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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인간복제 시대와 그 윤리적 책임(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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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54

인간 복제 시대와 그 윤리적 책임(토론)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2000년 대희년 맞이 세미나

 

 

(토론1) 황경식 교수의 “생명 공학은 신을 희롱하는가”에 관한 논평 - 강성위(한국 외국어 대학교 명예 교수, 철학)

 

황 교수는 이 논문에서 요즘 세상에서 매일같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생명 공학’ 또는 ‘유전 공학’을 일반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생명 공학의 전문가가 아닌 황 교수가 힘을 매우 많이 들인 글이라 그 노고에 감사한다. 그런데 글이 쉬워 잘 알아들을 수 있기는 하겠으나, 논의만 나열하고 각 논의에 대한 황 교수 자신의 입장이 뚜렷이 나타나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이 논평에서는 논문에 대한 논평이라기보다 황 교수가 뚜렷이 밝히지 않았으나, 밝히고자 했을 것들을 강조하고 요약하려 한다. 

 

현재 여러 분야에서 유전 공학 또는 생명 공학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높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학문들이 그 발생 초기나 발전 과정에서 그런 우려를 자아냈다. 그러나 우리 인류는 이런 우려들을 잘 극복하여 왔다. 우리는 지동설이나 진화론 같은 것을 이런 보기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과학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라 할 수 있다. 과학 자체가 윤리적인 가치를 이미 가지고 태어나거나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응용하고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과학의 윤리적인 가치가 규정될 수 있다. ‘원자’만 하더라도 그 자체가 윤리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무엇을 위해 또 누구를 위해 쓰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정해진다. 곧 원자를 인류 평화를 위해 쓸 때에는 좋은 것(선)이나, 전쟁의 무기로 쓸 때에는 나쁜 것(악)이다. 

 

이와 같이 유전 공학도 쓰는 방법과 용도에 따라 선과 악이 엇갈릴 수 있다. 오늘날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현재 세계의 인구가 50억이요, 20년 뒤에는 60억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농사를 지을 농지의 면적은 제한되어 있다. 아니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 동일한 땅 또는 더 작은 땅에서 더 많은 수확을 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사용되기 시작한 유전 공학적인 농업 방법은 현재보다 더 발전해서 더 많이 이용되어야만 할 것이다. 

 

간단한 일상 식품인 수박 같은 것을 보아도 옛날보다는 크고 맛있는 수박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수박들은 유전자 공학의 초보 단계를 이용한 것들이다. 곧 박의 줄기에다 수박 싹(줄기)을 접붙인 것들이다. 이런 초보적인 유전공학은 거의 모든 과일과 농작물에 응용되고 있으며, 윤리적 신학적으로 그다지 문제도, 논란도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우리 생활에 커다란 이익을 주고 있다. 

 

유전 공학이 유전자를 조작하여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인류의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황 교수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현재 유전 공학이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들 가운데 한 가지가 의약 분야다. 유전자를 조작함으로써 유전병을 치유하고, 다른 불치의 병을 낫게 하는 것 등은 바람직한 일이다. 따라서 앞으로 인간의 평균 수명은 해를 더할수록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생명을 인공적으로 연장한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능력에 도전한다고 비약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도 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바다. 해마다 늘어나는 인구를 기근과 질병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을 생명 공학은 올바르게 발전하고 올바르게 이용된다면, 바로 인류의 희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외국의 신문은 유전 공학으로 암은 물론 현재 가장 무섭고 난치병으로 알려진 AIDS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유전자 공학이 아무리 인류의 희망이라 하더라도, 황 교수가 지적한 대로 그림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이용된다면 많은 사람이 우려하고 있는 여러 가지 폐해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말썽도 되지 않을 정도로 보편화되다시피 한 낙태를 더욱더 촉진할 것이다. 곧 유전자 감식으로 유전자를 미리 알았을 때에는, 여아나 열등한 소질이 있는 어린애는 낙태로 죽여 버리고 말 것이다. 또 유전자를 알고 있으면, 그 사람이 태어나도 여러 가지 차별 대우를 받을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곧 취직이나 혼인 등에서 차별은 당연시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곧 인권을 침해하는 일로도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들에게서 성격을 형성하는 유전자를 제거해 버리거나, 똑같은 유전자를 심어 준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사람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되어 차라리 인권을 침해하고 개성이 말살되어 버리는 비극도 낳게 될 것이다. 유전 공학이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까 하는 것이 뜻 있는 사람들의 우려다. 

