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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안락사에 관한 윤리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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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391

안락사에 관한 윤리문제

 

 

I. 서론

 

미국 미주리 주에 살고 있는 33세의 낸시 크러잔(Nancy Cruzan)은 1983년 교통 사고로 뇌를 심하게 다쳐 회복 불능의 혼수 상태로 8년 동안 병원에서 지내왔다. 그녀의 부모는 낸시가 평소에 "만일 사고로 의식 불명의 상태가 되면 자기에게 더 이상 치료하지 말고 죽게 해달라"는 말을 근거로 법원에 모든 치료 및 급식을 중단하게 하고 죽게 해달라고 제소했다. 실제로 유서 및 유언은 없었지만, 그녀의 평소의 대화를 근거로 '죽을 권리'를 주장하며 법정 투쟁을 3년간 해왔다. 처음에 연방 대법원에서는 낸시가 스스로 죽기를 원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음식과 물은 계속 공급해야 한다고 판결했었으나, 그 후 그녀의 친구들의 증언에 따라 본인의 죽을 의사를 확인한 뒤 1990년 6월 25일 모든 치료와 급식을 중단해도 좋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그 해 12월 26일, 급식 튜브를 제거한 지 12일 만에 그녀는 숨졌다.    미국 미시간 주의 의사 잭 키보어키언(J. Kevorkian)은 1990년 이후 암, 알츠하이머병, 다발성 경화증, 심장병 등의 불치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죽기를 원하는 환자 15명의 안락사를 도왔다. 그는 개폐식 클립이 달린 일산화탄소 마스크를 쓴 환자가 직접 클립을 잡아 당겨 일산화탄소를 흡입하도록 해, 의식을 잃고 몇 분 안에 숨지도록 했다. 그는 1990-1991년 사이에 살인 혐의로 세 차례 기소되었으나 매번 기각되었다. 그는 환자의 병세로 보아 회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고 고통이 계속될 때, 본인이 원하면 안락사를 돕는 것이 의사의 임무라고 하며 이로 인하여 감옥에 가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최근에 매스컴을 통하여 세상에 큰 물의를 일으켰던 위의 두 사례는 지속적으로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으면서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환자들의 생명을 끊는 일을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지속적인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끊을 수 있는가, 아니면 거의 회복될 수 없는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계속적인 치료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결단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며, 인간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근본문제에 이르게 된다. 이 글의 목적은 현재 여러 곳에서 절박하게 당면하고 있는 안락사 문제에 관한 개념, 분류, 찬반의 논거들을 찾아보고 비판적인 성찰과 함께 우리 그리스도교에서 제시하는 해답과 구체적인 지침을 모색해 보고자 함이다.

 

 

II. 안락사의 개념과 활동

 

'안락사'라는 의미는 희랍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편안한 죽음"(eu thanatos)을 뜻한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회복할 수 없는 병으로 인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계속적으로 받고 있는 환자들과 노인 환자들을 그들의 원의에 의해서거나 또는 가족 및 다른 사람들이 원해서 의사들의 개입으로 죽게 하는 것을 말한다.1) 즉 극도의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또는 가족과 사회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울 수도 있는 정신 질환 및 불치병에 걸린 인간에게 비참한 생명의 연장을 중단하기 위하여 행하는 안락 살해(mercy killing)를 흔히 "안락사"라는 말로 채용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는 1만 명이 넘는 영구 식물 상태의 환자들이 있고, 또 매년 수천 명의 불구아들이 태어난다. 이들은 가족들과 사회의 거추장스러운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현대 의학에서 생명을 유지시키는 의술은 계속적으로 발달하여서 인간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점점 길어졌고 따라서 이러한 조건 하에 있는 사람들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이들 때문에 막대한 의료 비용이 들어가기에 본인은 물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판단하여 안락사를 선택하게 하자는 의견들이 많이 대두되고 또 국가에 따라서 실제로 실시하는 경우가 있다. 1936년 영국의 모이니한 경(Lord Moynihan)은 "병의 정도가 심하거나 치명적이어서 그 고통을 더 참을 수 없거나 줄일 수 없을 때에는 적극적인 혹은 간접적인 안락사가 허용될 수 있어야 한다"2)고 주장하면서 영국 의회에 법안을 제출한 바 있고 현재 네덜란드에서는 고통받고 있는 환자 자신이 안락사를 원하면 의사는 이것을 수행할 수 있도록 법원에서 허락하고 있다. '자발적 안락사를 위한 협회'에 의하면 1985년 약 이천 명의 환자들이 의사의 독극물 주사로 안락사를 원한다고 신청하고 있다.3) 한편 '국제 안락사 반대 수행기구'의 수많은 회원들은 안락사는 절대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구에서도 이미 많은 병원과 양로원 등에서 수행되고 있는 소극적인 안락사 혹은 죽게 두는 일(letting die)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III. 안락사의 분류(安樂死의 分類, Classification of Euthanasia)4)

