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교회의 사회교리 관점에 비추어 본 노동의 신학적 의미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419

교회의 사회교리 관점에 비추어 본 노동의 신학적 의미

 

 

1. 들어가는 말 

 

"인간의 생활은 매일 노동으로 이루어지며, 노동에서 인간은 그 독특한 존엄성을 얻는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은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의 노고와 고통을 동반하고, 또한 개별 국가와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생활 속에 깊이 침투해 들어오는 해악과 불의도 안고 있다."1)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한다. 왜냐하면 노동은 인간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노동의 신성함을 알기 때문에 노동을 신앙 체험과 분리하지 않고 오히려 노동을 통해 자신의 영성과 신앙을 드러낸다.2)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기 노동을 통하여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고, 형제들과 결합되고, 형제들에게 봉사하며, 또한 노동을 통하여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완성하기 위하여 협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노동을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인간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참여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노동을 통해, 곧 노동 활동을 시작하면서 자신들이 하느님께 부여받은 직무를 완수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침착하고 경건한 태도로 노동을 행하게 되고, 또한 그런 행동을 통해 사람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또한 노동은 개개 인격체의 표현이며, 동시에 의무의 실현이기도 하다. 이런 연유로 몇 가지의 의무와 권리가 인간 노동의 고유 영역에 속한다. 노동은 인간 생활을 표현하는 방법이자 직무의 완수이기도 하므로 인간의 권리이며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수행하는 데 적절한 조건과 그에 합당한 보수를 요구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이런 조건과 보수는 충만하고 발전적인 삶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 구약성서에서도 적절한 조건에서 자신의 의무를 행해야 한다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마라."(신명 25,4)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합당한 보수에 대해서도 성서는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창세 29,15-30; 1고린 9,9-1,1; 1디모 5,18; 루가 10,7; 마태 20,8-15 참조).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창조의 계획을 거슬렀으며 따라서 노동의 신성한 본래 의도마저 변질시켰다.

 

사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노동을 통하여 피조물들을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셨으며 또한 인간이 헤쳐 나가야 할 삶과 그 한계까지 명시해 주셨다(창세 1,28-30; 2,15-16 참조). 하지만 인간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써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되었으며 노동도 그런 식으로 인간에게서 멀어졌다. 그 결과로 노동은 고통과 노고를 수반하게 되었다. 고통은 인간이 신(神)을 불신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며, 인간은 그 결과로 하느님께 벌을 받게 되었다. 인간의 노동은 이런 식으로 신성한 본래의 의도였던 창조의 환희는 잃어 버리고 고통과 노고만을 수반하게 되었다(창세 3,17-18; 로마 8,22-23).4)

 

과학 기술의 발달로 드러난 결과 가운데 분명한 것은 노동 활동에서 노고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학 기술의 발달은 대부분의 경우, 자연 파괴와 환경 오염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낳았으며 이 때문에 인간의 삶과 진보는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인간의 노력이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노동 윤리를 존중하고 창조주의 뜻을 따르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온 인류의 진정한 '인간화'를 위한 길이다. 하느님의 원 창조 계획 가운데 하나인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될 때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실현되고, 노동은 자신의 진정한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위와 같은 전제 조건에서 출발하여 무엇보다도 교회의 사회 교리 관점에 비추어서 노동의 신학적 의미를 간단하게나마 다루어 보고자 한다. 

 

 

2. 교회의 사회 교리 가르침에 비추어 본 노동의 신학적 의미 

 

1) '노동하는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창조는 단순히 과거에 완료된 사건이 아니며, 신학은 섭리 개념 외에도 보존과 경쟁이라는 개념까지도 창조의 개념에 덧붙임으로써 이신론(理神論)자의 사고를 반박해 왔다.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만물을 보존, 유지시키시며 그들의 활동까지도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활동은 이 세상 만물의 존재와 생성에 아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공산품은 노동이 중단된 뒤에도 계속해서 존재하며 그들의 형성에 비해 오래 유지된다. 반대로 하느님에게서 나온 피조물인 인간(이것이 바로 '무에서 창조되었다'는 증거이다)은 하느님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창조는 앞서 말했듯이, 지속적인 의미나 영구히 현재형적인 의미가 복합된 형태로 일컬어진다. 곧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창조를 이미 완료하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계속해서 세상을 창조하고 계신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창조를 단순히 '무(無)에서 존재(存在)로의 이행 과정'으로 여기거나 과거에 그러한 창조 행위가 완전히 끝난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5)

