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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가톨릭시즘과 한국 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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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50

가톨리시즘과 韓國 醫學

 

 

I. 問題의 提起

 

문헌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事業이 처음 시작된 것은 李朝末期  純祖에서 哲宗에 이르는 사이 가톨릭 신부들이 孤兒들을 위해 孤兒院과 함께 藥局을 개설한 것이 최초라고 할 수 있는데1) 특히 1885년 지금의 서울에다 불란서 신부 메스트르가 세운 성영회 慈惠院은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의 施療機關인 것이다.2) 이후로 한동안 가톨릭의 醫療事業은 1883년 카나다 宣敎師들에 의한 王立 濟衆院을 위시해서 주로 北美 선교사들에 의한 전국 여러 곳의 근대식 診療活動 등 改新敎의 그것에 비하면 보잘것이 없었으나 그래도 現在 聖母病院의 前身이라 할 수 있는 施療所를 1905年 京城修女院內에 설치하여 운영하는 등 많은 의료 및 사회 사업을 전개해왔던 것이다. 특히 해방 이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각종 救濟사업과 6 · 25 이후 여러 修女會에 의한 적극적인 의료봉사활동은 우리나라 醫療史에 뚜렷이 빛나는 업적들로 손꼽히고 있다. 더구나 1951년부터 시작해서 현재는 전국 37개의 定着場과 10여 개의 특수진료시설을 갖추고 있는 가톨릭의 癩病 理事業은 政府機關은 물론 어떤 민간단체들로서도 감히 해낼 수 없는 가톨릭만의 훌륭한 醫療活動이라 할 수 있다. 가톨릭의 이런 모든 救寮活動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가톨릭의 중심사상인 慈惠, 博愛思想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애당초 교회가 이런 의료 활동을 가난한 모든이들에게 거의 전부 무료로 해왔던 것으로 봐도 알 수 가 있다. 醫療活動을 통한 敎會의 이런 정신은 극히 개인위주였던 과거 우리나라 儒敎의 實踐倫理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가톨릭 전래 당시의 사회제도나 민중의 생활에 일대 革命을 초래한 것은 물론 階級思想의 타파로 만인평 등을 이상으로 하는 民主主義 思想을 싹트게 하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아 틀림이 없을 정도다. 敎會의 醫療事業은 그러나, 최근에 와서 그 내용에 있어서는 물론 목적에까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유야 어찌됐건, 오늘날은 대부분의 교회병원들이 병원에 오는 有料患者들의 치료활동에만 급급하는 형편이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적 慈惠, 博愛사상의 실천을 게을리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이것이야말로 바로 오늘날 한국 가톨릭교회가 그들의 醫療 내지는 醫學活動과 관련하여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한편, 이것과는 문제의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오늘날 가톨릭 교회가 당면한 또 하나의 현대의학상의 문제로는 醫學의  技術發展과 人口增加에 따라 생겨난 생명경시 풍조에 대해서 교회가 어떻게 적절히 대처해 나갈 것이냐 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예컨대 人口調節의 한 방편으로 생겨난 人工流産이나 不妊手術, 그리고 이런 것과 관련된 醫學硏究들에 대한 교회의 대처방안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이외에도 물론, 이미 등장했거나 장차 그렇게 될 문제 가운데는 가톨리시즘에 입각하여 생각해야 할 현대의학상의 문제점들이 많다. 가령 安樂死의 문제라든가 心臟이나 腦와 같은 臟器移植문제, 그리고 각종 生命創造에 관한 연구 등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우리나라에 제기된 두 가지의 문제, 즉 한국에 있어서 敎會醫療奉仕活動, 그리고 人工流産이나 不妊手術 등 각종 인구조절 방법들에 대한 우리 가톨릭의 대처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장차는 어떨 것인지에 대해서만 간단히 고찰해보고자 한다.

 

 

II. 가톨릭 시즘에 立脚한 現代 가톨릭 醫療事業

 

