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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장기 및 조직 기증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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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69

장기 및 조직 기증의 윤리

 

 

시작하는 글

 

가톨릭 교회가 조직 이식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것은 1956년 교황 비오 12세 때이다. 비오 12세는 이탈리아 각막 기증자 협회 대표자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그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치료를 위해서나 학문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사체로부터 장기나 인체 조직을 떼어낼 수 있다는 원칙에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살아있는 사람으로부터의 장기나 조직이식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지만 가톨릭 교회는 윤리적, 의학적 차원에서 조직 및 장기이식을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학 및 과학 기술의 놀라운 발전과 함께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는 장기 및 조직이식의 긍정적 측면보다는 오히려 부정적 측면이다. 존엄성을 지닌 인간이 일종의 사물로 취급되고, 단순히 실험을 위한 한 대상으로 전락되는 인간성의 상실위기와 함께 장기이식과 관련되어 돈과 권력의 횡포라든가 폭력까지도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이 분야에서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는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참된 모습이라는 윤리성의 근본 기준을 제시하는 일일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발전과 존중이 장기 및 조직이식에 대한 사고를 떠받치는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기이식과 관련된 의학 및 과학기술은 명백히 인간 생명에의 봉사를 지향해야 하며, 이러한 전제와 관련하여 기증자와 수혜자의 관계도 올바르게 정립되어야 한다. 

 

 

1. 새로운 한계와 윤리적 도전 

 

인간 삶에 있어서의 실제적 상황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지만 특별히 인간 장기이식 분야는 항상 더 넓게 그 영역을 펼쳐가고 그에 따르는 새로운 한계는 끊임없이 새롭게 대두된다. 각막, 골수, 간, 신장, 췌장, 폐, 심장 등의 조직이나 장기이식 수술은 이미 널리 시행되어 왔으며, DNA 유전자 일부의 이식, 호르몬과 같은 유전적 특성을 전달하는 내분비선의 이식, 성인 혹은 태아로부터의 신경 조직의 이식 등에 대해서도 이미 활발한 연구가 진행 중인 실정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식 의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멈출 줄 모르는 발전에서부터, 특별히 장기이식의 거부 반응을 조절할 수 있는 의약품의 발견은 분명히 장기이식의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또한 동시에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 생명에 대해서 매우 급진적이고도 때로는 마치 심판관과도 같은 인간 생명의 지배자의 위치에 과학-기술을 올려놓고 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기술의 힘과 인간적 혹은 인격적 힘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용기를 요구하는 윤리적 도전이 생겨난다. 심각한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육체적 가능성과 윤리적 가능성 사이의 구분과 관련된 문제이다. 더 정확하게는 기술적 인간(Homo technologicus)와 이성적 인간(Homo rationalis) 사이의 구분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문화에 만연되어 있는 풍조는 자주 "과학적 기술주의"라고 불리우는 철학 사조이다. 이러한 사조의 기본 원리는 인간 생명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현실에 대한 절대적 조작이다. 그 논리적 결론은 기술적으로 실행 가능한 것이 곧 윤리적으로 허용되는 것이며, 이 둘 사이의 완전한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여기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들이 말하는 기술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이란 단순히 '할 수 있는 것' 뿐만이 아니라 '해야되는 것' 까지도 포함함으로써 과학주의적 가능성과 윤리적 가치 및 정당성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전제로 하여 기술 자체가 기준이 될 때 바로 그것이 윤리적 척도를 구성하는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 인간(Homo rationalis)은 기술적 인간(Homo technologicus) 안에서 전적으로 변화되거나 소멸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술이라는 것은 인간을 발전시키는 선에로 이끌 수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할 수 있는 악에로 끌어들이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핵기술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질적인 향상을 가져다준 것은 명백하지만 동시에 핵기술에 따라온 핵무기의 출현은 인간과 세상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음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동일화는 받아들일 수 없으며, 기술적 발전이 갖는 인간적 의미에 대한 판단 기준이 무엇보다도 시급히 요청된다. 또한 그 기준이 참된 인간으로서의 인간 발전과 존중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 

 

절대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과학-기술에 대해 분명히 긍정적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전제가 있다면 그것이 인간에게 봉사하는 한에서이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을 위해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기술이 있을 뿐이다". 

 

장기 및 조직 이식 분야에서 윤리적 기준은 어떤 특별한 모양을 갖추어야만 한다. 곧 인간의 신체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하는 구분이다. 분명히 우리는 장기 및 신체 조직의 이식에 대해, 즉 인간의 신체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인간적' 육체와 관련되며 이는 단순히 장기와 신체 조직들의 혼합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분명한 형상(形相)을 통해서 인간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지'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장기이식은 인간 육체의 구성 요소와 연관될 뿐 아니라 인간의 정서적이고도 영성적인 요소와도 불가분의 관련을 갖는다. 곧 이는 분명히, 항상 인간 인격과 관련되는 사건인 것이다. 

