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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생명과학의 문제와 철학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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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64

생명과학의 문제와 철학적 성찰

 

 

머리말 : 생명문제의 철학적 지평

 

이 글은 생명과학의 문제와 그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논문이다. 오늘날 인간 유전자 지도와 그에 따른 생명복제, 이종배합, 유전자 변형 등의 문제가 광범위하게 퍼졌음에도 이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나 해석은 거의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 논문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존 재?해석학적으로 반성하고, 그 의미를 "생명철학"의 원리로 정립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이로써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유지하려는 철학 밖의 노력에 대해 철학 안에서 비롯된 정당한 형이상학적 근거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먼저 생명과학의 대두와 그것이 지니는 문제의 철학적 지평을 밝힐 것이다. 그 뒤 "생명과학"의 내용과 문제를 인간복제와 유전자 변형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어서 이 문제를 성찰하고 극복하기 위해 생명에 대한 철학적 해석학을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고찰한다. 이 논의는 생명의 존재론적 특성에 대한 규명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생명과학의 윤리 문제와 생명의 존엄성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선행 작업은 생명에 대한 존재론적 원리의 이해에서 시작되리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명과학시대에 인간에게 필요한 철학적 의미는 서구의 근대 형이상학을 넘어서는 탈형이상학의 관점으로 형성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지닌 "생명"에 대한 정보와 지식은 양에서는 물론 그 깊이에서도 과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이다. 더욱이 이러한 자연과학적 발견과 지식은 기술적이며 자본주의적 사회의 내적 논리와 결합하여 인간의 생명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일상적 삶의 영역에까지 엄청난 변화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발전해 갈지 예측하기란 현재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생명과학이 몰고 올 결과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이란 그저 이러한 변화에 당혹감을 느끼며 심정적으로 거부하거나, 또는 막연히 미래를 낙관적으로 기대하는 정도이다. 안타깝게도 현대인은 이 같은 변화에 담겨 있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할 뿐이다. 그 사이에도 생명에 대한 이러한 혁명적 상황은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현실 세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생명과학 시대는 생명 이해의 기반이 신학적이며 형이상학적 범위를 넘어 과학의 영역으로 전이되면서 초래된 혁명적 변화에 따른 결과이다. 다윈 이래 생물학의 발전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진화의 산물이며, 태초의 기원에 대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가설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단지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쳐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진화론적 발전은 자연선택, 진화와 생물 종의 합병 및 멸종, 돌연변이와 적응이란 과학적 이론체계를 거쳐 마침내 1953년 크릭과 왓슨에 의해 DNA의 이중 나선 구조가 밝혀짐으로써 생명에 대한 이해를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게 하였다. 이로써 생명의 기본 원리는 유전자 자체이며 그 유전자는 DNA의 작은 내부 구조에 들어 있는 순수한 디지털 정보의 긴 사슬임을 밝혀 내었다. 생명이란 아미노산의 염기서열로서 단지 4개의 기호를 사용하는 4원 부호의 암호체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의미는, 살아 있는 생명체에는 뭔가 근본적이고 해명하기 힘든 초월적 실재와 원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철저히 파괴하고 그것이 단지 지난 시대의 순진한 세계관, 심지어는 신화적 세계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과학적 이론 체계가 오늘날 생물학 전체를 지배한다. 이것은 자연에 분리된 채 주어진 다양한 분야의 많은 관찰결과들을 결집시켜 생명사건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분자들의 구조와 그것의 상호작용으로 생명체의 특성 및 기능을 이해하려는 분자생물학은 생명 자체에 대한 최고의 진리주장을 펼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생명을 관장하는 이러한 이해와 정보가, 존재론적으로 해명되지 않은 과학주의와 윤리학적으로 성찰되지 않은 자본주의와 결합함으로써 생기게 된다. 사유하지 않는 과학과 맹목적인 자본의 논리라는 일면적 세계관이 인간과 자연 존재자의 모든 원천이며 근거인 생명의 원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은 과거 종교적 차원 내지는 적어도 철학적 영역에 관계되었던 생명의 문제가 한낱 대상적인 사물로, 또는 유전암호를 지닌 정보기계 정도로만 취급된다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의미의 문제나 실존의 문제, 초월적 영역이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게 된다. 자연과 우주는 더 이상 생명의 노래에 귀기울이지도 않고, 인간은 적막한 우주의 깊은 나락에 서서 생명의 시작과 끝을 무(無)와 공허함으로만 체험할 뿐이다. 생명체는 진정 놀라운 특성을 지닌다. 그는 환경에 반응하고 다른 생명체와 감응하며,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킨다. 지적 생명체의 놀라운 능력과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당혹스럽고 믿기지 않는 것은 그 생명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원리를 파악하고 그것을 조작하는 일이 그토록 쉽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생명학이 "생명과학"과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질 때 생명은 더 이상 그 자체의 정당한 의미를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을 단지 이러한 관점에서 다루는 것은 생명의 존재와 의미를 이해하는 인간의 주체성을 상실하게 만들고 이로써 인간과 생명이 맺는 올바른 관계를 파괴할 뿐이다. 그것은 생명 일반의 원리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장악됨으로써, 생명 자체는 왜곡되어 그 본연의 의미를 상실하고, 필연적으로 인간 생명과 생명의 의미는 물론, 인간성과 그 초월적 성격조차 왜곡되는 현상이 초래됨을 의미한다. 생명을 과학て기술주의적이며 자본주의적으로만 바라보는 관점은 전형적인 근대성(Modernity)에 따른 이해이기에, 생명에 의미와 지향성을 부여함은 근대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생명 이해에 자리한다. 이로써 우주와 생명은 인간의 의미부여와 이해형태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형성될 것이다. 나아가 생명체와 우주에 대한 관계의 틀인 생명윤리학의 형태 역시 이러한 이해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와 발전의 의미를 올바르게 정립함으로써 인간학적인 새로운 전환을 이룩하는 일이다. 그것은 새로운 문화적 진화의 형태로 이해된다. 이러한 노력을 여기서는 존재론적 이해의 틀에 따라 생명을 해석하고 그에 의미를 부여하는 철학적 작업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1. 생명과학의 문제점