역사적으로 敎會의 醫療事業은 그것이 전교 활동의 중요한 수단이 되어오긴 했어도 본시 병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이들에게 치료의 기적을 보이셨던 그리스도의 행적을 본받고자 했던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 의료사업은 원칙적으로 慈善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물론 이제까지의 교회의 자선사업은 그것 자체가 是非의 대상이긴 하다. 개인의 물질적인 필요를 아무 비판없이 채워만 주는 식의 慈善事業은 결국 그 개인은 물론 그들이 속한 社會의 발전에 오히려 큰 방해가 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醫療에 관한 한 이런 慈善은 언뜻보기에 항상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진다3). 그래서 아직도 無料가 성행하는 곳은 醫療界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로 의료에 관한 한 자선사업은 어느 정도 당연시되어 왔다. 오늘날 교회병원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교회가 의료활동의 상당한 부분을 자선사업으로 하고자 하는 욕심과 營利性 여부의 是非를 무릅쓰고 운영상의 赤字를 메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야 하는 고민이 그것이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균형을 각기 달리함으로써 어떤 병원은 이 중요한 의료사업을 그만두어야 할 지경에 빠지기도 하고 또 더러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오늘날 교회병원들이 지나치게 營利的이거나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불친절하다는 것들로 표현되지만 좀더 뜻있는 사람들의 견해는 오늘날 교회병원의 의료사업이 그 내용에 있어서 더 이상 교회사업으로서의 의미를 잃고 있지 않느냐 하는 점인 것이다. 물론 변화한 것은 교회병원이 아니고 社會쪽이라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질병이 다양해지고 그 질병들을 관리하는 기술이 專門化되었을 뿐 아니라 시설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敎會病院들도 서둘러 시설을 확장하고 비싼 人力을 확보해야 했고 이 일을 위해서 有料로 환자를 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은 언뜻 아주 자연스런 일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문제는 社會病院들이 바로 그 社會의 變化 - 그것도 절대로 바람직하지 못한 醫療의 高級化라는 변화 - 에 거의 비판없이 따라가는 형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社會의 變化를 따라간 것이 아니고 항상 사회를 스스로 변화시켜 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오늘날 왜 敎會病院이 그토록 어려운 고민에 빠져 있게 된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가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만일 아직도 敎會가 醫療事業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원칙적인 면에 있어서 보편성을 탈피하는 것이어야 한다. 최근 교황청 의료문제 전문기구의 하나인 ‘꼴·우눔’ 위원회에서는 전세계 가톨릭 醫療機關들이 나가야 할 새로운 방향에 대해서 두 가지 지침서4)를 발표한 일이 있다. 하나는 1976년 3월 30일부터 4월 1일까지 로마에서 열린 醫師, 간호원 및 기타 敎會醫療事業 전문가들이 가진 “開發途上國家에 있어서 보건 및 질병에 관한 대책”이란 주제의 회의결과를 정리한 것이고 또 하나는 다음 해 거의 같은 기간에 역시 로마에서 열린 ‘1차 保健醫療’에 관한 전문가 회의에서 채택된 건의서이다. 우선 첫 번째 지침서의 내용은, 아직도 세계에는 많은 개발도상국가들이 있고 이들 나라의 농어촌 주민들은 지금도 적절한 醫療惠澤을 못받고 있으므로 교회는 이들을 위한 의료사업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과 과거와는 달리 이제 이런 지역들에서의 醫療事業은 질병예방을 포함한 소위 包括的 醫療保健事業을 그 내용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지침서는 특별히 가톨릭 醫療人들이 강력한 그리스도적 사랑의 실천자로 모범을 보이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1975년 1월 세계보건기구가 제네바에서 채택한 1차 보건의료의 기본원칙을 우리 교회 醫療機關들이 먼저 실천에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의료에 종사하는 그리스도 信者라면 누구나 이런 일과 관련해서 교회가 가르친 몇 가지 중요한 福音思想에 입각하여 끊임없이 자기 복음을 가꾸는 일은 물론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이들로 하여금 그들이 속한 지역사회에 대해서 그들의 건강과 그 지역사회 전체의 발전에 대한 강한 책임을 느끼도록 계몽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지금 都市에 있는 모든 敎會病院들이 이제까지의 의료활동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도시는 도시대로의 교회가 담당해야 할 醫療保健 문제를 갖고 있음은 물론 특히 敎育病院들은 앞서 말한 새로운 敎會醫療事業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각종 醫療要員의 양성에 절대적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現在 도시에 있는 敎會病院들은 敎會精神에 따라 이제까지의 의료활동을 반성하고 장차의 사업을 철저히 계획해야 하는데 이때 그 地域社會의 要求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일 교회가 患者診療로부터 얻은 돈으로 다른 投資를 한다든지 또는 高度의 병원치료시설을 단지 다른 병원들과 경쟁적으로 도시에만 확장해간다면 그것은 절대로 敎會醫療事業으로서 正當化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敎會는 항상 敎會醫療事業 담당자들과 모임을 가져 교회의료사업이 진정한 교회사업이 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III. 韓國敎會 醫療事業의 功過와 전망

