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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가톨릭 윤리신학의 안락사 이해와 불필요한 치료행위의 중단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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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7 ㅣ No.390

가톨릭 윤리신학의 안락사 이해와 불필요한 치료행위의 중단에 관한 고찰

 

 

머리글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생명윤리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에게 당신의 생명을 불어넣어 살아 움직이게 만드신 하느님이 위치한다. 곧 인간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생명을 선물로 나누어 받은 인간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생명을 처분할 수 있는 어떠한 권한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은 언제나 신성한 것이며, 따라서 무죄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예외 없이, 그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일이며, 또한 극도의 중죄를 범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의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거나 자살하는 일도 살인과 마찬가지로 부당한 일이며, 하느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로 간주된다.

 

이 논문을 통해 필자가 다루려고 하는 안락사 역시 가톨릭 교회의 신학에서는 엄격한 의미에서 고의로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는 행위로서의 안락 살해로 이해되기 때문에 인간 생명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가진 하느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일이며, 따라서 어떠한 경우라도 수용될 수 없다는 입장을 명백히 한다. 인간 생명의 고귀함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자신은 그 고귀함을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의 안락사에 대한 이러한 기본 시각은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만성적 질환이나 말기 질환의 환자들이 겪는 심각한 고통 앞에서 상당한 도전을 받고 있다. 인간적인 품위를 누리며 살아야만 하는 인간적 삶에 대한 당연한 요청과 고통이 서로 만나면서 과연 어떠한 선택이 인간적 품위를 위한 올바른 선택인가의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되기도 하며, 안락사가 오히려 죽음을 앞둔 고통 받는 환자의 인간적 품위를 보호한다는 주장까지도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주장의 상황에서 ‘안락사’라는 단어는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말기 환자가 단순히 생명 연장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생명 연장 장치의 제거까지도 안락사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단순히 죽음의 시간만을 연장시키는 불필요한 치료의 중지로서의 생명 연장 장치의 철회를 안락사라고 정의하지는 않듯이 안락사 개념의 사용에 있어서 매우 협의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안락사의 이러한 개념적 차이에 따르는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본고를 통하여 안락사의 정확한 개념 이해와 함께 가톨릭 교회의 신학은 안락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고, 나아가 안락사의 주제에서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말기 환자에 대한 불필요한 치료 중지에 대한 윤리적 정당성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곧 불필요한 치료 행위의 중지가 안락사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의 윤리적 정당성의 문제에 관해서이다.

 

 

1. 안락사(安樂死) 개념 이해

 

안락사의 본래 개념은 '편안한 죽음' 혹은 '행복한 죽음'이다. 어원으로 말하자면 고대로부터 유래된 안락사라는 말은 심한 고통이 없는 편안한 죽음을 의미하지만 오늘날에 와서 그 개념은 노령이나 어떤 신체적인 장애 혹은 불치의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의도적인 죽음으로 이해되면서 안락사라는 말은 질병의 고통을 없애려는 일종의 의학적 개입과 함께 이해되는 개념이 되어 버렸다. 결국 이 개념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한 ‘안락살해’와 동일한 의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안락사에 대한 어떤 사회 분석은 생물학적 생명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서 의식이 없는 경우나, 또는 불치이면서 인내하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으로 사회 생활이 의미 없고 불가능하게 되면서 삶의 의미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절망적인 경우에, 혹은 어떤 신체적 결핍 때문에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면서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자격이 상실된 경우에는 스스로 죽음을 앞당기더라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합리주의적 사상이 발단이 되어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결론 내리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날 이해되는 안락사의 개념은 이전과는 달리 “인간 생명이 불가역적인 죽음의 방향에서 인식되었을 때 합리주의적인 발상에 의해 이를 인위적으로 단축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 행위”라는 안락사의 정의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 의미에서의 안락사는 통상적으로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물리적 혹은 화학적 방법으로 직접 죽음을 초래케 하는 것이고, 후자는 환자에게는 누구에게나 통상적으로 시행되어야 하는 일반 주지(周知)의 의료 행위를 중지함으로써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소극적인 방법이다.