 

오늘날 생명과학이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생명의 복제와 유전자 조작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과학적 발견이 기술공학적으로 응용되어 일상의 삶을 현저하게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함으로 비롯된 현상이다. 특히 실험과학은 단순히 자연에 대한 객관적이며 실험적 검증을 거친 지식이란 차원을 넘어 기술화함으로써 우리 사회와 현실 전반을 조종하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 문화적 요인이 된다. 오늘날 생명과학은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의 발전에 따라 생명의 탄생과 비밀, 생명원리에 대해 놀라운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제 신의 영역에 속해 있다고 믿었던, 인간의 손을 절대적으로 떠나 있다고 생각되었던 생명현상에 대해 그렇게도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과학이 기술의 영역과 결합함으로 탄생한 생명공학은 마침내 생명현상을 자신의 원의에 따라 조작하기에 이르렀다.

 

생명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힘을 창출한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지배와 관리의 힘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자신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러한 존재의미의 형성과, 과학적 발견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 과학은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과학은 존재론적으로 맹목적이며 인간의 초월성과 지향성에는 어떠한 의미도 제시하지 못한다.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필요로 하는 앎이란 결코 이러한 지배의 힘이 아니라, 생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함에 있다. 과학적 지식이 그 앎을 위한 자리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의 문제는 과학 자체에 대한 성찰과 해명의 차원을 넘어 과학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 해명에 근거한다. 그것은 과학이 객관적 발견이 아니라 과학자의 사유세계, 그의 문화와 선험적 의미세계에 대한 결단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생명의 원리를 규명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제시하는 과학은 그 자체로 존재 드러남의 창조적 과정에 기여한다. 그럼에도 과학은 존재론적 의미와 근거를 자생적으로 도출하지는 못한다. 자신의 학적(學的) 근거원리를 넘어서는 영역에서 존재론적 의미를 제공받지 못할 때 과학은 그 자체로 공허하며, 그 지식은 가치론의 관점에서 맹목적이 될 뿐이다. 현대의 생명과학은 모든 존재자를 객체적 대상으로 장악(Verfgen)하는 근대성의 관점에 따라 생명의 원리와 의미조차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한다. 과학은 자본주의와 함께 근대가 형성해낸 가장 강력하고 근대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는 체계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문제와 해답은 이 두 사유체계와 그 방법론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서 주어진다. 그것은 생명의 내재적 원리에 따라 생명의 문제를 다루는 철학적 관점의 정립에 따라 달성될 것이다.

 

생명과학 시대에서의 두 번째 문제는 생명에 대한 규범과 윤리에 관한 것이다. 이와 연관되어 우리 사회는 생명공학에 대한 분명한 규범은 물론 법적 조치조차 갖고 있지 못하다. 15대 국회에 제출되었던 인간복제 금지 관련 연구 금지의 대상은 "인간의 생식세포나 체세포를 이용한 인간복제, 인간?동물 간의 수정란 또는 체세포를 상호 융합하는 행위, 인간 · 동물 간의 수정란 또는 태아를 상호 이식하는 것" 정도이다. 여기에 덧붙여 "인간의 태아나 죽은 자로부터 정자, 난자를 추출하여 수정란을 만드는 행위" "다음 세대로 전이되는 인간 유전자 조작, 계통이 다른 동물 종간의 세포 융합 또는 수정란 상호이식, 상업적 목적의 동물 대량 복제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있다.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 사회의 논의는 생명과학 시대에 필요한 형이상학의 정립 노력은 차치하고라도 그에 대한 규범과 윤리 정립 노력 역시 지극히 선언적이며 원론적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생명은 존엄하다"는 식의 이해와 그에 따른 문제의 해결 시도는 이러한 생명과학의 시대에 아무런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 오히려 생명과학 시대의 윤리학은 생명과 인간이 맺는 관계의 틀을 새롭게 정립함으로써야 올바르게 형성된다. 그것은 거듭 인간의 생명에 대한 이해와 자기 정체성에 관한 초월적 존재론에 근거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2. 생명과학의 구체적 내용과 문제

