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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철학적 측면에서 보는 생명복제의 현실과 인류의 미래: 생명 공학은 신을 희롱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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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51

철학적 측면에서 보는 생명 복제의 현실과 인류의 미래


생명 공학은 신을 희롱하는가 - 유전 공학에 대한 찬반 논변

 

 

1. 생명 공학은 제2의 창세기를 여는가?

 

1953년 생명체 유전의 신비를 간직한 DNA의 이중 나선 구조가 밝혀진 이래 인간을 위시한 여러 생명체들의 모든 유전 정보를 규명하는 것은 생명 과학의 숙원이었다.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를 포함한 모든 DNA를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의 합성어인 유전체(genome)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도 특히 인간의 유전체를 모두 규명하겠다는 대담한 계획이 바로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 HGP)이다. 이 같은 프로젝트는 1990년부터 15년 계획으로 총 예상 비용 30억 불을 투자해서 진행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진행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첫째, 인체 및 소수 모델 생명체의 유전체 염기 서열을 결정하고, 둘째, 연구 결과의 수집, 저장, 분배 및 분석 능력을 개발하며, 셋째, 이 같은 목표의 달성에 필요한 제반 기술 개발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프로젝트가 태동할 당시는 무모하고 낭비적이라는 비난도 있었으나 이 프로젝트는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었으며 시작된 지 10년도 되지 않아 20여 종이 넘는 모델 생명체의 유전체 염기 서열이 완전히 밝혀져 공공 데이터 베이스에 등장하였다. 인간 유전체도 이미 인체 염색체 24개에 대한 염색체 구조 지도의 작성이 완료되었고 당초의 계획보다 4년 앞당긴 2000년 3월까지 90%를 완료할 계획이라 한다.1) 

 

인간 유전체 염기 서열 지도의 완성을 앞두고 그 결과가 가져올 파급 효과를 몇 가지로 나누어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인의 유전자를 검색하여 이상 유전자의 보유 여부를 파악함으로써 자손에게 나타날 수 있는 유전병의 발생 빈도를 줄일 수 있게 될 것이며, 태아와 신생아의 유전자 검색으로 가능한 유전병을 치료 예방할 수 있다. 둘째, 프로젝트가 완료되면 인간의 표준 염기 서열 결과를 바탕으로 인종, 질병 발생, 의약품에 대한 개개인의 차이를 규명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셋째, 21세기는 유전체 서열 연구에 이어 본격적으로 유전체 기능 연구가 활발해져 의료와 산업 분야 응용에 이바지할 것이다. 그 결과로써 우리는 저마다 유전자 신분증을 갖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배우자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가 유전병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 생명 공학 또는 유전 공학의 기술 발전으로 유전자 조작, 변형이 가능해졌고 그로써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지고 다양한 변종이 생겨남에 따라 제2의 창세기를 맞기라도 한 양 야단법석이다. 이같이 들뜬 분위기는 신의 비밀을 엿보고 그의 지식을 탈취한 프로메테우스적 기획을 예찬하는 쪽에서건 신을 희롱하고 섭리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의 월권을 비난하는 편에서건 마찬가지이다.2)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사태에 대해 그 예찬도 이르거니와 비난도 조급하다는 생각에서, 특히 종교적인 입장일지라도 지나친 비난은 몇 가지 관점에서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견해를 정리하여 제시해 보고자 한다. 우선 쟁점을 좀더 선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라는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더불어 그와 대비되는 유사 개념들을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원래 기독교의 창세기에서 문제되는 창조는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 : creation from nothing)라는 의미를 가지며 오직 전지전능한 신만이 이러한 권능을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미 존재하는 요소들을 이리저리 재구조화하는 것은 창조가 아니라 구성(construction)이나 조합(combination)일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들이 새로운 상품들을 만들어 내는 발명은 결코 창조일 수 없으며 다만 이미 있는 요소들을 재구성하고 재조합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우리의 용어법에서 발명 중 독창성이 강한 경우에 창조라는 말을 쓰기도 하나 이는 비유적인 의미에서일 뿐이다. 

 

인위적인 재구성이나 조합으로써 발명이 아니라 자연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재구성과 재조합의 과정이 일정한 방향성이나 지향점을 가질 경우 우리는 진화(evolution)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진화는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각종 변수들로써 서서히 재구성, 재조합의 과정이 일정한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같은 변수들을 인위적으로 통제, 조작함으로써 재구성과 재조합의 과정이 급속히 이루어질 때,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생체를 출현시켰을 경우 우리는 놀라움의 정서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자 창조라는 말을 곧잘 오용 또는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종의 기원]을 쓴 진화론의 창시자 다윈은 그의 책 말미에서 생성의 “단순한 기원으로부터 가장 아름답고 가장 놀라운 형태가 무한히 발생되었고 또 진화되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이, 그 갖가지 능력과 함께 최초에 조물주에 의해 하나 또는 소수의 형태로 불어넣어졌다.”라는 견해에 장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 글 속에서 다윈은 분명 진화가 결코 창조는 아니며 창조된 생명 및 그에 내장된 능력이 각종 형태로 재조합, 재구성의 과정을 거쳐 변화되어 가는 과정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3) 

 

