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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안락사와 치료중지에 관한 윤리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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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392

안락사와 치료중지에 관한 윤리문제

 

 

I. 머리말

 

30여 년 동안 X-ray에 관해서 연구해 온 어떤 물리학자가 피부암으로 심하게 고통을 받고 있다. 그는 이미 코와 입술 그리고 왼손을 잃어 버렸고 오른 손가락 두 개를 절단했다. 그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다. 담당의사에 의하면 몇 년밖에 더 살지 못할 환자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단지 끊임없는 고통과 수술뿐이라고 한다. 그 환자는 자신의 동생에게 생명을 끊어 달라고 애원하였다. 결국 그의 동생이 술을 마신 후 권총으로 자기 형을 쏘아 죽였다. 이 환자와 그 동생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아니면 정당화될 수 없는가? 정당화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고 또 정당화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포낭섬유증식증(Cystic Fibrosis)에 걸린 11살의 소년은 몇 달밖에 생명을 더 유지할 수 없다. 그는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기관지염, 폐종양, 폐기종 그리고 기관지폐렴 등을 앓고 있다. 그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기관지경을 사용해서 노폐물을 긁어내는 것이나 이 고통스런 치료도 임시로 도움을 주는 것이고 기껏해야 몇 일 또는 몇 주 더 생명을 연장해 줄뿐이다. 그의 어머니는 치료를 중지하고 할 수 있는 한 그가 안락하고 평화롭게 죽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병원측은 그녀의 요청을 거절했고 이 때문에 법정소송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우 어머니의 요청대로 치료는 중지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병원측의 주장대로 치료는 계속되어야 하는가? 치료가 중지되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고, 또 계속되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는 매우 곤혹스러운 문제들로서 한 생명의 생사를 결정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질병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끊을 수 있는가? 우리는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우리는 환자가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하도록 더 이상의 치료를 중지하거나 거부해야 할 때가 있는가? 치료를 중지해야 할 때가 있다면 그 때는 언제인가? 치료의 계속이나 중지는 누구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제기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결정하려고 할 때 제기되는 회피할 수 없는 문제들인 것이다.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그 본래적 가치가 근본적인 회의에 붙여진 이 시대에 이러한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윤리신학이 당면하고 있는 절박한 시대적 소명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인간생명의 근본가치에 대한 계시의 빛으로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해 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본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먼저 안락사의 개념과 오늘의 현황을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이유로 안락사를 찬성하거나 반대하고 있는지 그 논거들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을 시도할 것이다. 끝으로 안락사에 대한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을 살펴보고, 결론으로 위에서 제기한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모색해 볼 것이다.

 

 

II. 안락사의 개념과 오늘의 현황

 

1. 개념과 정의

 

안락사(euthanasia)라는 단어는 희랍어 eu(좋은)와 thanatos(죽음)의 합성어로서 어원적으로 선종, 안락한 죽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어원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안락사는 본래 임종자가 자신의 죽음을 의식적으로 수락하면서 큰 고통 없이 평화롭게 맞이하는 선종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1) 그런데 1605년 베이컨(F. Bacon)의 Advancement of Learning이 출판된 이후 안락사는 그 본래의 원초적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고, 무익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피할 목적으로 죽음을 초래하기 위한 작위나 부작위를 의미하게 되었다.2)

 

오늘날에는 안락사라고 말할 때 그 말의 본래 의미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고통이나 단말마의 고통을 없애려는 어떤 의학적 개입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또하나 고통스럽거나 비참한 생명을 서둘러 마감하려는 의도적인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극도의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한 '안락살해' 또는 가족과 사회에 너무 무거운 부담을 지울 수 있는 정신질환 및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을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비참한 생명의 연장에서 구제하기 위한 '안락살해'를 뜻하는 보다 특수한 의미로 안락사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3)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윤리학자들은 인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는 환자들을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어떤 의학적 작위나 부작위를 안락사로 이해하고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조용하고 안락한 죽음을 야기시키는 행위"로 그리고 [웹스터 새 국제사전]은 "치료할 수 없는 상황이나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고 죽여주는 관행"으로 안락사를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신앙교리성성의 안락사에 관한 선언은 "모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고의로 죽음을 초래하는 작위나 부작위"로 안락사를 정의하고 있다.4)

 

이러한 의미의 안락사는 안락사의 원인과 방법, 그리고 목적과 동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분류되고 있다.5) 먼저 안락사의 원인이 직접적이냐 간접적이냐에 따라서 직접적 안락사와 간접적 안락사로 구분할 수 있다. 직접적 안락사는 환자가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그를 직접 죽이는 것이고(mercy killing),6) 간접적 안락사는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치료를 거부하거나 이미 시작된 생명연장을 위한 치료를 중지함으로써 환자가 죽음을 당하도록 하는 것이다(letting die). 그리고 안락사를 실행하는 목적에 따라서 자비적 안락사, 존엄적 안락사, 도태적 안락사로 분류된다. 자비적 안락사란 죽음 이외의 다른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도 진정시킬 수 없는 격렬한 고통으로부터 환자를 해방하기 위해서 자비의 이름으로 환자를 살해하는 안락사를 말한다. 그리고 존엄적 안락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한 채 생물학적 생명만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식물인간들의 무의미한 생존을 종식시키기 위한 안락사를 말한다. 그리고 도태적 안락사란 신체적 결함이나 정신질환으로 사회나 주위 사람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주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한 안락사를 말한다. 또 환자 자신의 명확한 요청에 의한 안락사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자의적 안락사와 타의적 안락사로 구분하기도 하며, 의식의 정지나 혼수상태 등으로 환자의 명백한 의지를 확인할 수 없을 경우에 환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안락사는 비임의적 안락사라 한다.