 

1) 인간복제의 문제

 

생명복제의 과정은, 우선 복제하려는 개체의 체세포에서 유전자를 채취하여 핵을 따로 추출한다. 그 다음 다른 암컷의 난자에서 핵을 제거하고 여기에 당초 복제하려는 개체의 핵을 이식시켜 수정란을 만든다. 이것을 자궁에 이식하여 새끼를 키운다. 따라서 유전자 채취만 가능하다면 죽은 생명체도 다시 복제할 수 있다. 이러한 복제의 역사는 1981년 미국 일멘스 박사팀이 수정란 세포를 분리하여 생쥐를 복제함으로써 시작된다. 이어 1996년 7월 5일 영국 로슬린 연구소의 체세포에서 복제양 "돌리"(Dolly)를 생산하여 비로소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고등동물을 복제한 첫 사건이 된다. 이어 1997년 복제송아지 '진', 1998년 인간복제자가 들어간 송아지복제, 1999년 일본 유키지루시유업이 우유세포를 이용한 소복제에 성공한다. 소복제에 성공한 이후 유전공학자들은 기술적으로 인간의 복제를 위한 장벽은 모두 극복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복제 시행 과정에서 생기게 되는 수많은 "폐기물"과 유전자 발현과 변이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돌리" 복제를 성공시킨 윌미트 박사는 인간복제에 대해 100개의 배아 가운데 1개의 성공확률과 복제된 아이의 정체성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국내에서는 1998년 경희대 불임클리닉 김승보 박사팀이 시험관 아기 시술 때 폐기된 난자에 체세포 핵을 이식, 4세포기까지 배양하였다. 배반포 단계란, 수정 후 세포분열을 시작하여, 전능성 보유세포 단계를 거친 상태이다. 수정 후 14일이면 기간세포가 완성된다는 점에서 5~6일이 지난 배아의 생명성 문제는 중요한 윤리적 논쟁거리가 된다.

 

복제인간의 경우, 일차적으로 의료용 목적이란 명목하에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것을 위해서는 배아복제 연구가 필수적인 관건이 된다. 그것은 결국 '생식용 복제'를 의미한다. 이 경우 인간 장기의 상품화와 여벌 인간의 문제가 핵심 쟁점이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의료용 목적이란 미명하에서 여벌 신체 정도로 이해되는 인간복제는 완전히 금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개별 인간의 복제와는 전혀 다른 살인행위이다. 복제된 인간은 그 순간 자체 인격과 정체성을 갖춘 완전한 인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문제는 수정란을 착상하는 산모의 윤리 문제와 여성으로서의 가치관과 세계관, 여성성의 문제는 물론이고, 부모와 대리모, 태어날 아이와의 관계 논의이다. 대리모의 윤리 문제와 인격의 문제를 도외시하는 수정란 착상 논의는 지나치게 편의적이며 비윤리적이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의학적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장기복제는 주로 고등동물을 이용한다. 돼지에서 장기를 이식하는 과정은 배아줄기세포(Stem Cell)를 키워 장기이식에 필요한 환자에게서 세포를 떼어내 체세포복제를 거쳐 성장시킨 후 이식한다. 이 경우 유전적 기형의 생물재해와 완전한 개체로 성장하면서 생기게 되는 예측불가능과 유전적 불안정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유전적 난치병 내지 불치병의 완치란 명목에도 불구하고 종간의 혼합 문제, 유전자 오염 가능성 및 미지의 바이러스에 감염된다는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얼마 전(2000.11.14) 복제양 돌리를 만든 영국의 로슬린 연구소가 돼지 인간 이식용 장기생산 연구 중단을 선언했다. 그 숨은 이유는 이종이식을 통해 돼지 세포에 내재한 리트로바이러스의 감염 가능성 때문이다. 이러한 바이러스 이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너무도 무지하다. 그것을 실험했을 때의 결과란 전혀 예측 불가능한 것이다.

