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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철학에서 본 뇌사: 생명윤리의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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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388

철학에서 본 腦死: 生命倫理의 觀點에서

 

 

I. 문제의 제기

 

인간의 죽음은 의사만이 판단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며, 종교인, 법률가, 철학자들도 또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문제이다. 인간의 죽음은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숨(호흡)의 정지와 심장박동의 정지로부터 도래한다고 사람들은 믿어왔다. 죽음은 신체의 모든 기능을 정지시키고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킨다고 사람들은 믿어왔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호흡과 심장박동이 정지하더라도 그의 체온이 남아 있으면 그 사람은 아직 완전히 죽은 사람이 아니며 아직 그의 영혼이 육체를 떠난 것이 아니라고 사람들은 생각해 왔다. 그리고 아무도 죽음의 순간을 명확하게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적어도 상당한 기간이 지난 연후가 아니면 이미 숨진 사람일지라도 살아 있는 사람으로 대우했다.

 

법률적으로는 1968년 이전에는 "죽음은 생명의 소멸; 생존하는 것을 중지하는 것; 혈액 순환의 완전한 정지와 동물적 기능과 식물적 기능의 소멸, 예컨대 호흡과 맥박의 소실"(Black's Law Dictionary)이라는 규정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인정했다. 이때까지는 의학적, 생물학적 죽음의 규정과 법률적 죽음의 규정간에는 거의 아무런 갈등도 없었고 윤리적으로도 아무런 난제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의학이 발달하여 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생명이 蘇生術과 인공호흡기에 의해 연장될 수 있게 되면서부터 腦死문제가 등장하게 되었고, 종전의 죽음의 판정의 기준에 대해 일부의 專門醫들이 문제삼기 시작했다. 그들은 뇌사가 곧 인간생명의 종말이며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심장의 운동이 먼저 정지했건, 폐장의 운동이 먼저 정지했건, 또는 그 두 기관의 활동이 동시에 정지했건 간에 뇌에 혈액이나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뇌의 기능은 마비되고, 한번 죽은 뇌를 아무도 소생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腦死가 바로 죽음이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腦死란 무엇인가? 腦死는 뇌가 질병이나 外傷에 의해 뇌의 조직이 파괴되어 뇌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고 나중에도 뇌의 기능이 도무지 회복될 수 없는 뇌기능의 완전정지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말해 大腦(celebrum), 小腦(celebellum), 腦幹(brain stem)의 모든 기능이 모두 상실되어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상태에서만 폐의 자동능력에 의해 심장박동이 유지되고, 네가지 生體徵候, 즉 맥박, 혈압, 체온은 그대로 있고 호흡은 인공호흡기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있는 상태를 지칭한다. 그러나 뇌사상태에 있는 사람도 심장사와 달리 척추성반사도 있고, 인공적인 방법으로 영양소 水液을 공급해 주면 腦死者도 일정기간 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심장의 활동이 정지하기 이전에, 다시말해서 각종 장기가 부패하기 이전에 신선도가 높은 臟器를 떼어내어 이를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식시켜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부의 전문의들은 대체로 장기이식을 전제로 죽음의 시점을 앞당겨서 뇌사를 법적으로 완전한 죽음으로 인정해 주기를 요망하고 이제까지의 죽음의 판정기준인 심장사를 뇌사로 바꾸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뇌사가 과연 한 인간의 죽음을 판정하는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 소위 뇌사의 판정기준이 되는 "不可逆性混睡狀態"(irreversible comma)가 바로 죽음의 충분조건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하는 것과 장기이식과의 연계성에 대한 문제, 뇌사자의 장기척출에서 수반되는 윤리적 문제, 뇌사의 용어사용에 있어서의 일반인들의 오해를 불식시켜야 하는 문제 등을 考究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기능적인 측면에서만 다룰 수 없으며, 의학적, 생물학적 측면 뿐만 아니라 윤리적 측면, 법적인 측면, 문화적 측면 등을 동시에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지 않을 수 없다.

 

 

II. 腦死와 죽음의 판정

 

브로디(Brody,1987; 377)는 "죽음의 정의는 인간의 생물학적 삶과 인간의 개인적 삶 사이에 획을 긋는 것이 되며, 어떤 사람으로부터 장기를 훔치는 것이냐 아니면 시체로부터 장기를 수확하는 것이냐 하는 중대한 물음의 판가름을 해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서양의 전통적인 죽음의 정의는 신체전부를 문제삼았다. 유태인의 전통은 한 개인이 그의 마지막 호흡을 뱉었을 때 죽음이 발생한다고 보았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영혼이 모든 육체안에 있다"(tota in toto, tota in qualibet parte)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현대에 들어와서 어떤 사람들은 죽음의 판정을 뇌 기능의 소실을 전제로 하려고 한다. 즉 "不可逆混睡狀態"(irreversible comma)와 "全面腦梗塞"(total brain infarction)을 죽음의 기준으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면 腦死의 판정은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뇌사판정의 기준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두가지 정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가) 不可逆混睡狀態의 主義.