 

1.1. 적극적 안락사

 

자비적 안락사(Beneficient Euthanasia)라고도 불리는 적극적 안락사는 “영구 불치이며 합리적인 진통 방법이 없는 육체적 고통을 지닌 환자를 그 고통에서 구하기 위하여, 그 생명체의 죽음을 자의적 혹은 수용적으로 종결짓는 행위”로 정의된다. 적극적 안락사는 환자의 명백한 간청에 의해서 환자의 고통 시간을 단축시킬 목적으로 의사가 치사량의 극약을 투여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것은 불치의 암이나 다른 악성 질환들 또는 신체 장애 등으로 인하여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죽음 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죽음을 통하여 고통을 제거해 주는 것이 그 환자에게는 자비로운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안락사는 환자의 고통이 심하거나 환자가 회복될 수 없는 혼수 상태에 빠져 있고, 고통을 진정시킬 약을 사용하는 것 외에 어떤 치료 방법도 없을 때, 그 고통과 비참함을 종식시켜 주는 것이 의사의 도리이며, 또한 그러한 행위가 그 환자의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랑, 우정, 사회화 등과 같은 수많은 가치를 구현시켜주는 선결조건이 될 때에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정당한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네덜란드에서는 작년 11월 국회의 하원에서 압도적인 표결로 안락사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적극적 안락사를 합법화한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하원이 의결한 새 법안은 1) 대상자가 불치의 환자이어야 하고, 2) 환자의 고통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하며, 3) 환자가 이성적인 판단으로 안락사에 동의한다는 조건으로 의사가 환자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적극적 안락사에 대한 지지는 많은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적극적인 안락사를 지지하는 국가나 학자들이 점차로 증가하고 있는 실태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 안락사를 지지하는 주장들이 단순히 공리주의적이고 편의주의적 발상에 기초하기 때문에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적극적 안락사를 반대하는 의견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불치병을 진단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심지어는 환자가 죽고 사체를 해부한 후에야 정확한 진단이 나오는 때가 종종 있다. 많은 경우에서 그 병의 진단과 예후가 명확하게 판명되지 않을 때가 얼마든지 있다. 또 의학적으로 절망이라고 선고받은 환자들 중에 지금까지 양호한 건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예가 드물지 않다. 2) 육체적 고통의 제한에 대해 현대 의학적으로 제거되지 않는 고통이란 거의 없다고 본다. 의학의 눈부신 발달과 진통제와 마취제의 개발로 심한 부작용이 없이 통증을 경감시켜 줄 수 있는 약재는 허다하며, 극심한 통증에는 전신마취를 시키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3) 환자의 명확한 청원과 승낙이라는 측면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공포와 심한 육체적 고통에 따라오는 환자의 정신 상태는 결코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하는 말은 신빙성이 없다.

 

1.2. 소극적 안락사

 

의학계에서는 존엄적 안락사(Euthanasia with Dignity)의 의미로도 사용하는 소극적 안락사는 말기 환자에게 적극적인 치료 행위를 중지함으로써 초래되는 죽음을 의미하는데, 이 경우는 환자의 죽음이 확실히 예상될 때 단지 더 이상 치료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죽도록 그대로 방치해 둔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한다.

 

현대의 의학 기술은 과거와는 달리 비록 환자의 의식이 없는 가운데서도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게 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인공 호흡 장치와 심폐기능 장치 등의 최신 기계의 도움으로 수년간 생명을 유지하는 식물 인간까지도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생명의 연장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소극적 안락사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다음에 열거되는 몇 가지 조건들은 소극적 안락사 행위의 정당성을 떠받치는 조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

 

1) 인간에 대한 존엄성의 강조이다. 곧 인간은 이 지상에서 특별한 존재로서 다른 존재와는 달리 단순히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자유 의지와 이성을 지닌 인격체로서 자기의 생존 또는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유로이 자기 나름대로의 생존 방법을 택할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인간 생명은 단지 생명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삶을 실현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고 존중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능력이 없고 인격을 지니지 않은 단순한 생물학적 생명만을 지닌 식물 인간과 같은 존재라면 비록 외형을 지녔으나 특별한 가치가 없고, 인간적인 존엄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2)‘죽을 권리’에 관한 문제이다. 인간 존엄성의 핵심은 자유로운 자기 결정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존재하는 한, 즉 인격이 존재하는 한, 살 자유와 살 권리가 있고 또한 죽을 권리가 있다. 이 때문에 무의미한 생물학적 생명만을 연장시키는 의료 행위에 대해 거부할 자유도 있다.