 

이러한 안락사들은 모두 인간생명을 살해하기 위한 고의적인 작위나 부작위로서 '사려와 분별에 근거한 치료중지에 의한 죽음'과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이러한 명확한 구분 없이 안락사라는 용어가 부정확하게 사용됨으로써 오늘날 안락사에 대한 논의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7) 따라서 안락사에 대한 올바른 논의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선종을 위한 인간적 배려는 절대로 안락사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8)

 

- 안락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마지막 배려에 포함되는 행위들(수분공 급, 간호, 마사지, 임종자와의 대화 등)

- 환자의 조건으로 보아 이미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특정한 치료행위들을 중지하는 사려와 분별에 근거한 합리적인 결정

- 환자의 생명을 단축할 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으나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취하는 행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필자는 '고의적으로 죽음을 초래하기 위한 작위(직접적 안락사)나 부작위(간접적 안락사)'만을 엄밀하게 안락사로 정의하고, '사려와 분별에 근거한 치료중지'는 안락사와 엄격히 구별하기 위해서 단순히 '치료중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2. 오늘날의 현황

 

인간생명의 근본가치가 의문에 붙여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치유 불가능한 질병이나 심각한 정신적·신체적 결함으로 야기된 고통이나 비참한 삶의 조건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고통 없는 안락한 죽음(안락사)을 선택할 권리를 개인의 기본권으로서 주장하고 있다. 치유의 희망도 없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나 비참함을 당하도록 방치하기보다는 차라리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해주는 것이 자비로운 행위이므로 안락사는 자비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환자가 자발적인 안락사를 분명히 요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의에 반하여 고통뿐인 생존을 강요당하는 것은 잔인하고 부도덕한 일이며, 그의 원의에 따라서 안락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자비롭고 윤리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치유의 희망도 없는 무의미한 고통을 거부할 권리가 있으며, 이러한 권리는 자신의 운명을 합리적으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인격의 존엄성으로부터 유래하는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것이다.9)

 

이러한 주장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매년 증가되는 추세에 있으며, 최근 몇몇 나라에서는 안락사 합법화 운동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1975년 미국의 적지 않은 의사들은 불치병 환자들에게 안락사를 허용할 수 있는 법률제정을 요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건의 환자는 안락사를 인정하도록 촉구하였다.10)

 

① 환자가 불치병의 말기에 도달한 경우

② 그 고통이 견딜 수 없게 심하여 영속적이고 불치의 경우

③ 환자의 죽고 싶은 의지가 확실하고 명확할 때

④ 그 병이 불치병이라는 진단을 2명 이상의 의사로부터 확인을 받았을 경우

⑤ 문제되는 질병의 종류는 법률로 정한다(예: 설암, 척추손상, 심동맥 경화증, 노쇠 등)

 

또한 유럽에서는 1973년 서독인구의 53%가 직접적인 안락사를 지지하였으나, 77년에는 55%, 84년에는 64%가 이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87년에 72%, 88년에 76%가 직접적인 안락사를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11) 우리 나라에서는 1992년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가 실시한 안락사의 법적 허용에 대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81.1%가 안락사의 완전허용(18.4%) 또는 부분 허용(62.7%), 주변 사람들의 고통(32%), 막대한 의료손실(5.4%) 등으로 나타나 있다.12)

 

이렇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안락사를 지지하면서 그 합법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비록 아직까지 직접적인 안락사를 합법화하고 있는 나라는 없지만, 간접적인 안락사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묵시적으로 실시되고 있거나 합법화되어 있다. 간접적인 안락사의 합법화는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파생된 결과라 할 수 있다. 현대의학은 인공호흡기, 인공신장, 인공심장 박동기 등의 온갖 복잡한 의료기계들을 동원해서 인간의 죽음을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지연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이미 죽었을 많은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최소한의 신체적 표징만을 지닌 채, 심각한 정신적·육체적 고통 속에서 생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기 위한 치료를 거부하고, 죽을 수 있는 권리를 합법적으로 요구하게 되었다. 단순히 죽음만을 인위적으로 지연시키기 위한 치료는 무의미한 치료이며, 이러한 무의미한 치료를 거부하고 죽을 수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권리는 1976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자연사에 관한 법률(Natural Death Act)이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입법화된다. 이 법은 환자가 생명연장을 위한 인위적인 치료를 명백히 거부할 때 그의 그러한 결정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그 후 미국의 많은 주에서는 인위적으로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한 치료를 거부하고 죽을 권리를 환자에게 법적으로 보장하는 죽을 권리에 관한 법률(Right to Die Law)이 제정되었으며, 유럽의 많은 나라들도 이와 유사한 법률들을 제정함으로써 간접적인 안락사가 완전히 정착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법률들은 한결같이 문서화된 의뢰서 또는 제시서를 작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의뢰서에는 자신의 병상이 불치병의 말기 증상임이 증명되었을 경우, 본인은 생명연장장치의 이용으로 무의미한 생존이 계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장치를 제거함으로써 죽을 수 있도록 조치해 줄 것을 의뢰한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이 기재된 의뢰서는 법적 효력을 지니게 됨으로써 간접적인 안락사가 합법화되고 있다. 이렇게 간접적인 안락사를 합법화하고 있는 법률들은 단지 죽음만을 인위적으로 지연시키기 위한 치료를 거부하고, 자유롭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환자의 기본적인 권리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13)

 

 

III. 의학윤리에 있어 안락사에 관한 찬반논거

 

안락사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 안락사에 대한 찬반논쟁은 주로 인간생명의 가치, 참을 수 없는 고통, 생명의 질, 죽을 권리, 품위 있는 죽음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안락사에 대한 구체적인 찬반논거를 살펴보고 이에 관한 비판적인 고찰을 시도해 보자.