 

그런데 우리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할는지는 모르겠으나, 인류는 절대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류에게 이성이라는 최후의 심판 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위기를 당했을 때마다 그래도 슬기롭게 잘 대처해 오지 않았던가? 독일의 철학자며 물리학자인 바이세커가 말했던 것처럼 과학과 기술은 그 자체로는 안정되지 못하고 오로지 이성의 힘으로만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이다. 곧 인간의 이성이 제구실을 하는 한 우리는 유전 공학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더 큰 발전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황 교수는 유전 공학에서 가장 큰 말썽이 되고 있는 인간 복제에 관해서는 언급을 극히 적게 하고 있다. 사실 지금 몇몇 동물들과 식물들은 복제에 성공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식물의 복제는 널리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동식물의 복제에 대해서는 반대 여론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 그 이유는 동식물은 복제로 인류 발전에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사실 유전 공학은 지금이라도 인간을 복제할 수 있는 기술 수준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인간 복제는 이른바 성(sex)을 통하지 않고 자손을 번식시키는 방법이다. 곧 정상적인 성 관계를 거치지 않고 자손을 번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자연법, 곧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런 복제도 결국에 가서는 모태를 이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근심도 그다지 안 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들이 생명을 거는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극단적인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인간의 복제야말로 여성의 생명을 안전하게 해 주고 남녀간의 차이를 없애 줄 가장 바람직한 과학 기술이라고들 환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들은 인간의 복제를 잘 몰라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원래 임신에는 기쁨이 따르고, 또 하느님이 원래 동물들에게 자식을 갖고자 하는 본능을 주었기 때문에 여인들은 그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만약에 유전자를 통한 인간 복제가 여성의 자궁을 거치지 않는 것이라면, 여성들이 대환영을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을 통하지 않고, 곧 순간적이지만 쾌락도 없이 임신만 해야 한다면, 똑똑한 여성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다 황 교수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유전 공학의 방법에는 아직도 막대한 비용이 든다. 곧 막대한 비용을 들이고 쾌락도 없이 임신과 출산의 고통만 감수해야 한다면 누가 이것을 하려고 하겠는가? 

 

현재 우리 교회는 유전 공학의 발전을 우려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치게 우려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도 황 교수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문제를 개방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황 교수의 “생명 공학은 신을 희롱하는가”라는 물음에 평자는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 생명 공학은 황 교수가 말하고 있듯이 창조가 아니라, 창조해 놓았으나 우리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우주의 부분을 알아내어 인류의 복지에 이바지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은 오히려 하느님과의 공동 창조자를 자칭하고 있는 인간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세계를 더욱더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왜 이렇게 재앙이 많으냐?”라는 질문을 조금이라도 줄여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현대 과학을 문제 삼으면서 중세기의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발전은 촉진시키되 그것을 어디에 어떤 목적으로 쓰는가에 주목하고 필요할 때만 경고를 해야 할 것이다.