아직 우리가 진화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와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앞으로 유전자의 비밀을 모두 알게 될 경우 그리고 그에 작용하는 환경적 변수들이 모두 인식된다고 가정할 경우 그 예측이 원리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화는 신이 디자인한 생명 체계의 범위를 결코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 공학 또는 유전 공학의 모든 성과 역시 자연의 진화 과정을 좀더 인위적으로 그리고 급속하게 조작함으로써 나타난 또 하나의 진화로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2. 생명 공학의 현대적 발전

 

생명 공학(Biotechnology)은 인간적 목적을 위한 생명 과학의 적용으로서, 소박한 형태에서이긴 하지만 인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적 생명 공학은 동물 사육, 식물 재배 등 농사짓는 일에서 시작하여 술, 빵, 요구르트, 치즈 제품 등 먹을 것, 마실 것 등을 생산하기 위하여 미생물 등을 이용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적용 범위가 넓다. 동식물 중에서 우량종을 의식적으로 선별하여 번식시키고 파종한 것은 유전학적 우생학에 속하며, 자연에서 일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인간이 간섭하여 유전자 전용이 이루어지고 심지어 어떤 유기체는 유전 구조에 엄청난 변화를 낳기도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난 20여 년 내 가능하게 된 조직 배양(tissue culture), 배아 전용(embryo transfer), 유전 공학(Genetic Engineering) 등 새로운 분야의 발전으로 현대의 생명 공학은 전통적 생명 공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다음 몇 가지 점에서 크게 차별화된다. 현대적 생명 공학은 우선 그 범위에서 거의 무한하며 농사, 의학, 식품 산업 등에서 혁명적 성과를 얻으리라 예상된다. 또한 현대의 생명 공학은 인류에게 이로운 성과뿐 아니라 그 잠재적 해악 또한 무한할 것으로 예견되며 점차 변화의 엄청난 가속화로 예견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나아가 유전 공학의 어떤 측면은 생명의 성격, 인간의 존엄성, 인류의 미래 등에 깊은 우려를 자아내고 있으며 지적 소유권, 사생활권의 문제 등 갖가지 난제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다.4) 

 

1) 유전 공학의 성과

 

과학적 관점에서건 윤리적 관점에서건 현대 생명 공학의 가장 뚜렷한 발전은 유전 공학의 성과인데 이는 1970년대 후반 또는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어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모든 유기체는 그 내부에 유전자(genes)로 알려진 것을 지니고 있는데 이 유전자는 유기체가 생존, 성장, 생식을 위해 만들어야 하는 화학 물질에 대한 정보를 운반하는 것이다. 유전 공학은 그 전형에서 유전 인자를 한 유기체에서 다른 유기체로 이동시키는 일에서 성립하며 이런 절차의 의도된 결과는 첫 번째 유기체에서 통상적으로 만들어지는 화학 물질이 두 번째 유기체에서도 생성되는 일이다. 

 

유전 공학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하여 어떤 종(species)이, 다른 종이 만드는 것과 동일한 단백질을 생성하기를 바란다고 해 보자. 예를 들어서 어떤 박테리아가 인간의 인슐린을 생산할 경우 그것을 모아 스스로 인슐린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에게 공급하기를 바란다고 해 보자. 이 때 유전 공학을 이용하는 기본 절차는 다음 두 단계를 거쳐 진행된다. 우리가 겨냥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 인자를 확인하는 단계와 이런 유전 인자를, 그것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종에서, 그 유전 인자가 생겨나기를 바라는 종으로 이전하는 단계를 거치게 되는 것이다.5) 

 

우선 첫 번째 단계 곧 유전 인자를 확인하는 단계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 미세한 박테리아도 수백 개의 상이한 유전 인자를 지니며 일반 동식물도 수만 개의 다양한 유전 인자를 갖는다. 그런데 오늘날 관심의 대상이 되는 단백질을 생산하는 유전 인자를 확인하는 몇 가지 방식이 개발되어 있다. 두 번째 단계 곧 유전자 이전 단계를 수행하는 경우에도 여러 가지 접근 방식이 알려져 있다. 그 중 하나는 그 유전자를 운반하는 매개물(vector)을 이용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매개 없이 더욱 직접적으로 이전하는 방식이다. 

 

2) 기타 생명 공학 기술들

 

이 밖에도 현대 생명 공학 기술들에는 조직 배양, 시험관 수정, 배아 이전 등이 있다. 조직 배양(tissue culture)은 무균의 실험실 조건에서 동물, 식물 또는 다른 생체에서 추출한 세포나 조직을 양성하는 일을 말하며 이는 현대 생명 공학에 이용되는 많은 기술의 선결 요건이다. 식물 생체에 바탕을 둔 조직 배양은 오늘날 원예 산업 등에서 엄청난 상업적 중대성을 갖는다. 특히 생체 배양은 단시간에 동일한 많은 식물을 생산할 수 있는 대표적 절차로 한 식물에서 작은 일부 세포를 추출하여 이를 실험 용기에 옮겨 물, 영양 액, 빛을 제공하여 제 기능을 하는 식물로 신속히 성장하게 하는 기술인데, 이같이 성장, 생산된 식물은 유전적으로 동일한 복제물이 된다. 유사한 방식으로 동물 복제도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동물 농장에서 배아를 둘로 나누어 어미에게 투입하여 동일한 쌍둥이를 출산하는 일은 번번이 시도되고 있다.