 

3)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뇌사설에 의해 인공 소생술과 인공심폐장치의 사용으로 심장과 호흡이 인공적으로 유지된다고 해도 뇌의 전 기능이 불가역적으로 소실된 것이 확인되면 죽음으로 단정되어야 한다.

 

치료의 행위를 거부하거나 이미 시작된 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의 정당성은 일상 치료 수단을 사용할 도덕적인 의무는 언제나 있으며, 또한 특수한 치료 수단의 사용은 거부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인격적인 삶의 실현을 단순히 정신적인 삶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데에 오류의 위험이 있으며, 또한 인간의 삶과 죽음이 인간의 자유로운 자기 결정에 맡겨져 있다고 할 때 언제든지 윤리적 상대주의의 오류에 빠질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안락사의 의미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수단만 다르지 내용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안락사를 시인하는 것은 환자의 치료를 그 소명으로 삼고 있는 의사의 임무와 모순되고, 이는 결국 의사에 대한 환자의 신뢰를 떨어뜨리게 된다는 점, 그리고 오진의 가능성이나 생명을 연장시키는 동안 새 치료법이 발견될 가능성도 소극적 안락사까지도 반대하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1.3. 가톨릭 교회의 안락사 이해

 

가톨릭 교회는 기본적으로 인간 생명의 가치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무후한 인간 존재로서, 태아이든 유아(乳兒)이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노인이든,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든 죽어가는 사람이든 결코 인간의 살해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확고히 천명하는 가운데,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안락사”라는 말의 부정확한 사용으로 말미암아 “안락사에 관한 논쟁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하고”있음을 지적하고 “이 점을 분명히 불식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안락사라는 용어 사용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가리키는 의미가 적어도 가톨릭의 환경에서는 절대로 내포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1) 병환의 마지막 단계를 견뎌내기 덜 어렵게 만들어 주는 마지막 배려를 포함하는 행위들(수분공급, 간호, 마사지, 보편적 투약, 환자와의 대화 등).

 

2) 환자의 조건으로 보아 이미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특정한 의료 행위를 그만두기로 하는 결정 (전통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특수 치료를 포기하는 결정’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것은 환자로 하여금 죽도록 내버려두기로 결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려와 분별에 근거한 합리적인 과정에 따라 적절하게 기술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3) 환자의 생명을 단축할 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으나마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켜주기 위하여 취하는 행위. 이러한 성격의 행위는 의사의 사명에 속하는 행위이다. 비단 질병을 치료하거나 생명을 연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 훨씬 더 일반적으로 - 환자를 돌보아 주고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것도 의사의 소명이다.

 

가톨릭 교회의 이러한 안락사 이해는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라는 모호한 개념이 위의 경우에도 해당될 수 있는 품위있는 인간적 죽음 내지는 존엄사(Death of Dignity)로까지 오해될 여지가 크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나온 것으로 사료된다. 가톨릭 교회는 ‘안락사’라는 말은 “특수한 행위를 함으로써, 혹은 의당 환자에게 베풀어야 할 치료행위를 중지함으로써 환자의 생명을 끝내게 하는 것”이라는 뜻만으로 사용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안락사는 그것이 적극적인 의미에서이든 소극적인 의미에서이든 결코 용인될 수 없는 행위임을 확고하게 가르친다.

 

 

2. 치료받을 권리와 치료의 중단

 

2.1. 치료받을 권리와 인간적 죽음

 