 

 

(토론 2) 김인경 교수의 “의학적 측면에서 보는 생명 복제의 현실과 인류의 미래”에 관한 논평 - 이수영(가톨릭 대학교 의과 대학 교수)

 

“의학적 측면에서 보는 생명 복제의 현실과 인류의 미래”라는 주제로 김인경 교수는 1) 멘델에서 돌리까지, 2) 돌리 출현의 생물학적 의의, 3) 유전 공학의 산업적 적용, 4) 인간 (배아) 복제가 왜 거론되었는가? 5) 인간 배아 실험에 관한 국내외 의견, 6) 수정 후 14일 이내의 착상 전 수정란이란? 7) 인간 배아 복제의 부당성 등에 대하여 상세하게 언급하였다. 

 

생명 복제라는 용어가 탄생한 효시는 돌리의 출생이라는 획기적 사건에서부터이다. 돌리라는 복제 양의 탄생, 곧 이 사건에는 새로운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복제 양의 탄생은 분할의 문제가 아니라, 복제라고 정의되는 급진적인 기술 혁신이다. 곧 유전 형질을 제공하는 성체와 생물학적으로 똑같은 개체들을 만들어 내는 무성, 무배우자 생식이라는 것이다. 둘째, 이와 같은 완전한 복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 왔기 때문이다. 곧 동물의 발생 과정에서 분화된 체세포의 DNA는 본래의 분화력을 회복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개체를 발생시킬 능력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되어 왔으나, 이러한 불가능성을 극복함으로써 체세포의 제공자와 유전적으로 똑같은 개체를 복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돌리가 태어나기까지 난세포와 체세포 제공자의 세포핵을 결합시키는 작업을 277회 시도하여 그 가운데 8개만이 융합에 성공하여 배아로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그 가운데 오직 1개의 배아만이 양으로 태어났다. 돌리를 탄생시킨 영국 로슬린 연구소장인 그레이엄 벌필드 박사는 “인간 복제 실험은 용납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한 바 있으나, ‘돌리’의 탄생으로 생명 복제의 기술이 인간에게 적용되어 ‘인간 복제’도 가능하리라는 것은 예견되는 사실로 이에 대한 찬반론이 꾸준히 대두되고 있는 현실이며, 국내외적으로 이를 진행하다가 폐기시킨 사례가 이미 보도되고 있다. 

 

생명 복제 기술을 응용하는 과학자들은 이 기술을 사람에게 적용시켜 백혈병 치료를 위한 조혈모세포의 제공 또는 장기 이식용 장기의 제공을 하도록 함으로써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함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곧 돼지의 장기는 사람의 것과 크기가 비슷하므로 거부 반응 문제만 해결되면 돼지 복제가 성공할 때 돼지 유전자에 사람 염색체를 합성해서 거부 반응이 없는 이식용 장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데, 이때 돼지 유전자에 대치해서 사람의 염색체로 치환하였다면, 이 생명체를 순수한 돼지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또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배아가 태아로 자라지 않고 특정 세포나 내장으로 성장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곧 자기 체세포를 떼어 내 기증자 난자의 핵과 치환시켜 배아를 만든 후 필요한 장기로 성장시키고 이것을 다시 자기 몸에 이식하면 된다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수정에 의해서 생성된 수정란은 이미 새로운 개체로서 그 생물학적 주체성이 인정된다.”라고 정의하고 있으므로 위에 제시한 방법들조차 교회법에 따르면 금기된다. 

 

또한 과학자들이 ‘인간 복제’는 절대 하지 않는다고 공언하고 있고, 이를 법으로 엄격히 금지한다고 해서 ‘인간 복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미 미국 버지니아 의대의 존 플레처 박사는 “인간 복제가 바람직한 상황도 있을 수 있다."라고 하며 "비난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라고 말한 바도 있다. 

