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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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인간 생명의 존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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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54

인간 생명의 존엄성

 

 

만인이 이성을 갖춘 영혼을 가지고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어 같은 본성과 같은 원천을 가졌으며, 그리스도께 구원되고 같은 목적에로 함께 불리었으므로 모든 사람의 기본적 평등은 더욱 명백히 긍정되어야 한다. 물론 육체적 능력이 다르고 지성적 내지 윤리적 역량이 다르므로 모든 사람이 꼭 같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 기본권에 관한 모든 차별 대우는 그것이 사회적 차별이든지, 문화적 차별이든지, 혹은 성별, 인종, 피부색, 지위, 언어, 종교 등에 기인한 차별이든지, 그것은 모두 다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극복되어야 하고 제기되어야 한다.

 

사적이거나 공적이거나를 막론하고 인간 제도는 인간의 존엄성과 목적에 봉사하며 온갖 사회적 내지 정치적 노예화를 거슬러 투쟁하고 어떠한 정치 체제 하에서나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도록 진력해야 한다. 비록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까지는 장기간을 요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제도들은 점차로 최고의 현실인 정신 세계에 적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사목헌장, 29항)

 

 

1. 머리말

 

우리는 일찍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표현을 익히 들어왔고 지금에 와서는 우주를 정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매일 보고 듣고 살아간다. 이러한 인간의 노력은 인류복지에 이바지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의 됨됨이를 바수어버리거나 격하시키고 인류를 파멸 쪽으로 유도하는 인상을 주는 때도 자주 있다. 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들으면서도 볼 일이 있어서 관공서나 병원이나 심지어는 교회에마저 드나들 때 우리는 결코 평등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씁쓸한 느낌을 강요당할 때가 많다. 한 마디로 현실 사회에서는 사람 자체보다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인상이나 그 사람이 걸치고 있는 옷 또는 그 사람이 타고 다니는 승용차에 의하여 평가도 받고 대우도 받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실존에 대하여 회의도 가져보고 혼동도 하고 삶에 대한 의욕도 상실하곤 한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새 날을 맞이하는 때도 적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지나간 세대들이 제기하였던 질문을 되풀이하게 된다. 즉 사람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람에게 과연 존엄성이라는 것이 있는가? 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의 생명은 과연 신성한 것인가? 그렇다면 왜?… 끝이 없는 질문의 연속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도 인류의 역사 자체만큼 유구한 세월을 두고 헤아릴 수 없는 성현 석학들이 시도하였고 아직도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이를 만족하게 해준 대답은 아직 하나도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도하려는 것도 해답이라기보다는 그 많은 대답 가운데 하나로서 천주교회의 한 사제가 자기 신앙과 사제직의 테두리 안에서 사람 내지는 사람의 생명을 보는 관점을 비록 직업은 다르다 하더라도, 공동의 관심을 갖고 계신 의료계통의 형제자매들께 나누어드리는 데서 그치지 않을 수 없다.

 

 

2. 사람

 

그리스도교인에게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실재이다. 즉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면 그 존재는 이미 사람(personal whole)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은 단순한 존재도 아니고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이며 볼 수 있는 피조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존재로서, 가시적 세계와 불가시적 하느님 사이에 만물을 다스리지만 언제나 초월적 하느님 아래 서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성서에 바탕을 두고 볼 때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있어서 극치를 이룬다. 먼저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타나는 인간의 위치를 훑어보자. 1장에 서술된 창조사업을 보면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서 맨 마지막으로 창조되었는데 사람에 앞서 창조된 모든 피조물은 다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졌다. 즉 사람이 창조되기 위하여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과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여건이 다 마련되어야 했다.(1장) 이러한 인간의 특권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은 시편 작가가 전형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그를 하느님 다음 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주셨습니다.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시편 8,4-6)

 

다른 피조물은 한 마디 말로 이루어졌으나 인간만은 하느님의 결의에 의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창세 1,26-27) 하느님의 결의가 있었던 것도 인간의 존재를 크게 돋보이게 하거니와 더 의미 있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덕망이 있거나 인기가 높은 사람을 닮았다고 해도 으쓱대기 일쑤고 악명 있는 사람과 비슷하다고만 해도 화를 내는 것이 예사라면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갖고 있다고 할 때 이것은 엄청난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우리 안에 하느님이 현존한다는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은 사람을 버릴 수 있어도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을 지닌 사람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면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닮았는지 생각해 보자.

 