 

하느님의 창조는 완료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시작을 정확히 가려낼 수는 없다. 창조의 시작에 완벽히 맞출 수는 없다.(그 시작을 정확히 시간적으로 따질 수는 없다.) 사도 바오로와 요한의 편지 중 가장 중요한 독서 부분은 창조의 개념에 관한 부분으로, 이들은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창조가 이루어지는 첫 시작에서 끝까지의 모든 시간을 포함한 연속적인 행동으로 보고 있다. 창조란 그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하느님께서 수천 년에 걸쳐 이루어 놓으신 인간과 우주의 구원의 역사인 것이다.

 

인간 또한 자신의 활동(노동)을 통해 이 구원의 계획에 협조해야 할 부름을 받았다. 인간도 노동을 통해 우주 만물의 발전에 한몫을 해야 한다는 이 전제는 노동에 관한 신학적?철학적 고찰이기도 하다. 노동은 그 동안 강요당해 왔던 협소함에서 벗어나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한 의미를 띠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서, 또 하느님의 협조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게 된다.

 

요한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 구절은 하느님(그리고 하느님과 동일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역사를 위한 명백한 허락을 나타내고 있다.6)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우리 인간들을 통해 당신의 창조 사업을 완성해 나가신다. 이는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무엇, 곧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뭔가를 발명해 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이미 현실 속에 묻혀 드러나 있지 않은 가능성들만 발견하고 드러내는 능력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2) 노동은 인간을 위한 것으로 인간에게 봉사하는 행위이다. 

 

인간은 개개인적으로도, 그리고 전 인류적으로도 하느님의 모습이기 때문에 노동 또한 각각의 개인에게, 그리고 온 인류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활동과 노동을 통해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간다고 할 수 있다. 곧 인간은 노동을 함으로써만 하느님의 완벽한 모습이 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으로서 발전시켜야 할 여러 다른 측면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다른 피조물들을 지배하는 기능을 빼놓을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임을 표현하고 보여 주는 수단이 바로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인류학적 특성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신학적 연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노동은 사물을 만들어 내기 전에 타동(他動) 활동에 속하기 때문에 인간의 인격을 통해서만이 다음 단계로 활기를 띠고 발전하며 확대된다. 노동은, 어떤 노동이든 간에 계획과 창조력, 자유, 교육, 결단력, 책임감을 수반하며, 능력, 주의력, 절제력, 상상력, 용기, 그리고 헌신력 같은 인간 고유의 특성들은 노동을 통해서 발달된다.

 

또한 사회가 각 개인이 자신의 소명을 다할 수 있도록 개개인에게 그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도 노동의 의무에 속한다. 실업은 인간에게서 자연스러운 요구인 노동을 빼앗음으로써 사회의 중대한 악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사회를 책임진 사람들은 개인과 공동체의 요구를 고려해 언제나 일자리의 창출을 위해 우선적으로 노력해 나가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노동이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방침을 재차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7)

 

인간은 그 전체로서도 하느님의 모습이다. 노동은 공동체의 특징적이고도 효과적인 표시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과거보다는 오늘날이 노동으로써 세상이 좀더 통합되어 나타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동은 인격체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서 움직이는 개개의 인격체를 나타내는 표시라고 말한다.8) 실제로 노동은 사회화의 방법이자, 결속의 기회이며 형제애를 다지기 위한 것이다.9)

 

하지만 역사에서는 특히 노동에서 결속이 잘못 이루어지거나 결속력이 파괴되는 것이 많이 나타난다. 곧 형제애로 다스려야 할 곳(창세기의 명령)에서는 약육 강식의 법칙이 나타나며, 그리고 노동의 세계는 종종 이기적이고 불공평한 세상으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노동자의 문제 역시 인간 사회의 근원적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회칙 [백주년]에서 자본주의의 낡은 방식, 특히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강력하고 예리한 변화가 이루어져야만 자본주의가 여전히 효과적인 체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가능한 유일한 자본주의는 사유 재산(노동을 통해 정당하게 얻은 것)과 기업과 시장의 역할, 이익의 정당한 기능, 개인과 사회 주체들의 자유와 창조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교황은 "이윤이 기업 조건의 유일한 지표는 아니다."(35항)라는 이윤에 대한 원칙도 잊어서는 안 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자유로운 노동, 기업, 그리고 참여 사회로의 지향을 뜻한다. 또한 이것은 역사적 대안이 몰락한 이후 현 자본주의에서 남은 진정한 대안이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최우선이라는 뜻이다. 