 

생명 과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생물의 존재적 가치는 생물의 다양성에 있으며, 만약 인간이 호기심으로 ‘복제 인간’을 만들어 낸다면 신체 구조의 복제가 반드시 존재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완전히 똑같은 인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정신과 영혼은 인간에게 속한 모든 실체 가운데 본질적인 구성 요소이고,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모가 만들어 내는 것도, 인공 수정이나 복제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심리적인 발달과 문화와 환경은 언제나 별개의 인격을 만들어 낸다. 쌍둥이인 경우에서도 그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곧 닮았다는 것이 똑같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 인간, 그 인간의 인간성은 무엇일까? 아마도 ‘복제 인간’이란 윤리관과 도덕성을 찾을 수 없는 동물에 불과할 것이다. 복제에 수반되는 무한한 능력에 대한 대중의 기대나 미묘한 분위기는 적어도 올바른 시각에 놓여야 하며 극단적 이기주의와 인간성 상실 상황을 선도적인 입장에서 견제하는 역할을 우리가 해야 한다. 

 

‘인간 복제’가 인격의 근원인 정신을 포함할 수 없는데도 ‘인간 복제’에 대한 생각은 무한한 능력을 갈구하면서 이미 다음과 같은 가정적인 상황들을 상상하기까지 이르렀다. 곧 비범한 재능과 미를 지닌 사람들을 복제하기,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재생하기, 유전병에 면역성이 있는 건강한 사람을 고르기, 인간의 성(性)을 선택하기, 선별된 냉동 배아들을 생산하고, 그것을 나중에 자궁에 이식시켜 여분의 장기들을 제공하는 데 사용하기, ‘복제 인간’의 상품화, ‘복제 군인’ 제조, ‘복제 슈퍼맨’ 제조 등이다. 

 

마치 공상 과학과도 같은 이러한 가정적인 상황들과 관련하여 복제가 ‘합당’하거나 ‘긍정적’이라고 여겨지는 제안들이 뒤이어 나올 수 있다. 곧 남편이 무정자증으로 고민하는 가정에 아기를 낳게 해 준다거나, 과부가 된 여자에게 죽어 가는 자식을 대신할 아기를 낳게 해 주는 것 등이다. 이러한 상황이 터무니없는 공상 과학 소설 같은 것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복제 기술을 적용한다고 예상할 때, 이러한 통탄스러운 행위에 대한 인간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인간은 워낙 사악한지라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보장할 수 있는가? 최근 청소년의 범죄 행태를 보면 ‘비디오’ 또는 ‘영화’를 통한 모방 범죄, 특히 살인을 장난 삼아 행하고 나서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태연해 하는 현실이다. 

 

유전자 조작 및 복제 기술은 식량 문제 해결, 부족한 장기 공급, 난치병 치료 등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그 기술에 내재된 잠재적 위험성을 크게 부각시킨다면 핵무기나 화학 무기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 1997년 이언 월머트 연구팀이 양의 체세포 복제에 성공한 사건은 1939년 독일 과학자들이 우라늄 핵분열을 발견한 것에 비견될 만한 것이다. 체세포 복제의 성공이 인류를 핵전쟁과 같은 파멸적 상황으로 몰아갈지 아니면 불로장생의 복지 사회로 이끌어 갈지는 아직 예측하기 힘들다. 

 

현재의 생명 과학 기술 발전 속도로 보아 ‘복제 인간’이 등장하는 것은 거의 시간 문제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인간 복제’를 내놓고 옹호하는 것은 아직까지 일반인의 정서보다 앞서가는 것이 분명하다. 종교 단체와 시민 단체 등에서 복제 기술 연구 개발에 대한 통제를 주장하고 있고, 관련 분야 과학자들도 ‘인간 복제’ 자체는 금지해야 한다고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핵무기 개발 과정에서 보여졌듯이, 과학자들이 일단 과학적 지식을 만들어 내고 난 이후에는 그것을 활용하는 데까지 통제할 힘은 없다는 것이 문제다. 핵무기가 완성된 뒤 과학자들에게서 정치가들에게 통제권이 넘어갔듯이, 많은 사람은 원자 폭탄을 개발한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사실에 충격을 받고 뒤늦게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려를 씻지 못하고 있다. 복제 기술도 그것이 구현된 이후에는 과학자들에게서 관련 기업으로 지배권이 넘어가리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얼마 전에 있었던 젖소의 체세포 복제 성공 사례를 우리 나라 생명 과학 기술의 쾌거로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로 볼 때, 사회 분위기는 분명 ‘인간 복제’가 가능하게 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토론 3) 이동익 신부의 “인간 복제의 현실과 윤리 신학적 반성”에 관한 논평 - 최기섭(가톨릭 대학교 교수, 신부, 동양 철학)