 

현재 우리나라에는 敎會나 수도회들이 運營하는 50여 개의 가톨릭 病 · 醫院이 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病床은 줄잡아 4천은 될 것으로 보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전체 병상의 약 10%에 해당하는 숫자다. 1976년 말 현재 보건사회부에 病院開設 등록을 필한 전국 병원급 의료기관 명단에 의하면 1백 80개의 병원 가운데 가톨릭病院이 25개로 전체의 13.9%를 차지했는데 各 宗派를 총망라한 改新敎의 병원들은 단 13개밖에 안되며 病床數에 있어서도 가톨릭病院은 전체 2만 1천 병상 가운데 약 2천 6백 병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醫療機關의 숫자나 그 施設의 규모는 우리나라에서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약 3%정도인 것과 비교해도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 前述한 바와 같이, 醫療事業에 관한 한 가톨릭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先驅者였던 것은 물론 훌륭한 醫療奉仕를 제공해왔다. 특히 舊韓末, 日政時期에 있어서나 6 · 25동란시기 등에 집중적으로 교회의료기관들이 설립된 것은 이같은 교회의료사업의 빛나는 업적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敎會病院들은 아직 일부 대중으로부터 이긴 하나 적잖은 비난을 받기 시작했고 또 이 일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사실은 오늘날 교회의 醫療事業에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를 품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5). 이같은 현상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원리로 世界 모든 나라 敎會病院들이 안고 있는 고민 그대로를 현재 우리나라 교회 병원들 또한 갖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주로 도시에 큰 병원을 만들어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醫療惠澤을 줄 수 있었던 교회병원들이 이제는 다른 많은 병원들과 有料患者 경쟁에 나서는 형편이 된 것이다.

 

1978년도 「한국 천주교 주소록」에 의하면 전국에는 病院級 이상의 가톨릭 醫療機關이 26개 있었고 醫院級은 助産所나 나병진료소를 합쳐 41개가 있었다. 이를 市部 이상과 郡部이하로 구분해보니 病院의 경우는 전체 26개중 18개가 市에 있어서 전체의 69.2%를 차지했고 一般病院은 20개 중 7개가 市에 있고 나머지가 郡部 以下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分布는 전국 病醫院의 그것과 비교해볼 때 病院이나 醫院 모두 일반 병원이나 의원들에 비해서는 군부 이하에 존재하는 경향이 높긴 하지만 가령 우리나라 都市人口와 農村人口의 比率로 본다면 확실히 교회 醫療機關이 都市에 많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지금 일부 社會 혹은 교회 내부의 비판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르이 敎會醫療活動을 긍정적으로 봐야 하는 훌륭한 사실들을 얼마든지 들 수가 있다. 예컨대 癩病과 같은 특수질환관리, 職業病에 대한 연구와 진료활동,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醫學敎育의 실시 등이 그 대표적 일들이다. 더구나 病院內에서는 많은 院牧活動을 통해 司牧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敎會醫療活動을 결코 과소평가할 일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일이다. 그동안 敎會病院들이 이룩한 그 많은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지금 확실한 것은 적어도 도시에 있는 교회병원들은 다시 한 번 그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가톨릭시즘에 입각한 진정한 반성과 계획의 기회를 가져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축소할 것은 축소하고 늘릴 것은 과감히 늘림으로써 이 나라 실정에 맞는 醫療형태를 취해나갈 것은 물론 장차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醫療로 기대되는 地域社會保健醫療를 앞장서서 지도해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IV. 現代醫學의 生命輕視風潮와 가톨리시즘

 

