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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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윤리] 교회의 양심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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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55

교회의 양심 교육

 

 

머리말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불의와 부정이 끝간데를 모르는 채 계속되고 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여러 언론 매체들의 보도에서 보듯이 하루도 빠짐없이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상황, 생명을 유린하고 죽이는 사태, 개인과 단체의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살인, 사기, 횡령, 폭력, 가정 파탄과 이혼 등이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양심의 부재 상황, 윤리적 가치의 전도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놀랄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관행으로 굳어져 너무 자주 선과 악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과 부패의 공범자가 되고 있다. 일부 특권층이 세상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릴 만큼 극도의 사치와 낭비에 젖어 있는 것도 큰 문제다.1) 바른 양심은 교육으로 성숙하게 되며, 여기서 옳은 도덕적 판단이 나오게 된다. 잘 교육되고 훈련된 양심은 하느님의 정신과 뜻에 따라 실천적 판단을 내린다.2) 인간은 쉽게 사회의 부정적 영향을 받게 되며, 교회와 사회의 권위 있는 가르침도 자신의 오류적 판단을 내세워 거부하려 하기에 양심 교육은 더욱더 필요하게 된다. 

 

여러 비윤리적 세태들은 경제 제일주의, 황금 만능주의, 극도의 이기주의 등이 빚어 내고 있는 결과다. 거룩한 교회의 구성원들도 이런 문제 앞에서 제외되지 않으며, 이런 사회 현상들에 휩쓸리기도 하고, 때로는 잘못된 세상의 조류와 풍조에 따라 행동하는 데 낯설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본질적인 사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봉사와 복음을 통해 인간의 양심을 깨우쳐서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인간답게 되기를 백성들에게 성실하게 제시해야 한다.3) 

 

양심은 무엇인가? 양심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회는 과연 양심 교육의 주체적 기관으로서 사명을 다하고 있는가? 청소년에게 어떻게 양심 교육을 시켜야 하는가? 이 글에서는 이러한 몇 가지 측면에 대하여 기술하게 될 것이다. 

 

 

1. 양심의 정의

 

구약성서에는 범죄한 원조들의 부끄러운 마음(창세 3,7-12), 살인을 저지른 카인의 마음(창세 4,5-11), 나단과 다윗의 일화(2사무 12장) 등에서 사악한 양심을 기술하고 있다. 가리옷 사람 유다의 뉘우침과 절망(마태 27,3), 사도 베드로의 배반과 가책(마르 14,66-72) 등에도 양심의 심한 요동이 언급된다. 이렇게 볼 때 영(靈), 혼(魂), 내심(內心), 마음[心] 등은 양심을 일컫는 용어인 셈이다. 양심의 소리는 인격신이신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으며, 늘 인간에게 악에 대한 경고와 선에 대한 부단한 권유를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바로 신앙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로마 14,23). 신앙은 양심을 비추어 주며, 동시에 선한 양심은 신앙을 보호하게 마련이다. 이는 깨끗한 양심으로 신앙을 보존하고 성장시킬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1디모 3,9). 이렇게 완전한 양심은 신앙의 비춤을 받아 생기를 얻게 된다(2고린 1,12). 사도 바오로는 양심을 자연법 또는 신앙에 따른 윤리적 판단 능력이라고 본다. 곧 양심을 하느님과 관련시켜 이해하고 있다. 

 

양심의 기능은 양지 양능(良知良能)과 윤리 지식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4) 먼저 양지 양능은 인간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본성적 능력인 것이다. 이것으로써 인간은 객관적 진리를 알 수 있고,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그분께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본성 안에 깊이 새겨진 도덕률에 따라 작용하는데, 곧 인간은 내면에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명령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이렇게 양지 양능은 자연 도덕률을 현재의 상황에 적용시키는 역할을 한다. 양지 양능은 생래적으로 갖고 태어나지만, 윤리선을 바르게 이해하고 윤리적 행동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후천적 경험과 교육이 있어야 한다. 윤리 지식이란 단순한 법률의 내용을 숙지하고, 선과 악을 분석하는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지식을 일컫지 않고, 선을 행하려는 강한 의지의 결단력을 말한다.