 

腦死定義檢討를 위한 하바드 의과대학의 특별위원회는 1968년 비쳐(Henry K. Beecher, M.D.)를 위원장으로 하고 총 13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지금까지의 죽음의 기준으로서의 "생명의 기능의 중지"(cessation of vital functions) 대신에 "不可逆混睡狀態(irreversible comma)"를 새로운 죽음의 기준으로 대체할 수 밖에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Barger,1968;337-340). 환자가 불가역혼수상태에 있게 되어 "腦死"를 판정하는 특별위원회의 개념과 일치할 때, 죽음이 선언되고 인공 호흡기가 제거된다.

 

그러면 왜 이와같은 죽음의 정의가 필요한가? 여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인공호흡 및 보조장치의 발달은 치명적인 상해를 입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노력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노력은 때로는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심장을 계속 박동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뇌의 기능을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의식을 영원히 상실한 환자의 부담은 매우 컸으며 특히 그 환자의 가족과 병원과 또 병원의 침상을 필요로 하는 다른 환자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둘째로 죽음의 정의에 대한 종내의 기준은 장기이식을 위한 기관을 얻는데 논쟁을 가져올 수 있다.

 

불가역혼수상태는 많은 원인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분간할 수 있는 중앙 신경계의 활동을 전혀 가지지 못하는 혼수상태의 개인들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의학적인 문제 이상의 것이며, 윤리학적, 종교적, 법적인 문제들을 수반한다.

 

첫번째 문제는 영구적으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환자가 깊은 혼수상태에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주어진다(앞의책;338-339).

 

① 不受容性(unreceptivity)과 無反應性(unresponsivity)

 

환자는 외부에서 가해진 자극과 내적 욕구에 대해 완전히 인지하지 못한다. 대단히 강한 고통스런 자극을 주어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신음도 내지 않으며, 아무런 지체의 수축이나 호흡작용을 가쁘게 하지도 않는다.

 

②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아무런 숨도 쉬지 않는다.

 

자발적인 근육의 움직임이나 자발적인 호흡, 또는 고통, 접촉, 소리나 빛과 같은 자극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기준을 충족시키는 데는 의사가 적어도 한 시간 동안 환자를 관찰하는 것이 적절하다. 환자가 호흡기를 장착한 연후, 호흡기를 3분간 떼어 냈을때 자발적인 숨이 완전히 중단된다.

 

③ 아무런 반사작용도 없다.

 

중앙신경계 활동의 소멸을 수반하는 불가역적 혼수상태는 부분적으로도 반사를 이끌어낼 수 없음을 명백히 한다. 눈동자는 고정되고 팽창되어 있고 밝은 빛을 직접 쏘여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임상에서 명백하기 때문에 이것의 현존에 대해 아무런 불확실성도 없다. 머리를 좌우로 돌려보아도 눈꺼풀의 움직임이 전혀 없다.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고 삼키거나 소리를 내거나 하품하지 않는다. 각막반사도 정정안구반사도 咽頭반사도 없다. 아무런 腱반응도 없다. 뇌의 혈액의 순환이 없다.

 

④ 腦波電圖(EEG)가 횡선(flat isoelectric)을 그린다.

 

각종 유발검사에서도 5mv이상의 뇌파를 유도해 낼 수 없다. 그러나 뇌사뇌파가 일시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경우; 예컨대, 수면제 과용, 무산증, 저체온(32.2 C), 뇌의 외상, 뇌의 염증을 배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뇌파소견은 적어도 24시간 아무런 변화없이 계속 똑같이 반복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4가지 특성이 어떤 환자에게 나타났을 때, 의사는 결정권을 가진 환자의 가족과 보호자에게 즉시 이 사실을 통고하고 환자가 이제는 사망했다고 선언하고 나서 인공호흡기를 뗄 수 있다. 이러한 결정은 담당의사가 이 환자의 용태를 직접 잘 알고 있는 또 다른 의사 1명 또는 더 많은 의사와 상의를 한 후, 자기책임하에 행할 수 있다(Mappes &Zembaty, 1981;359-360). 그렇다면 이때 의사가 뇌사자로 부터 인공호흡기를 떼는 것을 뇌사자의 친권자로 하여금 결정하도록 하는 것은 책임회피의 오해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의사는 환자가 이미 사망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인공호흡기나 그밖에 인위적인 적극조치(intensive care)가 이제는 불필요해서 이를 제거한다고 해야만 일관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불가역혼수상태"를 뇌사로 정의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의사들도 있다. 엔겔하르트(Engelhardt,1981)는 죽음의 기준을 뇌의 기능의 소실에 두는 것은 인간의 동물적 삶이 식물적 삶보다 우위에 있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또 불가역혼수상태는 엄밀히 말해서 "대뇌의 신피질의 죽음"(neocortical death)일 뿐, "완전한 뇌사(total brain death)가 아니라는 것이다(Brody &Engelhart,1981;363).