 

시험관 수정(in vitro fertilization)은 인간의 불임 치료 방법 중 하나로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데 이른바 시험관 아기(test tube babies)는 이런 방식으로 출산된 경우이다. 시험관 수정은 때때로 동물에 있어 우량 어미에게서 다수의 배아를 산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하나 인간에 있어서이건 동물에 있어서이건 시험관 수정은 적합한 정자와 난자의 수정이 요구된다. 난자의 생산은 호르몬 제제 등의 투여에 따른 자극으로 얻어진다. 포유 동물의 경우 난자는 배란 직전 외과적 조치로 채집되기도 한다. 시험관 수정의 단순한 형태에서 정자는 적합한 매체와 더불어 난자가 담긴 시험 접시에 투입되며 이로부터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 수정이 이루어지게 된다.6) 

 

배아 이전(embryo transfer)은 발달의 초기 단계에 기증자에게서 채취하여 대리자에게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 대리모(surrogate motherhood) 형태를 띠고 있는 이 같은 절차는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 인간의 경우에는 그리 흔하지 않지만 가축이나 농장 동물의 경우에는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전통적 생명 공학에서도 유기체의 유전 구조의 변화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은 다음 세 가지 관점에서 현대의 생명 공학, 특히 유전 공학과 차이를 보인다. 첫째, 전통적 유전 공학이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동종 내에서의 변화를 시도한데 비해, 현대의 유전 공학에서는 유전자가 다른 종간의 이동으로 이루어진다. 둘째, 변화의 속도에서도 과거에는 수십 년을 거쳐 서서히 이동이 이루어졌는데 현대에는 동일한 이동이 수주 또는 수일 내에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또한 과거의 생명 공학은 음식물 등과 관련해서 소수의 종에 국한해서 이루어졌는데 오늘날은 종들간의 변화를 중심으로, 하수 처리, 공해 통제, 약품 생산 등에서 더욱더 야심적인 시도들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대조된다. 

 

 

3. 생명 공학에 대한 윤리적 찬반 논변

 

1) 유전 공학의 빛과 그림자

 

유전 공학은 유전 과정에 개입하여 유전 물질을 변경함으로써 유기체에 새로운 특성을 산출하고자 하는 과학이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선별적 파종, 짝짓기, 가축으로 길들이기 등으로 생체의 성질을 조작해 왔지만 1970년대 이래 생물학자들은 DNA 합성 기술을 이용하여 상이한 유기체, 심지어 자연종의 경계를 넘어 서로 다른 유기체의 유전 물질을 분리 결합함으로써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고도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유전 공학의 현실적 이득은 엄청날 것으로 기대된다. 식물, 동물 박테리아 등의 조작은 개선된 곡물, 염가의 식품, 더욱 효과적인 제약 등을 이끌어 낼 뿐만 아니라 인간 유전자의 검색과 변경은 유전적 질환의 치료와 예방과 관련해서 상당한 의료적 유용성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 같은 이득은 동시에 무한정한 잠재적 해악, 손실, 엄청난 비용, 바람직하지 않은 부작용 또한 동반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양면을 갖는 유전 공학에 대한 윤리적 시비를 다양한 철학적 관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유전 공학의 이득은 그 주창자들이 제시하듯 의료, 제약, 농업, 식품 산업, 환경 보존 등과 관련해서 다양한 현실적, 잠재적 기여를 내포한다. 의료와 건강 관리에서 가장 광범위한 결과는 인간 유전자 지도(human genome map)를 만드는 일에서 생겨날 것으로 예상되며 따라서 이는 앞으로 다양한 발전에 관건이 되는 사업이라 할 수 있다. 정확한 유전자 지식은 진단과 치료에서 예상할 수 없는 무한한 발전의 전제 조건일 뿐만 아니라 유전적 질환의 예방이나 인간의 일반적인 유전적 개선에서 중대한 요인이 된다. 그러한 지식이 가용할 경우 미래에는, 부모 될 사람은 결함 있는 유전자를 거르는 과정을 거칠 수 있게 되며 그 결과에 따라 그들 자신의 유전적 후손을 갖는 문제에 대한 상담과 조언을 받게 되고 출산 전 진단으로써 정보 제공도 가능하게 된다.7) 

 

출산 전 진단에 의거한 정보가 줄 수 있는 이득은 태아의 각종 유전적 질환의 치료로 유전적 결함의 상속을 예방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치료가 불가능할 경우 선택적 임신 중절로 엄청난 인간적 비극도 방지할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유전 공학의 이득은 출산 전 진단뿐 아니라 유전적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성인들에게도 유전자 치료를 제공할 수 있다. 나아가 유전자 지도는 단지 개인 차원뿐 아니라 직장의 직원 채용이나 보험 회사에도 크게 도움을 줌으로써 신청자의 질병과 돌연사 등에 대해서도 손쉽게 판정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유전자 치료나 유전적 상담을 위해서는 유전자 구조에 관한 상당한 지식과 다소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생명 공학에서 인간이 아닌 유기체의 유전적 조작 역시 인간에게 상당한 이득을 가져오게 된다. 예를 들어 유전 공학을 제약에 적용할 경우 미래에는 암, AIDS 등 불치병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 백신, 특효약 등이 생산될 수 있다. DNA 합성 기술을 농사에 이용할 경우 구충 능력을 스스로 내장한 식물의 개발이 가능해진다. 낙농에서도 유전 공학으로 태어난 소는 일반 소보다 더 많은 우유를 산출하게 되며 심지어 우유의 단백질 수준도 환자의 소화 능력에 맞추어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식품에 적용된 유전 공학은 바닐라, 코코아, 각종 오일, 설탕 등의 대용품 제조도 가능하게 하며 유전 공학으로 조작된 박테리아는 각종 독성을 중화시키고 폐기물을 소화시킴으로써 환경적 이득도 무한할 것으로 예견된다.8) 