 

1. 안락사 찬성논거

 

1) 일반적으로 안락사는 의료비관론자들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다. 생이 치명적인 불치병으로 양질의 삶을 영위할 수 없을 때는 고통 없이 죽도록 해주는 것이 합리적이고 자비로운 행위라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생명의 본질적 가치를 부정하면서 인간생명은 그 자체를 위해서 마땅히 보존되어야 할 최고-절대가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생명은 인간적 실존을 위한, 그리고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기본적이고 귀중한 가치이지만,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서도 마땅히 보존되어야 할 절대가치가 아니라, 단지 인간적인 양질의 삶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에만 보존될 가치가 있는 상대적 가치라는 것이다.14) 따라서 심각한 정신적·신체적 결함이나 치유 불가능한 질병으로 인간적인 양질의 삶을 실현할 수 없는 생명이나, 치유한다해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한 생명은 더 이상 보존될 가치가 없는 생명이다. 이러한 생명은 인간생명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무가치한 생명이요, 생존자격을 상실한 무의미한 생존이기 때문에 그의 생명과 생존은 더 이상 보존되거나 연장되어서는 안되고 마땅히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5) 이렇게 그들은 무가치한 생명, 무의미한 생존개념을 통해서 인간의 안락사를 정당화하고 있다.

 

2) 안락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제시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논거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신념이 자비적 안락사 발상의 직접적인 동기라 할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악이다. 이러한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차라리 죽도록 해주는 것이 자비로운 행위이기 때문에 안락사는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의 객관적 기준이 문제로 제기된다. 의학적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이란 합리적인 방법으로 완화할 수 없는 영구적인 고통을 말한다. 합리적인 방법이란 무의식을 초래하지 않고서도 완화시킬 수 있는 고통을 말한다. 따라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란 무의식을 초래하지 않고서는 완화시킬 수 없는 영구적인 고통을 말한다.16) 물론 의식을 온전히 마비시킴으로써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적 생존은 인격의 존엄성을 상실한 무의미한 생존으로서 더 이상 살 만한 가치가 없는 생존이다. 이렇게 의식을 온전히 마비시키지 않는 한 진정될 아무런 희망도 없는 고통뿐인 생존을 강요당하는 환자에게 최선의 합리적인 선택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죽음 이외의 다른 합리적인 방법으로 고통을 완화시킬 수 없을 때 안락사는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자비와 합리의 이름으로 안락사를 정당화하고 있다.

 

3) 한 생명의 생존이나, 생존을 위한 치료가 그의 가족과 사회에 부과하는 감당할 수 없는 희생도 안락사를 정당화하는 논거로 제시된다.17) 현대의학의 발달로 살아있다는 최소한의 신체적 표징만을 지닌 채 인위적으로 생존하고 있는 생명의 증가는 현대사회의 새로운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아무런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없는 생명을 보존하거나, 그러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치료는 사회적 공익에 손실을 주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치유 불가능한 질병이나 심각한 정신적·신체적 결함 등으로 그들의 가족과 사회에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생존권은 그들로 인해서 사회가 치루어야 하는 엄청난 정신적 고통과 경제적 희생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에 무거운 부담만을 강요하며 아무런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생존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생존이기 때문에, 사회정의와 공동선은 그들의 그러한 생존이 더 이상 연장되지 않을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의와 공동선의 이름으로 안락사를 정당화하고 있다.

 

4) 안락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제시되는 마지막 논거는 인간의 죽을 권리이다.18) 인간생명의 주인은 바로 인간자신으로서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죽을 권리는 합리적 성찰을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인격의 존엄성으로부터 유래하는 기본적인 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죽을 권리는 아무런 조건 없이 행사될 수 없는 무제약적인 권리는 아니다. 인간생명은 인간적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한 보존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생명이 치유 불가능한 질병이나 심각한 정신적·신체적 결함 등으로 인간적인 삶의 질을 영위할 수 없거나, 고통뿐인 실존을 강요당하거나, 아무런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없거나, 사회에 감당할 수 없는 큰 희생을 부과할 때 인간은 그러한 무가치한 생존, 고통뿐인 생존, 무익한 생존, 부담스러운 생존을 거부하고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인간적인 생존, 비인격적인 생존을 거부하고 존엄사(품위 있는 죽음)를 선택하고 결단할 권리로서 인격의 존엄성으로부터 유래하는 기본적인 권리라는 것이다.