 

뇌사상태의 환자가 인공호흡기를 사용하여 그의 심장과 폐의 기능이 유지되는 경우, 간장, 신장 등의 다른 기능들이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생물학적으로 볼때, 그는 완전히 죽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죽음의 순간, 즉 죽음의 정확한 시간을 누가 어던 방법으로 정확히 측정할 수 있겠는가? 죽음이 어떤 과정속에서 발생한다면 뇌사는 죽음의 과정(process), 즉 죽어가는 과정의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며 따라서 죽음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의사의 죽음의 진단에 있어서 뇌사의 판정이 중요하다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뇌사의 판정이 곧 한 인간의 완전한 죽음이라는 것은 어떤 의사들의 견해일 뿐이다. 죽음의 진단과 검증은 의사의 소관사항이나 인간의 생사문제는 의사뿐만 아니라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 이해를 도외시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의 진단 및 확인과 죽음의 정의를 구별해야 한다. 죽음의 진단은 생물학적, 의학적 과제일 뿐, 철학적, 종교적 과제가 아니다.

 

나) 全面腦梗塞

 

1984년 스웨덴에서는 "죽음의 개념: 죽음의 정의에 대한 스웨덴 위원회의 보고서"(The Concept of Death: Report of the Swedish Committee on Defining Death)가 간행되었다. 이 보고서는 죽음의 정의에 대하여 매우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보고서는 "죽음을 정의하는 일은 인간 생명의 본질적 특색이므로 생명의 결핍이 곧 죽음과 동일시 되는 것을 설명하는 일이며, 이 일은 무엇보다도 죽음이 포함하는 의미에 관하여 철학적, 종교적, 윤리학적, 심리학적인 관념들의 분석들을 통하며 이룩되지 아니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죽음의 개념은 인간의 生死觀을 구성하는 다양한 생각들의 종합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의 개념은 과학적 사실에서 연역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는 개방적 개념이기 때문이다"(Swedish Committee on Defining Death, 1984;26). 그러나 죽음에 관한 개념이 단지 철학적 및 신학적 토대 위에서만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의학적 및 생물학적 사실들이 죽음의 정의의 내용을 위한 기초가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의 죽음이 시간적으로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의학적인 관행으로 되어 왔다(Lanb, 1988;71-75). 그래서 "스웨덴 보고서"는 "비록 모든 개개의 부분(세포 및 장기)들이 아직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죽음이 일어났을 것으로 여겨지는 과정 중의 단계를 정확하게 지적해야 하며(앞의책;21), 죽음의 선언을 신체 전체, 즉 그 여러 부분들이 다 죽고 날때까지 연기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관행과도 위배될 것이다"(앞의책;22)고 기술했다. 그리고 스웨덴보고서는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한 인간은 그가(또는 그녀가) 육체적, 정신적 기능을 포함하는 신체적 기능들을 통합 조정하여 하나의 기능적 단위를 이룩하는 모든 수용능력을 완전히 복귀 불가능하게 상실했을 때 죽은 것이다"(앞의책;35). 그리고 스웨덴보고서는 죽음의 시점을 "한 개인이 그의 뇌의 모든 기능들을 전적으로 복귀 불가능하게 상실하였을 때"(앞의책;37)라고 밝혔다.

 

스웨덴 위원회의 이러한 죽음을 판정하는 정의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이 정의는 인간의 정신적 측면이나 육체적 기능,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인간 생명이 가지고 있는 양면을 두루 고려하고 있으며, 죽음은 한 인간의 육체적 및 정신적 기능을 통제하는 수용능력이 모든 측면에서 상실되었음을 강조하고, 죽음을 診斷할 때 臨床的으로 유익하게 적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준다고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스웨덴 위원회는 "뇌사(brain death)"라는 말은 "한 개인의 죽음에 그 뜻의 초점이 있는 것이지, 그 개인의 기관의 죽음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스웨덴 위원회는 죽음을 "뇌사" 또는 심장사(heart death)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일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혼동을 야기하기 쉽다고 한다. 그래서 스웨덴 위원회는 죽음에 대한 적절한 표현은 "全面腦梗塞(total brain infarction)"(앞의책;38) 이라고 말한다.

