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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평화를 원한다면 생명을 옹호하라: 1977년 세계 평화의 날 교황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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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01

평화를 원한다면 생명을 옹호하라


- 1977년 세계 평화의 날 교황 메시지 -

 

 

1977년 제10회 세계 평화의 날을 위하여, 바오로 6세께서는 "우리는 평화를 원하고 있는가?"라는, 단도직입적으로 강력히 우리에게 자문(自問)을 요구하는 테마를 선정하셨다.

 

 

I. 서론


1.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차라리 평화 없는 사회와 문명에 체념해버리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혹자는 인간의 노력이 실패를 거듭하고 야만성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체념해버린다. 바야흐로 힘을 모아 일고 있는 폭풍이 자기네들의 시대가 지나고 난 다음에야 휘몰아치기를 바라는 것이 그들의 최대의 염원이다. 혹자는, 과학적으로 말해서 전쟁이란 하나의 불가피하고 구조적인 역사의 법칙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이란 사회 내의 생활의 불가결한 요소라고, 아니면 적어도 우리의 고통받는 세대가 통과하고 있는 전례 없는 변화의 불가결한 요소라고 하여 전쟁과 더불어 살아가겠다고 싸늘한 결심을 하고 있다. 또 혹자는 - 그리스도교인들도 포함해서 - 우리 지구상의 도처에서 폭발하고 있는 무질서와 부도덕에 대한 해결책이란 나날이 고지(告知)되고 있는 커다란 환란들 이외에 달리 아무것도 없다고 보고 있다. 그들은 거기서 인류의 집단적인 죄악에 대한 하나의 저당한 징벌을, 인류의 십자가와 인류의 구원을 보고 있다.

 

끝으로 혹자는, 사회의 정책이야 어떠하든, 혹은 그 형태야 어떠하든, 그 속에 살아간다는 것이 그다지도 많은 문제들을 부과하지만 않는다면, 무엇보다도 자기들의 이익과 안락을 해치지만 않는다면, 기꺼이 거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겠다고 하고 있다.분명한 일이거니와 우리가 여기서 취급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기정사실화된 무질서', 이런 거짓 평화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이다. 진정한 평화란 '비전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사라지고 혹은 되살아나는 갈등들의 와중에 있다하더라고, 그래서 비록 큰 노력이 따라야 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일련의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제가치들을 추구하면서 보다 큰 정의와 안전과 유대와 참여와 창조와 우애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그런 것이 진정한 평화인 것이다. 이것이 - 우리가 과연 평화를 신봉하고 평화를 원하며 평화를 위하여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 교황 성부께서 1977년의 테마에서 생명과 관련지어 말씀하시고 있는 그 평화이다.

 

평화와 생명은 함께 나아가는 법이다. 평화도 생명도 하나의 사회의 성공의 표징이고 그 건강의 표징이다. 그 성장의 증거요 척도이며 인류의 역사와 그 구원의 이면에 있는 이유요 진정한 법칙이다.평화와 생명은 서로 영향을 주는 법이다. 평화는 생명을 보호하고 발전시킨다. 생명은 평화에 대하여 그 내용과 '주제들'을 제공해준다.

 

2. 인간 생명을 옹호하라

 