 

양심은 선행적인 것과 후속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선행적 양심은 행동이 실천으로 옮겨지기 전에 윤리성의 판단이 이루어질 때를 말하는데, 행동을 명령, 권고, 허락, 금지하는 기능을 갖는다. 후속적 양심은 무엇을 실천에 옮겼거나 옮기지 않은 행동을 평가하는 것을 말하는데, 한 행동을 인정하고 수용하거나 책망하고 고발하는 기능을 한다. 그 밖에도 객관적인 규범에 양심이 합치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이 있으며, 그릇된 양심은 극복 가능한 것과 극복 불가능한 것이 있을 수 있다. 허위의 윤리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릇된 판단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확실한 양심과 불확실한 양심이 있다. 의심하는 양심은 판단에 확실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경우인데, 여기에는 사실에 대한 의심(dubium facti)과 법에 대한 의심(dubium juris)이 있다. 실천적 확실성에 도달하는 직접적 방법은 신중하게 윤리 지식을 점검하고 다른 계명들과 비교하여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간접적인 방법으로서 반성 원리(principia reflexa)5)가 있다. 권리 문제에서 공동선을 개인의 선익보다 우선적으로 배려하고, 소유권 문제에서 현재의 점유자에게 우선권을 주며, 범죄의 경우 의심이 생기면 피고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고, 범죄의 혐의가 있는 자라도 판결이 내리기 전에는 무죄한 자로 추정해야 한다는 등의 원리들을 전개하고 있다. 그 밖에도 사실은 추정되어서는 안 되며 증명되어야 하고, 이미 완료된 행위는 반대의 사실이 증명되지 않는 한 유효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특수한 의심이 있더라도 평상시와 같이 일어나는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등의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윤리 체계(systemata moralia)에 의한 일반 반성 원리6)를 들 수 있다. 곧 개연론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를 중요시하여 비록 법에는 반대된다고 하여도 상당한 논리적 근거가 있으면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다고 본다. 동등 개연론은 자유 행동을 선택하는 근거가 법을 따라야 하는 만큼의 무게가 있으면 법 대신 자유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안전 개연론은 자유 행동을 선택할 근거가 법을 따라야 하는 근거보다 비중이 클 때에만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다고 본다. 위의 세 이론들은 건전하고 타당한 주장으로 교회에서 인정되고 있다. 이완주의(laxismus)는 미약한 개연성만 있어도 법의 의무에서 면제될 수 있다고 보지만, 1665년 알렉산데르 7세에게 단죄받았다. 이와 반대로 얀세니즘 계통의 엄격주의(rigorismus)는 완전한 확실성이 있어야만 자유 행동이 허용된다는 주장을 펼치지만, 1690년 알렉산데르 8세에게 단죄받았다. 

 

양심의 습성은 항구적 능력을 말하는데, 윤리 가치에 반응하는 정도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기민한 양심 또는 태만한 양심으로 구분된다. 윤리 가치를 무시하는 이유는 적대감과 무감각 때문이다. 적대감은 선을 지향하는 가치와 덕목과는 반대되는 삶의 목표를 설정하는 사람에게 발생한다. 그리고 가치에 무감각한 경우는 쾌락에 몰두하여 사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2. 양심과 죄 의식

 

인간은 윤리 의식을 지니고 있기에 인간의 역사와 함께 죄 의식을 갖고 살고 있다. 외적인 규범과 법을 어겨 죄 의식이 생긴다고 볼 수 있으나, 사실은 인간이면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 내적 당위를 거스르기에 생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윤리 규범을 어기는 것은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며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가 된다. 개인의 윤리적 성숙과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객관적인 규범과 개인의 양심이 상호 보완적인 협력을 해야 한다. 사회의 규범들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개인의 양심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없고, 개인과 사회가 비양심적 상황에 놓여 있게 되면 개인적, 사회적 비인간화가 가속된다. 현대 사회에서 물질 제일주의, 쾌락 제일주의, 경제 제일주의, 무신론, 세속화 현상 등은 기존의 가치와 규범들을 제거하려 하거나 상대화시키고 있어 개인과 사회를 혼미에 빠뜨리고 있다. 