 

그러나 생명 공학을 회의적으로 보는 반대자들은 그 이득 뒤에 숨어 있는 수많은 불이익을 거론한다. 유전 공학을 비판하기 위한 효율적 전략은 각종 기술들에 따르는 엄청난 비용과 위험 요소들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DNA 합성 기술은 엄청난 비용을 요구하며 각국 정부와 다국적 기업들은 생명 공학의 연구 개발에 해마다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는 실정이다. 반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같은 엄청난 자원이 국제 기구를 통해 제3세계에 배정될 경우 인류에게 좀더 이로운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문제로, 과학자들의 좋은 의도에도 유전 공학의 응용은 가끔 예상에 없는 노골적 위험 요소를 동반한다. 예를 들어 병충해에 대한 내성적 면역력이나 구충력을 내장하고 있는 식물을 생각해 보자. 그 같은 곡물이 인체에 예상하기 어려운 기형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부분적으로 입증되고 있으며 앞으로 그러한 부작용이 어디까지 이를지는 현재로는 예측할 수 없다. 또한 유전적으로 조작된 변종들이 나타날 경우 기존의 자연종들은 대부분 도태되거나 멸종하게 될 것이며 이는 결국 생태계의 파멸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나아가서 반대자들은 지나친 효율성 도모로 인간들이 공유해 온 도덕적 이념들의 상실도 지적한다. 그 중 하나로서 유전 공학은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 경제적 격차와 사회적 부정의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부유한 선진국에서도 유전자 치료는 너무 고가로 예상되어 최상류층에게나 가용한 의료일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같은 치료는 상류 계층의 특권을 강화하고 의료 자원을 고갈시킴으로써 의료상의 분배 정의는 지금보다 더 요원한 꿈이 되고 말 것이다. 더욱이 후진국에서는 유전 공학의 청사진이 그림의 떡이 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부정의로서, 유전 공학으로 생산되는 대용 식품의 판매로 다국적 기업은 세계 시장을 석권할 것이며 이 때문에 제3세계의 수많은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빼앗기게 될 것이다. 그와 더불어 국제적으로 무역 수지와 거래 균형이 깨짐으로써 국가간 격차도 엄청나게 벌어질 것으로 예견된다. 나아가 인간 유전자에 대한 지식의 증대는 처음에는 유전 질병의 치료 등 소극적 우생학(negative eugenics)을 겨냥한 것이나 결국에는 인간 유전자 구조를 변화, 개선시키는 적극적 우생학(positive eugenics)에 이용될 것이다. 이 또한 처음에는 개인 수준에서 이용될 것이나 드디어는 사회 전반적인 차원에서 사용되어 유전적으로 우월한 인간을 선별, 양산함으로써 결국 헉슬리(A. Huxley)의 [위대한 신세계](Brave New World)와 방불한 전체주의적 세상이 되지 않을까라는 우려를 낳게 된다.9) 

 

이상과 같이 유전 공학에서 예상되는 이득과 손실을 이론적으로 논의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기술을 적용할 경우 구체적으로 생겨날 현실적 결과에 대한 객관적 예측이 쉽지 않다는 데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결과의 예측이 어려운 한, 그것은 엄청난 모험을 함축하는 기획이며 어떤 점에서 되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다. 또한 그러한 결과는 유전 공학적 기술의 적용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정치적 배경 조건이 어떤 것인가에도 상당히 의존하게 된다. 공론화로 각종 사안에 대한 투명한 논의와 합의 도출의 과정이 확립되고 그에 대한 법제적, 제도적 장치에 따른 사회적 통제가 구축되어 있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 간에는 이 같은 기획의 낙관적 또는 비관적 여파가 달리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여하튼 현재로써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가 우리 인간 주체의 손에 달려 있다는 데 대해 대오 각성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2) 결과주의적, 공리주의적 논변(consequentialist, utilitarian Argument)

 

(1) 생명 공학이 인간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나

 

생명 공학의 현실적(과거, 현재), 잠재적(미래) 결과는 무한하다. 생명 공학의 가장 오랜 사례로 알코올(술)의 생산을 생각해 보자. 한편으로 알코올 소비는 수많은 인간의 고통, 간경화, 각종 암, 알코올 신드롬을 갖는 출산 등 직접적인 결과뿐 아니라 간접적으로 알코올과 관련된 우연사, 폭력 등을 결과로 지적할 수 있다. 반면 알코올은 또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의 원천이었으며 그로써 갖가지 예술적 성과와 감동적인 낭만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적절히 섭취할 경우 건강을 증진한다는 결과도 갖는다. 

