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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과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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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421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과 인권

 

 

1. 이끄는 글 

 

1997년의 경제 위기 이래 우리 사회에 구조 조정이란 말이 보편화하고 있고 전가의 보도처럼 적용되고 있다. 국민 경제적 차원에서의 전체 위기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의 개별 문제에 대해서도 구조 조정은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따라서 구조 조정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문제시하는 것은 시대 착오적이거나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보여진다. 그럼에도 그에 따른 폐해와 부작용은 갈수록 우리 사회를 멍들게 하고 깊은 상처를 드리우고 있다.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구조 조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졸지에 길거리로 내몰려 실업자와 노숙자가 넘쳐 나고, 멀쩡한 가정이 파탄에 이르거나 해체되고 심지어 생명을 끊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여파는 이미 경제적 영역을 넘어서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깊숙이 몰아 닥치고 있다. '생산적' 복지라는 미명 아래 그나마 미약했던 사회 안전망이 흔들리고 있고, '수요와 공급의 원리'로 시골의 작은 학교들을 폐지하고 '경쟁력'이라는 기준으로 BK21 정책을 작성 집행하는 등 우리 사회 곳곳에, 그리고 우리 삶의 깊숙한 곳에까지 구조 조정의 칼날이 춤을 추고 있다.

 

이러한 반생명적, 반인간적 현상 앞에서 우리는 구조 조정과 그 결과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무엇을 위한, 그리고 누구를 위한 구조 조정인가? 그 과정 속에서 희생되고 짓밟힌 수많은 사람과 자연의 생명과 권리는 과연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것으로 모른체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생명의 하느님, 삶의 하느님을 고백하는 우리 신앙인들은 이러한 반생명적, 반인간적, 반자연적, 따라서 반신앙적 현실 앞에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2. 구조 조정과 신자유주의:그 역사와 한계

 

정부는 4대 부문 12개 핵심 개혁이라는 과제를 설정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구조 조정을 시행하고 있고 일단 큰 틀에서 성공한 것으로 자평한다. 4대 부문이란 금융 부문, 기업 부문, 공공 부문, 노동 부문을 이야기하며, 금융 기관이나 기업들의 경우 퇴출, 합병, 매각, 조직 축소, 아웃소싱, 정리 해고를 비롯한 인력 감축 등으로 이어지고 공기업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며 민영화나, 시장 경제적 원리 도입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그에 따라 해고, 임금 삭감, 노동 강도 강화, 노동 조건의 악화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한다.

 