 

죄에 대한 감각이 상실되어 가는 사회에서 죄에 대한 의식을 깨우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감각은 인간의 윤리적 양심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께 대한 감각과도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의식, 양심의 소리, 죄에 대한 감각 등을 제거할 수 없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양심을 “인간의 가장 은밀한 안방이요, 인간이 저 혼자서 하느님과 같이 있는 지성소”7)라고 보고 있기에 인간의 자유와도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양심이 둔화되면 하느님께 대한 의식도 흐려지며 죄에 대한 감각도 약화되거나 소멸된다. 

 

죄에 대한 감각이 약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세속주의를 들 수 있다. 바로 하느님을 완전히 배제한 채 인간적 행위와 물질적 생산만을 중심적 가치로 평가하려는 인본주의적 태도를 일컫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물질적 소비주의와 육신적 쾌락에 정신을 빼앗겨 정신적, 영성적 가치에 무관심하게 된다.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 하느님 없는 세상을 건설하려 하지만, 하느님의 정신을 제거한 인간은 세상과 세상의 문명, 과학으로부터 죽음과 직면한 위기와 도전을 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8) 인간의 기원과 최종 목적은 하느님이며 인간은 자신 안에 신적 생명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거스르고 있다는 죄의 본래적 의미가 바로 서야만 죄에 대한 의식이 사람들 안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발전이 죄에 대한 감각을 박탈하고 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과장하여 해석하고, 죄 의식 자체를 과소 평가하기도 한다. 사회학에서는 개인의 잘못은 없애고 사회에 모든 책임을 돌리기도 한다. 문화 인류학에서는 환경적이고 역사적 요인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인간은 바른 행동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보면서 개인의 책임을 지나쳐 버리기도 한다. 또한 역사적 상대주의도 죄의 감각을 흐리게 한다. 모든 윤리 규범을 상대화하여 한 행위는 그 자체로서 불법적인 행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본다. 이때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태도와 모든 윤리 규범은 전도되어 죄의 관념이 사라지게 된다. 죄는 존재하지만 죄를 저지르는 주체는 없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죄를 병적인 죄 의식으로 보거나 법적인 기준과 명령을 단순하게 어긴 것으로 보는 태도도 죄의 감각을 상실하게 하고 있다. 

 

죄에 대한 감각 상실은 결국 하느님 거부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죄는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며, 죄스런 행동을 답습하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듯이 살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속주의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각종 선전과 광고, 홍보 매체 등도 죄 의식을 제거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여기서 개인의 독립성을 강조하여 초자연적 규범을 무시하게 되고, 다수의 의견과 행동에 따라서 개인은 비양심적 행동 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을 없애려고 한다. 

 

교회 생활에서도 죄의 감각을 저버리는 태도가 발견된다. 과거에는 죄에 대한 과민한 반응 상태에서 살았으나, 현대에 와서는 가능하면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과거 영원한 벌에 대한 공포 대신, 오늘날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용서가 강조된다. 극도의 양심 존중 사상은 죄를 고백할 공간을 박탈하였다. 그리스도교 규범에 대한 신학자들과 교리 교사들의 견해와 가르침들이 다르기에 신앙인들의 양심은 큰 혼란을 일으키고 죄의 감각은 약화되고 있다. 성사적 참회의 실천에서도 죄와 회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해석하고 있다. 반대로 선악의 개인적 가치는 전적으로 무시하여 공동체적 회개만을 외치는 경우도 있다. 두 가지 태도를 모두 지양하여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죄에 대한 합당한 감각을 회복하려면 심각한 정신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가 이성과 신앙의 불변하는 원칙들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건전한 교리 교육은 죄에 대한 감각을 회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9) 물론 양심에 대한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참회의 성사를 신중하고 의미 있게 실천하는 노력도 보여야 할 것이다. 