 

생명 공학의 구체적 사례가 갖는 결과를 계산하고자 하는 공리주의적 시도는 윤리적 의사 결정과 관련된 문제를 명료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시도는 사실상 문제된 기술을 발전시킬지 말지를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이 안 되는 애매한 지침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 중 한 가지 문제는 새로운 공학 기술의 결과를 정확하게 양적으로 환산하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는 점이다. 넓은 범위에서 본다면 인간은 생명 공학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그러한 공학적 과정이 통제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 생명 공학은 인간에게 안전한가 

 

물론 이 같은 질문에 “예” 또는 “아니오”로 단적인 대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단지 우리는 이와 관련된 갖가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안에 따라 달리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더하여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생명과 관련된 문제에서 100%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좀더 안전한 것이라 해서 반드시 더 나은 것은 아니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끝으로 단기적으로 더 안전한 행위가 장기적인 최종 결과에서는 덜 안전할 수도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 생명 공학은 동물의 고통을 결과하는가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sensitivity)뿐 아니라 고통에 대한 과거, 현재, 미래의 의식(awareness)을 내포한다. 여기에서 고통은 가장 광의의 것으로 스트레스, 불편, 고민, 불안, 공포 등도 포함한다. 많은 하등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동물들이 그들의 고통을 의식하는 정도는 천차 만별이다. 진화의 선상에서 인간에 가까운 동물들, 이를테면 침팬지나 원숭이 등이 자의식을 갖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말기 암으로 죽어 가는 시험 쥐의 고통과 동일한 병으로 죽음을 예견하고 의식하는 인간의 고통은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생명 공학이 동물들에게 고통을 유발하는지에 대해 전반적인 대답을 하기는 불가능하다. 우선 전통적 가축(양, 소, 돼지, 닭)들은 대체로 최선의 관리를 받아 왔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가축들이 다른 야생 동물보다 더 좋은 영양과 건강을 누려 온 것은 사실이다. 물론 신체의 거동이나 짝짓기 등에 상당한 제약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그들에게 고통으로 경험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생명 공학의 결과로 많은 동물이 고통 속에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특정한 시험 조건으로 성장 촉진, 골절, 기형 등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여기에서 유발되는 고통 또한 심각할 것이기 때문이다.10) 

 

(4) 생명 공학의 환경적 결과는 어떠한가 

 

이 같은 고려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결국 인간에게도 간접적 결과를 유발하게 되며 다른 유기체에도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 때문이다. 생태적으로 상이한 지역에서 새로운 종이나 변종의 동식물들이 이전, 도입될 경우 환경 재해가 발생될 뿐만 아니라 기존의 동식물 등이 멸종될 우려가 있으며 생태계의 파괴까지 예상된다. 앞으로도 현재의 생명 과학이 갖는 환경적 영향력을 평가 예측함으로써 적절한 감시와 규제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3) 비결과주의적, 의무론적 논변(non-consequentialist, deontological Argument)

 

비결과주의자, 곧 결과주의적 진영에 속하지 않는 자가 반드시 의무론자일 필요는 없으나 대체로 말해서 의무론(deontology)은 비결과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의무론적 윤리설의 근본 주장은 그 결과가 어떻든간에 결코 행해서는 안 될 어떤 것이 있다는 점이다. 의무론도 다시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첫째, 결과주의적 고려로도 무시되어서는 안 될 의무들이 있다는 입장. 둘째, 어떤 여건에서도 침해될 수 없는 권리들이 있다는 입장, 셋째, 권리 및 의무와 상관없이 인간이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 넷째, 신을 희롱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일은 시도되지 말아야 한다는 종교적 입장 등이다.11) 

 

유전 공학과 관련해서 우리는 어떤 의무를 가질 수 있는가? 대표적 의무론자인 칸트(I. Kant)가 제시한 기본적 의무는 우리 자신이나 타인에게 인격을 단지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의무이다. 다른 종이 아니라 우리의 동료 인간이 지게 되는 이 같은 의무는 합리적 행위자로서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 이외의 존재를 다루는 방식은 인격의 목적성에 의거한 이 같은 의무를 기준으로 해서 부차적으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칸트의 원리를 인간 유전자 변경의 문제에 적용해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20세기 철학자들은 개인의 선호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함으로써 인간의 인격성이 갖는 가치가 더욱 고양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럴 경우 각종 유전적 치료는 환자의 선호와 결정에 따라 시행,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본질적 인격성은 우연적이고 비합리적인 우리의 욕구나 선호보다 우선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 이성은 우리의 자연적 성향보다 도덕법에 따를 것을 명하며, 외적으로 생겨난 충동보다 이성적 본성을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진정한 인격성이 존중되기 때문이다. 

 

권리 개념에 바탕을 둔 비결과주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제기된다. 개인은 자신의 기본적인 생물학적 구조에 대해 특수한 권리를 지니는가? 다른 의료적 수단의 도움을 받을 권리와 마찬가지로 유전적 치료에 대해서도 동일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미래 세대는 그들 조상의 유전적 결함에 대해 어떤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가? 현세대와 차세대의 권리가 충돌할 경우에는 누구의 권리에 우선성이 주어져야 하는가, 권리의 근거는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등의 문제들이 제시된다. 