안락사의 문제는 결국 어떠한 죽음이 품위 있는 죽음이며, 또한 인간적 죽음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죽음을 기다리는 말기 환자가 겪는 고통이 환자 자신의 인간적 품위를 떨어뜨리고, 그러한 고통 중에 맞게 되는 죽음이 지극히 비인간적이기 때문에 그 고통을 없이함으로써 품위를 지키게 하고, 인간적 죽음을 맞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자명하다. 그렇지만 그 고통을 없애는 방법이 곧 안락사라는 의견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인간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죽음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존재이며, 또한 ‘죽음’ 속에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실존 앞에서 인간은‘인격적 존재’로서 불리움을 받았으며, 양심과 자유, 책임감이라는 인간됨의 조건을 실현해 나가면서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사는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적 품위를 지니고 죽는다는 것은 인간 존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거절할 수 없는 요소이며, 이는 곧 인간 생명 전체를 요약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책임성을 갖춘 자유와 의식을 통해서 받아들여져야 하며, 나아가 각자의 고유한 삶을 통해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이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는 죽음이어야 하며, 죽음에 대해 순응하면서 살아가기를 요구받는 일종의 신앙 행위로까지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비록 죽음을 눈앞에 둔 말기환자일지라도 정상적인 치료를 받을 권리가 생겨나는 것이며, 이 치료 과정 역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고유한 인간적 영역을 도와주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죽어가는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인간적인 품위를 지니고 죽을 수 있도록 도와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앙교리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건강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고 다른 사람의 간호를 요구할 의무가 있다. 병자를 돌볼 임무를 지닌 사람들은 양심적으로 간호해야 하며 필요하고 유용한 의약을 투여해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가능한 모든 의약을 사용할 의무는 없다.”

 

곧 환자는 건강에 도움을 받기 위하여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항상 자신의 건강 유지에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으뜸의 권리를 가지므로 적합한 의료적 도움을 받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권리에 속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고통 중에 있는 말기 환자에 대한 의료적 도움의 핵심적 목표는 고통의 경감이다. 이는 곧 극심한 고통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극단적 결정을 피할 수 있도록 돕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기도 하며, 말기 환자가 의식을 가지고 죽음을 맞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위대한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 행위를 윤리성을 평가할 수 있는 행위와 윤리성이 평가될 수 없는 행위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곧 윤리성을 평가할 수 있는 행위에만 선과 악이라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며, 이 가치 평가에 따라 인간 행위에 대한 윤리성을 평가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인간 행위를 인간적 행위(Actus humanus)라고 칭하였으며, 인간의 행위는 이 인간적 행위일 때에만 윤리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고통 중에 있는 말기 환자에게 있어서 현재 그 환자가 겪고 있는 엄청난 고통이 그 환자로 하여금 정상적인 사고 행위를 가로막고 인간적인 자유 의지를 빼앗아 버림으로써 인간적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 있는 환자가 인간적인 품위를 되찾고, 인간다운 정상적인 의식으로 되돌아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일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2.2. 불필요한 치료 행위의 중단

 

이제 말기 환자의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해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불필요한 치료행위의 중단 문제이다. 곧 동원할 수 있는 치료 수단을 모두 사용한 다음에 의사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 와 있다고 할 때 오로지 죽음의 시간만을 연장시키는 의료 집착적 행위에 대한 윤리적 평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 윤리신학이 말기 환자의 치료 중단의 문제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은 비오 12세가 1957년에 의사들과의 담화에서 언급한 내용에 그 기초를 둔다. 비오 12세는 이 담화에서 말기 환자에게 정상적인 간호 행위라든가 영양 공급 등 일반적인 치료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적이지만, 특수한 수단의 사용은 비록 정당하기는 하지만 항상 의무는 아니라고 가르친다. 비오 12세의 이러한 언급은 일반적인 치료 수단에 의한 통상적 방법(Ordinary means)과 특수한 치료 방법에 의한 예외적 방법(Extraordinary means)의 구분이며, 신학자들은 적용할 윤리적 의무가 없는 방법에다 “예외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비오 12세의 이러한 개념 구분은 1995년에 교황청 보건사목 평의회가 반포한 “의료인 헌장”에서는 균형적 방법과 불균형적 방법으로 언급되고 있다. 곧 보건사목 평의회가 제시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환자의 상태를 고려하여, 그와 같은 치료 방법들을 사용할 때에 사용된 수단과 의도한 목적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존재할 때에 균형적이라고 판단하며, 균형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는 불균형적이라고 간주한다.”