 

안락사의 분류는 그 생명체의 의사에 따라, 시행자의 행위 방법에 따라, 또 윤리적인 관점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생명체의 의사(意思)

시행자(施行者)의 행위

생존의 윤리성

1. 자의적

2. 임의적

3. 타의적

소극적

간접적

적극적

자비적

존엄적

도태적

 

1. 생명체의 의사에 따라

 

1) 자의적 안락사(Voluntary Euthanasia) : 생명 주체의 자발적 의사에 따르는 안락사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다시 두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어떤 생명 주체의 명령, 의뢰 또는 신청 등의 적극적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의뢰적 안락사라고 하며, 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나 안락사를 승낙하여 이루어지는 경우, 즉 적극적인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소극적인 의사에 의한 경우를 승인적 안락사라고 한다.

 

2) 임의적 안락사(Nonvoluntary Euthanasia): 생명 주체가 의사를 표시할 수 없거나 그 표현이 불가능한 경우, 또는 가능하다 할지라도 외부에서 이를 이해할 수 없을 때, 즉 표현되고 있으나 시행자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않을 때 이러한 상황에서 시행되는 것을 말한다.

 

3) 타의적 안락사(Involuntary Euthanasia): 생명 주체가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에 반대하여 시행자가 실시하는 것으로 일명 강제적 안락사라고 한다.

 

2. 시행자의 행위에 따라

 

1) 소극적 안락사(Passive Euthanasia): 생명체가 어떤 원인으로 죽음의 과정에 들어선 것이 확실할 때, 시행자가 그 진행을 일시적이나마 저지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이를 방관하는 것으로 일명 부작위적 안락사라고도 한다(예를 들면, 중병의 기형 신생아를 수술하지 않고 방치하여 사망케 하는 경우).

 

2) 간접적 안락사(Indirective Euthanasia): 어떤 일정한 현실적 변화를 목표로 한 자기의 의도적 행위가 결과적으로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행하여 죽음이 야기되는 것으로 일명 결과적 안락사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예를 들면, 죽음이 초래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동통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모르핀을 계속 증가하여 사용하는 경우).

 

3) 적극적 안락사(Active Euthanasia): 행위자가 어떤 생명 주체의 죽음을 단축시킬 것을 처음부터 목적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며 작위적 안락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예를 들면, 혈관에 공기를 주입하여 공기전색을 야기시켜 사망케 하는 경우).

 

3. 생존의 윤리성에 따라

 

1) 자비적 안락사(Beneficient Euthanasia): 인내하기 힘든 격렬한 고통이 진정될 가능성이 없는 경우, 이러한 육체적 고통을 지닌 인간 생명은, 무의미한 존재이기 때문에, 거부한다는 것이다. 즉 고통을 견디어 나가는 것이 일과의 전부가 되는 상태에서의 생명이란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 생명은 단축시키는 것이 오히려 자비로운 행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반고통사(反苦痛死, Antidythanasia) 로 표현하기도 한다.

 

2) 존엄적 안락사(Euthanasia with Dignity): 비이성적인 인간 생명은 무의미한 생존이기 때문에 이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의식이 없어 정신적인 활동이 전혀 불가능한 '산송장'으로서의 인간은 그 생존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인격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단축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존엄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3) 도태적 안락사(Selective Euthanasia):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과 일정한 연대성을 지니고 생활하는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다. 어떤 생명체가 때로는 질병이나 사고로 심신의 상태가 극도로 약화되어 공동체가 많은 부담이 되며, 그 희생을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즉 이렇게 공동체에 큰 부담이 되는 생명 주체는 생존의 의미가 없다고 거부되는 것이다. 쓸모 없는 존재로서의 생명 주체의 배제는 공동체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강화의 방향에서 나오게 된 이론으로 도태사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일명 포기적 안락사라고도 한다.