 

이와 같은 권리들이 실정법에 근거한다고 대답할 경우 유전 공학과 관련된 입법이 완료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법적 과정에서 개인들이 어떤 권리를 얻게 될지 예견하기 어려우며 입법이 완료되었다고 할 경우 현행법은 도덕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개인은 비록 현행법으로 시행되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도덕적 권리를 지닌다고 할 경우 그 정당화는 전통적으로 자연권 이론에 기반을 둔다. 이는 토마스 데 아퀴노의 가톨릭 교설에서 현대의 자유 지상주의자 노직(R. Nozick)의 소유 권리론에 이르는 다양한 지지자를 갖지만 각종 비판도 받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행위는 넘어서는 안 될 한계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 행위가 결과적으로 엄청난 이득을 줄지라도, 또한 그것이 특정한 의무나 권리와 상관없을지라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들 중 한 가지 형태는 다음 '5)'에서 논의할, 신을 희롱한다는 점과 관련되며 다른 한 가지 형태는 정서주의적 경향의 것이다. 이에 따르면 행위의 도덕성은 사람들의 정서로 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서에 기반한 의무론에 따르면 만일 다수의 인간들이 유전 공학에 대해 그것이 나쁘고 사악하며 역겹고 부도덕하다고 강하게 느낀다면 그것은 금지되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의 치명적 약점은 정서에 대해서는 합의 도출이 어려우며 따라서 상대주의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12) 

 

4) 유전 공학이 부자연스럽다(unnatural)는 논변

 

목적론적 윤리설(teleological ethics)의 핵심은, 모든 존재는 그것이 지향, 성장, 발전해 가는 목표로써 자연적 목적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목적론적 모형을 그 철학적 형태 그대로 유전 공학에 적용하는 일은 간단하지가 않다. 좀더 적용이 손쉬운 목적론적 모형의 통념적 형태는 유전 공학이 부자연스럽고 비자연적이며 자연에 반(反)한다는 주장 속에 부분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특히 인간 유전 공학과 관련된 비자연성 논변은 크게 세 가지 문제로 정리될 수 있는데, 첫째, 자연성 또는 비자연성의 정의, 둘째, 비자연성보다 자연성을 선호하는 근거, 셋째, 생명 공학의 제반 기술들을 이런 두 가지 구분에 따라 분류하는 일 등이다. 

 

자연스러움의 정의에 대한 한 견해에 따르면 개체로서 인간 존재의 출현 및 발전이 기술적 생산과 사회적 승인 아래 결정되지 않을 경우에만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이에 따르면 기술적,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은 단지 부자연스러운 인공물만을 산출할 뿐이라고 한다. 또한 인간의 출현 및 발달과 관련해서 자연스러움을 증진하고 인위적인 요소를 회피하는 것이 갖는 가치는 인간 존재의 인간 됨과 존엄성을 보호할 필요성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의 인간 됨은 그 핵심이 자연스러운 출현과 발달에 있으며 우리의 존엄성은 본질적으로 그 기원의 자연스러움에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 

 

만일 기술적, 사회적 개입과 간섭이 허용되면 그 결과는 인간이 타인들에게 창조되는 셈이며 그 정체성과 인격이 다른 인간들의 계획이나 자의로 결정된다. 이같이 출산된 인간은 온전한 의미에서 자유롭고 자율적인 인간이 아니며 그들의 삶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인간적 생명의 가치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입장에 따르면 타인에게서 우리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보장하는 것은 자연의 순수한 기회에 기원하는 것이라 한다.13) 

 

이상과 같은 고려에 근거해서 인간 유전 공학의 기술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첫째, 태아, 유아, 성인에게 행해진 유전적 치료는 정당화된다. 문제의 개인이 이미 자연적 존재로 발달한 이후에 유전적 치료가 이루어지는 까닭에 그 개인의 인간 됨이 손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 유전자 지도는 이상과 같은 치료에 이용되는 한에서 합당하게 연구, 제작될 수 있다. 그러나 유전자 지도가 다른 우생학적 목적으로 이용될 경우에는 논란의 여지가 생긴다. 셋째, 인간 복제나 대규모의 우생학적 프로그램은 인간을 기술적,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부당한 경우로 금지된다. 넷째, 유전적 비정상을 시정하거나 개선하는 모든 간섭적 행위는 금지된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부자연스러움에 근거한 유전 공학 반대 논변은 여러 가지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우선 이 같은 논변은 유전 공학 외에도 전통적으로 합당하다고 생각되어 온 많은 의료 행위들에 소급해서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유전 공학이 인간을 기술적 방법으로 변경시키는 그 능력을 근거로 비난받는다면 대부분의 의료적 간섭 역시 같은 이유에서 비난받아야 한다. 예를 들어 외과 수술은 죽음 직전의 환자를 아주 건강한 사람으로 변경시키지 않는가? 그리고 인간 정체성의 변화는 정신 의학 치료의 경우에 훨씬 더 심각하게 이루어지지 않는가? 