 

2000년 10월 클로나이드 사는 인간복제를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과학계는 인간의 장기로 바로 연결될 수 있는 배아줄기세포 단계까지의 복제 연구에 이미 성공한 상태이다. 8월 16일 영국정부는 의학상의 치료 목적이란 조건하에 인간 배아복제를 허용했다. 치료용 목적으로 인간복제를 허용할 때, 사용 후 폐기되는 복제인간과 기형아의 문제가 제기된다. 현재에도 동물복제의 성공률은 1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도 이러한 이유에서 "폐기"할 수 있는가. 그것은 생명을 위해 또 다른 생명을 매매하거나 파괴하는 행위이다. 단지 태어나 살고 있는, 권력과 자본을 소유한 사람을 위한 생명사업으로 전락하는 생명연구는 살인연구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여기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욕망과 불사에의 유혹은 어떻게 제어 가능한가.

 

순수 생명과학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인간복제는 유전자 조작처럼 생명체 자체에 치명적 결과를 미치는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복제된 인간의 개체성과 연관된 생명과학적 관점에서의 복제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유전자의 발현과 관계된다. 유전자의 발현은 환경과의 상호연관성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은 얼마전 인간 게놈의 수가 초파리의 2배 정도에 지나지 않는 3~4만 개로 밝혀진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왜냐하면 생명체가 형성되는 것은 유전자의 수효가 아니라 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복제된 아이의 인격성과 정체성의 문제이다. 복제된 아이는 그 자신만의 역사와 관계를 지닌다. 따라서 생명의 존재론적 원리에 따라 고찰할 때, 모든 개체는 고유한 정체성과 인격성을 지닌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에 따라 이해한다면 복제된 인간은 결코 손오공의 분신술처럼 그와 똑같은 제2의 복사본이 되지는 않는다. 히틀러(Hitler)와 같은 독재자를 복제한다고 해서 제2의 히틀러가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복제는 인간 생명의 고유성을 위협한다기보다는 복제된 생명체 자체도 하나의 생명체로 인격성과 자기 정체성을 지닌다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복제를 통해 인간을 상품화하거나 여벌 장기조달처 내지 인체실험의 터전으로 삼을 때에 발생한다. 의료적 이용이란 명분이 "맞춤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복제된 인간의 인격성 및 정체성 문제와 그에 대한 윤리적 규범 설정의 문제는 우선적으로 복제 자체에 대한 의미 해석에 따라 규정될 것이다. 오늘날의 기술적 발전은 물론, 사회적 변화에 의거해 본다면 복제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성찰 없이 이루어질 개연성이 매우 높다. 의료사고로 생후 10개월 만에 죽은 아이의 복제를 부탁한 미국의 어떤 부모의 소원을 단순한 윤리적 선언만으로 과연 얼마나 더 금지할 수 있을까? 아이의 부모는 그 대가로 약 190만 달러 이상을 클로나이드 사에 제공했다. 거대 자본은 기꺼이 이 일을 맡아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철학과 신학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선언적 명제 이상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이것은 복제된 인간의 인격성 및 개체성의 성찰이란 측면과 생명의 근원에 대한 대답에서 제시된다. 여기에는 의식과 지성의 진화란 관점에서의 존재론적 성찰과 그를 넘어서는 신학적 성찰이 요구된다.

 

2) 유전자 변형의 문제

 

유전자 혼합은 개별 생물 종의 탄생보다 더 오래 전부터 자연계에서 늘 있었던 일이다. 살아남는다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생명체는 현재까지 모두 3차례에 이르는 생물 종의 합병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생명과학적으로 유전자를 상호교환하고 변이시키는 일은 박테리아 세계에서 보면 그다지 더 새로울 것이 없는 기술이다. 박테리아는 위기를 만나면 종(種) 공통의 유전자 풀을 형성한다. 이처럼 유전자 풀이 서로 융합하는 사건이 일어나면 유전자들이 서로 섞이게 되고, 이것은 진화를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유전자 혼합이 현재 인류에게 작용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진화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사실 3만 5천 년 이래 인간의 형태상 진화는 거의 중단된 반면, 의식과 지능, 문화의 진화는 엄청나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신체적 변화를 이끌던 힘들이 지능과 마음의 변화를 이끄는 힘으로 변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문화적 진화는 유전자의 변화 없이도 가능하다. 유전자의 발현은 다른 유전자와의 관계, 생명의 내적 외적 환경, 바꾸어 말해 인간의 의식과 그에 따라 창조된 문화, 사회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말은, 유전적 진화는 자연 진화만이 아니라 문화 진화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인간 종에 큰 유전자 진화가 없는 상황에서도 발현형질 내지 대립유전자의 빈도 변화만으로 우리는 진화를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문화와 사회적 환경이 생물학적 진화를 가속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처럼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 문화와 사회 및 자연은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인위적 유전자 변형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문화적て사회적 요인에 의한 진화는 인간이 유전자에 가하는 직접적 변화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 교환이란 생명공학에서도 종간의 잡종, 악마적인 기술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서는 우선적으로 유전자의 다양성이 훼손된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 인간의 미래 진화를 결정하는 열쇠는 유전자 풀 전체의 다양성에 좌우된다. 유전자가 지닌 다양성은 진화를 계속 추진시키는 가장 강력한 자산이다. 실제로 발현되는 유전자는 유전 형질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머지 발현하지 않는 형질은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유전자 전체의 역사와 생존 전략을 위해서는 반드시 존재해야 할 요소이다. 그것을 현재의 인간 관심과 이해에 따라 조절한다면, 인간은 이 역사와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유전자 전체의 소멸을 초래할 수 있다.