 

 

IV. 안락사에 대한 논쟁과 윤리


1. 안락사를 찬성하는 의견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개 아래와 같은 이유를 들어 주장한다. 불치의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의 죽음은 불가피한 것이며, 이 환자를 위하여 고통을 진정시키는 진통제 사용 이외에 다른 어떤 치료 방법이 없는 경우에는 그 고통과 비참함을 빨리 종식시킬수록 좋다는 것이다. 사실상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 누워 있는 환자는 일을 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없으며 인간으로서 어떤 목적도 성취할 수 없는, 실제로 죽은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이 불치의 병을 치료하는데 그의 가족들에게 정신적,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주고 막대한 의료 비용은 그 환자의 가정과 재산을 파탄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환자의 생명을 빨리 단축시키는 것은 자비로운 행위라고 본다.5)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의사의 중요한 임무이므로 이것은 비윤리적인 행위가 아닌 것이다.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계속되는 고통과 회복의 희망이 없는 병에 시달릴 때 자신의 생명을 끊는 것은 개인의 기본적 자유이고 자율적인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모임들이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다. 영국에는 1935년에 시작된 "EXIT"라는 협회가 있고, 오스트레일리아에 4개, 벨기에에 2개, 인도에 1개의 모임을 비롯하여 20개 국가에 30개 이상의 자발적인 안락사 협회(Voluntary Euthanasia Society)가 있어서, 활발한 모임들을 갖고 법적으로 안락사가 허용될 수 있도록 많은 로비활동을 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대법원에서는 1984년 이후, 죽어가는 환자가 명확하고 지속적으로 죽음을 요청할 때에는, 의사들은 환자에게 독극물을 주사하여 안락사를 할 수 있도록 용인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의학 협회에서는 1986년에, 안락사를 수행할 수 있는 방향 설정을 해 놓았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첫째는 안락사를 요청하는 환자가 자발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고, 둘째는 신중하게 숙고하여 요청해야 하며, 셋째는 지속적인 죽음의 요청(A Durable Death Wish)이 있어야 하고, 넷째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지속되어야 하며, 다섯째는 동료들과 충분한 상의가 있어야 한다.

 

1991년에 네덜란드 정부에서 임명한 한 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매년 9,000명의 환자가 안락사를 원하면서 의사들에게 요청하고 있지만, 2,300명만이 여기에 해당되고, 연간 400명이 의사들의 도움으로 죽고 있다.

 

이 기관에서 조사한 바로는 병원에서 환자의 생명을 종식시키는 행위는 뚜렷하게 명시된 것은 없고, 불가피하게 행한 것으로 환자의 심한 통증치료의 부작용으로 생명이 단축된 경우,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소생술을 중단하던가 시작을 하지 않는 경우, 그리고 환자의 상태가 극도로 나빠지고 회복될 가능성이 없을 때 적극적인 안락사를 수행하는 경우가 있었고, 이때 이를 수행한 의사들은 법적인 보호를 받고 있다고 했다.6)

 

2. 안락사를 반대하는 의견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의사의 가장 기본적이며 고귀한 임무는 환자의 생명을 보호하고 치료하는 일인데 환자를 도와서 죽게 한다면, 그 결과로 의사 자신이 생명의 존엄성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사회 전체가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풍토로 변화될 것이다. 불치의 병으로 고통받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의미 없고 무가치하다고 생각되는 환자의 안락사를 용인하게 되면, 수많은 비윤리적인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은 틀림없다. 환자 자신이 고통스럽고, 그의 가족에게 큰 부담을 주고, 그 사회에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된다고 하여 그의 생명을 종식시키는 일이 허용된다면, 이러한 미명 아래 수많은 생명이 없어질 것이다. 1939년에 독일 정부는 그 당시 살 가치가 없고 사회에 부담만 주고 있는 정신병자들, 오랫동안 앓고 있는 노인들을 소멸시키기 위한 법률을 제정하고, 나치당원 의사들에게 이들을 안락사 시키도록 명령하여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벌써 275,000명을 죽였다. 그 후에 이런 대상이 확대되어 사회에 해를 준다고 생각되는 유대인들과 비독일계 민족인 집시 등을 대량 학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7)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설정한 방향에 따라 안락사의 여부를 결정하는 데는 많은 모순이 따른다. 오랫동안 고통 중에 있으며 진통제를 사용해온 환자가 자기 생명을 끊는 데 있어서 정상적인 정신상태로 신중하게 숙고하여 결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아 있으며, 또 진통제로써 고통을 완화시킬 수 없어서 죽음을 꼭 선택하여야만 하는 지속적인 고통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남아 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안락사의 남용과 오류를 막을 충분한 안전 장치가 없고, 현실적으로 안락사의 실시를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3. 찬성과 반대 의견의 종합적 비판

 

