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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생명] 인간 배자 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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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6 ㅣ No.312

인간 배자 복제?

 

 

새로운 도약의 길

 

"새로운 도약의 길"이라는 주제와 "전통 기술과 현대 과학의 조화",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라는 부제로 93일 간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에서 열렸던 '대전 세계 박람회'가 지난 11월 7일 막을 내렸다. 전국민의 1/3인 1천 4백만 5천 8백 8명(조직위 최종 집계)이 관람한 대전세계 박람회는 103개 국 33개 국제 기구가 참가함으로써 역대 전문 박람회로는 최대를 기록하였다. 어린이들에게는 꿈의 잔치였으며, 국민들에게는 과학의 중요성과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과학 교육의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질서 의식을 고양시킨 좋은 기회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인력 활용이나 컴퓨터를 통한 시설 관리 면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0년 이상 앞당긴 대전시의 발전은 지역 발전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미숙한 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이에 따른 비판적 시각이 존재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 관람객들을 지치고 짜증나게 만들었던 전시관 운영의 비효율성은 박람회 시설의 재활용 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기술보다는 외국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외화를 낭비한 것뿐만이 아니라 국내 기술을 발전시킬 기회를 뒤로 미룬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흥미 위주의 영상물 중심으로 전시관을 운영함으로써 관람객들이 과학 기술 발전의 참된 면을 소홀히 취급하도록 한 것도 반성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쉽게 지나쳐 버리고 간과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바로 과학의 목적과 과학의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 교육이다. 대전세계박람회가 어린이들에게, 학생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을 심어 주었고, 국민들에게 과학을 쉽고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접근시켰다는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것이 바로 인간이며, 인간이 그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면에서 교황청의 대전세계박람회 참가의 커다란 의의를 재발견할 수 있다. "전세계적인 문화 현장에 보편 교회는 물론 지역 교회의 현존도 반드시 드러나야 할 것"이라는 일반론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참된 과학 기술 발전의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를 제대로 보여 주고 가르쳐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측면에서도 대전세계박람회에의 교황청 참가는 충분한 현존의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인류의 삶과 그 문화 속에 현존하는 교회의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올바로 보여 주어, 과학 기술의 인간화와 문화의 복음화를 모색하고자 함이 참가 목적이었듯이 "인류의 빛"(Lumen Gentium)이라는 주제 아래,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Pro Mundi Vita), "친교와 진보를 위하여"(Pro Communione et Progressione)를 부제로 삼은 바티칸관은 인류 문화와 과학의 발전에 이바지해 온 가톨릭 교회의 공헌을 비롯하여 근대 과학과 함께 이 땅에 들어온 신앙, 그리고 과학 기술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밝혀 주고자 했던 것이다.

 

 

과학과 신앙의 관계

 

과학은 "구체적인 사상(事象)과 그것을 통일하는 보편적인 법칙에 관하여 객관적인 진리를 인식하고, 또 그것을 응용하는 체계적인 학문으로 대상 영역에 따라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새 우리말 큰 사전, 삼성출판사, 1987) 것으로 좁은 의미로는 자연 과학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며, 자연 과학은 "자연에 딸리는 여러 대상을 다루어 그 법칙성을 밝히는 학문"(상동)이다. 이에 비해 신앙은 "종교 생활의 의식적인 측면, 곧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 사랑, 의뢰심을 갖는 일"(상동)이라고 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과학과 신앙은 그 대상이나 추구 방법에 있어서 전혀 별개의 것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과학의 대상이 자연 현상이나 사실의 문제라면 신앙의 대상은 초자연적인 것이며, 그 방법에 있어서도 과학이 실증적이고 객관적이라면, 신앙에 있어서는 초월적이고 어느 정도의 주관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과학이 신앙의 대상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거나 신앙이 과학의 대상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은 과학이 연구하고 서술하는 대상의 배후에 있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표와 행동 기준 및 그에 따르는 가치 판단의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불가분의 것으로 이끈다. 따라서 과학이 신앙의 문제까지도 대체하려는 시도나 신앙이 과학의 방법과 목적을 지배하려는 시도들은 배제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적 자연관과 신학적 자연관 간의 갈등은 피할 수 없게 되며 이것은 결국 과학과 종교의 첨예한 대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김현태, 과학과 종교·그 문제점과 해결책, [과학과 신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44면 참조).