 

두 번째의 문제는, 유전자의 가능성이 35억 년 이상의 진화사에서 우리 유전자에 축적된 결과란 사실에서 기인한다.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 두뇌와 유전자는 현재의 능력보다 훨씬 더 많은 다양한 능력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유전자 지도를 모두 읽어 낸다고 해서 밝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전자 조작은 그 기나긴 역사 안에서 축적된 모든 가능성과 생존의 잠재력, 다양성과 진화의 도약 가능성을 던져 버리는 행위가 될 뿐이다. 혼합되고 오염된 유전자 변화, 대립유전자의 빈도 변화의 앞날은 원칙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다. 유전자 풀의 혼합은 대립 유전자의 빈도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유전자 조합을 낳을 수 있지만, 인위적 조작은 그 예측불가능성과 생명원리인 시간성을 무시함으로써 파국을 초래할 것이다. 생명은 시간성을 지닌다. 그 말은, 생명은 시간에 따라 형성된 것이며 동시에 자연의 시간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 간다. 생명은 이러한 자연의 시간성에 순응할 때만이 생명으로 유지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진화는 비가역적 과정이기에 그 변화가 일어난 뒤의 유전자 조합은 결코 되돌릴 수가 없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난 개체가 어떻게 변화할지는 현재까지 전혀 연구된 바가 없다. 더욱이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할 때 생기는 문제는 생명에 대한 존재론적이며 생명과학적 이해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거의 이해가 불가능하다. 생명성이 자연의 본성과 원리에 순응하지 않을 때 일어날 결과를 어떻게 예측할 수 있는가. 인간 유전자 조작은 이러한 이해가 정립되기 전까지는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생명의 시간성에 순응하지 않는 유전자 조작은 파멸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전자 변형에 따른 세 번째의 문제는 우생학적 도약이란 허구이다. 유전자가 발현되는 과정에 주목한다면 유전자에 따라 인간 종의 형질이 결정된다는 유전자 결정론은 무의미한 견해일 뿐이다. 유전자 혼합과 유전자 결정론에 따라 우수한 유전자를 지닌 종이 세계를 지배하리란 주장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 과거의 역사에서 보듯이 우생학적 주장이 빚은 처참한 결과를 유전자 변이를 통한 종의 도약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전자의 다양성이 유지되는 유전자 다원성의 사회이다. 이것을 유전자 조작을 통해 통제하려 한다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결과에 따라 인간 종의 파멸만을 초래할 뿐이다. 정신적 발전과 생물학적 진화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다원성의 유지이다. 우수한 단일 종을 생산하려는 우생학적 논의와 반대로 우리 종 사이에서 유전적 변이의 풀은 새로운 돌연변이에서 그리고 서로 다른 인간집단간의 혼합으로 인해서 다양성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도약의 근거가 된다.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과 적응, 생명의 창조력을 제공하는 것은 개체가 지닌 정신적 육체적 다양성과 생태계에서 유지되는 종의 다양성이다. 이러한 다양성이 없다면 생명체의 힘은 곧장 사라질 뿐이다. 개체의 생물학적 특성을 획일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들은 생물학적으로 거부되고, 사회적으로 규탄되어야 마땅하다. 개체의 유전적 가치는 유전자의 질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지닌 다원성에 따른 유일성 때문이다. 인류의 발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문화적 다양성뿐 아니라, 유전적 다양성 역시도 오늘날 산업사회가 미래를 획일적으로 계획함에 따라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유전자 조작은 이러한 개체와 종의 이중적 다양성을 파괴하며, 인간의 현재 능력으로는 결코 예측할 수 없는 유전자 오염을 초래한다. 유전공학, 인간 게놈 프로젝트, 배(胚)발생 연구, 사회생물학이 범람하는 시대는 생명체를 일순간의 관심사에 따라 마음대로 변형시키게 된다. 인류의 역사가 이러한 우생학과 생물학적 결정론의 추악한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예측불가능성은 과학적 시도의 본성 자체 내에 존재한다. 유전자 조작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과 효과는 그 대가에 비해서는 너무나 미약하다. 자본과 권력, 과학자 내부의 자체 논리에 이 문제를 맡겨 둔다면 그 끝은 명확하다.

