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랑의 길은 끝없이 지체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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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2-14 ㅣ No.202

2차대전 때 히틀러 치하에서 아우스비츠 수용소에 갇혀 순교 당한

독일의 목사 본회퍼의 설교 가운데 가장 감명 깊게 와 닿았던 구절은

"사랑의 길은 끝없이 자꾸만 지체되는 길이다"라는 것이다.

"진실로 그러하다!"고 가슴에다 소리쳤었다.

사랑하면 모든 건 원만하고도 쉽게 풀려 이뤄질 듯 여기려는 게 보통이나,

사실은 사랑의 생활만큼 예리하고 어려운 것도 없다.

모든 순간을 온 맘을 쏟으며,

마치 유리그릇을 다루듯하며 살아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그냥 그대로 아무렇게나 쓱싹 지나가 버리는 게 아니다.

앞에서처럼 그것을 ’길가는 것’에 비유한다면,

그는 매 걸음마다 밟혀 죽는 벌레나 풀꽃은 없는가,

다친 생명이 있다면 멈추어서 고쳐 주고,

길 잃은 아이를 발견하면 옳은 길로 올려 주는 등등,

한순간 한순간이 그에겐 관심의 시간, 관계의 시간, 동참의 시간이 된다.

사실 성경에도 "몸과 맘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사랑을 하라고 했다.

왜냐면 사랑은 둘레에 대한 관심과 동참이니(루가 10,33-34),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레위 사람이나 사제처럼 둘레에 무관심한 체

바람처럼 휑하니 지나갈 순(루가 10,31-32) 없는 까닭이다.

그렇게 볼 때 어쩌면 사랑의 길은 영원히 지체되는 길인지도 모른다.

과정의 순간 순간이 목표 도달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처럼 하느님의 사업도 끝없이 기다리는 속에 완성으로 향한다.

조급함은 그분의 역사를 그르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진실로 그분의 사업이 영원성을 얻는 까닭도

순수함 속에 탄탄한 토대 위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무한한 희생과 끝없는 정화 속에서

순수결정체만으로 한 점 한 점 쌓아 가며

오랜 시간을 거쳐 다져 나가기 때문에

결국 그 자체 곧 전체가 본질화되어

혼(魂)을 낳고 정신의 빛을 스스로 뿜게 된다.

그렇게 철저한 혼(魂)을 지녔을 때

죽음마저도 누르지 못할 영원성을 띠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돌아가셨을 때 아무 것도 남기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의 성령으로 체현된 혼(魂)이 철저히 신도들 속에 살아 있었기에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이룩된 것이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도 샤를르 드 푸코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은 그 자체만의 외적으로 볼 땐 좌절되고 실패한 것 같지만,

뜨겁게 온 존재를 태우며 오직 진실 그 자체로만 진솔하게 살았던

그들 삶의 모든 것은 불멸의 혼이 되어 살아남아

그 혼이 무리를 모으고 이끌어

스스로 그들의 꿈을 이 세상에 구현시키게 된다.

그야말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은 것이다.

따라서 오직 필요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는

그분의 말씀처럼, 참된 삶의 철저한 실천뿐이다.

그렇게 하여 나의 삶이 본질화되어 혼을 지니게 되었을 때,

그때 하느님의 완전한 영(靈)이 내게 내려

그분의 꿈으로 나의 삶을 승화시키고, 또한 영원으로 완성시킨다.

이 때 나는 하느님의 도구가 된다.

그뿐 아니라 더 나아가 나의 꿈은 나를 떠나 나를 넘어

그분이 주신 그 꿈의 오의(奧意)를 드러내

우주의 꿈으로 밝혀지면서 새 하늘 새 땅의 그날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꿈을 지니자마자

덜 된 설계도와 서툰 솜씨와 덜 준비된 마음가짐으로

"우선 짓고나 보자"라는 심사로 마구 덤벙대며

거짓 열정으로 얼렁뚱땅 일을 펼치는 짓을 경계하라고 외치고 싶다.

영원에 이르는 하느님의 사업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조급하게 굴 때 십중팔구는 실패하고 만다.

오히려 영원에로 향하는 눈을 지니고서 꿈을 곱게 품고 있을 필요가 있다.

그 꿈이 성숙되어 더 이상 알로 갇혀 있을 수 없게 될 때까지

하느님의 손길을 기다리며 참다가(마르 4,27-28),

때가 되어 일어나지만

그럴지라도 다시 다듬고 다져(루가 14,28)

마치 묵은 포도주가 더 맛이 나듯

그렇게 진맛이 꿈으로부터 우러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꿈이 하느님의 뜻 안에 온전히 의탁되면서

영원에 맞닿는 꿈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그 꿈은 폭발성을 지녀

이 세상에다 하느님의 사랑 그 불길을 가져다 주고

종국적으로는 참다운 신세계마저 창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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