생명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제일가는 것이요 가장 보배로운 것이다. 이번 평화의 날 메시지의 주제에서 사용되고 있는 생명이라는 말은, 인간의 현세적 및 불멸적 존재를 뜻하는, 가장 넓은 의미의 생명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한정된 의미에서 인간의 육체적인 생명, 아니 그보다는 인간의 정신적 및 육체적인 생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인간은 그의 양심과 자유와 영적인 본성으로 말미암아 동물적인 생명보다는 - 물론 인간이 동물적인 생명에 완전히 참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 근본적으로 높은 차원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생명을 옹호한다는 것은 따라서, 이 독특한 살아있는 존재를 존중하고 보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회칙 Populorm Progressio에서 발전이라는 것에 적용되고 있는, "인간 각자와 인간 전체의 선익(善益)을 증진한다"라는 구절을 변형시켜서 말하자면, 생명을 옹호한다는 것은 곧, 하나의 '고양된 품위'(Gaudium et Spes, 26항)를 부여받은 이 인간 인격 안에서 "살아있는 존재 각자와 살아있는 존재 전체의 선익"을 옹호하고 증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이것은 하나의 굉대(宏大)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 안에는, 혹은 이미 존재하는 자로서의 혹은 아직 태어날 자로서의, 혹은 각 개인들의 총화로서의, 혹은 단일한 인류 전체로서의 모든 사람들도, 각 사람의 정신과 육체의 숭고한 존엄성도 모두 포함되어 있다.그렇다, 생명은 옹호되어야 한다. 생명은 일시에 동시에 존중도 찬양도 추구도 도움도 받고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대항이나 무시나 공격이나 상해나 압박을 당하기도 하는 모순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병든 사람을 구제하기 위하여 혹은 하나의 위급한 마을을 대피시키기 위하여, 구조자들이 위험을 무릅쓸 때, 국가적으로 또 국제적으로 연대성이 드러나고 있음은 빈번하고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생명에 봉사하기 위하여 사용되던 동일한 비행기들이 필요하면 어느새 둔갑을 하여 전쟁 무기가 된다. 인간 생명에 관하여 현실의 화급한 문제점들을 열거하자면 너무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다소 독단적으로나마 이들을 요약해서 세 가지의 카테고리로 구분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들 각 카테고리는 대소간에 상응하는 본질적인 요구를 가지고 있으니, 곧, 생명을 옹호하라, 생명을 치유하라, 생명을 증진하라 하는 것이 그것이다.

 

 

II. 인간 생명을 옹호하라


1. 죽음을 목표로 하거나 사실상 죽음을 내포하고 있는 공격들

 

옹호라는 표제하의 첫째 그룹에 있어서 우리가 우선 따로 구별해서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으니, 그것은 수백만의 인간 존재들의 - 이미 성숙해 있거나 성장과정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 죽음을 목표로 하고 있는, 혹은 사실상 그러한 죽음들을 내포하고 있는 그러한 공격들이다.여기서 그 자체로 그리고 평화와 관련해서 기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세 가지의 공격 형태들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니, 전쟁과 낙태와 기아가 곧 그것이다. 생명이 없는 곳에 평화란 없다. 죽음이 없는 것이, 학살과 멸종과 상해와 파괴가 없는 것이 평화의 첫째요 으뜸이다. 생명을 잃는다는 것은 평화를 잃는다는 것이다. 생명을 죽인다는 것은 평화를 죽인다는 것이다. 생명은 평화와 동일한 적들을 가지고 있다.

 

(1) 전쟁

 

가장 두드러지고 오래되고 보펴적인 것은 전쟁이다. 아무런 규칙도 없이 우발적인 갈등의 형태를 취하고 있든, 혹은 한 사회의 존속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법적으로 인정되어 있는 하나의 제도의 성격을 가장하고 있든, 어떻든 무력에 의하여 - 갈수록 완벽해지고 살인적인 위력을 더해가는 무기들에 의하여 - 상대방을 말살하고 굴복시키기를 추구하는 것이 전쟁이다.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를 그 자체로 다루고 있을 생각은 없다. 이 문제는 자주 고찰되어온 바 있고, 수많은 연구와 문헌과 도의적 판단과 활동들이 나타난 바 있다. 우리는 다만 단호히 전쟁을 규탄하신 교황들의 가르침을 상기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즉 "전쟁에 대한 전쟁"(비오 12세)과 "다시는 전쟁을 말자"(바오로 6세의 UN에서의 연설, 1965.10.4)가 그것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두 분의 규탄과 요한 23세의 Pacem in Terris 에서의 호소를 반향하고 있고 우리들 모두에게 "낡은 시대의 전쟁의 노예"가 되지 말고 "보다 인간에 합당한 방법으로 우리의 분쟁들을 해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그러나 우리가 "전쟁에 대한 전쟁"을(그리고 전쟁을 존속 또는 촉진시키고 있는 군비경쟁에 대한 전쟁을)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동시에 "죽음에 대한 전쟁"도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생명에게 살아갈 권리를 주어야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온갖 수단들을 다 취해야 할 것이다.-도대체 인간 생명이 없이(건강·성장·운동·생각·느낌·활동·사랑·출산·창의성이 없이)가능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전쟁이 죽음의 별명이라면, 생명은 평화의 별명이다.

