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미술ㅣ교회건축
본당순례: 공손과 배려가 마중물이 되어 작지만 옹골찬 경화동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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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순례] 공손과 배려가 마중물이 되어 작지만 옹골찬 경화동성당
첫눈에 반하다
큰 울림을 남기고 간 사제
모든 열정이 반드시 진리를 향한다고 볼 수 없고 모든 노력이 반드시 하느님의 뜻이라고도 볼 수 없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하느님이 보시기에 나았다는 것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경화동을 아픔으로 물들인 한 사건이 있었다. 사제서품을 받고 첫 부임지로 온 김해동 사제를 불과 2년 만에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1974년 10월이었으니까 1968년 새 성전을 짓고 6년 만에 터진 일이었다. 엄청난 충격과 상실감에 빠진 신자들은 기운을 차려 소복을 입고 국화꽃으로 운구를 단장해 젊은 사제를 차분하게 보내드렸다. 그 그리움과 비통함이 은연중에 깊은 침묵으로 이어져 반성과 회한으로 공동체에 신앙의 잔뿌리를 내렸다.
신앙의 못자리
새 성전을 짓고 첫 혼배미사를 올렸다는 송숙자 아가다 자매는 아직도 레지오 단장을 하고 있다. 여성부장과 함께 각 단체장을 두루 섭렵하였고 레지오 단장만 25년을 훌쩍 넘겼으니 경화동성당의 나이테나 다름없다. 현 사무장인 임소숙 마리안나는 부모님도 이곳에서 혼배성사를 올리고 언니와 가족이 그 뒤를 줄줄이 잇는가 하면 할머니도 세례를 받고 할아버지의 장례식도 여기서 치렀다. 김춘덕 스콜라스티카는 교적을 옮긴 지 4년 만에 본당 사목회장을 맡았다. 이런 막대한 임무가 어찌 하루아침에 뚝 떨어졌으랴만, 그만큼 응답에 충실하였고 낯선 이에 대한 기존 신자들의 배려와 상호 간의 노력이 이런 파격을 이뤄냈다. 한창 활기찬 시기에 덕산동성당 부지를 마련해 놓고 신자의 절반을 떠나보냈다. 그때는 사람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마저도 훌러덩 비더라고 하였다. 1930년 진해공소로 시작해 근 90년에 이르기까지 그 풍파와 애환을 어찌 다 설명하랴만 이별과 혼란을 견디며 신앙의 동력을 키웠다.
시대를 껴안는 작지만 옹골찬
감동이 깃든 공동체
경화동성당은 시대와 상황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사제를 만나왔다. 그리고 지난해 부임한 윤행도 가롤로 주임 신부는 신자들과 각별한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 중이다. 부임하던 날 “성당 지으려 오셨지요?”라는 뜻하지 않은 신자들의 질문을 받고 “지금 이 성당에서 20년은 거뜬하게 버틴다. 나는 여러분에게 어떤 것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대답했다.
어떤 곳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성전
60년 전에는 이 장소에 이 규모가 최적이었으나 반세기를 넘기면서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주유소가 생겼고 정문을 나서면 6차선 도로에 차들이 휙휙 달린다. 처음 설립할 때의 의미는 바래지고 좁은 마당에 낡은 건물이 보수와 땜질로 기도생활에 방해를 받고 있다. 그래도 우리 세대에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으나 후손들을 위해서는 어차피 한 세대는 희생해야 한다는 게 지금 신자들의 생각이다. “진정한 성전은 내 마음 안의 성전이다.”라고 했던 윤행도 신부도 팔을 걷어붙였다. 첫눈에 반하게 하였던 그 이미지로 뼈대를 갖춘 새로운 성전을 기대하면서 곧 사라질지도 모를 소담한 성전을 눈에 담았다.
[2022년 10월 9일(다해) 연중 제28주일 가톨릭마산 4-5면, 조정자 이사벨라] 0 239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