 

우리는 그 대립의 여러 가지 현상을 알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1633년의 갈릴레오 사건을 비롯하여, 지동설을 주장한 부르노의 화형 사건 등 그 영역과 대상의 고유함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례들이 있었다.

 

우리는 지난 1992년 10월 31일, 교황청 과학원 총회를 마치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언급한 내용들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교회의 가르침은 진리에 부합되어야 함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앙의 진리에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과학적 자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또한 지식에는 계시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과 이성 스스로의 능력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의 두 영역이 있는데, 특히 철학과 경험 과학은 두 번째 영역에 속합니다. 이 두 영역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으며 서로 만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각 영역의 고유한 방법론들은 실재의 서로 다른 측면들을 드러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신앙의 진리에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과학적 자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알아야"한다.

 

뿐만 아니라 과학에 종사하는 학자들과 연구자들도 과학의 목적과 그 궁극적인 가치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 할 것이다. 신앙이 과학이 탐구하고 추구하는 대상의 가치와 존재 목적을 제시하고 그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과학은 그 대상이 지니고 있는 존재 의의와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고, 이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은 그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사목 헌장]은 "과학과 기술은 그 고유한 방법으로써 사물의 본질을 깊이 파고들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도 이런 학문의 연구 방법을 진리 발견의 최고 법칙이라고 여길 때, 현대의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현상론과 불가지론을 조장하게 된다. 더구나 현대의 발명을 과신한 나머지 인간은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기며, 더 높은 것을 찾지 않게 될 위험도 있다."(57항) 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과학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인류는 두 가지 발달 유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문화 과학적 탐구와 기술에 관련되는 것인데, … 인간과 창조의 수평적 차원에 속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두 번째 발달 유형은 인간이 세계와 자신을 초월하면서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분께로 돌아올 때, 인간 존재 안에서 발견되는 가장 심원한 것에 관한 것입니다.… 수평과 수직의 두 가지 발달 유형 안에서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서 그리고 지혜의 존재로서 스스로를 완전하게 실현시키게 됩니다. … 이 두 가지 발달을 의식하고 신중하게 고려하는 과학자는 조화의 회복을 위해 기여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과학자들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계에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라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 배자 복제 실험 성공의 문제

 

그러나 과학 기술의 연구는 알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해 왔고, 어떤 면에서 순수 과학적 측면을 지나치게 중시함으로써 과학 기술의 인간화와는 다른 길을 걸어오기도 하였다. 좀더 많이, 좀더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한 과학의 발전은 분자 물리학과 유전 공학 기술의 새로운 발견과 함께 이제 생명의 신비에 대한 접근까지도 용이하게 하였고, 이러한 발견의 성과는 인간의 질병과 식량, 환경,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주 귀중한 것이 되었다. 실제로 유전 공학의 실험은 동물과 기타 농산물의 개량, 병충해의 방지, 환경 보호를 위한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따라서 그러한 기술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생명 공학 내지 유전 공학의 발전에 대해 교회가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기술의 반인류적, 반생명적 활용 때문이다.

 

지난 10월 24일 [뉴욕 타임즈]는 10월 13일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수정란학회에서 조지 워싱턴 대학의 메디컬 센터 연구팀이 인간 배자를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고한 내용을 보도하였다. 이 소식은 국내의 종합지들도 일제히 박스 기사로 처리하여 그 윤리적 문제점과 더불어 로마 교황청 기관지인 [로쎄르바또레 로마노] 지의 비난 기사까지도 게재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개최한 '의료와 형법' 세미나(10월 29일,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인하대학교의 정영민 교수가 "배자 보호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는 기사가 게재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전 공학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다. 배자 복제 기술은 이미 1959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타코우스키가 생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성공하였고, 가축에 적용해 오던 기술이기에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1989년 건국대학교 동물자원연구센터가 수정란 분할을 통한 일란성 쌍둥이 소 출산에 성공한 바가 있으며, 지금은 수정란을 세포 단위로까지 분할하는 '발생 공학'이 발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내의 몇몇 불임 전문 의료 기관은 '미세 조작 기계'라는 수정란 분할이 가능한 의료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기술 처치도 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국내에서는 그러한 사례가 보고되지 않고 있으나,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하기 전에 2개로 분할, 그 하나를 꺼내 염색체 이상 여부 판독에 이용함으로써 다른 수정란에 의해 태어날 아기의 이상을 미리 가려내는 일이 일부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다고도 한다.