 

 

3. "생명"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


1) 생명에 대한 철학적 이해

 

진화론적으로 고찰할 때 원시 복제자에서 시작된 생명은 개체성과 자기 보전의 의식을 지님으로써 새롭게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생명체가 생명체의 합병과 공생명이란 원리에서 타자의 존재 기능을 긍정함으로써 자기 의식과 지성을 지닌 종이 탄생하였다. 이 발전은 궁극적으로 철학적 인지체계와 초월적 이해체계를 요구하는 영역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제 이러한 생명체 가운데 한 종인 인간이 자신의 사유와 인지체계로 스스로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이것을 생명의 진화사란 관점에서 고찰한다면, 그 자신 생명으로 창조되었음에도 스스로 생명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초월적 존재자가 탄생하였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쩌면 기나긴 진화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존재론적 사건의 필연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제 이러한 현존재가 생명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생명의 원리와 진화의 방향이 결정된다. 이는 결코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생화학적 진화의 과정에서 이해할 때 사실에 부합하는 실제적 결론이다. 의식과 지능이 진화사적 현실이라면, 자기 성찰적이며 초월적인 인지체계는 생명현상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생명사건을 존재사건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살아 있는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성격은 자기 생성(autopoiesis)과 보존이란 원리이다. 그것은 생명체의 자기 형성과 자기 정체성 유지의 과정에서 이해된다. 자기 보전은 구체적으로 개체를 형성하는 자기 격리성과 자기 생산적 과정의 원리, 개체의 영속성을 유지하는 자기 영속성이란 세 가지 특성을 지닌다. 인식론적 구조를 밝히기 위해 생명의 자기 보전 개념을 원용한 마투라나에 의하면, 생명이란 복잡한 자신의 형상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위환경과 에너지 교환을 벌이는 과정을 의미한다. 자기 보전은 생명계 전체, 타자와 자신과의 이러한 상호작용에서만 가능하다. 생명체는 열역학의 관점에서는 열려진 개방체계이다. 따라서 생명체의 정체성이란 이 개방체계에서 생명체가 자신의 환경 및 다른 생명체와 맺는 관계와 그에 따른 자기 보존의 원리에 따라 형성된다. 그것은 그들과 나누는 정보교환의 체계와 자기 이해에 대한 성찰을 의미한다. 이제 생명체의 자기 생성과 보전이란 이러한 정체성을 유지하며, 이로써 그의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원시 복제자에서 시작된 생명체가 진화를 거듭함으로써 유전자를 교환하기 위한 가장 성공적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유성생식이다. 생물 종에서 개체의 죽음은 이러한 유성생식의 결과로 주어졌다. 그럼에도 인간은 단순히 죽음으로 사멸되지 않고, 스스로 이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며,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성찰한다. 죽음을 이기고자 노력한 길고도 오랜 인간의 고뇌, 특히 인류의 초월세계와 종교의 세계를 상기해 보라. 초월성에 대한 관계설정이 인류의 삶과 문화에 끼친 영향이란 거의 절대적이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이란 생명체가 지닌 자기 보존과 생명체와의 상호작용이 중지됨을 의미하며, 문화는 이 과정에서 생긴 생명체의 자기 이해와 표현의 과정을 의미한다. 생명체는 이를 통해 개체성과 정체성을 유지하며, 이를 최대로 증진시키기 위한 진화의 방법으로 의식과 지성이란 작용을 선택한다. 그것은 진화의 역사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자신 생명체이면서 생명 전체의 방향과 의미를 결정하는 인간이 "생명"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와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초월론에 근거한 형이상학에서 주어질 것이다.

 

2) "생명"의 원리와 "생명철학"의 성격

 