가톨릭은 인간의 行爲가 善인지 惡인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그 기준을 自然法(natural law)에 둔다6). 이 자연법에 의하면 결국 인간의 本性 전체와 일치하는 행위는 모두 道德的인 善이며 이에 反하는 행위는 모두 道德的인 惡이다. 醫師들에 의한 모든 醫學行動이 가톨리시즘에 입각하여 善인지 惡인지도 말하자면 이 自然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물론이다. 독일 태생의 가톨릭계 倫理學者이며 日本 岩手醫科大學에서 醫學倫理를 강의하고 있는 Paul Bernardi 교수에 의하면 모든 醫學行動은 自然法에 입각해서 대체로 다음 다섯 가지 원칙을 따른다고 한다. 첫째로 모든 인간은 살아가는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떠한 계획적인 殺人도 倫理的인 惡으로 쉽게 단정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든지 만일 이같은 인간의 基本生存權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반드시 예측하지 못했던 不幸을 당하게 될 것은 뻔한 이치다. 실제로 생존권의 침해로 보는 人工流産이나 或種의 産科的 수술,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에 대해서나 人間의 종족보존 능력에 간섭하는 일인 安樂死, 不妊手術등은 이미 그것 자체가 피할 수 없는 불행인 것은 물론 장차 어떤 大量殺人까지도 合理化하는 무서운 行爲로 보는 것이다. 두 번째 醫學的 行爲의 원칙은 모든 인간이 正義를 갈구하는 권리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환자는 의사에게 양심적 조치를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과 인간의 능력과 힘은 반드시 그 本性의 발전에 따라 이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의 다섯가지 원칙 중의 셋째와 넷째에 해당한다. 맨마지막은 어떤 종류의 惡도 善의 목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다섯 번째 원칙은 오늘날 대부분의 發展된 醫學技術들이 범하기 쉬운 중대한 윤리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가톨릭의 입장을 나타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령 結果的으로는 施術者의 일시적 명성이나 높여주는 일 외에 아무것도 아닌 生存의 神秘에 대한 人間의 도전적 연구와 技術의 개발이 바로 이에 속하는 일들이다. 실제로 器移稙이나 試驗管 아기 등의 수술이나 硏究는 매우 희박한 한두 件의 成功例를 위해서 숱한 生命現象을 말살하는 惡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다섯 가지 醫師倫理의 諸原則은 哲學의 한 분야로서 확실하고 論理的인 증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일 이 다섯가지 원칙이 무시되는 세계에서라면 사랑하는 일은 물론 生의 지속이나 인간의 활동 자체도 결코 바람직하게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이 Brnardi의 견해다. 

 

여기서 한 가지 참고로 밝혀둘 일은 改新敎의 自然法에 대한 입장이 가톨릭과는 너무도 큰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가톨릭이 自然法에 근거해서 모든 윤리규범을 유도해냄으로써 자연 그 자체의 神聖性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하는 반면 改新敎는 자연을 그대로 신성시하지 않고 人間이 實用的으로 이용하고 섭렵하여 정복하는 대상으로 自然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7). 이런 논리로 改新敎는 人工流産마저도 훨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잇는 실정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 인정하듯 일정한 自然觀이 없으며 그들이 내세우는 몇 가지 倫理觀이라는 것도 각기 나름대로이기 때문에 형식상 가톨릭의 醫學倫理를 演繹的 倫理라고 하고 그들의 의학윤리를 歸納的 倫理라고 말함으로써 결국은 같은 倫理觀을 갖는 것처럼 이야기 되지만 이것은 마치 Bernardi가 말한 다섯 가지 원칙 중의 다섯 번째 원칙을 즐겨 범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뿐이다. 

 

주로 科學技術의 발달과 인구증가에 따라 대두된 출산억제 방법들과 관련해서 가톨릭이 내세우는 自然法의 원리는 행위 각각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일 뿐 아니라 그 입장은 매우 강경한 편이다8). 가령 斷種手術에 대해서 그것이 영구적 不姙을 목적으로 하는 소위 直接的 斷種手術인 경우 이것은 절대로 옳지 않은 행위로 간주하는 것이다. 바오로 6세의 回勅 「인간의 생명」(Humane Vitae)은 “敎會의 교도권이 여러번 가르친대로 남자이건 여자이건 영구적이건 일시적이건 直接斷種 수술은 단죄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人工流産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 회칙은 産兒調節을 목적으로 한 어떤 直接的 落胎도 배격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V. 醫學上 自然法의 문제와 韓國 가톨릭의 努力

 

모든 사람이 교회가 自然法을 따라 醫學的 行動에 올바른 윤리규범을 적응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런 일은 대체로 人間의 즉시적이고 本能的인 욕구나 希望과는 달리 反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실천에 있어서는 대체로 어렵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가톨릭 교회는 이런 모든 人間生命과 관련된 醫學的 문제들에 대해서 의연히 올바른 태도를 표명해홨을 뿐 아니라 이것이 지켜질 수 있도록 구체적인 노력을 경주해 왔다. 