이러한 구조 조정은 1980년대 중남미 국가들에서 외채 위기가 보편화되자, 미국을 비롯한 채권국들이 이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마련한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미국 재무부의 지도 아래 국제 통화 기금이 외채 위기에 빠진 중남미 국가들에 직접 개입하면서, 구제 금융과 부채의 일부 탕감을 조건으로 해당 국가들의 경제 구조를 전반적으로 개혁할 것을 요구한다. 그 내용은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경제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다.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전개해 오면서 수많은 위기에 봉착했고 그 때마다 그 위기를 둘러싼 열띤 논쟁이 있어 왔다. 그 주된 논쟁 가운데 하나가 국가와 시장 경제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최초로 경제학을 정립한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시장 경제에서 모든 문제들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연스럽게 조정되고 해결된다고 본다. 곧 모든 사람이 사익을 추구하더라도 결국 시장 경제는 그 사익을 공익으로 전환시켜 주는 완벽한 제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그렇게 완벽한 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없고 다만 시장 안에서 각자가 자기의 사익을 최대한 추구하도록 보장만 해 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역사는 시장 경제가 늘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작동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1930년대 대공황을 겪으면서 시장 경제가 갖는 폐해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등을 중심으로 활발히 제기된다. 이러한 케인즈적 자본주의 경제는 1950-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하나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 파동을 거치면서 위기를 맞는다. 곧 낮은 경제 성장률과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특징지어지는 장기적인 경기 침체로 자본주의가 세계적 차원에서 위기에 봉착하자, 케인즈적 경제 이론과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 바로 통화론 또는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이론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 경제가 그 자체로 완벽한 제도인데 시장 외적인 국가와 노조가 자꾸 간섭하니까 문제가 생기고 위기가 발생한다고 본다. 따라서 종래에 케인즈 경제학적 관점에서 시장 경제의 부작용과 폐해를 완화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했던 경제 부문에서 모두 철수하고, 국가의 법적 보호를 받는 노조의 권력을 약화 또는 해체해야 시장이 제대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대내적인 측면에서 국영 기업의 민영화, 정확히 말하면 사영화, 각종 경제 규제의 철폐, 경제적 약자에 대한 각종 보조금 또는 지원금 철폐, 사회 보장성 지출 삭감, 그리고 대외적인 측면에서 무역 장벽 해소나 관세 인하, 각종 수출 지원 제도 철회 등을 요구한다. 단지 소극적으로 철수를 요구할 뿐 아니라 시장 경제 논리를 경제 영역을 넘어 사회의 모든 부문에 확대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고소득층에 대한 세제 혜택 등을 통해 사회 내 '건전한 불평등'을 조성함으로써 경제에 새로운 추진력 또는 역동성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국가를 고비용 저효율의 상징으로 여기고 나아가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단죄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를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단죄하고 국가의 경제 개입을 규탄한다고 해서 국가 자체의 해소를 주장하거나 나아가 국가의 개입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사회 복지적 차원의 국가 개입은 반대하되 시장 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돕기 위한 국가 개입에 대해선 오히려 더 적극적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레이건 정부에서 사회 복지 비용을 대폭 삭감하면서도 군사비 지출은 꾸준히 늘려 나간 것이다. 국가뿐 아니라 노조도 악으로 단정한다. 국가의 지원과 보호를 받는 노조가 임금을 인상하고 사회 복지를 확장하기 위해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사적 축적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기업의 이윤 수준을 파괴하고 인플레이션을 자극했으며 그에 따라 시장 경제의 위기를 초래한다고 본다. 따라서 그들은 노동 시장도 노조의 독점을 타파하고 자유 경쟁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노조의 매개 없이 고용주와 노동자가 일 대 일로 만나는 그러한 경쟁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처방은 처음으로 1979년 영국의 대처 정부와 1980년 미국의 레이건 정부에 의해 경제 정책으로 채택된 이후 1980년대 말까지 다른 유럽 국가들로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처음에는 주로 우익 정권들에게 수용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프랑스의 미테랑, 스페인의 곤살레스(Gonzales) 등 사회민주주의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1980년대 말에 이르면 서구 사회에서 좌우익을 막론한 헤게모니를 획득한다. 그 결과 이 경제 정책을 수용한 서구 선진국들은 대부분 1970년대의 높은 인플레이션을 어느 정도 억제하고 그에 따라 기업의 이윤율도 회복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노조와 노동 운동을 억압하고 실업을 방기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그들이 부르짖는 '건전한 불평등'의 결과로서 얻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이윤율의 회복은 경제 성장률의 회복, 다시 말해서 투자율의 회복으로 이어지지 못했는데 그것은 금융 규제 완화나 해제 조치로 생산적인 투자보다는 투기적인 투자 쪽으로 돈이 몰렸기 때문이다.1)

 

이와 같이 서구의 신자유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음에도 이후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 발전해 간 것은 다른 외적 요인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 서구에서 신자유주의의 한계가 명확해지던 1980년대 말에 동구와 소련의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이러한 동구권의 붕괴는 전체 자본주의 진영의 승리가 아니라 대처와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진영의 승리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동구권의 붕괴로 이제 유일한 대안이 된 신자유주의 모델은 동구에서 더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인 방식으로 이식된다.2) 그러나 동구의 신자유주의 정책도 역시 최근의 대통령 선거에서 구공산당이 다시 정권에 복귀하는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대중의 저항에 직면한다. 그럼에도 정권을 다시 잡은 구공산당 역시 경제 정책에서 만큼은 큰 틀에서 보면 신자유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동구권에서의 실험은 신자유주의가 갖는 유효성과 역동성을 여타 세계 지역에 널리 선전하는 전시 효과로 기능한다.

 

신자유주의의 세 번째 실험 무대는 라틴아메리카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신자유주의는 영국이나 미국보다 10여 년 앞서 칠레의 피노체트(Pinochet) 정권에서 이미 실험된 바 있다. 이 실험이 '서구'의 신자유주의를 위한 예비 실험이었다면, 1985년 제프리 삭스가 주도했던 볼리비아의 사례는 '동구'의 신자유주의 이식을 위한 예비 실험이었다. 그러나 대륙적 차원에서 중남미에 신자유주의가 보편화된 것은 1988년 멕시코의 살리나스(Salinas), 1989년 아르헨티나의 메넴(Menem), 베네수엘라의 페레스(Peres), 1990년 페루의 후지모리(Fujimori) 정권 등이 등장하면서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정책 이식에서 중요한 고리가 되었던 것이 경제적으로 외채 문제였다면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적 체제였다. 멕시코의 경우 이미 오랜 전통을 갖는 일당 독재 체제를 기반으로 했고 메넴과 후지모리는 비상 입법, 친위 쿠데타, 헌법 개정 등으로 독재의 기반을 새롭게 구축한다. 이에 반해 중남미에서 비교적 건실한 정당 체제를 갖춘 베네수엘라에서는 결국 페레스의 실각으로 끝난다.