 

먼저 이런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신 주교회의 가정 사목 위원회와 좋은 논문을 발표해 주신 이동익 신부에게 감사 드린다. 이동익 신부는 다양한 현대 사회에서 제기되는 가치관적 문제들에 대해 전통적인 교회 가르침 안에서 그 해답을 제시하고자 노력해 온 윤리 신학자이다. 특히 사회 교리와 인간 존엄성에 대한 교회 입장을 이론적 연구뿐 아니라 실천적 활동 안에서도 확산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활동해 왔다. 이번 논문도 그의 이러한 학문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왕성한 활동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평자는 윤리 신학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격려하는 마음으로 또 배우는 자세로 몇 가지 소견을 피력하면서 논평에 임하고자 한다. 논평은 몇 가지 소주제들을 제시하면서 이 신부의 논문을 요약하기도 하고 보완하기도 하면서 이끌어 갈 것이다. 

 

1. 문제 제기의 시의성

 

이 신부의 논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 첫째 부분은 문제 제기의 형식으로 ‘생명 복제 기술의 현실’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생명 복제는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디에 쓰이고 어떤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지 개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인간 복제가 현실적으로 우리 앞에 와 있다는 것이다. 

 

인간 복제에 대한 논의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1980년대부터 제작된 몇 편의 공상 과학 영화에서 이미 예견된 일이었지만 그 동안의 많은 연구 결과들에 의해 이미 우리 현실 앞에 와 있다는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거의 정점에 달해 있고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시점이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시점에서 인간 복제에 관한 인식과 논의가 얼마나 시급하고 심각한지 우리에게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2. 가톨릭 교회의 확고한 입장

 

논문의 둘째 부분은 이 문제에 관한 교회의 입장을 인간 존엄성의 문제와 인간 생명의 시작이라는 주제 안에서 명쾌하고 단호하게 나타내고 있다. 본론인 셈이다. 문제가 심각할수록 그에 대한 입장은 확고해야 하는 법이다. 논문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인간 생명의 절대성과 인간 존엄성의 문제에서 교회는 수많은 문헌을 통해 ‘생명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로 이루어진 것이며 하느님께만 유보된 절대적인 것이다.’는 입장을 표명해 왔고 또한 그것은 가톨릭 신앙과 사회 교리의 핵심 내용이라는 것이다. 

 

‘인간 생명의 시작’이라는 두 번째 주제는 이 신부가 그 동안 힘을 기울여 왔던 인간 생명에 관한 연구에서 결정적인 단계를 표출한 것이다. 그는 그 동안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많은 문제들에 관해 연구해 왔다. 낙태, 인공 수정과 인위적 조작에 대한 윤리성 문제, 대리모, 장기 이식의 윤리성 등 이러한 문제들이 결정적으로 발전된 것이 바로 인간 복제와 그에 관한 연구이다. 여기서 그는 인간 복제와 그에 관한 연구의 핵심 문제는 인간 생명이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인간 복제가 가능하다는 이론적 바탕이 이 문제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신부는 ‘인간 생명이 유전자형이 시작되는 최초 순간부터 시작한다.’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입각해 이 문제에서 제기될 수 있는 여러 이론들을 하나 하나 비판하고 인간 배아 역시 온전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좀더 확고한 입장을 지니기 위해서 인간의 발생학적인 단계에 대한 연구가 치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여전한 과제를 남겨 놓기도 하였다.