 

2. 안락사 반대논거

 

1) 안락사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인간생명의 절대적 존엄성이다. 인간생명의 존엄성은 그 자체로 자명한 개념이기 때문에 그 자체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그 목적과 정당화의 근거로 취하지 않는다.19) 인간생명은 그 자체로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인간생명은 다만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도구나 사회적 공익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인간생명은 어떤 목적실현을 위한 단순한 도구적인 가치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고유한 가치, 즉 본래적 가치(intrinsic or inherent values)를 가지고 있다.20) 이러한 인간생명은 그 자체를 위해서 보존되어야 할 절대선-가치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살아있는 생명은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생명이 없는 죽음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생명권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권리로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 누구에 의해서도 박탈 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권리이다. 이러한 인간생명을 살해하는 안락사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반역으로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2) 인간생명을 살해하는 안락사는 질병을 치료함으로써 환자의 생명을 구해야 할 의사의 숭고한 사명에 대한 반역으로서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21) 고통을 덜어주고, 건강을 회복시키고, 생명을 보존해야 할 의사가 안락사를 실시한다면 환자들은 의사를 신뢰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치유 불가능한 질병으로 인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는 환자가 자발적인 안락사를 요청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의사는 죽음 이외의 다른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서 얼마든지 환자의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환자의 죽음을 초래하기 위한 안락사는 생명을 구해야 할 의사의 사명을 배반하는 것이다. 현대의학은 진통제, 방사선, 뢴트겐선, X선 치료법, 신경외과적 수술 등을 통해서 질병으로 인한 거의 모든 고통을 심한 부작용 없이 완화시켜 주거나 제거할 수 있다.22) 따라서 고통에서의 해방이라는 미명 하에 안락사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환자의 자발적인 안락사 요청은 정상적인 심리 상태에서의 요청이라 할 수 없으며, 죽음을 진정으로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락사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안락사를 요청하는 환자의 정신 상태는 죽음을 눈 앞에 둔 공포와 육체적 고통으로 합리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능력이 마비된 상태이기 때문에 정상적이라고 볼 수가 없다.23) 또한 환자는 자신 때문에 그들의 가족들이 감당해야 하는 정신적 고통과 경제적 희생을 풀어주기 위해서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안락사 요청은 안락사에 대한 진정한 원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인간적인 이해와 따뜻한 사랑을 구하는 고뇌에 찬 절규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환자의 안락사에 대한 요청은 신빙성이 없기 때문에 안락사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4) 치유 불가능한 질병의 오진가능성과 안락사의 남용가능성도 안락사를 반대하는 논거로 제시된다.24) 질병의 오진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으며, 치유 불가능한 질병은 경험에 기초한 추정 이상이 결코 아니다. 의학의 눈부신 발전은 어제의 불치병을 치유하고 있으며 오늘의 불치병도 내일은 치유될 것이다. 따라서 의학의 발전이 정지되기 전에는 아무도 어떤 질병이 치유 불가능한 질병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또한 치유 불가능한 환자를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주기 위해서 안락사를 합법화한다면 힘없고 귀찮고 쓸모 없는 인간살해를 정당화하는 선례로 사용될 것이다. 이처럼 죽어서도 안되고 죽을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 희생될 수 있기 때문에 안락사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3. 찬반논거에 관한 비판적 고찰

 

1) 안락사에 대한 찬반논쟁의 핵심은 인간생명의 가치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인간생명의 본래적 가치를 부정하고 도구적 가치만을 인정하고 있다. 인간생명은 현세적인 안락한 삶이나 사회적 공익을 실현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적 가치만을 가지고 있을 뿐, 그 자체의 고유한 내재적 가치, 본래적 가치, 초월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현세적인 안락한 삶을 실현할 수 없는 생명, 아무런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없는 생명은 인간생명의 가치를 상실한 무가치한 생명이요, 인간생명의 의미를 상실한 무의미한 생존으로서, 그 존재 가치와 생존의 의미를 상실한다. 그러나 인간생명은 단순히 도구적 가치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 자체로서 추구되는 본래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이러한 본래적 가치는 생명의 본성에 근거한 가치로서 본질직관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25) 만일 인간생명이 그 자체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면, 그밖에 어떤 것도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삶은 가치가 있고 어떤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명은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관계없이 그 자체로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락한 삶을 실현할 수 없고 아무런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없는 생명도 인간생명으로서 똑같은 가치와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개인이 사회의 공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개인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2) 일반적으로 안락사를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논거는 인간생명의 절대적 존엄성이다. 자비의 이름으로 인간생명을 살해하는 안락사는 인간생명의 절대적 존엄성에 대한 반역으로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거가 생명보존을 위한 치료의 의무에 적용될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26) 절대적 존엄성을 지닌 인간생명은 그 자체를 위해서 보존되어야 할 절대가치이기 때문에 이러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어떠한 치료중지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생명을 마땅히 보존해야 할 절대적 선-가치로, 그리고 죽음을 마땅히 피해야 할 절대적인 악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생명은 진정 기본적이고 귀중한 선이요, 또한 현세적 최고선이라고 할 수 있을지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마땅히 보존해야 하는 절대선-가치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숭고하고 귀중한 선-가치의 실현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수도 있으며, 그것은 언제나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생명은 절대가치요, 따라서 생명보존을 위한 치료의무가 절대적이라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의 질을 실현할 수 없는 생명도 그러한 생명을 연장하고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명보존을 위한 치료의무가 절대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면 인간의 삶은 단순히 생명보존을 위한 투쟁 이외의 다른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3) 최근 안락사에 대한 논쟁은 환자의 명확한 요청에 의한 자발적인 안락사냐 아니냐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환자의 명확한 요청에 의한 안락사는 인간의 기본권인 죽을 권리의 선택으로서 정당화된다는 것이다.27) 그러나 과연 환자들의 안락사요청을 정상적인 심리상태에서의 진정한 원의로 이해할 수 있는지, 그리고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개인의 기본권으로서 주장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일반적으로 안락사를 요청하는 사람들은 치유 불가능한 질병으로 무의미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절망감과 자신의 존재가치가 없다는 좌절감과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부담만을 줄뿐이라는 자책감과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고독과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이 요청하는 안락사는 자신을 죽여달라는 진정한 죽음에의 원의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고통과 절망과 고독과 소외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절규요, 진정 인간적인 사랑과 도움을 간청하는 고뇌에 찬 마지막 애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28) 그리고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죽을 권리란 자신의 손에 의하여 또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서 비인간적인 죽음을 획득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니고 평화롭게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닐까?

