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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에서 배운다: 탁발 수도회들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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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6-04 ㅣ No.519

[교회사에서 배운다] 탁발 수도회들의 탄생


역사적 배경

12세기와 13세기 초부터 유럽에서는 봉건제도가 쇠퇴하면서 농촌과 농업보다 도시와 상공업이 발전한다. 영주와 주교의 지배에서 벗어난 중산층 시민들은 민주적 성격의 사회조직(commune)을 만든다. 이것을 계기로 사회가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평등하게 변하게 되고, 각 도시마다 시민교육을 위한 학교뿐만 아니라 대학들도 설립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이제 수도원보다 사회단체, 성직자보다 평신도 지식인, 신앙보다 문화의 영향을 더 받게 되어 세속화와 합리주의의 위험이 생겨나고 빈부 격차, 신분 차이로 말미암은 갈등도 증가된다.

교회는 그레고리오 7세 교황(1073-1085년) 이래의 개혁으로 황제권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만, 이교인들과 이단자들의 복음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복음적 쇄신이란 도전에 직면한다.

그레고리오 개혁 결과로 복음과 가난한 그리스도를 재발견하게 되면서 11-12세기의 수도승 개혁은 원시교회의 사도적 청빈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사도적 생활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가난한 순회 설교가로 생활한다는 이상과 긴밀히 결부된다.

한편, 1170-1180년대 이후 카타리파(또는 알비파)와 발도파 운동은 부유해진 수도원과 호화롭게 살면서 설교 의무를 등한시하는 고위 성직자들이 많은 교회를 보면서, ‘평신도 설교’와 ‘사도적 청빈’의 구호를 자신들의 목표로 내세운다. 이 단체들은 교회의 부와 그에 따른 부패에 분개해 교황이나 주교의 권위를 무시하면서까지 즉각적이고도 급진적인 개혁을 바랐다.

많은 신자들이 여기에 동조하자 교회는 처음에는 평신도 설교를 금지하고 ‘이단’들을 저주하는 조치로 대응했지만, 곧 잘못된 가르침이나 이단의 의혹이 있는 사람들을 심문하기 위한 사법 절차와 재판 제도로 ‘이단 심문’(Inquisitio, ‘종교 재판’은 잘못된 용어임)을 설립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에 대한 십자군(1202-1204년)과 알비파 전쟁(1209-1229년)까지 일어난다. 이런 일들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조롱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따라 민중들이 열망하고 있는 가난한 교회로의 복귀, 복음적 생활에 부응하는 새로운 수도생활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바로 탁발 수도회(ordo mendicans)로서 프란치스코회(1209년), 도미니코회(1216년), 가르멜회(1247년), 아우구스티노 은수회(1256년)가 대표적이다.


탁발 수도회들의 탄생

당시 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문제들에 대해 탁발 수도회들은 특히 축재욕에 대항한 프란치스코회의 ‘공동체적 가난’과 지성의 자유 문제들에 대항한 도미니코회의 ‘탁발의 순회 설교’를 통해 복음과 사도들의 생활양식을 글자 그대로 본받으려고 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2-1226년) 성인의 근본사상은 흔히 생각하듯 ‘가난’이 아니라 ‘그리스도 추종’(sequela Christi, 2회칙 1,1 참조)이었다. 그 그리스도는 영광과 개선(凱旋)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가난하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로서 ‘벌거벗은 그리스도를 벌거벗고 따르는’ 개인적, 집단적 생활방식이 가난이었다.

또 그의 공동체적 이상은 기존의 수도승회처럼 초대교회 원시 공동체가 아니라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수도회를 세우지 않았던 프란치스코 성인과 달리, 도미니코 성인(1170-1221년)이 하느님 말씀의 확산을 수도회 창설의 명백한 목표로 설정한 것은 수도생활 역사상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탁발 수도회들은 개별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수도원들 자체에도 불가피한 최소한의 소유를 제외하고는 엄격한 ‘가난’을 의무화했다. 그들은 손노동으로, 그리고 탁발로 얻거나,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준 희사로 자신들의 생계를 꾸려야 했기에 탁발 수도자라 불렸다. 이런 이득에 대한 보상으로 그들은 설교와 사목활동(고해성사)으로 봉사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수도승원들처럼 세상으로부터 떨어진 외딴 산 위나 황무지의 계곡이 아닌 도시에 거주지를 정했고, 기존 수도승처럼 정주서원에 매임 없이 세상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했다.