 

이 두 가지 개념의 구분, 즉 통상적 혹은 균형적 방법 그리고 예외적 혹은 불균형적 방법의 구분에서 가톨릭 윤리신학은 후자의 방법으로서의 치료 방법을 중단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그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먼저 이 기준들은 각기 구체적인 경우에 따라서 적용되어야 한다. 그 중의 일부는 객관적 기준이다 : 예컨대 주어진 요법의 관용이 얼마나 되느냐, 그런 요법을 이용하는 것이 적당하냐, 그런 요법을 이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정의의 대안은 무엇이냐 등, 요법의 본성에 관한 것들이다. 또 다른 기준은 주관적 기준이다. 예컨대 어떤 환자에게는 심리적 충격이나 불안이나 불편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다. 치료방법을 결정할 때에 어느 정도로까지 그 수단을 사용하고 그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적정한가를 확정한다는 것은 언제나 문제가 된다.

 

모든 판단기준 중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할 것은 치료에 의하여 건져지고 살아나가게 될 생명의 성질이다. 가톨릭 의사협회의 국제연맹총회에 보낸 빌로 추기경의 서한은 이 문제에 관하여 매우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의사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동시에 의사에게는 죽음과 싸우기 위하여 자기 의술의 모든 수단을 다 이용할 의무가 있다는 것은 생명의 신성성에서 연유한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사에게 과학의 끊임없는 창의적 활동에 의하여 주어지고 있는 생명유지 기술을 모두 사용할 의무가 지워져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불치병의 마지막 단계 동안에 식물적 생명을 거듭 되살릴 의무가 부과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무용한 하나의 고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생명의 성질이라는 기준은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관적인 고려사항들을 참작해서 무슨 치료를 시행하고 무슨 치료를 시행하지 않을 지에 관해서 적절하게 신중히 판단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기본요점은 가족에게 어떠한 결과가 미치게 될 것인가를 포함하여 다양한 상황의 여러 측면들을 충분히 고려한 합리적인 근거에 따라서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따라야 할 원칙은 예외적 치료를 실시할 윤리적 의무가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의사는 환자가 그런 요법을 거부할 경우에 환자의 소망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이른바 ‘최소한’이라고 부르는 그런 치료수단을 적용할 의무는 언제나 엄격히 남아있다. 즉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정상적이며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그런 수단(영양공급, 수혈, 주사 등)은 언제나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최소한의 처치마저 중단해 버린다는 것은 사실상 환자의 생명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울러, 교회는 이러한 일반 원칙의 적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다음의 설명을 추가한다.

 

1) 여타의 충분한 치료법이 없다면 그러한 수단이 아직 실험 단계에 있고 어떤 위험이 없지 않다 하더라도, 가장 진보된 의학기술에 의하여 제공된 수단들을, 환자의 동의 하에 사용하는 것은 허용된다. 그 수단들을 받아들일 때, 환자는 인간성에 대한 봉사 안에서 아량까지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2) 또한 그 결과가 기대에 너무 미치지 못할 때, 환자의 동의 하에 그러한 수단들을 중단하는 것은 허용된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 방면에 특히 유능한 의사들의 조언은 물론, 환자와 환자 가족들의 온당한 소망을 참작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전문의사들은 설비 및 인적 투자가, 예상되는 결과에 비해 균형을 잃느냐는 문제를 판단할 수 있고, 적용되는 기술이 그러한 시술에서 환자가 가질 수 있는 이해에 상반되는 고통이나 노고를 환자에게 강요하느냐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

 

3) 또한 의학이 제공할 수 있는 정상적인 수단으로 대용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위험을 수반하는 난사(難事)만 될 뿐인 기용(旣用)의 기술에 의지해야 할 의무를 어느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거부는 자살과 같지 않다; 그와는 반대로, 인간조건의 수용으로서 간주되어야 하며, 기대할 수 있는 결과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의학적 가료를 회피하려는 원의나 가족 혹은 공동체에 과도한 부담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원의로 간주되어야 한다.

 

4) 사용되는 수단에도 불구하고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임박할 때,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운 생명의 연장만을 가져다주는 치료법을 거부할 수 있는 결정은 양심 안에서 허용된다. 단, 유사한 병증의 환자에게 요구되는 정상적인 간호는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위험 중에 있는 사람을 돕지 못한 일로 의사가 자책할 이유는 없다.