 

1962년 이후 政府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가족계획사업에 의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非自然的인 피임법 사용에 대해서 교회는 이것을 性倫理와 個人의 健康, 그리고 가톨리시즘에 입각하여 우려를 표명해왔고 인구 문제에 대한 가톨릭의 바른 입장을 밝혀왔던 것이다9). 더구나 최근 개발된 효과적 자연피임법(점액관찰법이나 증상체온법)을 널리 보급할 수 있도록 幸福한 家庭運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교서10)를 주교회의가 발표하고 실제 각 교구 단위로 이 방법을 지금 열심히 지도하고 있다. 그리고 人工流産에 관해서는 우리나라 國會가 이것을 合法化하려던 1960년대 초기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法은 1973년에 合法化(母子保健法)되었으나 교회는 교황청이 발표한 人工流産 반대성명11)을 번역 배포하는 등 계속해서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명해왔다. 그외 1975년 7월에는 한국가톨릭 病院協會의 이름으로 정부의 不姙 시술시행 검토에 대한 반대견해를 政府 및 言論등 각계에 전달한 일도 있다. 醫學上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가톨리시즘과 상충되는 면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주로 이들 人口調節과 관련된 문제들을 경험하고 있을 뿐이지만 앞에서도 言及했듯이 장차 더 많은 문제에 부딪치게 될 것이 예상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좀더 많은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보다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며 기왕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좀더 전체 교회적인 태도와 이를 위한 행동이 기대되는 것이다.

 

 

VI. 結論

 

敎會의 각종 사회사업은 종종 그것을 地域社會나 國家의 발전에 있어서 敎會가 담당하는 役割이란 관점에서 논의된다12). 원래 발전이란 개인,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전체의 富와 平和, 그리고 행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통상 經濟的 向上으로 지칭되는 國家發展에서도 개인에게는 반드시 良質의 生活이 보장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국가수준에 있어서 발전이 개인의 기본적 권리를 침해한다거나 이를 無視하고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發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기에 個人의 健康問題가 發展과 별도로 고려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더구나 後進國에서는 그들의 家族發展計劃에서조차 개인의 건강은 거의 무시되는 게 보통이고 때로는 그 발전계획들이 個人의 건강적 희생까지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에 놀란다. 이런 의미에서 일찍부터 가톨릭교회가 醫療事業을 그 중요한 世俗事業으로 해왔다는 사실은 결코 과소평가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의 의료사업은 그 목적과 내용에 있어서 새로운 모색을 계획해야 한다. 그것은 그만큼 사회가 변했기 때문인데, 교회는 단지 변화에 적응해오기보다 언제나 사회를 변화시켜온 先驅者的 역할을 했음을 상기할 대 敎會醫療事業이 크게 달라져야 할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리고 이제 교회는 단지 의료의 전달자라는 소극적 기능만으로 의료사업을 핏기보다 生命現象과 관련된 모든 의학상 문제에 대해서 자신있는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人間의 硏究慾은 이미 고삐풀린 망아지와 같이 되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이같은 生命에의 도전적 행위는 결국 인간을 스스로 멸망의 구덩이로 몰아넣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이런 일과 관련하여 가톨릭은 이제 거의 유일하게 남은 道德的 宗敎라고나 해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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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金斗鍾, 韓國醫學史 p.493, 탐구당, 서울, 1966.

2) 朴相ㅡ, 韓末 및 日政時代의 社食事業에 관한 硏究, 中央大學校 社會開發大學院 碩士學位論文 p.49, 1971.

3) 孟光鎬, 교회의료사업의 자세, 경향잡지 70권 3호, p.18-20, 1978.

4) 교황청 꼴·우늄위원희, 교회의료봉사의 새 방향, 한국주교희의인성회 발행, 서울, 1978.

5) 任珍昌 編, 韓國의 社會發展과 가톨릭敎會의 役割, 西江大學校 社會問題硏究所, 서울, 1976.

6) 德田, 醫學과 倫理, 醫學書院, 東京, 1973.

7) 노경선, 生命의 존엄성에 대한 改新敎의 立場, 聖醫學報, 제190호, 가톨릭의과대학, 1976.

8) 與庚換, 現代醫師의 倫理問題, 醫脈 제12권 pp.71-81, 가톨릭의과대학, 1977.

9) 한국주교회의, 세계 인구의 해에 즈음하여, 주교회의 사목교서, 서울, 1974.

10) 한국주교회의, 건전한 가족계획에 대한 사목교서,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서울, 1976.

11) 한국주교회의, 인공유산 반대선언, 한국천주고중앙협의회, 서울, 1974.

12) 孟光鍋, 地域社會 건강과 발전에 있어서의 敎會의 역할, 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p.10 -13, 10월호, 1976.

 

[사목, 1979년 7월호, 맹광호(가톨릭 대학 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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