 

3. 인간 복제의 사회 현실

 

이 신부의 논문은 인간 복제와 그에 관한 연구의 문제에서 기술적이고 방법론적 측면의 윤리성 문제에 치중한 느낌이 든다. 물론 그러한 행위 자체의 부당성과 방법론적 오류를 지적하고 원천 봉쇄해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에서는 당연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현실 사회 속에서는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할 때 인간 복제를 인식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그 움직임 그리고 장차 인간 복제 현실이 가져올 사회적 현상과 그것에 대응해야 하는 방법들에 관해 더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직 대다수의 사람은 인간 복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고, 많은 국가는 법적 제재를 준비하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과학 기술의 개가를 환영하고 공상 과학 소설의 내용들이 현실로 다가올 것을 기다리며 그것이 가져다 줄 폐해보다는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문명적 이익에 도취해 있는 사람들 또한 서서히 늘고 있다. 그래서 인간 복제가 현실로 다가오고 말 것이라고 예견하는 사람들은, 교회도 결국 이제까지 낙태, 이혼, 인공 피임이나 수정의 문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몇 십 년 후에는 인간 복제도 현실적 죄악으로 받아들인 채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따라서 교회는 원론적 오류를 지적하는 것 외에도 이 문제에 관한 사회적 흐름에도 민감해야 하고 그것이 가져다 줄 인류의 멸망적 요인들을 좀더 구체적이고 심각하게 경고해야 한다. 이 신부도 논문의 곳곳에서 인간 복제가 가져다 줄 끔찍한 상황들을 지적하고 비판했는데, 보충하는 의미로 몇 가지 상황을 제시하고자 한다. 

 

1) 뇌사 인정의 문제:인간 복제 기술과 뇌사 인정의 논리가 만나면 합법적으로 인간 복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문제이다. 기술적으로 유전자 조작을 통하여 무뇌 인간을 만들 수 있는데 뇌가 없으므로 그는 죽은 인간이며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2) 성의 파괴 문제:복제 양 돌리는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만 셋이다. 따라서 복제 기술은 남성과 여성의 본질적인 관계와 역할을 혼란에 빠지게 하여 결혼과 부부애의 의미, 혈통으로 사회와 가정의 근원이 되었던 구조와 관계를 무너뜨린다. 여성 동성애자들이 ‘이젠 정말 남자들이 필요 없어졌다.’고 환호했다는 기사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3) 죽음에 대한 인식의 문제:사람의 생명이 사람의 손으로 생겨난다면 죽음을 바라보는 사고 또한 경시될 것이다. 곧 쉽게 만들듯이 쉽게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신비와 경외심이 사라진다면 종교는 성립할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4) 생태계 파괴와 인류 종족의 멸망:동양 사상은 인간을 비롯한 자연의 모든 생명이 하나의 유기체적인 생명 체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과학 문화를 모색하는 장회익은 인간 복제에 대해 이렇게 경고한다. “지구상의 모든 고등 생물은 유성 생식에 의한 복합 복제 체제를 취하고 있으며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생명 원리이다. 따라서 인간 복제와 같은 무성 생식 기술의 개발은 잘못 사용하면 모든 생명 체계를 파괴할 수도 있다.” 

 

다만 몇 가지를 예로 들었을 뿐이지만 모두 사회 윤리와 관계되는 문제들이다. 평자의 의도는 인간 복제나 그것을 연구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윤리적 평가와 함께 그것이 몰고 올 사회 현상에 대한 윤리적 고찰도 함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4. 대응 방안의 난점들

 