 

스웨덴 위원회는 全面腦梗塞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① 大腦와 小腦의 기능의 소실(결여)

환자는 혼수 상태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뇌가 고등기능을 하고 있다는 아무런 신호도 없다.

 

② 腦幹 기능의 소실

뇌간 기능의 상실의 결과로 모든 두개골 내의 반사작용이 소멸한다.

 

③ 호흡정지, 자발적 호흡의 결여

뇌간의 기능 정지의 결과로서 자생적인 호흡 능력이 소실된다. 肺의 통기는 인공호흡장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Swedish Committee;41).

 

그리고나서 그 위원회는 기능상실의 복귀 불능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附記했다:

 

① 판정의 과정은 두개골 내의 뇌압이 두뇌의 피의 흐름을 방해할 만큼 높은 경우를 수반할 것.

② 藥物中毒과 體溫低下의 경우는 제외시킨다.

③ 뇌의 모든 기능들의 상실은 다시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長期間 지속되어야 한다(동보고서;42).

 

이상과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었을 때, 스웨덴 위원회는 죽음을 판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스웨덴 위원회의 죽음의 판정의 기준도 결국은 다른 뇌사 인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뇌의 기능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죽음의 판정을 기능적인 면만을 가지고 확언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컬버와 제르트(Culver and Gert, 1982;180)는 "죽음의 과정(the process of death)"과 "죽어가고 있는 과정(the process of dying)"을 구별하면서, "뇌사는 죽어가고 있는 과정이지, 죽음의 과정이 아니며, 죽음의 과정은 어떤 사람이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을 때 시작하는 것이며, 죽음은 죽어가는 과정의 종결"이라고 말한 바 있다. 램(D. Lamb, 1988;81)도 이 사실을 강조하면서, "죽음은 죽어가는 과정이 정지하고 신체의 와해의 과정이 시작하는 순간을 지적하는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生醫倫理學者들 중에는 사람의 죽음이 하나의 점진적 과정이냐 아니면 하나의 순간적 사건이냐를 두고 논란하기도 하지만(Lamb, 1988;79-82), 대체로 인간의 죽음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면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는 경향이 오늘날 우세하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심폐기능의 완전한 소실의 순간을 의사들은 사망시간으로 사망진단서에 기록하는 관행이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뇌사의 시간과 심폐기능의 완전한 소실의 시간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차가 있고 인위적으로 그 시간차를 늘릴 수도 있다. 뇌사는 말하자면 죽음의 과정의 초기 단계일 수 있다. 문제는 뇌사를 죽음의 판정의 기준으로 삼으려는 의사들은 이 시간차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신선한 장기를 척출해서 이를 필요로 하는 다른 환자에게 이식시키려는 데 있다. 우리는 여기서 뇌사를 완전한 죽음으로 인정함으로써 어떤 사람들이 혜택 내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과 뇌사가 곧 인간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뇌사인정을 우리의 전통적인 윤리관과 사회문화적 통념에 비추어 살펴보자. 유교윤리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아직 심장과 맥박이 뛰고 있는 사람을 사망했다고 볼 수 없다. 한국인의 전통 의식은 유물론적인 기능주의적 사고가 근저에 깔려 있는 西洋醫學者들의 의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안나스(Annas, 1983;21)는 1983년 2월 한국인 권투선수인 김덕수의 사망과 관련된 토론을 다음과 같이 보고한 바 있다:

 

"네바다(Nevada)주는 뇌사를 인정하는 법을 가진 주이다. 김덕수는 권투시합이 끝나자마자 사망진단이 내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덕수로부터 인공호흡기는 즉시 제거되지 못했고, 그의 부인의 확인과 그를 한국인 의사가 진찰할 것이 요청되었다. 그러나 입석한 한국인 의사는 '한국인의 문화에서 보면 김덕수는 아직 살아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의사는 그로부터 호흡기를 떼는 결정을 법과 의료윤리와 가족의 소원과 일치할 때에만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인용되었다. 나중에 그 의사는 판사에게 자기를 보호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판사의 확언과 호흡기를 떼어도 좋다는 환자가족의 확언을 받고 나서야 김덕수가 실제로 죽었다고 선언했다. 네바다주의 뇌사인정보다는 公論이 더 중요한 결정자가 된 것이 분명했다."

 

안나스의 이 보고는 뇌사인정은 담당의사보다는 여론과 친권자의 소원이 더 중요한 관건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의 확정은 실제로 사회적 문화적 관행과 여론과 가족의 소원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브로디와 엔겔할트(Brody and Engelhardt Jr, 1987;379)는 이와 비슷한 뇌사인정의 곤란성과 관계되는 케이스를 보고한 것이 있다.