 

 

3. 양심 교육의 내용과 방법

 

양심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가정 교육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다른 이를 존중할 줄 모르며, 이기적 사회 생활을 하기 쉽다. 물질주의와 기능주의에 젖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목적 달성을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인간까지도 자신의 욕망을 해결하는 도구로 보게 된다. 현대 사회의 대종을 이루는 범죄들의 종류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인간은 사용될 수 있는 사물이나 객체가 아니라, 양심과 자유를 부여받은 책임 있는 주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10) 오늘날의 결혼 풍속도를 보면 부부 사랑, 자녀 출산과 교육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의식 없이 결혼을 재산 획득의 한 방법으로 선택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원하지 않았던 임신이거나 장애아의 출산이 우려된다는 소리를 들으면 곧바로 낙태를 선택하는 일은 인간 존엄성을 바로 의식하지 못하는 양심 교육 부재가 빚어내는 행태들인 것이다. 태어난 인간을 죽이면 살인죄가 성립하고, 아직 부모와 정이 들지 않은 뱃속의 태아를 죽이는 일은 별것 아닌 일상적인 일이라고 보는 것은 부정직하고 비양심적인 태도다. 혼인 교리에서 단순한 낙태 방지와 성생활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 사상과 사랑의 공동체, 결혼이 갖는 영속적 의미 등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여기서 청소년 문제와 양심 교육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11) 오늘의 청소년을 이른바 'X 세대'라고 한다. 이들은 개인을 중시하며 개성을 내세우고, 특정 호칭을 거부하면서 물질적 풍요와 소비를 구가하고 있다. 이들의 눈에 기성 세대는 출세와 돈, 명예, 노동, 전통 등을 중시하며 청소년들을 비판하고 억압하는 세력으로 비친다. 오늘의 신세대들은 편의주의에 편승하여 감각적으로 인생을 즐기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감상주의적 경향을 갖고 젊음을 발산하는 데 초점을 맞춰 살고 있다. 무조건 외국의 풍습을 받아들여 노래, 춤, 복장, 언어 등에 국적을 모를 것들이 많아 주체성을 잃어버린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신세대는 컴퓨터 통신을 통해 유해한 사이버 음란물과 선정적 광고, 폭력물을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이고 있다. 텔레비전의 스포츠, 드라마, 음악 프로그램, 노래방, 단란 주점, 호프집, 각종 음란성 잡지, 소설, 만화, 패션 잡지 등에 청소년들은 여과 장치 없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들에게 양심 교육은 아주 멀리 있는 다른 세계의 일이다. 

 

초등학교, 중등학교의 학교 폭력은 근절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욱 조직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유치원에도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이 눈에 띄고 있다. 청소년 보호법이 있다고는 하지만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례들의 원인은 가정의 자기 중심적 생활 태도, 경제 제일주의를 우선으로 삼는 사회의 관습, 가정과 학교,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에 대한 도전과 반항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폭력 문제 앞에서도 양심 교육은 실종되어 있다. 

 

청소년의 양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반성할 것들이 있다.12) 우선 가정 안에서 가풍(家風)을 정립해야 한다. 성인과 청소년의 몫과 경계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어른은 자녀들에게 양심 교육의 하나인 예절과 도의심을 함양시켜야 한다. 어른에 대한 공경심, 함께 사는 데 필요한 협동심, 참된 우애와 독립심을 가르쳐야 한다. 

 

다음으로 파괴된 질서를 회복시켜야 한다. 질서 없는 가정은 양심 교육을 가르칠 바탕과 발판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양심 교육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부모들은 자녀들을 교육하는 투철한 교육 철학과 종교관을 가져야 한다. 자녀를 무책임하게 낳고 기른다면 그것은 사회 질서를 원천적으로 오염시키는 결과만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자녀의 기를 살려 준다고 버릇없이 키우고, 모든 못된 성질을 꾸짖거나 고쳐 주지 않고 받아 주는 태도는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또한 양심 교육이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올바른 의미의 자립심을 길러 주어야 한다. 육체만을 중시하며 정신적으로 의타심 많고 우유부단하며 결단력 없는 인품은 결국 나약한 양심 상태를 조장하게 된다. 스스로 서지 못하는 많은 청소년들이 정신적 질병에 걸려 가정과 사회를 위협하는 경우도 있고, 엄청난 피해를 선량한 시민들에게 끼치는 가공할 폭력 조직의 구성원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는 몰상식과 비상식이 판치는 비양심적인 사회로 빠져 들게 된다. 