이 신부는 논문의 결론에서 다시 한 번 인간 복제의 위험성을 제시하면서 무엇보다 모든 생명 공학의 연구에서 인간 존엄성과 인간을 위한다는 원칙이 지켜져야 하고 모든 시민이 그것을 감시할 수 있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까? 인간 존엄성의 강조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교회가 그토록 강조함에도 살인, 낙태 등의 인명 경시 풍조는 여전하다. 법적 제재나 시민의 감시도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 오히려 비관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학자들의 태도에 달려 있는 문제이고 몇 평의 작은 공간만 확보되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며 장차 보여 줄 은혜로운 결실을 준비하고 있다고 선전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연구의 순수성을 믿어 달라고 연구 활동의 자유를 부르짖는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역사 경험이 말해 주듯 그들이 어느 국가나 단체의 이익과 연계될 때 또 자본주의적 상업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때 얼마나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지는 무척 의심스럽다. 또한 그들이 연구 활동에서 본질적 속성으로 지니고 있는 ‘호기심’을 어떻게 자제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하여튼 교회는 좀더 구체적인 대응 방안이 필요하고 용기 있는 결단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인간 복제의 문제는 외적으로 인류 구원과 생존에 직결되고 내적으로는 복음 선포 사명의 본질을 이루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약정 토론에 대한 답변 - 황경식

 

강성위 교수님의 논평은 제 입장을 지지하는 논평으로 봅니다. 발표 논문에 첨가해서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인간 복제가 반드시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위배되느냐는 것입니다. 최초로 인간 복제를 하신 분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아담의 갈빗대를 이용하여 하와를 복제하셨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각도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복제 반대 논리의 근거 중 하나는 생명을 너무 많이 소모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돌리 양 복제는 270번의 시도 중 하나가 성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 공학 기술이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따라서 생명 공학 기술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이런 현상은 대부분 극복되리라고 보기에 반대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복제 그 자체가 도덕적 윤리적 입장에서 본질적으로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입니다. 

 

여기서 수정란 14일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수정이 되더라도 그것은 모체의 자궁에 착상을 해야 합니다. 수정란 착상에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됩니다. 이 과정에서 착상을 하기 전에 많은 수정란이 모체도 모르게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굉장히 소모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착상 곧 임신이 된 이후와 수정란 상태는 구별해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14일 이전에 배아가 분열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중에 한 사람이 될지 두 사람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개체의 정체성이 14일이 되어야 확실히 결정되기 때문에 이때부터 인간이라 할 수 있는 생물학적 이유가 성립합니다. 그래서 결코 14일이라는 기준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복제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현재의 쌍둥이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쌍둥이는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쌍둥이는 동시적으로 출생합니다. 그런데 복제는 시간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쌍둥이는 모습은 비슷하지만 개성은 다릅니다. 만일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다면 전혀 다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제 인간도 똑같은 인간이 되라는 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일회성, 고유성의 문제는 크게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톨릭 생명 윤리와 관련해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최기섭 신부님도 말씀하셨지만, 가톨릭에서는 죽음의 문제와 관련해서 뇌사를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기 이식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뇌사를 인정하는가.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뇌 때문입니다. 뇌가 죽었다는 것은 인간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가능할 것입니다. 만일 뇌사를 인정해서 장기 이식을 인정한다면, 다시 말해서 생명의 마지막이 뇌의 손상이라면 생명의 시작도 뇌의 성숙과 관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생명 윤리의 비대칭성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뇌의 손상이 죽음을 의미한다면 대뇌가 발생해서 성숙하는 시점을 인간의 시작으로 보아야 합니다. 대칭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면, 뇌사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시작에서도 부분적인 조건부 임신 중절과 인간 복제도 14일 이전에는 허용될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곧 뇌사 인정과 관련한 대칭성을 생각한다면 복제 문제에 좀더 관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끝으로 제 논문에도 나왔지만 위험 요소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요소는 사회적으로 통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 이성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이성을 제도화하고 집단화하는 것, 곧 공론화하고 사회적 제도적 법적 통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에 위배되는 기업이나 개인을 사회의 이름으로, 인간 존엄성의 이름으로 견제하고 응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으로, 윤리 도덕적으로 이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필요 조건이지만 충분 조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성의 제도화와 법제화, 그리고 집단화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약정 토론에 대한 답변 - 이동익

 

최기섭 신부님의 논평에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의 연구 방향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먼저 황 교수님의 지적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황 교수님의 지적은 지면 관계로 제가 미처 언급하지 못한 중요한 부분을 담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 신부님의 말씀에 대한 답변을 하겠습니다. 