 

"A라고 부르는 부부가 교통사고로 뇌에 치명상을 입은 딸을 두었는데 그들은 그녀의 딸이 더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의사는 그녀가 입원한지 3일이 되는 날 A양은 뇌사이며 그녀는 이제 죽었다고 그녀의 부모에게 통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양친은 병원이 그녀의 딸을 살해하려고 한다고 주장하고 대단히 분개했다. 그들은 그들의 딸이 인공호흡기의 도움으로 지금 숨을 쉬고 있고 그녀의 가슴을 만지면 따뜻하기 때문에 그녀는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엇보다도 그녀의 맥이 뛰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만일 당신네들이 호흡기를 떼어 나의 딸을 죽이려고 든다면 나는 당신들을 살인범으로 법정에 고발하겠다고 울부짖었다."

 

그들은 또 뇌사인정을 주창하는 사람들도 뇌사상태의 산모의 생명을 연장할 수 밖에 없는 경우에 대하여 보고 했다:

 

"임신한지 20週가 되는 31세난 부인이 머리에 총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왔는데, 그녀의 뇌의 기능은 완전히 소실되었다는 것이 의사들에 의해 진단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산모의 배속에 들어있는 아기가 조기출산되지 않도록 가능한 오랫동안 산모를 살려두고 아기가 살 수 있는 기회를 가지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뇌사를 인간의 죽음이라고 주장하던 의사들도 그의 요청을 수락하고 아기가 출산될 때까지 그 산모를 살려두고 마침내 무사히 아기를 구해냈다"(같은책;380).

 

그러면 이  뇌사샹태의 산모는 참으로 죽은 사람인가? 만일 그녀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면, 시체에다가 인공호흡을 하고 영양제를 주사하고, 그 밖에 흡입관을 꽂는 것이 되지 않는가? 태아로 하여금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사람을 완전히 죽었다고 말할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그 산모는 그녀의 뇌기능이 임상적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살아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딜론(Dillon), 리(Lee), 트로노론(Tronolone), 북크왈드(Buchwald), 푸트(Foote)도 임신 26주가 되는 산모가 뇌사라고 진단을 받은 후, 4일 만에 개복수술로 아기를 무사히 출산한 것을 보고한 바 있고, 심지어 뇌사후 3주 지나서도 아기가 출산된 것을 보고하기도 한다(Dillon, Lee, Tronolone, Buchwald, Boote, 1982;1089-91).

 

한국인의 전통적인 유교적 윤리 의식으로는 설사 뇌의 기능이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하더라도 맥박이 아직 뛰고 있고, 따뜻한 체온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죽은 것과 죽어가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뇌사자가 몇 시간, 몇 주일 밖에 더 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 기간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소중한 시간이다. 한국인은 임종의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임종의 순간, 환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임종의 순간을 지켜보기 위하여 수만리에서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찾아온다. 이것은 참으로 의미없는 일인가?

 

만일 뇌사자가 완전히 죽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에게 남은 여생을 설사 짧은 기간이라도 다른 사람의 생존기간의 길고 짧음과 함부로 비교할 수 없다.

 

인간의 생사문제는 量的 시간을 준거로 삼아 그 가치를 논할 수 없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의 얼마남지 않는 생명도 존귀한 것이다.

 

의사는 환자의 뇌의 기능을 임상적으로 진단하여 그 환자의 죽음을 개연적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며 죽음의 정확한 순간을 확인해 줄 수는 없다(Walther, 1979;35). 의사의 임상적 소견이 완전한 죽음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III. 뇌사판정과 윤리문제

 

이제 우리가 뇌사를 죽음의 판정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자. 그러면 뇌의 기능의 전면적 소실을 기준으로 하여 한 사람의 죽음을 진단할 때, 그 진단은 과연 실제로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을 수 있는가?

 

의학적 진단을 하는 문제에서 우리는 항상 誤診할 위험성이 있다는 점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을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으로 진단하는 소극적 오진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것으로 진단하는 적극적 오진은 용서받을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全面腦梗塞이라는 진단을 내릴 때, 최대한의 안전책을 강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우기 뇌사판정 후에 곧 장기 척출이 있게 되면, 이 때의 오진은 바로 살인을 범하게 된다.

 

죽음을 진단하는 경우에 臨床的 절차의 신빙성과 결론의 확실성은 그것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거의 100%의 보장이 요청된다.