일반적으로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인간 생명의 본래적 가치를 부정하고 현세적인 안락한 삶이나 사회적 공익을 실현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적 가치만 주장할 뿐, 인간 자신이 지닌 고유한 내재적 가치, 본래적 가치, 초월적 가치를 경시한다. 따라서 현세적인 안락한 삶을 실현할 수 없는 생명, 아무런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없는 생명은 가치를 상실한 무가치한 존재이고 생존의 의미를 상실한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관계 없이 그 자체로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없고 아무런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없는 생명도 인간 생명으로서 똑같은 가치와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개인이 사회의 공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개인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 안락사를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인간 생명의 절대적 존엄성이다. 안락사는 이에 대한 반역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논거가 생명 보존을 위한 치료 의무에 적용될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8)

 

이러한 절대적 존엄성을 지닌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어떠한 치료 중지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 생명은 진정 기본적이고 귀중한 선이요, 또 현세적 최고선이라고 할 수 있을지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마땅히 보존되어야 할 절대적인 가치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명 보존을 위한 투쟁 이외에 다른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최근 안락사에 대한 논쟁은 환자의 명확한 요청에 의한 자발성의 여부이다. 그런데 이 명확한 요청에 의한 안락사는 인간의 기본권인 죽을 권리의 선택으로 정당화된다는 것이다.9)

 

그러나 과연 환자들의 안락사 요구는 정상적인 심리 상태에서는 진정한 원의로 이해할 수 있는지, 그리고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개인의 기본권으로 주장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진실로 이러한 권리란 환자가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니고 평화롭게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V. 안락사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견해

 

개신교에는 안락사에 대하여 보수적인 견해와 진보적인 견해가 있다.10)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안락사를 선의의 인도주의보다는 하느님의 명령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처리하려고 한다. 하느님만이 인간의 생명을 끝내실 수 있고,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하고 분명한 명령을 받을 때에만 그것을 도와야 한다. 죽음 자체는 삶과 동일하게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이지만, 안락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 살해가 축복이라고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관점을 둔 것이다. 즉, 인간의 인위적인 욕망의 성취가 아니고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비록 안락사가 환자 자신과 그와 함께 고통을 겪는 가족들을 돕기 위해 현대 의학의 기술을 사용하여 효과 있게 고통을 없애는 방법으로 이 세상의 삶을 끝내게 함으로써 그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단축시키는 것이지만, 안락사는 살해(Killing)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어원적으로는 "부드럽고 고통이 없으며 거의 아름다운 죽음"이지만 일반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살해"(Justifiable Killing)를 의미하고 있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이런 견해를 가진 대표적인 학자이며 그는 이러한 이유로 안락사의 수행을 반대하며, 안락사도 인공유산과 같이 의학윤리의 특별한 문제로서 한계상황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한편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안락사를 인간의 존엄성의 견지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불치의 병으로 환자가 천천히 추하게 죽어감으로써 고통당하고 비인간화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그러한 고통에서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하느님은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고, 인간의 행복은 선한 것과 옳은 것을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인본주의적이고 인격주의적인 가치체계를 생물학적 가치체계보다 우위에 두어 생각해야 하며, 윤리적으로 우선 고려해야 할 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며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인간적인 것이 삶(Vita)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뇌사는 인간의 합리적인 능력이 끝난 것으로 보며 뇌 기능의 상실은 인간이 죽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소극적 또는 간접적 안락사는 윤리적으로 인정하여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능동적이고 직접적인 안락사는 윤리적으로 주장하게 된다. 죠셉 플레처(Joseph Flethcher)가 이런 진보적인 견해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생명을 하느님 사랑의 선물로 본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생명을 잘 보존하여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존재이다.11) 또 인간 생명은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지니며, 이 신성불가침의 생명권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며, 다른 모든 인간적 권리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죄없는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예외없이 그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고 근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또한 극도의 중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자기 생명을 이끌어가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 생명은 오직 영원한 생명 안에서 온전한 완성을 찾는 것이지만, 이미 이곳 지상에서 결실을 맺어야 할 선으로써 개인에게 맡겨진 것이다. 또 고의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거나 자살하는 것은 살인과 마찬가지로 부당한 일이다. 인간의 편에서 취하는 이러한 행위는 하느님의 주권과 사랑의 계획에 대한 거절로 간주되는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오래 지속되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인하여 죽음을 요청할 수 있고, 이 편안한 죽음(안락사)을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좋은 일이며 인간 존엄성에 부합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가톨릭 교리의 가르침은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무구한 인간 존재, 갓 잉태된 태아든 좀 자란 태아든, 어린이든, 노인이든,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든, 죽어가는 사람이든 결코 인간의 살해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고히 천명한다.12)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든 아니면 자기가 돌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든,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살인 행위를 요청할 수 없고, 또 남자든 여자든 명시적으로나 함축적으로 거기에 동의할 수 없다. 어떠한 권위라도 그러한 행위를 합법적으로 권고하거나 용인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을 침해하는 문제이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며 생명을 거스르는 범죄요 인간성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권리'를 말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손에 의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손에 의하여 혹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서 죽음을 획득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적인 그리고 그리스도교적인 존엄성을 지니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13)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보면, 고통, 특히 삶의 최후 순간에 겪는 고통은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죽음은 회피할 수 없는 현존이며 동시에 죽음은 불멸의 생명으로 문을 연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죽음의 시간을 재촉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책임과 존엄성을 가지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결코 안락사는 용인될 수 없다. 그러나 한편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언제나 가능한 모든 치료를 계속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가에 대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치료를 하고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교황 비오 12세는 1957년 11월 24일 의사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생명 보존을 위해서 일반적인 치료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적이지만, 특수한 치료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적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14) 일반적인 치료 수단이란 "환자에게 어느 정도 이익을 줄 수 있는 합리적 희망을 제공하고, 동시에 지나친 치료비나 고통이나 다른 큰 불편함이 없이 제공받을 수 있는 약품 투여, 치료 수술 등"을 말한다. 반면에 특수한 치료 수단이란 "지나친 비용이나 고통이나 다른 큰 불편이 없이는 제공받을 수 없고, 또 제공받는다 하더라도 기대하는 이익을 얻으리라는 합리적인 희망을 제공하지 못하는 모든 약물 투여, 치료, 수술 등"을 말한다.15)