 

 

IV. 안락사에 관한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


1. 인간생명의 가치

 

인간생명은 모든 선의 근원이며 모든 인간활동의 필연적인 전제조건으로써 기본적인 선이다. 인간생명은 그 자체로 존중되고 수호되어야 하는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지닌다. 신성불가침의 생명권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며, 다른 모든 인간적 권리의 토대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생명 안에서 보다 위대한 그 무엇, 즉 인간생명은 하느님의 모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인간은 이러한 생명을 수호하고 사랑하여 그 완성을 실현하도록 하사된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인간생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생명의 주님이신 하느님이시며, 인간은 생명을 사랑으로 관리하여 그 완성을 지향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 완성을 실현해야 할 인간생명은 그 자체를 위해서 마땅히 보존되어야 하는 절대가치는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마음내키는 대로 처분할 수는 없으나, 생명보다 더 숭고한 가치, 즉 하느님의 영광이나 영혼의 구원 또는 공동선이나 형제에 대한 봉사를 실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봉헌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봉헌은 자살과는 명백히 구별되어야 한다. "벗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생명에 대한 이러한 고찰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29)

 

① 무죄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예외 없이 그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 스르고 근본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극도의 중죄를 범하는 것이다.

 

②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자기생명을 이끌어가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 다. 그 생명은 오직 영원한 생명 안에서 온전한 완성을 찾는 것이지만 이미 이곳 지상에서 결실을 맺어야할 선으로서 개인에게 맡겨진 것이다.

 

③ 고의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거나 자살하는 것은 살인과 마찬가지로 부당한 일이다. 인간의 편에서 취하는 이러한 행위는 하느님의 주권과 사랑의 계획에 대한 거절로 간주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살은 또한 자기사랑의 거부이고 생존본능의 부정이며, 이웃과 여러 공동체 또는 전 사회에 대한 정의와 사랑의 의무를 회피하 는 것이다.

 

2. 안락사

 

신앙교리성성의 안락사에 관한 선언문은 안락사문제를 올바로 다루기 위해서 먼저 그 용어를 정확히 정의할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선종을 위한 인간적 배려나 합리적 근거에 의한 치료의 중지도 안락사로 통칭됨으로써 안락사에 대한 논의에 상당히 혼란이 초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언문은 이러한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모든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고의로 죽음을 초래하는 작위나 부작위"만을 안락사로 정의하면서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 불가항력적인 무지나 오류에 의하여, 그리고 비록 선의에 의하여 안락사가 실행된다 할지라도 - 그러한 행위 자체는 항상 명백히 거부되어야 할 살인행위임을 천명하고 있다.30)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무죄한 인간존재, 갓 잉태된 태아든 좀 자란 태아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노인이든,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든 죽어 가는 사람이든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고히 천명한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자기가 돌보는 사람을 위한 것이든,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살인행위를 요청할 수 없고, 또 남자든 여자든 명시적으로나 함축적으로 거기에 동의할 수 없다. 어떠한 권위라도 그러한 행위를 합법적으로 권고하거나 용인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을 침해하는 문제이고 인간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며 생명을 거스르는 범죄요 인간성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3. 고통과 진통제 사용문제

 

질병에 의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분명 회피할 수 없는 인간조건이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고통 특히 삶의 최후순간에 겪는 고통은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 고통은 그리스도 수난에의 동참이며,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그리스도께서 바치는 구원 희생에의 일치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에 의하여 표현될 수 있는 사랑자체와 고통이 낳을 수 있는 정화효과를 남달리 고통 속에서 알아보고 있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고통(마태 27,34)에 의힉적으로 참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고통의 일부라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진통제의 사용을 절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러한 영웅적인 행위를 일반적인 규준으로 강요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31) 더구나 너무 강렬한 고통은 정신이 반드시 지녀야 할 자제력을 잃도록 하기 쉽기 때문에 적절한 진통제의 사용을 통해서 고통을 완화하거나 진정시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중추신경에 영향을 주는 진통제의 사용은 여러 가지 부수적인 효과를 낳을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호흡기능에 영양을 줄 수도 있고, 의식상태를 변화시킬 수도 있고, 습관성을 유발할 수도 있으며, 약효가 줄어들면서 점점 더 많은 용량이 필요해 질 수도 있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진통제를 사용하지 말고 다른 방법으로 환자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종종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진통제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 진통제가 부차적인 효과로 의식을 감퇴시키고 반의식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환자들을 위하여 고통을 제거하거나 완화시킬 수 있는 진통제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습관성현상을 유발하는 진통제는 그 약효를 유지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투약양의 증가를 필요로 하게 되므로 과도한 진통제의 사용은 가능한 피해야 할 것이다. 마취제의 사용이 생명을 단축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하거나 심지어 죽음에 가까이 이른다 할지라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제거하거나 완화시키기 위한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리고 주어진 여건 안에서 마취제사용이 여타의 종교적·윤리적 의무를 이행할 수 없게 만들지 않는다면 마취제를 사용할 수 있다.32) 물론 이러한 경우 사망의 위험이 따른다 하더라도 결코 사망을 직접 의도하거나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고통을 효과적으로 경감시키기 위하여 유용한 진통제를 사용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의식불명을 초래하는 진통제 사용은 특별한 고려를 요청한다. 왜냐하면 온전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윤리적 의무와 가족에 대한 책임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온전한 의식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채비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대한 이유 없이 임종자에게서 의식을 박탈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33) 진통제 사용문제에 대한 최종결정은 환자 자신에게 유보되어야 할 것이다. 죽어 가는 환자를 그의 분명한 원의에 반하여 마취한다는 것은 명백히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무의식을 초래하는 마취를 찬성해야 하 심각한 이유가 있다고 할지라도 , 만일 환자가 절실히 요망되는 종교적·윤리적 의무들을 아직 수행하지 않았다면, 그런 마취를 윤리적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환자가 의사에게 마취를 요청한 경우에도 의사는 - 특별히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 환자가 자신의 모든 종교적·윤리적 의무들을 수행하도록 한 다음에 환자의 원의에 따라 마취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4. 치료중지