 

따라서 뇌사판정의 기준이 이론적으로 완벽하더라도 임상적으로도 절대로 오진이 없다는 보장을 줄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 신경과 계통의 專門醫들은 확실하게 뇌 전체 기능의 완전한 소실과 뇌기능의 회복불능상태를 임상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의 의사들의 오진율이 높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사들이 높은 수준의 도덕률에 따라 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충분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양심적인 의사들의 진단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법은 원래 훌륭한 양심을 가진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이하의 양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 특히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을 제어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면, 뇌사인정의 法制化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에 들어와 母子保健法이 임신중절에 대한 의학상의 불가피성을 인정한 후부터는 임신중절이 합법화되고 급기야 오늘날 우리나라의 성도덕의 문란과 인명경시사상을 더욱 파급시킨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신경과전문의인 슈몬(Shewmon, 1992;2)은 솔직히 보건관계 전문가를 포함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腦死의 개념에 대해서 말로만 옳다고 하는 형편이다. 반면에 그들은 마음 속으로는 뇌사는 살아있는 (죽어가고는 있지만) 환자로부터 장기를 제거하는 일을 그럴듯이 정당화하기 위해서 발명해 낸 법적인 虛構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다"고 갈파한 바 있다. 슈몬 자신은 뇌사를 엄밀한 조건 아래에서 정당한 절차를 밟았을 때 神經生理學을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은 뇌사를 죽음의 판정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전문가들 간에 도덕적 확신에 대한 폭넓은 의견의 일치가 있는 곳에서는 그 사회가 신경학적 근거에 의해 죽음의 진단을 인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적절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반면에 이것이 주요 쟁점으로 되어 있는 사회에서는(예컨대, 일본이나 덴마크), 죽음의 기본적 개념적 대한 보다 강력한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장기이식을 계속 금지하는 것 또한 적절한 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Shewmon;2). 그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장기기증자가 실제로는 살아있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근본적 전제를 보다 철저히 연구할 수 있을 때까지 이 행위의 연기를 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良心의 타협이 계속됨으로 말미암아 그들 개인적으로나 그 직업적인 전체의 집단적 차원에서나 인격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앞의책;3).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국민들간에 뇌사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부족함으로 뇌사를 죽음의 판정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IV. 뇌사와 장기이식의 문제

 

뇌의 기능과 관련시켜 죽음을 판정하려는 중요한 동기는 주지하다시피 죽은 사람, 또는 소생이 불가능하다고 보여지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신선한 臟器'(vital organs)를 이를 필요로 하는 다른 환자들에게 이식시키는 것을 합법적으로 인정받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장기를 기증받는다면 생명을 더 연장할 수 있는 사람의 경우 중요한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고, 또 의사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을 우리는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이식에 있어서 대전제가 되어야 할 점이 있다. 인간의 장기는 단순히 기계의 부속품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고장난 기계는 다른 기계의 부속품으로대치시켜 고장난 부분을 고칠 수 있다. 두 대의 고물 기계가 고장났을 때, 한 기계를 완전히 폐기처분하고 그 폐기된 기계에서 사용가능한 부속품을 떼어내어 다른 기계의 고장난 부속품과 바꾸어 줌으로써 다른 기계를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이때 어떤 기계를 폐기처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는 대체로 효용가치에 의거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고장난 기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떤 사람도 다른 어떤 사람의 대용품이 될 수 없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강요받아서도 안된다. 사람은 늙었거나 젊었거나 병들었거나 건강하거나 간에 어떤 사람도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소중하거나 덜 소중하지 않고 모든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존중받아야 한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존귀하다. 따라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 불치병이 든 사람의 생명도 존귀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육체의 보존이 소중하다면 죽어가고 있는, 그러나 아직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육체보전도 소중하다. 따라서 80세가 되는 병든 노인의 1년과 20세가 되는 청년의 1년과 10세가 되는 소년의 1년은 어느 것이 더 가치있다고 단정할 수 없고, 80세 노인이 한 달 더 사는 것과 20세 청년이 1년 더 사는 것을 산술적으로 계산해서 청년의 삶이 더 가치있다고 단정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腦死를 죽음으로 인정하는 문제와 그 사람의 장기를 이식하는 문제를 구별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뇌사가 곧 인간의 죽음을 판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말과 어떤 사람의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함으로써 또 다른 사람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과 죽음은 공리적인 면에서 규정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공리적인 면에서 뇌사를 인정하자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경시를 야기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專門醫가 뇌사자에게 인위적인 적극요법(intensive care)이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는 확신이 섰을 때, 의사는 자기 책임하에 환자로부터 인공호흡 조치를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의사의 권한에 속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호흡기를 사용한다든가 그 밖에 적극요법은 원래 생명보존과 치유를 목적으로 마련된 것이므로, 그 목적이 소멸되었을 때 이를 중단시키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뇌사자일지라도 아직 심장과 맥박이 뛰고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장기가 엄연히 활동하고 있을 때 장기를 척출함으로서 그 환자의 남은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은 일종의 安樂死와 관련되는 중요한 도덕적 사건이다. 만일 뇌사자의 장기척출이 허용된다면, 뇌사이외에도 소생할 수 없는 영구적인 식물상태의 환자라든가 곧 죽게되어 있는 사형수의 장기척출도 적법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쐐기이론(wedge argument) 또는 도미노이론이 적용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실하고 엄격한 뇌사판정의 절차를 거쳐 어떤 사람의 뇌사를 그 사람의 죽음이라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몇가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의사들은 장기이식의 편의와 그 시술의 성공확률을 높이기 위해 뇌사판정의 진행과정에 부당한 영향을 주거나 서두르지 않는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한국의 많은 의사들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자연주의(naturalism), 행동주의(behaviorism), 기계론적 기능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볼 때, 의사들은 첨단시술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도 되도록 많은 신선한 장기를 획득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의혹의 해소는 뇌사인정의 선결요건이다.