 

(2) 낙태

 

'생명'의 문제는 논리적 심리적 윤리적 존재론적인 모든 면을 내포하고 있는 문제이다. 생명을 그 시초에서 멸시하고 위협하고 부정하고 죽인다는 것은 성인들의 생명을 멸시하고 부정하고 제거할 위험도 무릅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낙태는 찬성하면서 전쟁은 반대한다는 것은 하나의 모순이다. 또 낙태는 반대하면서 전쟁을 지지하거나 촉진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모순이다. 전쟁과 낙태를 종류가 다른 두 가지의 문제라고 구별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며 부당한 일이다. 도덕적인 단죄의 중대성에 따른 두 가지의 비중, 두 가지의 척도라는 것이 둘 중의 어느 한쪽에만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또 이들을 구분한다는 것은 아무런 효용도 없는 일이다. 전쟁이나 낙태나 둘다, 마치 살고 죽는 것이 인간의 자유로운 처리에 맡겨져 있는 권리인 양,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을 점점 더 자의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상대방 나라의 전투원들을(또 자주 비전투원들도) 죽일 권리와 자기 나라의 시민들로 하여금 생명을 잃게 할 권리와(직업적인 혹은 징집에 의한 군대) 그들에게 사람을 죽일 도의적인 의무를 부과할 권리를, 일부 인간들의 자유로운 처리에 맡기고 있다. 낙태의 자유화는, 혹은 어머니에게 혹은 아버지에게 혹은 부부에게 혹은 사회에게, 잉태되어 있는 자녀를 억압할 권리와 권한을 부여하고 있고, 또 이미 온 백성에게 그렇게 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낙태의 주장과 입법과 실천에 관련시켜서 우리는 또 한가지 지적해두어야 하겠거니와, 단종(斷種) 역시 - 그것이 남자의 단종이든 여자의 그것이든, 개인적 자발적인 것이든 아니면 특별히 집단적 강제적인 것이든을 막론하고 - 생명에 대한 매우 중대한 하나의 공격행위이다.사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하려는 이와 같은 주장들을 정당화해 보려고 여러 가지 논증들이 제시되고 있고 또 앞으로 계속 제시될 것이다. 개중에는 실로 아슬아슬한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경우들도 있다. 특히 이 양심상의 문제를 서로 대립하는 의무의 충돌로 취급하고 있는 경우가 그런 경우이거니와, 이들은 어린이의 생명과 어머니의 생명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이요, 혹은 집단적인 차원에서는 임신되어 있는 어린이에 대한 마땅한 존중과, 굶주리는 사람들의 숫자가 날로 늘어나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인구 성장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는 특정인들이 느끼고 있는 정당한 염려와의, 사이에도 갈등이 있다는 것이다.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불가피하게 '인구 문제'라는 중대한 문제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것은 1977년의 테마를 제시하는 데에만 목적이 있는 이 글로서는 너무나 방대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인간 생명에 대하여 합당한 존중을 주장해야 할 근본 이유만은, 즉 생명의 신성한 성격을 망각할 때 거기에는 하나의 멸종의 연쇄반응을 무릅쓰게 헤아릴 수 없이 큰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만은 상기해두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모험의 가공한 결과들을 경험해왔다. 첫째로, 집단적인 멸종으로서 대량학살, 종족학살, 계획적인 유대인 학살, 집단 화장터, 죽음의 포로 수용소가 있었다. 그뿐인가, 자발적으로든 강제에 의해서든 우생학(優生學)은, 일반 대중은 잘 알지도 못하는 유전적인 조작과 수정을 본인들에게 말해 주지도 아니한 채로 행하면서, 혹은 노인들을 혹은 불치의 환자들을 혹은 신체불구자나 정신장애자들을 혹은 특정한 인종, 특정한 이념, 특정한 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혹은 바라지 아니했다는 이유로 혹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된다는 이유로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아이들을 제거해버리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오늘날 주창되고 있는 구분과 동일한 바로 그 구분을, 이론가들이나 정치가들은 온갖 차별대우를 위하여 - 그 근거야 인종이나 색채나 성별이나 국적이나 계급이나 이념이나 믿음 등, 그 무엇이든 - 주창하고 있다. 생명이 존중되고 있느냐 아니면 멸시받고 있느냐 하는 것은 태아에서부터 집단학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매일반의 문제인 것이다. 끝으로, 이와 같은 생명에 대한 망각 내지 멸시 현상으로서 우리가 묵과할 수 없는 또 다른 형태들이 있으니, 그것은 나날이 신문과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의하여 공급되고 있는 실로 극약이나 다름이 없는 음식물을 받아먹고 있는, 저 테러적 공격행위와 살인적 파괴행위와 무기에 의한 폭행과 살인과 고의적인 자살들이다.