 

착상 순간부터를 인간 생명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수정란이 착상에 이르기까지 30-50%의 자연 손실이 이루어지고, 둘째 착상 이후부터 출산까지 10-20%가 자연 유산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에 확실성을 주기 위해서라도 인간 생명의 시작을 착상 이후부터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관계를 맺으며 사는데, 그 관계는 제일 먼저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태를 받으면서 시작되기 때문에 인간 생명을 착상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입장에 대해 제 논문에서 반대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곧 위의 두 가지 면을 인정한다고 해도 착상 이전의 단계를 인간 생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살 수 있는 확률이 낮지만 안전한 확실성을 갖고 살 수 있는 생명의 시작 그 자체가 바로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관계를 가지면서 생명 활동을 시작한다는 것은 중요한 면이지만 관계 이전의 전(前) 단계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개체 분할의 시기는 자연적인 쌍생아가 생겨나는 시기인데, 착상 전에 자연적으로 개체 분할이 될 수 있는 시기를 수정 후 약 2-3일 정도로 봅니다. 곧 하나의 수정란이 자연적으로 2개 또는 3개로 분할되어 다태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시기입니다. 이 하나의 수정란이 두 개로 자연 분할되어 쌍생아를 출산한다고 할 때 이 쌍생아의 시작은 자연적으로 분할된 시기, 곧 수정 후 2-3일 된 시기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리 있는 이야기지만, 그 개체화된 두 개가 과연 어디에 기원을 두고 있는지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1995년 교황청 보건 사목 평의회에서 [의료인 헌장]을 반포하면서 교회도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뇌가 인간 됨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에, 뇌의 활동이 없는 것을 죽음이라고 본다면 뇌가 형성되기 이전의 시기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지 않느냐는 논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대뇌피질이 형성되는 최초의 시기는 수정 후 약 25-40일 정도입니다. 그리고 뇌의 활동이 어느 정도 시작되는 시기는 수정 후 60일입니다. 그런데 뇌사라는 것은 뇌기능의 불가역적 정지를 의미합니다.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면에서 뇌가 죽었다는 것은 다른 신체 부분들이 살아 있다고 해도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세포라는 것은 항상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뇌가 처음 형성되는 대뇌피질의 시기도 세포의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이르는 시기이기에 어떤 연속성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연속성을 인정한다면 대뇌피질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기부터 인간 생명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런 면에서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황 교수님은 인간 복제 문제를 사회적 통제에 맡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의미라고 봅니다. 우리는 요즘 이른바 문화 사회학주의라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문화의 다양성, 사회의 변화를 인정하면서 거기에 맞추어서 가치나 진리도 변화되어야 한다는 움직임입니다. 곧 진리의 절대성이 없어지는 추세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 사회학주의는 불변하는 것은 없다고 하면서 윤리적 상대주의를 가속화합니다. 집단 양심이 개인 양심을 형성시키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괜찮다고 하는 것은 개인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또한 황 교수님과 강 교수님은 이 모든 것을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인간 이성이 인간 존엄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보았을 때 과연 인간 이성으로 모든 것이 다 통제되어 왔는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경험에서 배워야 합니다. 인간 이성으로 아우슈비치 대학살과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막을 수 있었습니까. 물론 이성의 통제 기능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국 사회의 기능이라는 것은 이성의 통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최기섭 신부님의 질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문제는 앞으로 인간 복제 사회가 어떤 미래를 가져올 것인가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도구화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희생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교육의 측면 외에 말할 것이 없습니다.

 

[사목, 199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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