도 의존성이 계속된다는 점이다. 태아가 생존을 계속하자면 누구의 보호가 절대로 필요하고 출생 후에도 의존성은 오래 계속한다. 그래서 생존능력의 시기에 의존성이 약간 감소된다고 그것이 인간성 획득의 순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태아의 인간성을 식별하는 둘째 기준은 체험이라고 한다. 이 주장에 의하면 인간성은 태생적이 아니고 출생 후에 취득하는 것이다. 체험을 갖고 생활하고 고통 당하고 기억을 갖는 존재는 그렇지 못한 존재보다 더 인간적이다. 이런 체험이 없으므로 태아는 인간적이 아니다. 체험을 인간성의 기준으로 삼는 이 주장은 초기와 후기단계에 있는 모든 태아의 인간성을 부인한다. 그리고 체험이 무엇인지 문제이다. 8주간 된 태아는 접촉에 반응을 보이는 고로 체험을 갖는다고 해야 한다. 그 이전에라도 태아는 살아있고 또한 환경에 반응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인간성 발생에 체험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이유가 모호하다. 사랑과 학습 등 중요한 체험이 그 사람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데에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랑하지 못하고 학습불가능한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성의 셋째 식별기준은 성인의 감정이라고 한다. 신생아의 죽음과 태아의 죽음에 대하여 성인들이 상당히 다른 느낌을 갖는 것은 태아가 인간이 아님을 입증하는 표지라는 것이다. 신생아 살해자에 대하여는 강한 반감을 느끼지만 낙태자에 대하여는 그렇지 않은 것이 일반적 현실인 듯 하다. 낙태를 살인으로 보고 또한 계획적 살인자의 사형을 당연시하는 사람들도 낙태 여인과 의사가 중형이나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감정 차이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인간성의 식별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이민족에 대하여 인간적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이들이 많고, 그뿐 아니라 청소년의 죽음, 유아의 죽음, 90세 노인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슬픔은 다르다. 슬픔 정도의 차이는 그들의 인간성에 등급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한가지 인간성의 식별기준은 사회적 인정이라고 한다. 이 입장에 의하면 태아는 사회적으로 인간으로서 인정되지 않고 타인과 교신하지 못하므로 사회의 성원이 아니다. 도덕률은 사회성원의 행동을 위한 것이므로, 성원이 아닌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태아는 인간사회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인간이 아니다. 인간성이 사회적 인정에 달려 있다면 인간성은 쉽게 박탈당할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한 집단이 인정하는 인간성이 다른 집단에 의해서 부정되는 모순적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많은 사회에서의 노예와 공산주의 사회의 지주가 사회적으로 인간성을 상실하며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다. 인간성은 실질적 사전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사회적 인정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V. 실질적 차이와 윤리판단

 

생존능력, 체험, 성인의 감정, 사회적 인정 등을 태아의 인간성 식별기준으로 사용하는 주장을 배척하였다. 태아의 인간성 여부에 관한 판단은 과학적 결론이 못되고 윤리적 판단인 반면에, 윤리적 판단은 임의적 기준이 아니라 실질적 차이에 기반을 두어야한다는 데에 이유가 있다. 어떤 것에 관한 판단이라도, 실질적 차이에 근거한 판단은 그렇지 못한 판단보다 합리적이고 건전하다. 그리고 이상의 네 가지 기준은 태아의 실질적 차이를 표시하지 못하는 까닭에, 태아의 인간성 판단을 위한 합당한 기준이 아닌 것이다. 피하주입 이전의 태아의 인간성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것이나, 수정 순간부터 태아가 인간이라고 함도 과학적 결론이 아니고 도덕적 판단이다. 이런 판단은 무슨 실질적 차이에 기반을 두는가? 인간으로 발전하는 생명체는 난자와 정자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언제부터 인간이고 왜 그럴까?