 

(3) 굶주림

 

20년 이상에 걸쳐 여론은 저개발 문제와 특별히 세계 기아 문제에 대해서 일깨워져왔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현재에 있어서는(그리고 이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기근이나 영양실조나 혹은 한발(旱魃)로 인해서 일어나는 대규모의 인간 생명의 손실에 대해서보다는 오히려 개발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측면에 대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10년 간에는 용수(用水) 문제와 생명을 보존하고 구제해야 할 물자를 낭비하는 스캔들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분명히 증명되어왔던 것이다.

 

"생명을 옹호하라" - 1977년 테마의 이 외침을 듣고, 보다 잘 사는 나라들은, 그리고 또한 국제적인 차원에서 특정한 요구조건들을 주장하고 특정한 행동 노선을 따르고 있는 나라들은, 이와 같은 마땅히 책임져야 할 태만에 대하여, 새로이 주의를 기울이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저 가난한 라자로(루가 16,20)와 관련하여 악한 부자에게 적용하신 책망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또한 평화에 대해서도 더욱 위험을 가중하게 될 것이다. 생명을 손상한다는 것은 평화를 손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인간 생명을 손상, 약화 또는 훼손하는 것들

 

공의회가 이름을 들어 지적하고 있거니와, 정식으로 인명을 살해하는 공격 행위들 이외에도, "지체절단, 육체적 또는 정신적 고문, 의지 자체를 강제하려는 시도 등 인간 개인의 완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들, 인간 이하의 생활조건, 불법감금, 유형, 노예화, 매춘, 부녀자와 연소자의 인신매매…… 노동의 악조건 등 인간 존엄성을 모독하는 온갖 것들, 이 모든 것들과 그 밖의 비슷한 것들은 실로 파렴치한 행위들이다. 이들은 인간 사회에 해독을 끼치되, 그로 인하여 손상을 받는 사람들보다도 그런 것을 실행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큰 해가 되는 행위들이다. 더구나 창조주께 대한 극도의 모독이다."(Gaudium et spes, 27항).뒤이어 곧, 바오로 6세는 "폭력, 보복, 테러리즘, 경찰고문, 마약매매, 납치……" 등 이런 사례들을 계속 보완하여 진단하고 열거하시었다. (1970년 3월 25일의 일반 회견).그러나 사뭇 특별히 강조해서 단죄하신 것은 고문이었다. "우리는 선의의 인간들로 하여금 오늘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호소해야 할 통절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 ……

 

예컨대 고문의 사례들이 그것이다. 고문은 세계의 여러 부분에 널리 만연되어 있는 하나의 전염병이라고들 운위되고 있다. …… 고문, 즉 감금자들의 입술에서 자백을 짜내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경찰 수단은 공공연히 단죄되어야 할 일이다. …… 그것은 설사 정의를 실행하고 공공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하더라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 고문은 배척되고 폐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비단 육체적인 완전성만이 아니라 인간 인격의 존엄성도 침해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정의감과 정의 체통을 격하시키는 행위이다. 그것은 달랠 길이 없고 전염성이 강한 증오와 복수의 감정을 유발하는 행위이다."(1970년 10월 21일의 일반 회견).

