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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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2-14 ㅣ No.201

사랑의 과업은 분명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느님의 육화사건이

그분의 인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면

수난의 예수 그 모습(이사 53,2-9; 시편 22,6-17 등등)은

그 크신 사랑의 대가였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 육화사건의 완결이요 완성이었다.

그분은 말만의 사랑이 아닌

철저한 자기희생의 대가를 치른

참 사랑을 드러내셨다.

마치 더러운 곳을 치우려면

자기 몸에 먼지를 뒤집어쓰는 것쯤이야 감수해야 하듯,

또는 불 속에 갇힌 자를 구하려면

불 속으로 들어가 불길의 뜨거움을 감수해야 하듯,

또는 물에 빠진 자를 구하려면

물 속으로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듯이 말이다.

그렇다.

’감수(甘受)’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와 하나 되며

그를 고통에서 구해 내려면

그의 고통을 함께 받는 걸 감수해야 한다.

고통받는 인간을 구원키 위해

그분이 몸소 고통의 인간이 되시어

그 고통을 감수하시고

더 나아가 인간고통의 끝인 죽음을 맛보셨듯이

사랑하려면 그에 따르는 자기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직도 채워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아직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의 과업이 남아 있다는 뜻이 된다.

즉 감수해야 할 고통의 양은

바로 모자라는 사랑의 양을 나타내 주고 있다.

진정 고통은 사랑에 대한 갈구이다.

달리 말해 그만큼 사랑이 미흡하고 요구되기에

아니 고통을 감수하는 삶이 그만큼 찾아볼 수 없기에

이 세상은 고해(苦海)인 것이다.

그렇게 상처받은 치유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와

그분의 제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솔선하여

세상의 고통을 사랑으로 감수하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 갈 때

하느님 나라는 그만큼 가까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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