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 (금)
(홍)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동정부부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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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07 ㅣ No.1379

[124위 시복 특집] 동정부부 ① 유중철 요한(1779~1801) · 이순이 루갈다(1782~1802)


“순결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 두 고귀한 마음의 결합은 얼마나 행복하였던가!”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



이순이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녀의 부친인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의 학자 이익의 외손으로, 처남인 권철신, 권일신 형제, 이승훈 등과 어울리다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이순이의 모친도 자연스럽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는데, 어린 이순이는 일찍부터 모친에게서 글과 교리를 배웠습니다. 어려서부터 「효경」 등 경전을 배워 익힌 이순이는 학문과 지식이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필가 집안의 재능도 물려받아 그녀가 남긴 「옥중 편지」는 문장이 깊고 맑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5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이순이는 이미 오래전에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사실을 어머니에게 고백했습니다. 크게 놀란 어머니는 대견함과 현실적인 염려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앞장서 삼강오륜을 지켜야 했던 양반 가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식을 혼인시키지 않는 것은 일종의 패륜으로 여겨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딸의 선택을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라 생각한 어머니는 평소 언행이 갸륵하고 믿음이 깊었던 딸을 지지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승낙이 떨어지자 이순이는 주문모 신부에게 동정생활을 결심하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주 신부는 이순이의 말을 듣는 순간 전주의 유중철을 떠올렸습니다. 2년 전 주 신부가 전주 유항검의 집에서 며칠 머무를 때, 유항검의 아들 중철이 아버지와 주 신부에게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주 신부는 이들의 결심을 지켜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주 신부 역시 조선 사회의 여론과 이목이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멀쩡한 처녀 총각이 결혼하지 않는다면 ‘동정’에 관한 천주교 교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당장 천주교 신자로 의심받기 십상이고, 결국에는 화가 닥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궁리 끝에 주 신부는 두 사람이 동정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아예 두 사람을 혼인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평소 유중철과 이순이의 신덕과 사람 됨됨이를 신뢰하였던 까닭에 부부로 맺어 주어도 오누이처럼 지내며 틀림없이 동정을 지켜 낼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주 신부는 두 사람의 중매에 나섰습니다. 먼저 전주의 유항검에게 이순이를 소개하며 의향을 물었습니다. 유항검은 이순이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승낙했습니다. 이순이의 어머니도 흔쾌히 동의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혼인이 성사되었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10월 5일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서울주보 6면]

 

 

[124위 시복 특집] 동정부부 ② 유중철 요한(1779~1801) · 이순이 루갈다(1782~1802)


“어머님이 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천하고 약한 자식인 제가 끝없는 행복의 화관을 머리에 쓰고 모든 천상 기쁨이 넘치는 마음으로 어머님의 손을 잡아 영원한 고향으로 모셔드리겠습니다.”

- 이순이 루갈다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마침내 1797년 10월 이순이의 집에서 혼례가 이루어졌습니다. 열아홉 살 유중철과 열여섯 살 이순이가, 겉으로는 부부지만 내막으로는 오누이처럼 살기로 약속하고 결혼식을 올린 것입니다. 당시 서류부가(?留婦家)라 하여 혼례를 올린 신부가 한동안 친정에 머무르던 풍습에 따라 이순이는 1년 동안 친정에 머물다가 이듬해 10월 전주의 시댁으로 내려갔습니다. 재회한 유중철과 이순이는 부모님 앞에 꿇어앉아 장엄하게 동정을 서약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오누이로 지내며 동정을 지켜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의지가 약해지면 마음이 혼미해지고 본능적 욕구가 불쑥 치솟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육신의 욕망을 극복해 갔습니다. 이들에게 일상은 매 순간이 자기 극복의 단련으로 이어지는 영신 수련의 삶이었습니다.

1801년 시작된 신유박해의 불길은 그 해 2월 이순이의 큰외삼촌인 권철신을 덮쳤고, 이 비보가 전주에 당도하기 무섭게 유항검이 체포되었습니다. ‘전라도 천주학의 괴수’라 소문난 유항검이고 보니 도무지 무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항검은 즉시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유관검과 유중철도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9월 17일, 유항검과 유관검은 전주 풍남문 밖, 지금의 전동 성당 터에서 능지처참 되었고 유중철은 큰칼을 쓴 채 무한정 옥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유항검의 사형 판결 소식을 전해 들은 이순이와 가족들은 머지않아 닥칠 환난을 예감하며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마음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9월 15일, 전주 감영의 포졸들이 몰려와 이순이와 가족들을 체포하였습니다. 이순이는 옥에 갇히면서도 지필묵을 챙겨 들었습니다. 언젠가 유항검 집안이 박해를 당하거든 박해의 상황을 소상히 기록해 두라는 주문모 신부의 분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9월 27일에는 옥졸들의 눈을 피해 어머니에게 유서와도 같은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11월 14일, 옥졸이 옥에 갇힌 시동생 유문석을 불러냈습니다. 이순이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옥졸은
“관장의 명령이다. 유문석을 큰 옥으로 데려가서 제 형과 함께 가둘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순이는 유문석에게 “서로 잊지 맙시다!” 하고는, 가거든 형에게 같은 시간에 주님을 위해 목숨 바치기를 원한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10월 12일 연중 제28주일 서울주보 6면]

 

 

[124위 시복 특집] 동정부부 ③ 유중철 요한(1779~1801) · 이순이 루갈다(1782~1802)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유문석이 떠나고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유중철과 유문석 형제가 교수형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유중철이 22세의 나이로 순교한 뒤, 옥중의 이순이는 그가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서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의 옷 안에서 자기 누이(아내 루갈다)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쪽지에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뒤, 전주 관장은 이순이와 가족들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곧바로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에 파견했습니다. 그 결과 이순이를 비롯한 가족들은 유배형을 받았고, 이순이는 함경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순이는 가족들을 대표하여 “우리들은 하느님을 공경하였으니 모두 국법대로 죽어야 마땅합니다.”하고 항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간청에도 불구하고 이순이와 가족들은 결국 유배지를 향해 길을 나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유배지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쫓아와 그들을 다시 체포하였습니다. ‘하마터면 치명의 큰 은혜를 받지 못하고 평생 죄인으로 살 뻔하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한 이순이는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다시 전주 감영에 당도한 이순이와 가족들은 서슬 퍼런 심문에도 다만 하느님을 공경하며 죽기를 원한다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이에 감사는 사형을 선고한 후 몽둥이로 정강이를 치고 칼을 씌워 옥에 가두었습니다. 전라 감사가 의금부에 장계를 올린 지 20일이 지나도록 이들을 처형하라는 기별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순이는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소일 삼아 친정 언니와 올케 등 다른 가족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순이는 편지에서 유배지의 관비가 되는 것보다 치명자가 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라며 “내가 죽는 것을 산 것으로 알고, 산 것을 죽은 것으로 알라”고 당부했습니다. 당시 순교자들은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공통된 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의(義)를 배반하고 사는 것은 천지의 죄인이라 살아도 죽은 것만 같지 않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사형 판결이 났습니다. 1802년 1월 31일, 이순이는 판결에 따라 가족들과 함께 숲정이라 불리는 전주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당시 그녀의 나이 스물이었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10월 19일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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