 

 

2. 인간으로서의 인간: 윤리성의 근본 기준 

 

장기 및 조직이식의 윤리성에 대한 가치를 제공해주는 근본 기준, 확실한 의미에서의 건설적인 원리는 이미 제시되었다. 곧 인간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발전과 존중이 그것이다. 이러한 공식화는 이미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완전한 의미에서의 일반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는 특별한 방법으로 장기이식에서 제기되는 여러가지 복잡하고도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이란 인격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점에서부터 나타나는 다양한 결과들을 집중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다. 

 

분석에 앞서 우선 강조되어야할 점은 인간성의 발전과 존중이라는 것이 인간의 장기나 신체조직들을 단순하게 '고치고' '보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 자체의 육체적 및 정신적 조건들을 참되고도 고유한 의미에서 더 나은 상태로 만든다는 의무까지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분석을 통해서 계속 주시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격으로서의 고유함에 대한 강조이며, 곧 이는 인간이 항상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지 수단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모든 의학적 개입은 인간의 선(善)에로 향해야 하며,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그 반대로 의학적 개입은 한 사람의 인간을 또 다른 인간을 위한 도구로 삼아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실상 의료 기술의 도구화는 각각의 구체적 인간의 고유한 인격으로서의 품위와 정체성이라든지 절대적 평등까지도 직접적이고도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버리고 만다. 만일 그러한 사고 방식 안에서 태아의 장기나 조직을 이식하는 일은 중대한 불법이 되고 만다. 

 

우리는 인간이 일치된 전체성 혹은 개체로서의 '나' 안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통합된 인간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장기이식에 대한 윤리적 질문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즉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정신적, 영성적 측면을 무시한 채 순전히 인간의 육체성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정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인간 이해는 장기이식에 대한 윤리성을 논하는 데 있어서 필연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는 일반적 성격의 문제이고, 두번째는 특수한 성격의 문제이다. 인간의 일치된 통합성에 대한 존중에서부터 제기되는 첫번째 문제는 장기이식이 심리적 측면과 매우 깊숙이 관련되던가 혹은 장기이식이 정신 및 경험 세계 안에서 아예 자취를 감추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결과를 예상케 한다는 것이다. 곧 장기 적출이나 이식을 통해서 변형된 육체 (혹은 전혀 새롭게된 육체)를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기증자이든지 수혜자이든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심리적인 문제를 안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심리적인 측면 역시 인간의 불가분성 및 통합성에 예속되며, 이런 의미에서 심리적 측면 역시 윤리적 가치 안에서 다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장기가 없어졌다거나 혹은 없었던 장기가 새롭게 이식됨으로써 놀랍게 변화된 삶의 형태에 대해 의식적이고도 자유로운, 그리고 책임감있는 수용이라는 심리적 조화 차원에서의 적절한 준비가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특수한 성질의 문제로서, 뇌 조직과 같은 조직 이식의 형태와 관련된다. 이러한 성격의 이식 결과는 인격의 파괴 또는 변형이다. 여기서 이러한 문제가 야기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 상세하게 다룰 수는 없다. 뇌 세포의 수여뿐만 아니라 접목까지도 포함한 뇌이식에로 범위를 좁히면서 내릴 수 있는 판단은 윤리적으로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형태의 이식은 사실상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식 전후의 정신적 일치라든가 과거라는 '기억'으로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는 현재와의 일치는 전혀 존중되지 않기 때문이다. 

 

 

3. 인간 생명에의 봉사 

 

살펴본 바와 같이 장기 및 조직이식에 있어서 윤리성의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인격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존중과 인간성의 촉진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장기 및 조직 이식은 생명을 보호하고 생명에 유익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생명에의 봉사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이식수술이 발전되기 시작한 최근 30년 간의 엄청난 발전을 통해서 이끌어낸 긍정적 최종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이러한 결론은 의료진들로 하여금 이식 수술을 위한 몇 가지 조건들을 매우 엄격하게 지키도록 촉구한다. 이식 수술을 담당하는 의료진들이 자신들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과학-기술적인 측면에서 빈틈없는 전문성이 요구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기억하는 몇 가지 원리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식 수술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에 대한 충분한 인식, 곧 '장기 및 조직 이식의 지침'; 2) 기증자와 그의 동의; 3) 이식 수술의 구체적인 조건, 상황에서의 수술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위험성; 4) 수혜자와 그의 동의, 그리고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과 한계, 곧 수술 후의 인간적 삶의 내용에 대해서; 5) 수술 비용과 수술 후의 건강 유지를 위한 비용. 

 

 

4. 동의 : 자유롭고도 책임성있는 기증 

 

가장 쟁점이 되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장기 및 조직 적출에 대한 동의와 관련된 문제이다. 최근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사실상 장기이식이 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의학적 환경은 장기이식의 거부 반응이 없는 환경이어야하며, 이러한 환경을 위해서는 가족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장기 수여와 이식이 성공률을 가장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형제들 사이의 장기 수여와 이식, 부모와 자녀 사이의 장기 수여와 이식이라고 가정할 때, 어떤 경우 가족의 압력, 주위의 눈초리 때문에 마지못해 장기를 수여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기증자에게 요청할 수 있는 동의의 형태, 곧 공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기증'이라는 표현에 대해 엄격하고도 신중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장기의 기증'이란 정확하게 어떠한 의미인가? 