 

모든 인간은 질병에 걸렸을 때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치료를 받을 권리와 의무가 있다. 이러한 생명보존을 위한 치료의 의무는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

 

우리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언제나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계속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교황 비오 12세는 1957년 11월 24일 의사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우리는 생명보존을 위해서 일반적인 치료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적이지만, 특수한 치료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적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34) 일반적인 치료수단이란 "환자에게 어느 정도 이익을 줄 수 있는 합리적 희망을 제공하고, 동시에 지나친 치료비나 고통이나 다른 큰 불편함이 없이 제공받을 수 있는 약물투여, 치료, 수술 등을 말한다." 반면에 특수한 치료수단이란 "지나친 비용이나 고통이나 다른 큰 불편이 없이는 제공받을 수 없고, 또 제공받는다 하더라도 기대하는 이익을 얻으리라는 합리적인 희망을 제공하지 못하는 모든 약물투여, 치료, 수술 등을 말한다."35)

 

이러한 일반적인 치료수단과 특수한 치료수단의 구별은 그 기준의 상대성 때문에 종종 큰 어려움을 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치료의 유형, 치료시 수반되는 위험의 정도, 치료비용과 그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그 치료를 통해서 기대할 수 있는 결과, 질병의 상태, 환자의 윤리적·정신적·경제적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는 치료는 일반적인 치료라고 할 수 있으며,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강요하는 치료는 특수한 치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36) 일반적인 치료와 특수한 치료를 구별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시행하려는 치료가 표준적인 방법인가, 그러한 치료를 하는 것이 적절한가, 그러한 치료시에 수반되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등 치료의 본성에 관한 것들이다. 그리고 주관적 기준은 그러한 치료가 환자에게 어떠한 심리적 충격이나 불안이나 불편을 주는가 하는 것이다.37)

 

이러한 일반적인 치료수단과 특수한 치료수단의 구별을 토대로 교회 교도권은 생명보존을 위한 치료의무의 한계를 분명히 설정해 주고 있다. 생명보존을 위해서 일반적인 치료를 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특수한 치료를 해야할 윤리적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특수한 치료를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수한 치료는 할 수 있으나, 그것이 결코 의무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원칙을 용이하게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 지침을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38)

 

1) 시행하려는 치료법이 아직 실험단계에 있고 또한 큰 위험을 수반한다 하더라도 다른 충분한 치료법이 없다면, 최첨단 의학기술에 의하여 제공된 치료법을 환자의 동의 하에 사용할 수 있다. 환자는 인간성에 대한 봉사 안에서 그러한 치료를 수용할 아량까지 보일 수 있어야 한다.

 

2) 그러나 그 결과가 예상한 기대에 너무 미치지 못할 때, 그러한 치료를 환자의 동의 하에 중지할 수 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특히 그 방면에 유능한 의사들의 조언은 물론 환자와 그 가족들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전문의사들은 설비 및 인적투자가 치료를 통해서 예상되는 결과와 균형을 이루는가 하는 문제를 판단할 수 있고, 그러한 시술을 통해서 환자가 얻을 수 있는 이익에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을 환자에게 강요하는가 하는 문제를 판단할 수 있다. 치료와 그 치료를 통해서 예상되는 결과가 합리적인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그 치료는 중지될 수 있다. 이러한 치료의 중지를 통해서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것은 환자를 고의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살인행위와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3) 모든 환자는 특수한 치료를 거부하고 단지 일반적인 치료만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특수한 치료를 받아야 할 의무를 어느 누구에게도 부과할 수 없다. 특수한 치료의 거부는 기대할 수 있는 결과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의학적인 치료를 포기하려는 원의나, 가족 혹은 공동체에 과도한 부담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원의로 이해되어야 하며, 인위적인 생명연장을 거부하고 자연적인 죽음을 수용하려는 것으로서 자살과는 명백히 구별되어야 한다.

 

4) 사용되는 치료수단에도 불구하고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임박할 때, 고통스런 생명연장만을 강요할 뿐인 치료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유사한 질환의 환자에게 요구되는 정상적인 간호는 중단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위험 중에 있는 환자의 생명을 구하지 못하는 일로 의사가 자책할 이유는 없다.