 

영상 매체들의 무절제한 상혼과 창작 활동들이 청소년들의 양심을 조직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런 출판물과 음란성 상업주의는 건전한 성 윤리의 정착을 방해하며, 무규범적 윤리를 조장하여 결국 청소년의 양심을 병 들게 하고 세상을 건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의지를 짓밟아 버리게 된다. 따라서 교회는 양심 교육의 첫 학교이며 현장인 가정의 신앙 교육, 초중고 주일 학교 교육에 특별히 역점을 두어 관리하고 감독하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해야 할 것이다. 충분한 양심 교육 자료와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충분한 교사 인력을 양성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사회 전체가 양심 부재의 혼란 상태에 있다고 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역할을 교회가 앞장서 몸을 던져 양심 교육의 기폭제임을 자청하여 세상을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상으로 물들이는 작업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초중고교생은 머지않은 장래에 모두 성인으로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게 된다. 성인들을 위한 양심 교육의 계획과 프로그램도 개발하여 실시해야 하겠지만, 우선적으로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가정과 주일 학교, 기타 사회 교육 기관에서 양심 교육을 시의 적절하게 시키는 일이다. 양심 교육의 결핍에서 나라 전체, 사회 전체의 온갖 비리와 부정 부패, 개인과 가정, 단체의 비윤리적 탈선, 각종 범죄 등은 기승을 부리게 된다. 어릴 때의 양심 교육은 한 사회를 윤리적으로 건실하고 건강하게 발전시킨다. 그러나 비윤리적인 풍토와 환경에서 자란 성인들은 결코 한 사회를 정직하게 이끌고 나갈 수 없다. 

 

 

맺는 말

 

지금까지 양심에 대한 정의를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과 신학적 방법론에 따라 간단하게 고찰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생래적으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야 하는 능력을 갖고 태어나지만, 그런 능력은 교육하여, 계속 습성으로서 발전시켜야 함을 보았다. 그리고 교회 문헌에 따라 죄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양심의 기능과 작용을 사장(死藏)시키는 이유와 동기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바로 세속주의, 무신론, 물질주의, 편의주의, 현대 인문 과학의 주장과 견해 등으로 전통적 양심의 기능이 무시되며, 양심이 바로 설 수 없는 환경과 조건들을 점검하였다. 마지막으로 양심 교육의 성공 여부는 청소년들을 어떻게 인도할 것이냐에 달린 문제로 보고, 가정 교육과 교리 교육에서 자연스럽고 철저하게 양심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여기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청소년 문제와 양심 교육의 갈등 상황을 검토하였다.

 

양심 교육은 온 생애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13) 특히 어린이들에게 양심 교육을 시키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은 양심 교육으로써 인간적 공포, 이기주의, 교만, 죄 의식 등을 치유하고 교양 있는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양심 교육이 자유를 보장하고, 마음의 평화를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양심 교육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신앙인은 신앙 생활과 기도를 통해 하느님 말씀과 하나가 되며, 그 말씀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인은 성실한 노동으로써 정직하게 살아가는 양심 교육의 모범이 되어야겠다. 또한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세태 속에서 법과 원칙을 존중하고 올바른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양심 교육의 이정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14) 이때 신앙인은 온 세상 끝까지 복음을 실천할 수 있으며, 건강한 사회를 위한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틀림없이 세상은 신앙인들과 함께 살아 봄 직한 사회로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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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한국 주교단 공동 사목 교서 [대희년을 바라보며], 1997, 2-2항 참조. 

2) [가톨릭 교회 교리서], 1783항 참조. 

3)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58항 참조. 

4) F. 뵈클레, [기초 윤리 신학], 성 염 옮김, 분도 출판사, 1974, 108-117면 참조. 

5) K. H. 페쉬케, [기초 윤리 신학] I, 김창훈 옮김, 분도 출판사, 1991, 318-321면; 최창무, [윤리 신학] I, 가톨릭 대학교 출판부, 1989, 85-86면 참조. 

6) K. H. 페쉬케, 위의 책, 312-318면; 최창무, 위의 책, 86-87면 참조. 

7) 사목헌장, 16항. 

8)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인간의 구원자], 15항 참조. 

9)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화해와 참회], 18항 참조. 

10)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 5항 참조. 

11) 방효익,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가톨릭 출판사, 1998, 92-103면 참조. 

12) 위의 책, 103-107면 참조. 

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1784-1785항 참조. 

14)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앞의 책, 7-4항 참조.

 

[사목, 1999년 2월호, 이용훈(수원 가톨릭 대학교 총장, 신부, 윤리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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