 

둘째로 부자연스러움에 의거한 논변은 보편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이론적 요소를 전제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 개체의 정체성을 전적으로 그 유전자 배열에 의거해 환원주의적 설명을 하고 있다. 문화, 교육, 사회 환경은 개인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변경시킬 수 없으며 오직 생명 공학만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편향된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이 같은 개체성과 인간성에 대한 엄격한 생물학적 정의는 옹호되기 어렵다. 또한 인간이 타인에게 조작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만 타인에게서 자유롭고 독자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나, 동시에 인간은 상호 작용적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서로를 만들어 가는 존재인 것도 사실이다. 타인에 의존하지 않는 인간의 자유는 추상물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5) 유전 공학이 신을 희롱한다는 논변

 

의무론적 반론의 한 유형으로서, 일정한 종교적 신념에 의거해서 현대 생명 공학의 발전은 불경스러운 일일뿐 아니라 죄악이고 신성 모독이라는 반론이 제시되고 있다. 이는 흔히 다음과 같은 구절로 요약, 제시되기도 하는데 곧 우리는 신을 희롱해서도 안 되고 신이 되려는 수작을 부려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신을 희롱한다'는 수사법은 지극히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거나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좋은 경우에 사용되며 나아가서 이러한 표현은 침해하는 것이 무모하거나 용납할 수 없는, 물리적, 도덕적 우주에서 신이 명한 자연적 질서를 전제하고 있다. 

 

새로운 의료 기술과 관련하여 신을 희롱한다는 반론은 신의 전지함보다는 전능함에 상관된 것이며 유전 공학이나 인위적 출산은 생명이나 생체를 창조하려는 시도로서 신의 권능에 필적하려는 월권 행위라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인공 수정이나 시험관 수정의 경우 출산 기술이 겨냥하는 것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체를 창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기존하는 물질을 재배열하는 일에 불과하다는 반론의 전개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동일한 논리가 전적으로 새로운 생체를 창조하는 유전 공학에는 해당되지 않으며 더욱이 인간의 창조까지 그런 프로그램에 포함시키는 것은 분명 신을 희롱하는, 넘어서는 안 될 한계를 넘어서는 월권이라는 것이다.14) 

 

그러나 인공 수정과 마찬가지로 유전 공학적 기획 역시 새로운 물체의 창조이기보다는 기존 물질의 재구조화 또는 재조합, 재구성에 불과하다는 견지에서 유전 공학에 대한 반론을 논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이 해 왔고 또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무에서 창조일 수가 없고 숨어 있는 자연의 비밀, 신의 기획을 밝혀 내고 그 메커니즘을 간파해 자연적 과정에 개입, 간섭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 같은 개입과 간섭도 자연의 질서와 법칙성에 부합하지 않는 한 결코 어떤 생체도 합성하거나 산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도 없고 신을 희롱할 수도 없으며 단지 신에 더욱 접근해 가고 신의 창조 사업에 동참할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인간은 신과 더불어 창조의 동업자, 동조자(co-creator)라는 해석이 가능하며 그 같은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논변이 제시된다. 곧 창조는 지속적인 과정이며 우주는 수십 억 년 동안 발전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단지 인간은 지난 몇 천 년 동안 의식적으로 그리고 그 어떤 종도 성취한 적이 없던 방식으로 그러한 연속적 창조 과정에 개입하고 영향을 주어 왔는데, 근래에 이르러서는 좀더 본격적이고 명실상부한 신의 조력자가 되어 온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또한 신을 희롱한다는 비판은 때때로 유전 공학적 조작이 간섭해서는 안 될 자연적 우주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이며 이 역시 용서받을 수 없는 월권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의미에서 신을 희롱한다는 고발은 관련된 논의를 명료화하기보다는 더욱 애매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비난이 신의 의지에 반한다는 의미를 내포할 경우 즉각적으로 봉착하게 되는 문제는 신의 뜻과 신이 인정하는 도덕적 질서에 대한 견해가 여러 종교들간에 무한히 다양하며 결코 합의의 도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신의 특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한 어떤 행위가 신의 특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비판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15) 

 

혹자는 유전 공학에 대한 반론으로서 유전자 풀(gene pool)은 신의 은밀한 피조물로서 보존되어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을 내세운다. 그래서 유전 공학은 신의 왕국만이 지닌 고유한 지식을 탈취하려는 위험스러운 프로메테우스적 모험이라고 비평한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 같은 견해는 더 이상 지탱되고 견지될 수가 없다. 오늘날 유전자 풀은 신의 섭리의 산물이기보다는 수억 년 동안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우연사, 재해, 행운 등이 얽혀서 점차 증대해 가는 진화의 산물로서 이해되고 있다. 굳이 더 절충적인 입장에 선다면 자연계는 철학자 베르그송(H. Bergson)의 명명대로 끊임없이 창조적 진화의 과정 중에 있는지도 모른다. 

 

 

4. 종교의 개방성과 사회적 통제

 

생명 공학이나 유전 공학의 최근 성과에 대해서는 이상과 같은 이론적 문제뿐 아니라 좀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들이 신앙이나 종교와 관련해서 제기된다. 우선 신앙인 일반이 처한 상황이기도 하겠지만 특히 우리 사회의 신앙인들이 처하게 되는 한 가지 난관은 생명 공학이나 유전 공학의 성과와 이에 대한 세속적 인식의 급진적 변화와 교회에서 발표되는 공식적 입장의 보수적 진영간의 엄청난 간격 사이에서 체험하게 되는 이중성이다. 대체로 신앙인들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있어 어느 한 입장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설득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세속적인 입장에 더 솔깃한 경향이 있어 교회에 대해서는 언제나 가책을 느끼는 처지에서 괴로워하는 셈이다. 