 

장기이식은 무엇보다도 본인의 사전동의나 적어도 최근친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한국인은 곱게 깨끗하게 임종하기를 바라며, 또 시신도 깨끗하게 보존되기를 바라며 시신을 정중하게 모시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특정한 종교를 신봉하는 것과 관계없이 유교적 전통의 영향을 받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부모나 자식의 시신을 기계부속품과 같은 것으로 보지 아니함으로 장기의 척출은 도무지 용납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더군다나 아직 맥박이 뛰고 있고 따뜻한 체온을 지니고 있는 부모, 형제, 자녀의 장기를 척출해 내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은 법의학적으로 사망의 정확한 원인을 해명하기 위해 시체부검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 이것은 매우 불행한 사건으로 보며 '두번 죽는다'는 말을 흔히 한다.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은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고 가르치고 있다. 많은 종교인들은 인간의 육체적 모든 기능이 소멸하는 순간, 인간의 영혼이 바로 육체를 떠난다고 믿지 않으며 적어도 몇시간 또는 하루나 이틀 육체주위에 머물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사망이 확정된 후에도 입관을 늦추며 매장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시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신의 입관과 매장시간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의사에 의하여 사망이 확정된 후에도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시행하는 것은 전세계 어디서나 일반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장기척출도 사망이 확정된 후 적어도 24시간이 경과한 후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망시간의 판정은 의사의 소관일 수 있으나 장기척출은 의사에게만 위임할 수 없다. 장기척출은 장기의 기증자가 반드시 완전히 죽었다는 엄밀한 검증이 있고 난 후에 실시해야 하며, 환자의 사망판정에 관여한 의사는 절대로 장기이식에 관여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의 장기척출과 그 사람의 죽음의 판정은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뇌사인정이 장기이식의 전제가 되어서는 안되며, 이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은 경우 장기척출은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되며 심지어 살인을 범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기이식을 오용할 수 있는 여지를 실제로 확실하게 방지할 수 있는 제도를 먼저 강구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장기는 단순한 물건처럼 매매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이것은 철저하게 엄금되어야 한다. 만일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그 사회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의사가 뇌사상태의 환자로부터 언제 인공호흡을 중지시킬 수 있느냐는 절차상의 문제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의사는 뇌사자가 이제는 완전히 죽었다고 사망자의 친권자에게 먼저 통고하고 친권자의 오해가 없도록 한 후 이미 죽어버린 사람으로부터 인공호흡기를 철거하는 순서를 밟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적극요법을 중단함으로써 이것이 환자의 사망시간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나는 또 다른 죽어가고 있는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와 열의를 가진 의사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의사들은 공리적인 관점에서 신선한 장기이식의 획득에만 욕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공장기의 연구와 인공장기이식의 연구에 가일층 분발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장기이식을 필요로 하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의사들의 관심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실제로 장기이식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이며, 우리 주위에는 의료의 혜택을 제대로 받으면 더욱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의사들은 유념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입법자들에게도 당부하고 싶다. 법은 일부의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법은 생사와 직접 관계되는 어떤 경우에도 그 법이 악용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아서는 안된다. 따라서 입법자는 의사뿐만 아니라 종교인, 윤리학자, 일반 시민의 의견도 두루 존중하고 국민들간에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진 후 뇌사인정법에 착수해 주기를 바란다.

 

 

V. 맺는 말

 

우리는 앞에서 뇌사의 정확한 정의, 뇌사를 죽음의 판정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論據와 이때 생길 수 있는 윤리적 문제들과 뇌사인정과 장기이식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 등을 살펴 보았다.