 

3) 인간의 노동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최우선으로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서 "노동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위한 것"(6항)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바로 노동에 관한 교회의 사고를 보여 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언제나 교회 관심의 중심부에 있으며, 교회적 사고의 기준점이기도 하다. 인간은 지금뿐 아니라 늘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하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인간이라는 인격체는 자신의 근원을 가졌지만 인간은 교회에서 자기 방어의 최후의 보루는 찾을 수 없었다. 곧 인간은 교회에 자신의 안식처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 방어의 최후 수단은 찾지 못했던 것이다.

 

노동에 관한 모든 신학은 '노동은 인간을 위한 것이다.'라는 원칙 위에 세워졌다. 복잡하고 다양한 가치적인 현실의 모든 특징들은 이 원칙을 중심으로 확대되고 배열된다. 노동 신학은 또한 인류학이기도 하다. 노동 신학이 무엇보다도 관심을 가지는 것은 노동 자체만이 아니라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기 실현을 얼마나 이루어 나가는가에 있다. 그래서 노동에 대한 복음은 복음 전파에서 필수적인, 아니 복음 전파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인간의 노동이 무시된다면 하느님의 유일한 계획 안에 위험한 생략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우주에서 아무 의미 없이 떠도는 방랑자가 아니라고 근대 과학자들은 말한다. 극도의 인간 중심설은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과오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문화 안에서 나타나는 인간 중심설은 단독으로 세워진 학설이 아니라 항상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이론화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창조된 우주 속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낸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인간은 자주 자신의 제한된 능력 또는 자신의 부족함을 곧잘 잊어 버리고 자신이 모든 세상일의 중심(주체)이 되고자 했다. 인간은 그렇게 자주 자신의 본 모습을 망각해 버렸고 그리고 또 앞으로도 그러한 유혹을 끊임없이 받을 것이다. 어쨌든 그리스도교의 인간 중심설은 인간 구성의 모든 기준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신학적 인간 중심설이다.

 

4) 인간의 노동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방된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 가운데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오로는 인간의 죄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이 '쇠퇴'와 '부패'와 '문란'에 젖어 있는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현재의 노동 또한 주인공이고자 하는 인간의 죄 때문에 쇠퇴와 부패와 문란의 상태(노예 상태)에 있다.10)

성서는 구원의 사업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 하느님께서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자들의 구원자이며 해방자이시다. 그리고 구원 사업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계속되어야 한다(이사 65,21-22; 아모 9,13-15 참조).

 

노동자들은 노동의 결실을 향유할 수 있을 것이며, 조화를 이룸으로써 모든 분쟁을 극복할 것이다. 그리고 노동의 구원은 인류가 하나로 결속되어 희망과 사랑 속에서 일하게 될 때 이루어질 것이다. 노동하는 세상이라는 힘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최후의 결과로 나타난다. 은총으로 우리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느끼게 된다.

 

문제는 개인, 사회, 정치적 문제가 다 같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는 것이다. 노동의 구원은 모든 사회적 요소가 서로 잘 조합해 협력할 때만 이루어진다. 세속에서의 노동에 대한 진정한 의미 부여는 그 방법론을 알기 위해 전문화되어 간다는 데 있을 뿐 더 이상 사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지 않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회칙 [노동하는 인간]을 통해서 노동의 의미를 잃어 버리고 있는 이 세상에 그 답을 알려 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산업 혁명 이후 급속도로 심각해진 인간 노동의 악화(육체적?정신적 중노동에 시달리는 고통)와 인간 소외 현상과도 투쟁해야 한다. 노동이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오늘날 현대 기술은 이런 요구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11)

나아가 모든 형태의 탄압과 노동자들의 결실을 횡령하는 것과도 투쟁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들이 노동의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단호한 시대적 요구들이다. 그러므로 노동의 구원은 신화적이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엄격히 책임 지어진 아주 가깝고도 구체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땀과 노고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름 받은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께서 성취하러 오신 일에 사랑으로써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 구원 사업은 십자가 위의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노동의 수고를 참아냄으로써, 인간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아드님과 협력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완수해야 할 사명으로 받은 일들에서 매일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는 것을 드러낸다."12)