 

'기증'은 몇몇 나라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장기 '매매'의 거부를 의미한다. 또한 '기증'이라는 의미는 어떤 이득을 취한다는 논리를 떠나서 장기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증'에 있어서는 커다란 지혜가 요구되기도 한다. 

 

'기증'은 자유로운 기증이어야 한다. 즉 긍정적인 의미에서 기증자의 자유가 요구된다. 기증자 자신이 이미 자신의 행위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 자유로운 동의를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기증'의 의미가 '기꺼이 베풀어지는 선물'의 반대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교황청 생명학술원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장기 및 조직의 기증은 어떠한 경우라도 기증자의 최종 의지가 존중되어야 하며, 가족이 있다면 그 가족의 동의도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다. '기증'은 그 본성상 전적으로 자유로와야 하며, 자유를 요구하며, 자유를 증거한다. 그러나 자유는 본질적으로 책임감을 요구하며, 구조적으로 인간적 가치를 고양시킨다. 자유는 인간의 자아 실현을 위해 인간에게 맡겨진 하나의 능력이며, 이는 가치에 의해서, 가치를 존중함으로써만 획득된다. 

 

기증이란 인간 육체의 올바른 이해에서부터 출발하여 책임감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인간 육체를 올바로 이해할 때 장기라든가 신체 조직의 기능은 인간에 있어서 탁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인간 육체를 단순하게 인간 자체의 정신적 및 영성적 범주와는 전혀 무관한 장기나 조직의 복합물이나 덩어리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현대의 인간학은 인간 육체를 특수한 방법으로 인간 실현에 도달케하는 중요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인간의 '정체성'은 (특별히 창조주 하느님의 선물인 사랑의 표지이며 열매로서의) 살아 움직이는 '선물'이 된다는 것에 있으며, 또한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스스로를 타인에게 내어줌을 지향하기 때문에 인간 육체는 정확히 말해서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선물로서 스스로를 탁월하게 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공간'이 되며 따라서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시간, 온갖 정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생명을 내어주면서까지 '선물'로서의 정체성을 살아가며,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 곧 장기나 신체 조직의 기증이라는 방법을 통해서까지도 자신에게 맡겨진 삶의 목표를 추구하기도 한다. 인간의 이러한 정체성의 표현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자기 자신의 육체 (장기나 신체 조직)를 내어주는 것으로 표현되며, 죽은 후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이 자유롭고도 책임감있는 결정을 통한 '기증'을 촉구하기 위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생명, 나아가서는 인간 육체에 대한 본질적이고도 기본적인 의미로서의 '선물-기증'의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교육일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연대성의 인간적 의미를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다. 삶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시각은 교육적 측면에서의 모험을 당연히 수반하고 또 수반하여야 한다. 살아 있는 동안, 혹은 죽은 다음에라도 장기 기증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하나의 구체적 방법이며, 예수의 삶을 구체적으로 따르는 하나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동의에 있어서는 추정되는 동의를 따르지 않는 측면과 따르는 측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가능한 방법으로써 인간 생명을 살리는 일과, 공동체에 위임된 죽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는 이중적 측면에서 어떤 측면이 존중되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사체(死體)는 죽음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한 부검이나 해부 그리고 의학적인 이유 등에 의해서 씌여질 수도 있다면 인간 생명의 구제의 측면은 공공 이익을 위한 위의 이유들보다도 더 기본적이고 상위의 선(善)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추정된 동의를 지탱해주는 또 다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 인간성을 갖추고 잘 교육된 사람에 대해 존경심을 갖는다. 죽음 후에 자신의 신체에서 어떤 조직이나 장기를 떼어내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의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기증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의사들에게 허용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도 고유한 의미에서의 윤리적 상위 가치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측면 외에 사실 또 다른 매우 어려운 측면이 있는데 곧 심리적 측면으로서 그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결정의 순간에 가족들이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고를 당한 한 젊은이의 부모에게 장기나 조직 적출의 정확한 시기를 놓쳐버릴 수도 있다는 긴박함을 느끼게 하면서 동의를 요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공동체의 시민이나 가족이 불쾌감이나 거부감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동의의 요구는 재고되어야 하며, 이에 따르는 각 개인의 자유는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체로부터 장기 및 조직들을 적출해 내는 일에 대한 추정된 동의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또 다른 측면에서의 자유의 요구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체를 공동체에 맡겨진 것으로만 생각함으로써 사체에 대한 존경심을 크게 상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죽은 사람의 친지와 사체 사이의 정서적 연결 고리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법적인 해결 방법을 제시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장기 및 조직이식의 윤리적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교육을 더 크게 확대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만일 이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선행된다면 비생산적인 명령이나 규정들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며 이에 대한 문제는 더욱 쉽게 해결될 것이다. 따라서 법적으로 대응하는 것보다는 자유로운 기증 기회를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끊임없이 교육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자유로운 동의로써 장기 및 조직 기증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꼭 필요한 때에 오히려 그 혜택을 받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대한조직은행연구회 주최 세미나(2000년 1월 15일),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 자료집, 이동익(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윤리신학) / 이동익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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