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ㅣ복음화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수원교구 안성본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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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수원교구 안성본당 지역 사회 경제 · 교육 선구자로 영향 미쳐 - 1927년 성당 앞에서 촬영된 신자들의 기념 사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성당 모습이 뒤쪽으로 보인다. 1900년 전·후반은 새로운 서양문물이 유입되면서 급격한 사회변화가 이어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 각 지역사회 내 본당 설립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의 전파일 뿐 아니라, 보다 발전된 생활문화 확산의 통로가 됐다. 특히 각 본당들은 농촌지역 경제적 자립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자리매김했다. 수원교구 안성본당(주임 이정혁 신부)의 이름을 언급하면 신자뿐 아니라 비신자들도 ‘포도’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만큼 유명해진 ‘안성 포도’재배가 안성성당 텃밭에서 시작됐고, 초대 주임신부는 지역민들에게 농장 토지를 임대해 각 가정의 살림살이를 도왔던 역사적 배경이 이어진 덕분이다. 이 포도밭 일부는 현재까지도 옛 성당 뒤편에 남아 있다. 이번 호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공존하고 있는 신앙의 터, 안성본당의 선교 뿌리를 찾아들어가 본다.
한국교회 초기, 전국 각 지역에 설립된 본당들은 대부분 외국인 선교사들의 굳은 신앙과 희생을 발판으로 이뤄졌다. 당시 선교사들은 서양문화에 반기를 들거나 곡해하는 주민들의 핍박도 고스란히 견뎌내야 했다.
이후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의 안성지역 방문을 계기로 지역 신자들은 본당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드디어 1900년 10월 19일자로 안성본당이 설립됐다.
본당 첫 사목자로 부임한 공베르 신부는 당시 선교활동과 함께 지역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도 큰 힘을 기울였다. 특히 공베르 신부는 안성의 토질과 기후에 적합한 포도 종자를 찾기 위해 프랑스를 32차례나 오가며 실험재배 등에 나서기도 했다. 또 성당 주변의 토지 50만 평을 매입, 이웃들이 경작할 수 있도록 임대하며 지역민 전체를 품어 안았다.
본당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신자들은 한뜻으로 새 성당 건립에도 나섰다. 현재까지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성당은 신자 개개인이 소와 땅을 팔아 모은 기금과 공베르 신부의 모국인 프랑스 신자들이 보내준 기부금으로 지어 올려졌다.
성당은 한국 한옥과 프랑스 건축양식을 절충해 지어 초기 성당 건축사 연구 사료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성당은 한국 전통 목조기법을 바탕으로 외래종교인 가톨릭교회의 전례공간을 수용한 독특한 형태를 보여 더욱 관심을 모은다. 초기교회의 토착화를 추진한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경기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된 성당은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아, 아무 때나 들어가 볼 수는 없다.
[가톨릭신문, 2012년 2월 26일, 주정아 기자] 0 1,91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