 

이것은 미래의 첨단 기술 산업 시대에도 그리스도교 사상의 실천과 사고를 통해 전통적 영성을 간직하기를 바라는 교황의 말이다. 노동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활동 속에서 십자가의 작은 부분을 발견하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받아들이신 것과 같은 구원의 정신으로 그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노동은 여러 가지 고통을 수반하는데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고통을 신앙 안에서 참고 견디면서 하느님과 내적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 안에서 영적 봉헌을 하기 가장 좋은 때는 성체성사의 순간으로, 신자들의 공동 사제직은 성체성사로써 완벽하게 표현된다. 성체성사 동안 자신의 '성체화'(Eucaristizzazione)를 위해 땅과 인간 노동의 결실이 봉헌된다.

 

농부, 노동자, 기술자 직공들은 모든 성 교회와 개인의 선을 위해 그리스도의 희생에 봉헌하고 하느님의 이름에 찬미와 영광을 드림으로써 그들의 희생을 실현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처럼 성체가 상징하는 바는 더욱더 무궁무진하다.

 

희생의 제단에 놓여진 빵과 포도주는 인간의 모든 노동을 나타낸다. 빵과 포도주는 모든 사회가 실제 참여한 역사의 긴 사슬의 결과를 뜻한다. 곧 빵과 포도주는 인간의 노고, 희생, 이상, 좌절, 배신, 착취, 횡포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노동을 상징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정화하고 봉헌하며, 허락을 받기 위해 하느님 앞에 모든 사슬을 나열하게 된다. 이때가 바로 인간 노동이 최대로 유용해지는 순간이다. 

 

 

3. 나오는 말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 자신을 발전시키며 형성해 간다. 동시에 가정과 이웃과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면서 인간을 서로 서로 결합시킨다. 곧 노동은 인간의 일치와 연대성의 한 요소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계속 수행하는 인간 본연의 고귀한 소명인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당연히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그 주체가 인간이기에 인간 인격의 표현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래서 교회는 과거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언제나 인간이 모든 사회 조직의 원인이며 동시에 목적이라고 가르쳐 왔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노동에 관계된 문제는 단순히 개인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 가족, 한 사회, 한 국가, 전 세계의 문제이며 동시에 인간의 구원을 책임진 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복음은 말로 선포될 뿐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속에 투신하여 증거될 때 비로소 그 생명력을 지닌다. 이제 교회는 다시 한 번 자신의 고유한 정체와 사명에 관하여 먼저 반성해 보고 노동 운동에 대해 법적 제도의 개혁과 좀더 구체적인 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면서 기업주와 정치인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깊이 내재해 있는 그릇된 가치관을 올바로 형성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되어 창조된 본래의 질서에 따라 살아가지 못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해방과 성취를 얻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영광과 그 생명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 각자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 이 글은 이탈리아의 Pistola 교구에서 조직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G. frosini 신부의 저서 L'ATTIVITA UMANA(Per una teologia del lavoro)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 - 필자 주.

 

----------------------------------

1)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노동하는 인간], 1항.

2) 교회헌장, 34항 참조.

3) 사목 헌장, 67항.

4) J. Hoffner, La dottrina sociale cristiana(titolo originale:Christliche Gesellschaftslehre), Milano, San Paolo, 1995년, 124면 참조.

5) G. frosini, L'attivita` umana, Milano, San Paolo, 1994년, 168면.

6) H. Van Den busschf, Giovanni, Assisi, Cittadella, 1970년, 256면.

7) [노동하는 인간], 6항 참조.

8) 위의 책 서문 중에서.

9) S. bortolan, Lavoro e realta terrene, Napoli, Domenicane Italiane, 1971년, 19면 참조.

10) T. goffi - G. piana(a cura di), Koinonia(corso di morale 3), Brescia, Queriniana, 1991년, 389-401면 참조.

11) [노동하는 인간], 6항 참조.

12) 위의 책, 27항.

 

[사목, 2000년 5월호, 이창영(본지 주간, 주교회의 사무차장, 신부)]



48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