 

따라서 기술 자체의 문제보다는 바로 그러한 기술이 인간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문제이다. 실험관 수정란을 냉동했다가 필요할 때 여자의 자궁에 이식, 임신을 시켜 아이를 낳게 하는 기술은 이미 개발되어 있기에, 인간 배자의 복제가 가능하다는 것은 얼마든지 쌍둥이의 시간차 내지 몇 년차 출산 및 장기 제공용 출산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기술의 인간 수정란에 대한 시행은 인간이 하나의 생산품으로 전락하게 되며, 앨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와 같은 공상 소설의 세계가 현실로 다가오게 되라라는 점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 문제이다. 교회가 피임, 인공 수정, 체외 수정, 낙태, 안락사 등의 문제에 있어 고루하고 너무 지나칠 정도로 고집스럽다는 지적에도 그 원칙에서 물러날 수 없는 것은 바로 인간 생명의 문제는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일에 있어서도 교황청은 유전자 실험의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이번 두 교수의 성과는 "모든 인류에 대한 모독이며 무례"이고, "본질적으로 사악한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나한 것이다.

 

 

한국 교회의 대처 방안

 

미국의 타임지와 CNN 방송이 벌인 공동 여론 조사에서 대상자의 75%가 인간 복제 실험에 반대를 하였다고 한다. 다행한 일이다. 반면 찬성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에도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장기 이식용 아기 생산에 대해서는 24%가, 우성 유전 인자 확산을 위한 인간 복제에 대해서는 6%가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낸다는 점을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윤리적 전통이 우리 나라와는 다른 남의 나라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낙태 건수에 있어서는 외국의 몇 배를 차지하고 있고, 인공 수정도 쉽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자기 중심적 사고와 인간 존엄성에 대한 망각이 증대하고 있는 한국이라는 현실에서 막연한 전통적 윤리관이나 무디어진 양심 - 인간 생명에 관한 한 - 에만 의존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교회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이다. 물론 한국 천주교회는 여러 차례에 걸쳐 생명 존중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지난해에는 낙태 반대 서명 운동을 통하여 생명 존중의 새로운 문화 창조에 앞장서고 있다. 생명 문제에 관한 한 교회의 입장은 분명하고 확고 부동하다. 어떠한 물리적 수단이나 기계적 처치에 의한 인공적 방법으로 인간 생명을 조작하는 행위나 그 시도들은 단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존엄성과 그 생명은 하느님의 영역으로 그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교회의 원칙에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지난해 전국적으로 낙태 반대 서명 운동을 하면서 실시된 한 조사에 의하면 가톨릭 신자의 낙태 건수가 다른 종교나 비종교인들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깊은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사실 구체적으로 일부 본당에서는 신부님들이 신자들에게 피임, 인공 수정, 인공 유산 등의 문제에 대해 신자들에게 죄의식만을 키워 줄 수 있으며, 그로 인해 교회를 멀리할 수 있다는 사목적 이유(?)를 들어, 특히 낙태의 경우 너무 잔인하고 끔찍한 실상을 보여 주기가 민망하다는 이유로 언급을 회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누가 생명의 존엄을 외치고 가르칠 것인가? 인간 생명을 수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일이 교회의 선언적 행위로만, 또 일부 관심 있고 열성적인 사람들의 노력에만 의존해야 할 일인지 더욱 큰 반성을 요한다고 하겠다. 인간 복제가 현실로 다가온 지금 전 교회가 나서야 할 것이다. 성직자, 수도자는 신자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고,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생활에서, 또 이웃에게 인간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고 전파해야 할 것이다.

 

인간을 잃어버린 다음에 누구를 대상으로 선교를 하고 사목을 할 것인가? 

 

[사목 편집부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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