 

우리는 신경전문의가 완전한 뇌사, 즉 全面腦梗塞에 이르는 뇌사자를 사망했다고 판정하고 그로부터 적극요법을 중단시킬 수 있음을 살펴 보았다. 우리는 죽음의 판정 기준을 心肺臟死로부터 뇌사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도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뇌사진단은 죽음의 판정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뇌사는 의학적으로 죽음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생물학적으로도 완전한 죽음이 아니며 더우기 윤리적, 종교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죽음 자체를 의미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죽어가는 과정과 죽음의 과정 그리고 죽음을 구별해야 한다. 뇌사는 죽어가는 과정의 하나의 단계이며 죽음은 죽어가는 과정의 종식을 의미한다. 예컨대, 심장과 같은 장기의 척출은 죽어가고 있는 과정중에 있는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죽음의 과정이 시작된, 즉 완전히 죽은 사람으로부터 다시 말해서 신체가 와해되기 시작할 때부터 허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의 생명을 존중해야 하는 것처럼,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의 얼마남지 않은 생명도 존중해야 하며, 인간의 생사문제를 기능적인 면에서만 공리적으로 다루어서도 안된다.

 

뇌사는 뇌의 전기능의 소생불능과 파괴를 의미해야 하며, 철저하고도 엄격한 검증을 거쳐서 절대로 오진이 될 수 없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인정될 수 있다. 뇌사인정을 하는 경우 어떤 경우에도 오용될 수 있는 소지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뇌사판정은 장기이식문제와 연관되어서는 안된다. 장기의 이용과 뇌사판정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뇌사판정은 서두르거나 장기이식의 영향도 받아서는 안된다.

 

장기는 어떤 경우에도 매매가 엄금되어야 하고 기증자의 사전유언과 가장 가까운 친권자의 동의에 의해서만 장기척출은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뇌사에 대한 의혹의 불식과 죽음의 기본적 개념에 대한 충분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기 까지는 뇌사인정은 입법화하지 말아야 하며, 더우기 뇌사자의 장기이식은 금지되어야 한다. 우리는 뇌사인정의 법제화를 서두를 필요가 없고, 인공장기에 대한 연구와 인공장기이식술에 대한 연구에 더욱 매진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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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rger, A. Clifford (1968),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Vol. 205, Nr. 6 (August, 6).

- Brody, Baruch A. and Engelhardt, Jr., Tristram H. (1987), Bioethics, Prentice-Hall, Englewood Cliffs, New Jersey.

- Culver, C.M. and Gert,B.(1982), Philosophy in Medicine: Conceptual and Ethical Issues in Medicine and Psychiatry,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 Dillon, W.P., Lee, Richard V., Tronolone, Michael J., Life Support and Maternal Brain Death during Pregnancy, Jour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Vol. 248, 9(Sept.)

- Ingvar, David H.(1985), "The Concept of Death: Comments on an Official Inquiry in Sweden," in The Artificial Prolongation of Life and the Determination of the Exact Moment of Death, ed. Carlos Chagas, Pontificate Academiae Scientiarum Scripta Varia.

- Mappes, Thomas A. and Zembaty, Jane S. (1981), Biomedical Ethics, McGraw Hill, New York.

- Shewmon, D. Alan(1992), "Clinical Determination of Death in Infants and Children," International Congress on Care for the Dying Person, March, 15-18, Rome, Italy.

- Swedish Committee on Defining Death(1984), The Concept of Death: Report of the Swedish Committee on Defining Death, Stockholm.

- Walther, Gotfried F.(1979), "Die Feststellung des Todes," hrsg. Rabanus Maurus, Akademie, Knecht, Frankfurt am Main.

 

<Abstract>


Braindeath in the Sight of Bioethics 

  

Dr. Kyohun Chin(Prof. of S.N.U., Philosophy)

 

I will make clear that the adoption of a brain-oriented concept of death is based on recognizing the primacy of personal human life over merely vegetative human life. I then suggest, taking this underlying rationale to its logical conclusion, that brain death is not total death and not total biological death. Diagnosing death is a medical, not a moral, religional or social-cultural task.

 

How a corpse is to be treated after death is a task which affects relatives of the dead. The physician has a duty to maintain life. Once he is satisfied beyond doubt that the patient is dead, he has no moral duty to ventilate a cadaver. He can remove the mechanical respiratory system from the patient and stop intensive care for the dead.

 

If we regard death as a process, then we must distinguish the process of dying from the process of death. Death is the event which indicates the moment when the process of dying ceases and the process of disintegration begins. We can allow the transplant only the organs from the cadaver of the dead.

 

It is appropriate for korean to continue banning vital organ transplantation, until a full agreement on the fundamental concept of death can be reached and also we have a large consensus of moral certainty among koreans concerning braindeath and the transplantation.

 

[진교훈 교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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