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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124위 순교자전: 청주의 두 프란치스코, 배관겸과 김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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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28 ㅣ No.593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청주의 두 프란치스코, 배관겸과 김사집

 

 

2009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124위순교자들 가운데 1월에 순교한 분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많은 분들 가운데 배관겸과 김사집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두 분 다 청주에서 순교했고 세례명도 프란치스코로 같았습니다.

 

 

사제를 모시려고 동네에 경당을 마련한 배관겸

 

배관겸 프란치스코(1740-1800년)는 충남 당진군 석문면 장항리 출신으로, 선하면서도 확고한 의지를 가졌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에 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입교하였습니다. 그의 동생 배 마티아는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는 여정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배 프란치스코는 1791년 신해박해 때 고을 수령에게 박해를 받고 풀려난 뒤 서산 두름바위 동네로 이주하여 열성으로 신앙을 실천하였습니다. 얼마 뒤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양제)로 돌아와 살았습니다.

 

1798년 주문모 신부를 모시려고 동네에 경당을 마련하였는데, 그 해 10월 3일 밀고자 조화진과 함께 나타난 홍주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홍주로 압송되었습니다. 신자들을 고발하고 천주교 서적들을 갖다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고만 하였습니다. 오직 하느님을 위해 죽는 것만을 생각하였습니다. 청주로 이송된 그는 원시보 등 다른 교우들을 만나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는 형벌 때문에 온몸의 살이 해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뼈가 드러날 정도가 되었어도, 영웅적인 용기와 인내로 모든 것을 참아내었습니다. 형리들의 매질 속에 1800년 1월 7일(음력 1799년 12월 13일)에 순교하였습니다.

 

 

교회 서적을 필사하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준 김사집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창말 출신인 김사집 프란치스코(1744-1802년) 는 선하고 정이 많았고, 자주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과거 공부를 하다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험을 포기한 그는 세속과 단절하고 신앙 실천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보급하였고, 새 옷을 마련하게 되면 막 벗은 옷을 가장 빈곤한 이들에게 주었으며, 고을의 모든 사람을 정성껏 도와주었습니다. 해산하는 여인이 필요한 것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소리를 들으면, 당장에 그것들을 구해서 보내주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불행한 이들과 버림받은 이들은 그의 곁에서 확실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에게도 헌신적이었던 그는 곳곳에서 뛰어난 효자라는 평판을 들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체포된 신자들이 갖고 있던 필사본 때문에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두 명의 배교자가 그에게 와서 천주교 신자인 체하며 복음서 한 부를 베껴줄 것을 청하고 나서, 한 달 뒤에 그를 체포하러 왔습니다. 체포된 그는 덕산 관아로 이송된 뒤 유혹과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배교하라고 하자 “내가 섬기는 하느님은 크신 천주이신데, 어떻게 내가 그분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거절하였습니다.

 

옥중에서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님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너희들의 생을 정직하게 영위하도록 애써라. 그리고 나를 다시 보려는 생각을 더 이상 갖지 마라.” 하고 당부하였습니다. 그해 10월 해미로 이송되어 치도곤 90대를 맞았고, 두 달 뒤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청주로 이송되었습니다. 엄동설한에 청주로 가는 사흘간의 180리 길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습니다. 목에는 칼이 씌워져 있었고, 백발은 어깨 위로 헝클어졌으며, 상처의 피는 옷 속으로 스며들고, 옷은 살갗에 들러붙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한마디 불평을 하지 않고, 마음의 평온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청주에 도착한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1802년 1월 25일(음력 1801년 12월 22일) 청주시 남주동 장터로 끌려나가 장터를 한 바퀴 돈 다음 묵묵히 곤장 80대를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신덕, 망덕, 애덕이 끝까지 열렬하였고, 마음은 쇠와 돌같이 강직하였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하였습니다.

 

두 분의 프란치스코가 순교한 청주를 찾았습니다. 지난 2002년 5월에 청주교구에서 양업교회사연구소의 고증을 받아 중앙공원 안에 ‘순교자 현양비’를 건립하였습니다(54쪽 사진). 현양비에는 청주 지역 순교자들인 원시보 야고보 ? 배관겸 프란치스코 ? 김사집 프란치스코 ? 오반지 바오로의 순교터와 신앙 증거 장소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 현양비는 중앙공원 안에 있는 수령 900년이 넘은 은행나무처럼, 오래오래 순교자들의 신앙과 순교를 증언하며, 찾는 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쳐줄 것입니다. 2009년 소의 해에, 두 분 순교자처럼 우직하고 순박하게, 은근과 끈기, 여유와 평화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경향잡지, 2009년 1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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