 

끝으로 우리는, 형사 절차와 구금 제도에 있어서 여러 나라에서 실행되고 있는, 인간 생명의 숭고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공격행위들도 우리의 양심성찰의 법정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전단적인 판결과 구금, 불법절차, 형기의 부당한 연장, 급식과 위생과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의 수감자와 그 가족들의 악조건, 무자비한 신문(訊問), 신체적인 징벌, 세뇌 등이 그런 것들이다.정신병원들과 그밖에 형태야 어떠하든 실천상의 여러 제도들이 바로 그 제도 자체의 힘에 의하여 억류자를 압박함으로써 그 억류자나 그의 추종자를 정신적으로 분열시키려고 꾀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특별히 언급해 두어야 하겠다. 우리 시대에 잔인하게도 불어나고 있는, 신체적 자유에 대한 공격 행위가 있으니, 유괴·인질·납치 사건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 위에 또 마약과 알콜과 그 밖의 물질들이 있어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 놓고 짐승이 되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이 모든 점에서 우리는 평화와 생명 존중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뚜렷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사회, 하나의 국가의 "생각하는 사람들"이 두들겨맞고 공격을 받고 심지어는 사고와 의지와 신념마저 박탈당하고 있을 때 그 사회, 그 국가가 평화로울 수가 있는가?

 

 

III. 생명을 치유하라

 

"생명 보호의 임무"(GS, 51항)라는 이 영역에 있어서 평화와 인간 생명과의 관계에 관한 1977년의 테마의 문맥 속에서, 할 말도 많이 있을 수 있겠고 해야 할 일도 많이 있다. 대부분의 현대 국가들은 하나의 보사부(保社部)를 창설해 놓았다. 질병과 싸우고 수명을 연장하고, 악조건에 있는 이들에 대하여 대책을 강구한다는 것, 또 무엇보다도 위생과 주택과 식량 사정을 끊임없이 개선해 나간다는 것,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안정과 평화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Gaudium et Spes는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26항) 오늘의 기본 필수조건들을 요약해 주고 있다.

 

 

IV. 생명을 증진하라

 

생명 증진에 관해서도 역시 같은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생명의 "책임성 있는 전달"(GS, 51항)이라는 문제에 관해서도 그렇고, "개인과 사회가 인간에 합당한 충족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갈구하고 있다 ……"(GS, 9항)고 하는 문화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도 그렇다. 이보다 나은 '삶의 질'에의 갈망 속에서, 생태학(生態學)이라는 말이 가리키고 있는 모든 것들이 매우 뚜렷이 그 형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니, 즉 인간의 자연과의 관계가 그렇고, 인간의 환경에 대한 관리가 그러하며, 인간의 육체적 및 미학적인 잠재능력의 개발이 그러하고, 소비자 사회의 단계를 넘어서 새로운 차원의 가치에로, 이기적인 쾌락이라는 이상보다는 더욱 높은 이상에로 나아가고자 하는 관심사가 그러하다.여기서도 역시 일치된 내용의 여러 가르침들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예컨대 진정한 평화로운 사회에 대한 Pacem in Terris의 탄복할 만한 정의를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 "우리는 인간 사회란 일차적으로 하나의 영적인 실재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영적이며 지적인 가치들을 직접 파악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바로 자기 생활-내적인 영의 생활과 동료들과 더불어 사는 생활-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들로써 우리의 테마는 자연적으로 바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 절정을 넘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과 은총 속으로, 오늘 그분이 세상에 가져다 주시고 있는, 어제도 그렇게 하시었고 내일도 그렇게 하실, 현세적 및 영적인 구원의 빛과 은총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V. 결론 : 신앙의 빛

 

이 문맥에서 우리는 다만 몇 가지 이정표들을 언급해 두는 데에 그치고자 한다. 좀더 풍부한 내용으로 이 "평화와 생명"이라는 테마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서는 1977년도 평화의 날에 관한 다른 예비 문헌들을 보면 성서의 인용과 이 날을 위한 기원 미사와 교회 교도권에서 선택한 텍스트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 앞에서 고찰한 바를 결론짓고 또 분명히 하기 위하여 여기에 몇 가지를 지적해 둔다.