오늘날 생명 일반에 대한 문제는 생명체의 생물학적 조건과 존재 상황은 물론이고, 생명 자체의 근원적 의미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제기된다. 여기에는 생명의 존재론적 의미설정이란 문제와 2차적으로 생명에 대한 과학 · 기술공학적 접근에 대해 비판 · 반성함으로써 생명에 대해 윤리학적 규범을 설정하는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즉, 그것은 생명에 대한 과학과 사회, 문화와 실천적 측면에서의 성찰적 윤리학과, 생명 일반의 의미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학의 문제로 이어진다. 생명과학의 시대에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필요한 과제는 생명윤리학의 정립일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설정하는, 자신이 탄생한 자연과의 만남과 관계의 양태에 관계된다. 생명체 일반과의 관계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생명 이해에 따라 그의 존재 의미를 설정하며, 그로써 그들 생명과 만나고 관계 맺게 된다. 생명윤리학이란 이렇게 인간이 설정하는 생명 자체와의 관계, 만남의 틀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생명윤리학은 생명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의 틀에 따라 설정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인간 생명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해 초월적이며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는 철학의 정립을 의미한다. 이러한 철학을 생명철학이라 이름한다면, 여기에는 생명과학의 연구업적과 발견을 수용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성찰하는 작업이 필요해진다. 그것은 생명과학의 연구업적이 생명과 인간 삶에 대한 초월세계적 회피, 의미 없는 가설과 논쟁의 폐기는 물론, 공허한 노력과 무의미한 전제를 포기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과학은 생태학과 생명 내재적 측면에서 이러한 관계 정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식을 제공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생명은 인간의 올바른 생명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며, 생명의 근원과 궁극적 목적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할 터전이 열리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철학은 생명의 지향성에 따라 그 존재론적 의미를 성찰하는 생명형이상학의 정립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한 생명의 원리는 역사성과 상호역동성, 자체목적성에서 이해된다. 모든 생명체는 시간에 의해 정립되기에 생명 이해에 있어서 시간 지향성은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다. 진화의 기나긴 시간 안에서 생명체는 생명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 나아갈 바를 스스로 결정하게 됨으로써 주어지는 역사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먼저, 역사성이란 이러한 성찰을 통해 얻게 되는 생명의 의미이다. 또한 생명은 생명체와 환경에 상호 작용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그의 존재를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따라서 인간 생명의 의미는 이러한 상호작용의 역동성에 의해 이해된다. 마지막으로 생명은 자신에 대한 성찰과, 그 나아갈 바 지향성에 따른 목적성을 지닌다. 이제 이러한 생명의 원리에서 생명의 목적성이 지향하는 초월성의 원리를 성찰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성이 궁극적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초월적 원리이다.

 

인간 생명은 태초의 창조과정에서 원시 자기 복제자로 시작된 생명의 역사 안에서 스스로 생명체이면서 생명에 존재론적 의미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존재로 이해된다. 이러한 생명 존재자인 인간은 이 허무의 나락에서 그 자신에게 스스로의 의미를 부여해야 할 과제를 지닌다. 생명은 놀랍게도 새로운 전환의 순간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도약과 절명이란 양극 사이에 놓인 결단의 시간을 의미한다. 여기에 생명의 원리를 성찰하고 그에 의미를 부여하는 생명형이상학의 의미가 자리한다. 이러한 성찰과 의미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 생명은 단순히 "이기적 유전자 전달 기계"(R. Dawkins, The selfish Gene)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단순히 생명과학에서 이해되지 않고 이러한 생명철학에 의해 올바르게 이해되고 해석되며, 초월해 갈 것이다.

 

생명과학 내지 "생명공학"이란 말이 논의되는 지금이야말로 올바르게 이해된 생명의 철학과 그로 인한 인간의 자기 주체성 정립이 필요할 때이다. 개별 영역의 지식과 그에 대한 문제의식은 서로 영향을 끼치고, 결합함으로써 그 자체의 의미는 물론, 인간의 자기 이해와도 관련이 된다. 그러한 비판과 의미수행의 성찰적 행위는 그 개별 영역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선험적으로 규정된 형이상학적 판단에 따라 그 문제를 성찰하고 해석하며, 올바른 의미부여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생명의 문제 역시 이러한 존재론에 근거한 해석학의 과정에 따라 이해되고 해석된다.

 

 

맺음말

 

인간 생명은 단순한 생물학적 차원만을 의미하지 않고 문화적이며 의미론적 삶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생명에 대한 유기체적 접근의 한계는 생명의 문화와 언어, 역사와 관계성, 지향성과 초월성이란 특성을 매몰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생명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명이 지닌 자기 생성과 자기 보전, 자기 성장의 원리와 특성을 정당하게 존재론적으로 수용하고 해석하는 생명의 철학이 요구됨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와 같다. 이제 이렇게 생명철학의 존재론적 원리에 따라 형성되는 형이상학을 서구 근대의 형이상학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러한 탈(脫)형이상학은 생명 이해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를 설정하고, 그러한 철학의 근거로 작용할 것이다.

 

이에 따라 생명과학의 윤리성 문제와 생명의 존엄성 문제는 2차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불행히도 우리가 지닌 이성과 통찰력, 타자에 대한 책임의식으로서의 윤리성은 생명의 원리를 좌우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하고 위험하다. 오늘날의 유전자적 변화와 도약이 인류가 나아갈 새로운 도약의 길로 작용하기 위해서 인간이란 존재는 여전히 지혜롭지도, 변화와 적응을 위한 기다림의 시간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는 자연의 생존과 인간 생명의 전권을 지니기에는 지나치게 탐욕스럽고 너무도 무책임할 뿐이다. 인간은 아직도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 유전자 연구의 결과를 의학적으로 또는 상업적으로 사용하려는 시도, 유전자 조작을 통한 식량문제, 농산물 문제를 해결하리란 꿈 같은 환상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과학이 순수한 학문적 논리와 발견을 향한 열정에서 이루어진다는 믿음은 과학의 사회적 관계를 무시할 때나 가능한 순진무구하기 그지없는 생각이다. 거대자본의 영향 이상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독선적인 신념들이다. 맹목적 신념에 근거해 과학의 업적을 부정하는 독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이 신의 위치에 서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인간이 생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생각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가장 위험한 독선일 뿐이다.