 

요약하면, 현재 세계적인 차원에서 진행 중인 신자유주의 실험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르지만, 적어도 서구의 실험에 한정한다 해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경기를 재활성화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원했던 '건전한 불평등'을 달성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이데올로기 측면에서는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 다시 말해서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명백히 실패했는데도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서구의 사회민주주의나 동구의 사회주의의 실패에 따른 반사 이익에서 비롯한 것이므로 일종의 정치적 거품이라 할 수 있다. 

 

 

3.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과 경제적 인권

 

신자유주의에서는 자본과 시장 경제를 중심에 놓기 때문에 인간의 삶과 자연은 부차적인 차원으로 밀려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삶과 자연은 자본의 논리, 이윤 최대화의 논리에 봉사하는 한도 내에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노동자의 임금이나 노동 조건이 관심사로 등장하는 것도 이윤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 조건으로서 노동자의 삶을 재생산하는 한도 내에서이고 가난한 사람들, 다시 말해 시장 경제 안에서 사고 팔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도 그들이 전체 시장 경제 시스템을 불안하게 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노동자나 가난한 사람들은 사람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러한 노동자의 삶, 가난한 이들의 삶의 희생은 전체의 이름으로 불가피한 어떤 것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을 포함한 전체의 더욱더 나은 삶을 위해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그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시장 경제 시스템이 올바로 구현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시적인 것이고, 시장 경제가 외부의 강제나 강요 없이 자유롭게 작동한다면 이 모든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본다. 이러한 논리에서 인간의 삶과, 권리의 희생과 자연의 파괴는 불가피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래의 정치적 인권에 대한 관심은 최근 경제적 인권에 대한 관심에서 고조되고 있다.3) 이러한 관심은 특히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유엔은 1966년 총회에서 이 규약을 채택했고, 1985년 경제 사회 이사회 산하에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위원회'를 설립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한 변호사 협회의 [1999년 인권 보고서 제14집]에 따르면 경제 위기에 따른 구조 조정으로 특히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 여건이 크게 약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4) 1995년부터 감소세를 보이던 산업 재해율이 증가하고, 구조 조정에 따른 인력 감축으로 노동 시간이 증가해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29개 회원국 중에서도 최장 근로 시간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 실업률은 떨어졌으나 일용직과 임시직 급증으로 고용 불안이 지속되었고 대기업과 중소 기업 간, 사무직과 생산직 간 임금 격차가 확대되었다. 구조 조정에 따른 이러한 폐해와 부작용은 다음과 같이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에 위배된다.5)

 

 

4. 인권과 교회

 

라틴 아메리카의 푸에블라 주교회의에 따르면, 사회 교리의 일차적 목적은 하느님의 모습인 인간의 존엄성과 거기서 나오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다(475항).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고, 그렇게 창조한 인간 안에 하느님께서 몸소 들어오시어 - 육화 - 인간을 자신의 성전으로 삼으시고 끝내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다. 이러한 헌신적인 하느님 사랑에서 우리는 쉽게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할 수 있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비추어 보는 사회 교리 역시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중심에 놓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이 단순히 선언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으려면 그러한 존엄성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보증해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할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또한 그 노동에 대해 정당한 보수를 받을 권리와 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배타적으로 지배 사용할 소유권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 밖에 많은 권리들을 상정할 수 있지만 적어도 이 세 가지 권리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다.

 