 

5)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른바 '최소한'의 치료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일반적이며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치료수단(영양공급, 수혈, 주사 등)은 언제나 의무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최소한의 치료마저 중단해 버리는 것은 사실상 환자가 죽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V. 맺음말

 

이상의 고찰을 토대로 오늘날 일반적으로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제기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모색해 보기로 하자.

 

1. 우리는 치유 불가능한 질병의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자신이나 타인의 생명을 끊을 수 있는가? 질병의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죽음을 초래하는 안락사는 인간생명의 고의적인 살해로서 어떠한 이유로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비록 안락사를 하나의 구원으로 갈망하며 요청하고 있는 고통뿐인 생명이라 할지라도 고통에서의 해방이라는 미명 하에 인간생명을 살해할 수는 없다. 불가항력적인 오류나 무지에 의하여 그리고 선의에 의하여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이루어진 안락사라 할지라도 인간생명을 고의적으로 살해하는 안락사는 엄연한 살인행위로서 생명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요, 인간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요, 신성불가침한 생명권을 거스르는 범죄며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성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인간생명은 안락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생명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현세적인 행복이나 사회적 유용성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현세를 초월하여 도달해야 할 다른 세계가 없다면, 치료할 수 없는 고통이나 비참함은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삶과 고통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그리스도의 생명과 고통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고통뿐인 생명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고통은 무의미한 고통이 아니다. 그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통에의 동참이며, 그리스도의 고통이 구원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그의 고통뿐인 생존도 그러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아무런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없는 생명이라 할지라도 그의 무력한 생명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능력을 키워주는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생명이다. 또한 인간적인 삶의 질을 영위할 수 없는 생명이라 할지라도 그의 생명은 고유한 가치와 존재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거룩한 생명이다. 이처럼 거룩하고 무한한 가치를 지닌 인간생명의 살해를 정당화하는 안락사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2. 우리는 환자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비오 12세의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는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치료를 해야 할 의무가 있으나, 특수한 치료를 해야 할 의무는 없다. 물론 특수한 치료를 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결코 의무적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은 인간의 현세적 생명은 하나의 기본적인 가치이지만, 절대가치는 아니라는 그리스도교적 생명관으로부터 연역된 결론이라 할 수 있다.39) 인간의 현세적 생명은 생의 의미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진정 기본적이고 귀중한 선이다. 그러나 현세적 생명은 그 자체를 위해서 마땅히 보존되어야 하는 절대가치가 아니라 생의 의미와 목적을 실현할 잠재력이 있는냐 없느냐에 따라서 그 보존여부가 결정되어야 하는 상대적인 가치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은 생의 의미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상대적 가치로서 생의 의미와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을 때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생명이 그 실현을 지향하는 생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현세적 생명의 완성-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사랑이요,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이웃 사랑은 인간관계와 상호인격적 친교를 통해서 실현된다. 그러므로 생의 의미와 목적은 인간 관계와 상호인격적 친교를 통해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요 핵심이라면, 인간의 현세적 생명은 인간관계와 상호인격적 친교를 실현하기 위한 기본적인 선으로서, 인간관계와 상호인격적 친교를 실현할 수 있을 때 그것을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명관으로부터 생명보존의 의무와 그 한계 그리고 생명보존을 위한 치료의무와 그 한계가 다음과 같이 분명히 설정된다.40)

 

생의 의미와 목적, 곧 인간관계와 상호인격적 친교를 실현할 수 있는 생명은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는 생명이다. 이러한 생명을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최소한 일반적인 치료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 일반적인 치료를 해야할 의무를 초과하여 특수한 치료까지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의무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와 상호인격적 친교를 실현할 잠재력이 없는 생명은 인간생명으로서 최소한의 생명의 질을 상실한 생명이다. 이러한 생명을 보존하거나 연장해야 할 윤리적 의무는 없다. 따라서 이러한 생명을 보존하거나 연장하기 위한 일반적인 치료의무도 없는 것이다. 최소한의 생명의 질을 실현할 수 없는 생명은 더 이상 연장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특수한 치료는 마땅히 중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생명은 존엄성이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간호는 의무적이다. 최소한의 생명의 질을 상실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치료의무를 부과한다면, 그것은 생명 그 자체에 대한 맹목적 숭배 이외의 다른 것이 결코 아니며, 인간의 삶은 오로지 생명연장을 위한 의무 속에서 생명보다 고귀하고 중요한 선의 실현은 희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우리는 환자가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하도록 더 이상의 치료를 중지하거나 거부해야 할 때가 있는가? 시행되는 치료에도 불구하고 뇌사가 일어나거나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리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명의 질을 상실했거나 더 이상의 인간관계를 실현할 잠재력을 상실했을 때,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하도록 치료는 중지될 수 있고 또 중지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때는 치료를 중지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41)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이른바 '최소한'의 간호는 중단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치료의 중지는 사람의 생명을 고의적으로 살해하거나 죽음을 재촉하는 안락사와는 명백히 구별되어야 한다. 죽음은 회피할 수 없는 인간조건으로서 우리는 죽음을 재촉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적이고 품위 있는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생명의 끝이나 종말이 아니다. 죽음은 더욱 충만한 생명에 이르는 문이다. 우리는 죽음을 단 한순간이라도 더 지연시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다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치료를 중지할 수 있고 또 치료를 중지해야 할 확고한 기준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잠재력이다.42)

 