우선 사람은 그 존재의 원리로 영혼을 갖고 있다. 이 영혼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나게 한다. 이 영혼은 우리의 정신적(영적) 행위의 원천으로 우리로 하여금 알고 사랑하는 등 다른 동물이 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한다. 우리의 지식과 사랑은 한이 없고 심지어는 조물주인 하느님까지도 알고 사랑할 수가 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이러한 행위를 선택할 자유마저 주어져 있다. 인간은 무한한 지식의 소유자와 영원한 사랑인 하느님의 증거자이지만 이 증거자의 역할을 부인할 수도 있다. 이러한 자유가 부여되었기에 사람은 자기 행동 하나하나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도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랑을 하고 지적, 의지적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동물과 본질적으로 구분을 지어주는 요소이다.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게 된 과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창세기 2장에도 있다. 하느님은 마치 작품 제작에 자기의 온갖 심혈을 기울이는 예술가처럼 직접 진흙을 빚어서 사람을 창조한다. 그리고는 그 만들어진 사람에게 자기의 입김을 불어넣어 숨을 쉬게 한다.(2,7) 사람의 생명은 다름 아닌 바로 하느님의 생명의 연장이고 나눔이다. 하느님은 자기의 혼백을 피조물인 우리에게 박아준 것이다. 사람이 생육과 번성의 축복은 다른 동물들과 공통으로 받았지만(1,22-28) 다른 동물이 받지 못한 생명의 숨결은 사람을 다른 모든 생명체와 구별할 수 있는 축복 받은 특전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갖고 있는 피조물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과 직접 대화를 한다.(2장과 3장) 인간은 땅을 정복하고 모든 동물을 다스리라는 통치권을 위탁받아(1,28) 이 권한을 실제로 행사한다. 하느님이 짐승들과 새들을 아담(사람)에게 주면 아담은 그 동물 하나하나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동물의 이름이 되었다.(2,19) 사람은 가시적 무대인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의 우주적 대화를 나누며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데서 하느님을 닮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인간상의 한 단면을 보았다. 즉 사람은 창조사업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갖고 있으며 인간의 존엄성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을 보았다.

 

이제 우리의 관점을 우주 창조라는 거대한 차원에서 인간 출생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차원으로 좁혀보자. 먼저 개인의 수태과정과 출생과정을 보는 구약성서의 두 저자를 소개한다.

 

"당신께서는 이 몸을 젖같이 쏟으시어 묵처럼 엉기게 하셨고, 가죽과 살을 입히시고 뼈와 힘줄로 얽어 주셨습니다. 나에게 목숨을 주시고 숨쉬는 것까지 보살펴 주셨습니다."(욥기 10,2-12)

 

"당신은 오장육부를 만들어 주시고 어머니 뱃속에 나를 빚어주셨으니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 깊은 땅 속에서 내가 꾸며질 때 뼈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었습니다."(시편 139,13-15)

 

이 두 저자는 보편적인 인간의 생명보다는 자신들의 생명이 직접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확고부동하게 믿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욥기의 저자는 자기의 전실존이 하느님의 창조적 활동의 결과임을 수태의 전과정에서 창조주 하느님이 절대적으로 관여하였다는 것을 저자가 살았던 당시의 생태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묘사하고 있다. 시편 작가는 사람의 창조주는 곧 자기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역시 작가 자신의 생물학적 지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은 창조주일 뿐 아니라-사실은 그렇기 때문에-자기의 프라이버시가 되는 출생과정을 포함하는 자기의 전존재를 알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피할 수 없는 감시자나 감독자로 알고 두려워하거나 도망을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며(1요한 4,9) 사랑 때문에 우리를 만드시고 보존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가를 다음의 몇 가지 구절을 통하여 음미해 보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이사 43,1)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이사 43,4) "나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여 너에게 변함 없는 자비를 베풀었다."(예레 31,3)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국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너는 나의 두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이사 49,15.16) "(하느님)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시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마태 10,30.31)

 

이 하느님은 사람을 단지 창조하고 보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각 개인을 고유하게 부르고 각자에게 고유한 사명과 그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힘을 보장해 준다. "야훼께서 태중에 있는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에 이미 이름을 지어주셨다."(이사 49,1)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주리라."(예레 1,5.8)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잡혀갔을 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마태 10,16.19.20)

 

지금까지 본 것은 주로 구약성서에서 찾아본 인간 내지는 인간의 생명이었다. 이 정도로도 이미 인간의 품위가 얼마나 고상한 것이며 아무리 천하게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는 한 사람을 대할 때 또는 한 사람의 생명을 다룰 때 하느님을 대하고 하느님의 생명을 다루듯 경건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 그리스도교인의 입장을 부분적으로나마 설명이 되었으리라 기대한다.

 

 

3. 삶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교의 인생관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창조주와 사람의 관계를 전제로 하여야 함을 보았다. 그런데 창조주 하느님을 알기 위하여는-적어도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인(神人)을 대전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까지 보아온 사람 내지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관점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도 간단하게라도 이 점을 짚고 지나가야 된다고 본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더 깊게 찾아보고자 한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길잡이다. 그리스도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요한 14,6) 그를 통해서 하느님에게 가기 때문에 길이고, 그를 통해서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 즉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 하느님을 사람 안에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에 진리이고, 그 말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이며 모든 사람의 원천인 하느님을 알게 되고 동참할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꼭 같으며(요한 10,30; 히브 1,3; 필립 2,6) 그를 보는 사람은 곧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요한 14,9)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에 동참하는 최상의 수준이다. 즉 우리의 삶이 참으로 보람 있는 것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그 이상을 찾고 그의 삶에 동참함으로써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한 생명이며,(요한 1,4;14,6)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으며,(요한 6,18) 그는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겠다고 약속하며(요한 4,14) 자기가 부활이며 생명임을 주장할 뿐 아니라(요한 11,25) 하느님과 함께 생명 자체의 주재자임을 역설한다.(요한 5,26) 예수의 이 말들은 엄청난 주장이며 만의 하나라도 진실이 아닐 때는 사기치고는 너무나 황당한 사기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이 주장들을 반증할 수 없다면 그저 무관심하게 지나칠 수도 없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장과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다시 한번 그의 생애와 나의 생애가 연관성이 없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베들레햄의 외양간에 태어나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벌거숭이로 일생을 마친 그 사람이 바로 우리 삶의 이상이요 의미라고 하면 좀체로 납득이 가지 않을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이한택 주교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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