 

수정이 되기 전에 하나의 정자와 난자가 인간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성행위에서 200만개 정도의 정자가 사정되므로, 하나의 정자가 난자를 만나서 접합체(zygote=초기태아)가 될 가능성은 200만대 1도 못된다. 여자의 일생 동안에 최고로 390개의 난자가 배란될 수 있으나 수정되는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단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된 후에는 20% 정도의 태아가 자연적으로 유산된다. 그래서 수정난자가 인간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자연조건 하에서는 80%이다. 유산의 대부분은 피하주입 전에 즉 수정 후 약 20일 전후에 발생한다. 그러니까 피하주입 후에는 태아가 인간으로 출생할 가능성은 거의 완벽한 것이다. 한 생명체가 인간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수정과 피하주입은 획기적인 변화가 발생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으나, 위에서 열거된 생존능력 발생, 체험, 성인의 감정, 사회적 인정 등은 그런 획기적 시기와 잘 상부하지 않는다. 수정이나 피하주입시에 발생하는 생물학적 가능성의 변화가 태아의 인간성을 입증하는가?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윤리적 판단이 합리적이고 설득적이자면 기준이 임의적 것이 아니고 실질적 선이어야 한다. 하나의 생명체가 인간이 되는 과정에서 가능성이 획기적으로 증가하는 수정과 피하주입은 실질적 선이라 함이 당연하다. 영혼주입 시기에 관한 교리를 확정하지 않으면서도, 가톨릭 교회는 수정시기가 인간성이 시작하는 결정적 순간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 때에 유전인자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수정란자가 인간이 될 가능성은 크게 확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피하주입 이전 태아의 인간성 여부에 관하여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그 시기에는 태아의 유산율이 상당히 높고(20%) 개체발달이 확정되지 않은 듯하기 때문이다.10)

 

 

VI. 결론

 

낙태의 합법성 문제는 우선 태아의 인간성 문제와 깊이 연관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수정 순간부터 태아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낙태를 금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낙태의 죄악성이나 영혼주입 시기에 관한 분명한 성경말씀은 없다. 그래서 초기태아의 인간성이나 영혼주입의 시기에 관해서 교회는 교리를 확정하지 않고 있고 확정될 가능성도 적다. 신학자들의 견해는 초창기부터 14세기 초까지는 교회당국의 입장과 일치하였으나, 그 후부터 18세기 중엽까지에는 초기태아의 인간성을 부인하는 주장이 확대되다가, 1750년부터 1965년까지 신학적 견해와 교회의 공식입장은 일치하였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날 무렵부터 산아조절의 압력, 생물학의 발달 등의 영향으로 초기태아의 인간성에 관한 문제가 다시 쟁점이 되었다. 생물학이 이 문제에 대해서 확답을 할 수 없지만 생물학의 발전에 근거해서 3개월 전의 태아를 비인간시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 견해에 영향을 받아 3개월 전의 낙태를 합법화하려는 움직임도 많다.    우리의 논점을 태아의 인간성에 국한시켰으므로 낙태 가능성 자체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태아의 인간성을 인정하더라도 낙태가 합법적이고 정당한 경우가 있는가? 가톨릭은 소위 간접적 낙태를 인정한다. 개신교는 정당한 낙태를 인정하면서 상당히 다른 이유설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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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행동과학연구소, 가족계획의 심리학적 탐색(서울, 1972), 85면.

2) Cooke, Robert E., M. D. et ali., The Terrible Choice: the Abortion Dilemma (New York, Bantam Books, 1968), 81-82면.

3) Noonan, John T., Jr., "An Almost Absolute Value in History", in The Morality of Abortion, ed. by John T. Noonan Jr. (Camb.,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70), 26-45면.

4) 교황청 신앙교리성성, 인공유산 반대선언문, 13항, [사목] 42호(1975, 11.), 125면.

5) Dimond, James J.M.D., "Abortion, Animation and Biological Hominization", in Theological Studies Vol. 36 (June, 1975), 305-324면.

6) Haring, Bernard, "A Theological Evaluation," in The Morality of Abortion, 123-146면.

7) Cooke, Robert E. et ali., The Terrible Choice, 39면.

8) Ramsey, Paul, "Reference Points in Deciding about Abortion", in The Morality of Abortion, 60-101면.

9) Noonan, John T., Jr., "An Almost Absolute Value in History", in The Morality of Abortion, 51-57면.

10) Hilgers, Thomas W., M.D., "Human Reproduction: Three Issues for the Moral Theologian", in Theological Studies Vol. 38 (March 1977), 136-152면.

 

[오경환 신부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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