 

물론 독실한 신앙을 가진 소수의 신자들은 당연히 교회의 입장에 동조할 것이나 신자들은 그 신앙의 강도에 따라 중층적 연속체를 이루고 있으며 주변부에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미약한 신앙을 온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신자들도 있다. 독실한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 신앙인들은 비단 생명 공학이나 유전 공학의 성과에 대해서만이 아니고 임신 중절이나 안락사, 산전 검사 등의 문제에서도 역시 교회의 보수적 입장보다는 세속적 입장에 승복하는 자신의 무력감과 위선성에 대해 자책하고 있다. 이같이 신앙의 이중성 또는 신앙인의 이중 인격성은 다시 한 번 심각하게 재고될 필요가 있는 주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16) 

 

이상과 같은 이론적, 현실적 부담 앞에 교회는 다소 개방적인, 전향적 자세로 대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록 교회가 아직도 극단적 보수주의를 견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세속의 급진적 변화에 교회 스스로 부단히 타협하고 협상해 온 것도 교회의 역사에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엄청난 세파에서 고립되어 ‘왕따’당하기보다는 세속적 견해에 대해 좀더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한에서 자신의 입장을 재설정하는 것이 교회도 살리고 신앙도 보호하며 세상도 구제할 수 있는 길이 아닌가 한다. 생명력 있는 교회, 살아 있는 떳떳한 신앙을 위해서 교회가 어떤 입장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더 깊이 숙고해야 할 시점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젖어 옛날 이야기만 힘없이 되풀이하는 늙은이의 이미지를 탈피해야 할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각종 사안을 자주 여론 재판에 회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조치는 민주적 의사 결정 절차에 따르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동강댐 건설을 놓고 찬반 의견을 묻기도 하고 법무부 장관 퇴진 여부에 대해 여론 조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접근이 진정한 민주주의적 의사 결정 절차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결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여론이 믿을 만한 결정 절차이기 위해서는 참여자가 상당한 정도로 합리적 판단자이어야 하며 그 같은 합리성을 보장하기 위해 충분한 정보가 주어져야 한다. 이 같은 선결 요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그 같은 여론 판단은 어리석은 자들의 중우적 의사 결정에 불과하게 된다. 

 

지역이나 집단간에 미묘한 이해 관계가 걸려 있어 합리적 판단이 불가능하거나 충분한 지식이나 정보의 지원이 없을 경우, 특히 그것이 전문 지식이 요구되는 사안일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중대한, 더욱이 인류 전체에게 중대한 사안일 경우 충분한 정보에 바탕을 둔 동의의 도출은 반드시 필요한 선결 요건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논의에 필요한 모든 자료가 충분히, 투명하게 공개되고 그에 바탕을 둔 각종 입장의 개진 및 입장간의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 곧 공론의 과정을 거쳐 합의 도출이 긴요하게 된다. 

 

나아가 일단 합의가 도출되었을 경우 그것의 현실적 시행을 위해서는 법제화 및 제도적 장치와 더불어 이를 감시하고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시민 단체(NGO)의 활동이 절실히 요구된다. 더욱이 유전 공학이나 생명 공학의 기술이 특정한 권력 집단이나 다국적 기업에 장악됨으로써 사회를 전체주의적으로 지배하는 일이 시민 단체들에게 봉쇄되고 차단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인간의 생존과 미래가 걸려 있는 중대 사안에 대해 공론적 합의 도출과 사회적 통제 장치를 확보하는 일은 인간의 미래를 인간 스스로 바르게 지키기 위한 민주적 선결 요건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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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규영, “21세기의 과학 ① 인간 게놈 계획의 현재와 미래”, [교수 신문] 제156호( 1999. 5. 10.). 

2) Jeremy Rifkin, The Biotech Century, ch.3 참조. 

3) Ch. 다윈, [종의 기원], 이민재 옮김, 세계 사상 교양 전집?후기 8, 을유 문화사. 

4) Michael Reiss. “Biotechnology”, Encyclopedia of Applied Ethics, Vol. 1, Academic Press, 320면 참조. 

5) 위의 책, 321면 

6) 위의 책, 322면 참조. 

7) Matti Hayry and Heta Hayry, “Genetic Engineering”, Encyclopedia of Applied Ethics, Vol. 2, Academic Press, 408면 참조 

8) 위와 같음. 

9) 위의 책, 409-410면 참조. 

10) Michael Reiss, 앞의 책, 323면 참조 

11) Matti Hayry, 앞의 책, 412-413면 참조 

12) 위의 책, 413면. 

13) 위의 책, 412면 참조. 

14) 위의 책, 413-414면 참조. 

15) R. Chadwick, “Playing God”, Cogito 3, 1989년, 186-193면 참조. 

16)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가정 사목 위원회,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숨결이며 선물입니다”, 제5회 생명의 날 담화문(1999. 5. 30.) 참조.

 

[사목, 1999년 11월호, 황경식(서울 대학교 교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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