 

이러한 일반적인 치료 수단과 특수한 치료 수단의 구별을 토대로 교회 교도권은 생명 보존을 위한 치료 의무의 한계를 분명히 설정해 주고 있다. 생명 보존을 위해서 일반적인 치료를 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특수한 치료를 해야 할 윤리적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VI. 결론

 

현대 의학에서 중환자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의술이 계속적으로 발달하여 영구 식물 상태로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의 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고, 또 많은 수의 불구아들이 태어나며, 회복할 수 없는 병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계속적으로 받고 있는 암환자들과 노인 환자들도 대단히 많다. 이들은 가족들과 사회에 거추장스러운 존재들이며 이들 때문에 막대한 의료비용이 든다. 그래서 본인은 물론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큰 부담과 고통을 주기 때문에 이렇게 무의미한 삶을 연장하기보다는 차라리 빨리 생명을 단축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여 여러 곳에서 안락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놓고 안락사를 찬성하는 부류와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격렬한 윤리적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비록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과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운명의 주인이며 자신의 문제를 자발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권리를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그리고 각 종교마다 이에 대한 견해도 일치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귀중한 인간의 생명을 현실적인 편의와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생명을 종식시킬 수 있는지는 깊이 숙고해야 할 윤리적인 과제라고 본다.

 

이상의 모든 것을 종합하여 볼 때 타의적 안락사, 적극적 안락사, 자비적 안락사, 도태적 안락사는 어떠한 합리적인 이유로써도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죽음은 인간 생애의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것이므로 그 인간의 조건에 따라 소극적 안락사, 간접적 안락사에 대하여는 기본적인 치료 방법(ordinary means)이 지속되는 가운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처리되어 허용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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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Oosthuizen Shapiro, Euthanasia, Oxford University Press, 1978, pp.156-160.

2) Robert M. Veatch, Death Dying and the Biological Revolution, Yale University Press, 1976, p.186.

3) Neal, Bernards, Euthanasia, Greenhaven Press, 1989, pp.13-14.

4) 문국진, [생명윤리와 안락사], 어문각, 1982, pp.113-135.

5) T. 샤논·J. 디지아코모, [생의 윤리학이란?], 황경식·김상득 옮김, 서광사, 1987, 81면.

6) Pat Milmoe McCarrick, "Active Euthanasia and Assisted Suicide", in Scope Note 18, Kennedy Institute of Ethics, 1992, pp.2-3.

7) Neal Bernands, Euthanasia, p.25.

8) McComick, "To Save of Let Die: The Dilemma of Modern Medicine", in JAMA., Vol.229, July 8, 1974.

9) 문국진, [생명윤리와 안락사], 135-139면.

10) 맹용길, [생명의료윤리],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7, 193면.

11) 신앙교리성, '안락사에 관한 선언', [사목]71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26면.

12) 같은 글, 127면.

13) 같은 글, 129면.

14) 비오 12세, AAS 49(1957), pp.1031-1032.

15) K.H. 페쉬케, [그리스도교 윤리학], 김창훈 옮김, 분도출판사, 1992, 303면.

 

[김중호 신부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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