 

(1) 하느님은 생명이시요, 삶과 죽음의 유일한 주님이시다.(지혜16,13) 성삼위(聖三位)께서 사랑 안에 공유하시는 이 생명을, 성부께서는 "낳아서 번성하라"(창세 1,28)하시는, 세계 창조의 최고의 행위로서 인간들에게 주신다. 죄에 의하여 부패된, 그러나 성자 - 생명의 말씀(1요한 1,1), 부활이요 생명(요한 11, 25), 길이요 생명(요한 15,6) - 의 속량에 의하여 구원되고 신화(神化)된 이 생명이 강물로서(요한 7,37) 빵으로서(요한 6,33) 성신 안에서 성신에 의하여(요한 3,5) 인간들에게 전달된다. 시간의 생명, 육의 생명으로(말씀이 살이 되시었다 - 요한 1,14) 시작하고 육화되는 것은 이 생명,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다. 여기서 생명의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나온다. "인간 생명은 신성하다"(Master et Magistra, AAS 53, 1961, p. 447). 하느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다함없이 샘솟아 나오는 이 생명에 대한 책임과 봉사를 주님께서 인간에게 넘겨주시고 위임하신다.

 

(2) 이렇게 대충 요약해서 되돌아봄으로써 앞에서의 고찰에서 야기되고 있던 하나의 기본적인 모순이 해결된다. 거기서는 생명이란 하나의 절대적인 가치이며 그것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인간이 생명을 파괴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라고 간주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태도에 조화될 수 있는가 :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루가 17,33) ;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친다."(요한 10, 11)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었다."(1고린 15,3) ; 그분은 "당신 피로써 우리의 죄를 씻어내어 주시었다."(묵시 1,5) 그리고 이 계시는 신약성서 전체에 전개되고 있다.자기 자신을 위해서 타인을 죽이거나 자살을 한다는 것과, 타인의 생명 즉 타인의 육체적 또는 영적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죽는다는 것, 즉 죽음을 겪는다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생명을 내어주시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형제들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버려야 한다."(1요한 3,16)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생명의 모상으로 창조된다. 그것은 이기적으로 간직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은 주어지는 데서 잃어지지 않는다. 육신의 생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미 이 지상에서 시작되어 있는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육신을 잃는다는 것은 존재를 잃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육신을 죽인다는 것도 하나의 절대적인 악은 아니다 : "육신을 죽이되 영혼을 죽일 수는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태 10,28)그러나 또 이에 못지 않게 육신의 생명은 그 기원으로 보나 그 기능으로 보나 그 중개역할로 보나 우주의 중심이자 정상으로서의 위치에 있으므로, 그것이 파괴되거나 공격을 받게 된다는 것은 예외적으로 중대한 하나의 불행 내지는 악을 구성하게 될 만큼 커다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위험이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봉사 또는 방어해야 할 이유의 존엄성·중대성·절박성뿐이다. 즉, 혹은 약한 자나 무죄한 자를 방어하거나 혹은 적대자들 사이에 개입하거나, 혹은 병자를 돌보기 위하여 치명적인 병에 걸릴 위험을 무릅쓰거나, 또 혹은 자기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순교를 받아들이거나 하는 그런 경우들이다. 자기 이웃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친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그것을 빼앗거나 훔치는 일이 아니라 도리어 하느님께 자기 생명에 대한 지배권을 되돌려 드리는 일이다. 이렇게 하여 아무런 모순도 없이 논리의 순환이 완성되는 것이다.