 

같은 생명체와의 연대감과 책임감을 지니지 못한 지성의 탄생은 진화사에서 치명적 결함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한 종은 자연계 안에서 스스로 멸종의 길을 걷게 된다. 오늘날 인간이란 종은 생태계에 대한 직접적인 개발, 생물 종의 파괴 위협과 마지막으로 서식처의 파괴와 단편화를 통해 오히려 제6의 멸종을 초래하는 주범으로 존재한다. 여기에 덧붙여 인간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미래 생명의 운명을 결정할 능력을 지님으로써 생물 종이 기나긴 진화의 역사에서 얻은 무한한 가능성과 미래의 가능성을 모두 파괴하고 있다.

 

생명의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지적 혁명은 내재적인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다. 생명과학 시대의 인간의 정체성 논의는 이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은 단순한 자연과학적 발견에 따른 생물학적 변화와 그 결과에 대한 수용 정도에 그치게 될 뿐이다. 생명과학을 통제하려는 여하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 자체로 엄청나게 발전해갈 것이다. 이 변화의 물결은 너무도 강력하게 인간의 전 존재 영역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이러한 생명의 문제에 대한 존재론적 형이상학이 필요한 때이다. 생명을 소유함으로써 인간을 초라하게 만들며 노예로 만드는 모든 것, 인간과 생명을 사물화하고 비인간화하는 모든 것에 맞서 싸우는 것은 오늘날 철학이 지닌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이 글에서는 논의의 확대와 심화를 위해 시론의 성격을 지니지만 "생명"의 의미를 존재론적으로 성찰하려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철학이외의 노력에 근본적인 의미, 형이상학적 원리를 제시하려는 의도이다. 그러한 "생명철학"은 근대를 벗어나는 형이상학적 원리에서 인간의 초월적 논의 지평에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다른 생명체와 생태계 전체와의 만남과 관계 맺음의 틀을 규정하는 윤리적 규범은 이러한 생명철학에서야 올바르게 주어질 것이다. 생명사건이 지닌 놀라움에 정당하게 이해된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따른 설정에 의해 생명사건은 존재론적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에 대한 능력이 과학적 지식이란 축에 의해 주어진다면, 그것은 먼저 전적으로 초월론적 형이상학의 해석학에 따라서만 제어되고 방향 지어져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이러한 생명학의 발전은 인간이란 존재는 물론 전체 종의 파멸을 막는 차원과 그를 넘어 더 나은 도약으로 나아가는 선택의 순간으로 다가올 것이다.

 

 

[참고 문헌]

 

1. 신승환, ['생명해석'의 철학과 탈형이상학적 사유틀], {생명과 더불어 철학하기}, 철학과 현실사, 2000, 15~40쪽.

2. L. 마굴리스 · D. 세이건, {생명이란 무엇인가}, 황현숙 옮김, 도서출판 지오, 1999(Lynn Margulis·Dorion Sagan, What is Life, 1995).

3. L. 마굴리스 · D. 세이건, {섹스란 무엇인가}, 홍욱희 옮김, 도서출판 지호, 1999 (Lynn Margulis·Dorion Sagan, What is Sex?, New York,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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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h. 럼스덴 · E. O. 윌슨(Ch. Lumsden, E. O. Wilson), {유전자와 마음, 그리고 문화}, Oxford, 1981.

6. 리처드 리키 · 로저 르윈, {제6의 멸종}, 황현숙 옮김, 세종서적, 1997.

7. J. 보이지트(Jrgen Voigt), {진화의 붉은 실: 티끌에서 핵구름까지}, 박시룡 옮김, 민음사, 1994.

8. E. 슈레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본 생명현상}, 서인석 · 황상익 옮김, 한울출판사, 1997(Erwin Schrdinger, What is Life).

9. F. 야콥, {파리, 생쥐, 그리고 인간}, 이정희 옮김, 궁리출판사, 1999(Francois Jacob, La Souris, la Mouche et l'Homme, Paris, 1997).

10. Ch. 윌스, {진화의 미래}, 푸른숲, 1999(Ch.Wills, Children of Prometheus, Massachusetts, 1998).

11. K. 포퍼, {과학적 발견의 논리}, 박우석 옮김, 고려원, 1992(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London, 1968).

12. R. Dawkins, River out of Eden, New York, 1995.

 

[신승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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