 

말기 환자에 대한 불필요한 치료 행위의 중단을 윤리적으로 정당화 할 수 있는 이러한 원칙들의 적용은 또 다른 측면에서 소위 ‘의료 집착’ 행위의 포기라는 차원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디오니지 테타만치 대주교는 ‘의료집착’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의료 집착 행위라는 표현은 반드시 치료의 무용성 혹은 무익성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곧 회복 불가능한 환자의 경우이며, 이 경우 의료 집착은 이미 치료를 위한 행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마지막 고통이라는 상황에 있으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환자의 고통 혹은 중병증(重病症)의 기준에서 볼 때 의료 집착이라는 용어는 병 자체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는 환자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를 ‘의료 폭력’이라고까지 비난하기도 한다. 셋째, 사용되는 수단의 예외성 때문에 의료 집착 행위라고 정의될 수도 있다. 이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외적 방법’ 혹은 ‘불공평한 방법’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예외성이 환자에게는 결국 유익하지 못한 결과로 드러나기 때문에 의료집착 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료 집착이 어떤 것인지를 정의했고, 이제 요구되는 것은 이러한 행위를 포기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의 적용 문제이다. 그러나 사실상 어떠한 의료행위가 어느 때 가장 유익하고 또 어느 때 무익한가에 대해 결정하는 것과 또한 의료 행위가 언제부터 의료 집착이라고 정의되는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단지 이러한 어려운 결정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환자의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의 ‘지식과 양심’이 될 것이다. 의사는 그 결정에 있어서 전문적이고도 정확한 지식과 인간적인 지혜를 따라야 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진단이나 의학적 판단에 있어서 실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는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환자에게 무익하고 고통을 줄 수 있는 수단들을 일시 중지하는 임의적 결정이 반드시 환자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의사는 환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은 항상 환자의 생명을 돌보고 이를 위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소명을 받았다는 점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만 의사들은 자신들이 돌보는 환자들 중에는 완치될 수 없는 환자들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완치될 수 없는 환자가 곧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환자라는 뜻은 아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과학적이고 의료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환자에게 정신적이고 인간적인 동참과 현존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도 되어야 하는 것이며, 따라서 의사는 “이제 더 이상 시도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절망을 선고받은 환자에게 더욱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마치는 글

 

안락사 논쟁에 관한 문제의 핵심은 인간적 죽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안락사를 주장하는 측이나 안락사를 반대하는 측이 주장하는 내용의 근거는 모두 인간적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극심한 고통이 인간적인 품위를 방해하기 때문에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 선택권을 환자가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안락사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이라면 비록 극심한 고통이 있더라도 환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자신의 실존적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면서 온전한 자유와 책임감을 함께 갖춘 온전한 의식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인간적 죽음이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니고 죽는 죽음이라는 것이 안락사를 반대하는 측의 주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적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피할 수 없는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고 따라서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존재이며, 그 죽음 속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이란 사건 앞에서 어떠한 모습이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며, 품위를 갖춘 인간적 행위일 수 있겠는가? 인간적 품위를 갖춘 죽음이 곧 외적으로 깨끗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요약하면서 온전한 자유와 책임감을 가지고 평화로움과 용기를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더 인간적이고 더 품위있는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고통 중에 있는 말기 환자의 인간적 품위를 갖춘 죽음을 도와주는 한 방법이 온전한 의식과 자유 그리고 책임감을 갖출 수 있도록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일일 것이다. 고통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고 정상적인 판단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안락사 시키는 방법 외에 얼마든지 자유로운 의식과 올바른 판단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불필요한 치료 행위의 중단 문제도 말기 환자의 인간적 품위를 지닌 죽음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단순히 죽음의 시간만을 연장시키기 위한 치료 행위라면 그것은 치료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환자에게 가해지는 고문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 행위 자체는 인간적이라기보다는 비인간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최소한이라고 부르는 통상적인 치료 수단의 사용은 항상 의무로 남아있다는 것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의사의 전문적인 지식과 올바른 양심의 판단이다. 여러 문제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있다 하더라도 그 기준의 적용은 언제나 전문 의료인의 주관적 판단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지식과 양심’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이동익 신부(가톨릭대학교 윤리신학)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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