이러한 기본권이 침해될 때 그것은 단순한 권리 침해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삶 자체를 부인하는 셈이 된다. 사실 가톨릭 교회가 사회 문제나 정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인권 보호 차원에서이다. 우리나라나 제3세계 등지에서 이뤄졌던 현실 참여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인권에 대한 관심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폭력과 억압에 대한 저항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제3세계 국가들이 민정 이양을 통해 일정한 형태의 민주화를 이룩하고, 1980년대 말 동구권 붕괴로 냉전 체제가 해소되면서 그 의미들이 크게 달라진다. 특히 전세계적으로 몰아 닥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각종 경제 위기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으로 나타난 각종 폐해나 부작용들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을 야기하면서 경제적 인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럼에도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개별 국가의 정부들은 자국의 경제 문제에서조차 그 주권이 크게 제한되고 있다. 멕시코의 경제 위기 때 다른 중남미 국가들이 경제 모델 - IMF 구조 조정 프로그램 - 의 유사성으로 멕시코의 위기가 곧 자국의 위기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있었던 것도 이러한 현실 때문이고, 우리나라 역시 1997년 이후 경제 위기와 더불어 채택된 경제 정책은 우리나라 국민 경제의 관심이나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워싱턴에서 작성된 IMF 구조 조정 프로그램을 그대로 집행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경제적 현실 때문에 경제적 인권 문제는 거의 방치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문제의 심각성이 한층 더 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의 인권 문제는 무엇보다도 고삐 풀린 시장 경제의 폭압에 대한 저항에 기초해 새롭게 조명되고 그에 따른 실천들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테면 생활고를 비관하여 연일 생명을 끊는 10-30여 명의 이름 없는 '경제적 사형수들'에 대해서 동등한 관심을 기울이고, 자살을 가져온 가해자의 폭력과 억압성, 약탈의 또 다른 형태인 불로 소득의 억압성에 대해서 동등한 저항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경제 성장주의에 맞서 '인간 발전 지수'를 대안으로 신자유주의에 외롭게 도전하고 있는 유엔 개발 프로그램(UNDP)과 같이, 인권과 '발전'을 연계하려는 노력에 인권 운동은 적극 가담할 필요가 있다.6)

 

그럼에도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인권 단체들이 여전히 정치적 시민적 권리에 집중하고 있고 경제적 인권 침해에 대해서는 기껏해야 논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우리 교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한 해 정치적 인권을 둘러싼 국가 보안법 개정 또는 폐지를 둘러싼 싸움에서 세미나도 하고 단식도 하고 시위도 하는 등 나름대로 활발하게 움직였지만 인간의 생존 근거 자체를 박탈함으로써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정을 해체하고 하나뿐인 생명마저 끊는 경제적 인권 침해에 대해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또 생명은 낙태에 의해서만 짓밟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하느님을 고백하는 우리 신앙에 걸맞으려면, 정치적 인권 옹호나 낙태 반대뿐 아니라 경제적 인권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 그에 따른 실천들을 조직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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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erry Anderson, "Balance del neoliberalismo: lecciones para la izquierda", El Rodaballo, Argentina, 1996년 1월, 1면.

 

2) 미셀 캉드쉬 전 IMF 총재 자신이 동구권에 시장 경제를 이식한 방식이 지난 세기말의 야만적 자본주의의 잔인한 순간들을 상기시킬 정도로 가혹했다고 고백한다(Michel Camdessus, "Mercado-Reino:A dupla pertencia", [프랑스 주교회의 회보] 12호, 1992년 7-8월, 2면).

 

3) 최근 세계 인권 선언의 한계에 대한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제정 당시 몇몇 서구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생국들에 노동 문제 등 경제, 사회적 권리 의식이 일천해 선언이 시민, 정치적 권리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르완다 등의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갈등, 아동 학대, 다국적 기업의 인권 침해, IMF 등 국제 기구나 자본에 의한 경제 구조 조정 과정의 인권 위협, 유전자 복제, 환경 등"과 같은 새로운 과제 앞에서 인권 개념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s_plus/news163/np163dd020.html).

 

4) 관련 사이트 폐쇄로 삭제.

 

5) 이대훈에 따르면, 공무원 감축, 공기업 민영화, 수입 개방에 따른 저가 외국 상품과의 경쟁과 고금리 압박으로 발생하는 중소 기업의 대량 도태를 주요 원인으로 하는 '실업의 증대'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제6조 노동의 권리에 대한 심각한 침해이고, 반복적인 통화 평가 절하, 차관 조건으로 부과되는 IMF의 임금 지침과 노동 조합 억제 정책으로 인한 '노동 가치 및 임금의 하락'은 같은 규약 제7조 공정하고 유리한 노동 조건의 향유권, 제8조 노동 기본권의 보장과 위배된다. 또 수출 산업에 대한 강조, 실업 증대, 임금 억제, 물가 상승, 소생산자 보호 정책의 폐기로 인한 '빈곤층 확대와 빈곤 심화'는 같은 규약 제9조 사회 보장권, 제11조 사회권의 기본, 일반 규정, 기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침해하고, ......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로 오염 물질 배출, 자원 파괴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약화 등으로 '환경 파괴의 가속화'는 같은 규약 1조 재화와 자원을 자신을 위하여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한다 .......("신자유주의 공세와 인권 운동의 과제", 1998년 5월, http://www.hbr.pe.kr/ash/humanright/index.htm).

 

6) 이대훈, 위의 글.

 

[사목, 2001년 3월호, 김항섭(한신대학교 강사, 경제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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