그러나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은 수학적 분석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판단에 의한 것이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는 여러 가지 여건들을 신중히 고려하여 인간관계에 대한 잠재력을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은 항상 오류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 우리가 때때로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라면 가능한 한 생명을 구하는 방향으로 실수를 저질러야지 죽이는 방향으로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면, 인간관계에 대한 잠재력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치료를 해주기만 한다면 인간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모든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치료를 다해야 할 것이다. 가장 무력하고 힘없는 환자에 대한 사랑과 봉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봉사이다 :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4. 이러한 치료의 중지는 누구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환자가 의식이 있을 경우 치료수단의 사용 및 중지나 거부의 결정에 환자가 참여해야 한다. 따라서 환자의 동의 없이 치료수단을 사용하거나 중지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환자가 의식불명 또는 다른 이유들로 이러한 결정에 참여하지 못할 때 가족과 의사는 여러 가지 요인들을 고려하여 충분한 합리적 근거와 윤리적 이유들이 존재한다면 치료를 중지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환자의 가족과 의사는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러한 결정을 위해서 의사 자신이 환자와 같은 상황에 있다면 무엇을 원할 것인가라는 황금률이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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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ngelo Fioei, "Probleni medico-legali del l'eutanasia," in: Il valore della vita (Milano, 1985), 179.

2) 위의 책, 179 참조.

3) 신앙교리성성, "안락사에 관한 선언," [사목] 71호(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0), 127면.

4) 위의 책, 127.

5) 문국진, [생명윤리와 안락사](어문각, 1982), 113-135 참조.

6) 직접적인 안락사는 환자의 간청에 의해서 환자의 죽음을 초래할 목적으로 의사가 치사량의 극약을 투여하는 것이 보통이다.

7) 교황청 인간계발위원회, "중환자와 임종자에 관한 윤리문제," [사목] 78호, 127 참조.

8) 위의 책, 127 참조.

9) 안락사 옹호론자들이 1974년 7월 [더 휴머니스트]지에 발표한 안락사 선언문. 여기서는 Elio Sgreccia, "Dignita della morte ed eutanasia," in: Il valore della vita(Milano, 1985), 137-138 참조.

10) 김학중, [안락사: 의학윤리], 한국가톨릭의사협의회 편 (수문사, 1984), 250.

11) K. H. 페쉬케, [그리스도교 윤리학], 김창훈 역(분도출판사, 1992), 350 참조.

12) 윤여덕, "생명에 대한 사회의식 조사: 생명연구," [생명문화총서] 제1집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 1992), 364이하 참조. 안락사의 법적 허용에 대한 태도에서 안락사의 법적 허용불가가 18.9%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상은 안락사의 개념에 대한 명확한 이해의 부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부분허용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는 응답자는 이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의문이다.

13) 문국진, 앞의 책, 135-139 참조.

14) 위의 책, 117-135 참조.

15) T. 샤논·J. 디지아코모, [생의 윤리학이란?], 황경식·김상득 역 (서광사, 1990), 81 참조.

16) 위의 책, 130-131 참조.

17) John A. Roberson, "Involuntary Euthanasia of Rejective Newborns," in: Stanford Law Review vol. 27, 1975, 213-214; 여기서는 이 글이 재수록된 김일순·N. 포션 편역, [의학윤리](연세대학교출판부, 1982), 250-256 참조.

18) 문국진, 앞의 책, 135-152 참조.

19) T. 샤논·J. 디지아코모, 앞의 책, 32-34 참조.

20) 진교훈, "철학에서 본 생명: 생명연구," [생명문화총서] 제1집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 1992), 21-36 참조.

21) T. 샤논·J. 디지아코모, 앞의 책, 80 참조.

22) Yale Kamisar, "Euthanasia Legislation: Some non religious objections," in: Euthanasia and the Right to Die (New York: Humanities Press, 1970); 여기서는 이 글이 재수록된 김일순·N. 포션, 앞의 책, 227-228 참조.

23) 위의 책, 214-225 참조.

24) 위의 책, 207-228 참조.

25) 진교훈, 앞의 책, 24-27 참조.

26) McCormick, "To Save or Let Die: The Dilemma of Modern Medicine," in: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vol. 229, July 8, 1974; 여기서는 이 글이 재수록된 김일순·N. 포션, 앞의 책, 190-192 참조.

27) 문국진, 앞의 책, 135-139 참조.

28) 신앙교리성성, 앞의 책, 128.

29) 위의 책, 126.

30) 위의 책, 127.

31) 위의 책, 129 참조.

32) 비오 12세, AAS 49 (1957), 147.

33) 비오 12세, AAS 50 (1958), 694.

34) 비오 12세, AAS 49 (1957), 1031-1032.

35) K.H. 페쉬케, 앞의 책, 303 참조.

36) 신앙교리성성, 앞의 책, 130 참조.

37) 교황청 인간계발위원회, 앞의 책, 126.

38) 신앙교리성성, 앞의 책, 130.

39) 교황청 인간계발위원회, 앞의 책, 126 참조.

40) K. H. 페쉬케, 앞의 책, 306-310 참조.

41) 많은 윤리신학자들은 뇌사상태에 들어가면 생명연장을 위한 인위적인 치료를 중지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또한 인간관계를 실현할 수 없는 환자에게는 특수한 치료를통해서 그의 생명을 더 이상 연장시키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죽음의 고통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것뿐이므로 비윤리적이라는 것이다.

42) 교황청 인간계발위원회, 앞의 책, 126 참조.

 

[유영도 신부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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