 

(3) 신앙의 빛은 인간 생명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부정하지 아니하도록 지켜준다. "생명은 보호되지 않으면 안된다. 생명은 온갖 축복들 중에서도 최대의 축복이다."이 긍정에서부터 우리 현대인들 중의 많은 이들이-바로 우리들 자신 가운데 많은 이들이-육신 생명이 유일한 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은 유혹을 받고 있다. 그래서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육신 생명만은 보존되고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육신 생명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생명이라고 하여, 사람들은 오늘도-2천년 전에 성 바오로께서 인용하신 고린토인들의 말을 따라-메아리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내일이면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자."(1고린 15,32) 이 작은 한마디 안에는 온갖 향락주의가, 오늘날의 온갖 물질주의가, 온갖 소비자 사회의 철학이 다 포함되어 있다. 온갖 형태의 말사스론 역시 여기서 나온다-국가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그렇고, 비단 산아조절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보다 잘 사는 사람들의 특권을 보장하려고 꾀하고 있는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정책들과 관련해서도 그렇다. "많이 가지기 위하여 적어지자"하는 것이 그들의 모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연의 복음의 빛은 생명을 구원해 준다. 생명을 자기우상화로부터 육체의 숭배로부터 보호해 준다. 즉 복음의 빛으로 구원받은 생명은 산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봉사한다는 것을, 위험과 누명을 무릅쓰고라도 타인이나 사회에 봉사한다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육체적 죽음에 의지할 때, 오늘의 인간은 그의 부(富)라는 제약에서 해방된다. 생명을 희생하는 그 곳에서 만큼 생명이 신성하게 보이는 곳이란 없다.

 

(4) 신앙의 빛은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난제를 해결해 주고 있으니, 그것은 '생명의 대가'라는 것에서 야기되는, 즉 도덕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목적인 영역에서, 특별히 전쟁과 낙태라는 두 가지의 큰 문제와 관련해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온 세계가 쉴새없이 변화와 발전을 하고 있는 그 속에서, 어떻게 해야 교회가 요구하고 있는 그 정도에까지 생명을 존중할 수가 있는 것일까? 어떻게 그것을 증거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그것을 지지할 수가 있을까? 그처럼 많은 사람들과 그처럼 많은 비그리스도교적인 - 또 자주는 비인간적이기도 한 - 요인들이 관련되어 있는 상황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하느님의 계명의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즉 '객관적'인 성격과 조화시킬 수가 있으며, 어떻게 이러한 계명을 교회가 우리에게 강력히 촉구하고있는 대로(낙태에 대한 시민적 반대투쟁 등) 직접 적용할 수가 있을까? 여기서 다시 한번 신앙의 반성과 교회의 경험은 하나의 해결을 향하여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우선 첫째로 객관(도덕법)과 주관(양심)과의 대립 내지 긴장에 대하여 보자. 홀로 주님께서만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수 있는 것인 각자의 인간 성숙의 진로들이야 어떠한 것이든 간에, 필경 객관적으로 더 이상 빠져들어가서는 안될 하한선이 존재하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윤리적인 가치들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조건이 된다는 것을 긍정하는 도덕법의 역할인 것이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하는 하느님의 법이 언제 적용될 수 있느냐 하는 '시기'에 관한 한, 그것을 현재화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이 다 동원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씩 조금씩 지반(地盤)을 획득해 나감으로써 현재화될 수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에 대한 충실성의 이 조그만 지반들이 모두 하나로 연결될 때는 언제일까? 언제 하나의 연속된 영토를 이루게 될까? 공의회와 교황단이 간단없이 요구하고 있는 대로 전쟁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합법적인 수단 - 또는 사법적인 수단 - 이기를 그치게 될 날은 언제일까? 낙태를 실천하고 옹호하는 자들은 언제 사라지게 될까? 오직 하느님만이 아신다. 한편 그리스도교인들은 역사와 시간의 그리스도교적 이해 안에서 위로도 희망도 발견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말이 동시에 적용되는 영생의 나라에 살고 있다-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들 가운데"(루가 17,21)있고, 아직 우리들의 시간 안에 완전히 실현되어 있지는 아니하다. 이 나라를 건설하는 일은 점차적이요 기복적이며 예견할 수 없는 일이다. "보다 인간에 합당한 생활방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일에 여론이 굼뜨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조금도 없다. 또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체념하고 말 필요는 조금도 없다. 실망과 체념도 금물이요 초조와 속단도 안될 일이다. 생명과 평화의 분야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교인의 활동은, 그의 존재의 다른 모든 영역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겸손에도 희망에도 모두 충실한 이 노선을 따르고 있는 것이

다. (정한교 역)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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