탁발 수도회 생활과 그 역사적 의미

탁발 수도회들은 그리스도 추종이란 근본 이상으로 되돌아가면서 당시의 세속화되고 권위적이며 부유한 교회를 비판함과 동시에 그릇된 청빈운동 이단들에 대한 방어를 통해 새 생명의 흐름들을 도입한 참개혁의 촉진자들이었다.

그들이 카타리파, 발도파 등에 의해 강력히 촉진된 사도적 가난에로 성직자를 돌아오게 한 것은 부와 권력의 정점에 선 당시 교회 내부에서도 개혁이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탁발 수도회들은 새로운 생산양식이 발생시킨 기존의 신분제적 귀족들과 신흥 유산 계급, 가난한 이들과 부자들 사이에 증가하는 긴장을 완화시켰다.

요즘 신자유주의에 따른 양극화와 전 지구적 남북문제로 부국과 빈국, 부자와 빈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로 말미암은 문제들이 심화되고 있다.

또한, 지나친 자본의 이익 추구와 자연에 대한 인간과 과학기술의 우위가 초래한 생태 위기와 핵으로 인류의 평화와 생존이 위협받고 있고, 비자발적 실업과 저임금 문제도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대사회에 교회가 오직 하느님만 신뢰하게 하고, 유산자들이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는 산증인들이 되고자 노력하는 동시에 무산자들의 경제문제 해결을 위해 투신했던 탁발 수도자들은 삶의 모범이 되고 있다.

나아가 프란치스코 성인이 벌거벗은 그리스도를 추종하고자 지녔던 가난, 겸손, 기쁨의 영성, 특히 그의 ‘태양의 찬가’에서 잘 드러나듯이, 동식물은 물론 해와 달까지도 형제와 자매로 여기는 창조적 관계를 우리 모두 마음 깊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탁발 수도자들은 매우 등한시되었던 사목활동에 열정적으로 헌신했고, 교회 학문의 영역에서도 놀라운 성과들을 거두었다. 따라서 복음정신과 동떨어진 경제적 사목태도로 하느님만이 교회의 참되고 유일한 부(富)임이 흐려지고 있는 오늘의 교회에도 도미니코 성인처럼 말씀을 하느님께 구걸하는 걸인으로서 신원을 확립하는 새 삶의 설교자들이 필요하다.

또한 탁발 수도회들의 ‘회헌’은 엄격히 중앙 집중화되었고, 힘들을 협동적으로 구성했다. 수도회의 머리에는 총장이 있고, 총장에게 예속되는 각관구장들은 총장과 함께 총회에서 규칙적으로 모였다. 장상들이 선거와 총회를 통해 선출되고, 수도승회들의 아빠스처럼 종신제가 아닌 임기제인 점은 당시 수도생활에 대한 응답이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응답을 요청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1회(남자 수도회)와 제2회(여자 수도회)에 이어 평신도들을 위한 ‘제3회’는 탁발 수도회들의 또 다른 특수성을 구성한다. 세속에 살면서 가정과 재산, 직업을 유지하지만, 일정한 규칙들에 따라 제1회의 지도 아래 기도와 이웃 사랑에 헌신하는 ‘제3회원’이란 존재는 신분과 계급과 무관하게 모두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게 했다.

이는 평신도가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등하게 친교를 심화하는 동시에 수도생활 체험을 통해 영적 갈망을 해갈하려는 현대의 비신자들과 세상을 향해 더욱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게 하고 있다.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적 가정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년) 개회 6년 전인 1209년‘ 가난한 작은 형제’인 프란치스코와 절대 군주인 인노첸시오 3세 교황(1198-1216년)의 역사적 만남이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1206년 성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에서 “무너져가는 내 집을 고쳐라.”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소명은 복음에 충실한 가난한 예수의 제자도(弟子道)로서 교회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교회를 위한 대안이 프란치스코를 통해 준비되고 있었다.

또한 중세 교황권을 절정으로 이끌었던 인노첸시오 3세는 교회의 내외적 개혁 필요성을 자각하고 곧 공의회를 소집하려고 했다. 따라서 교회 전체가 개혁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명민했던 교황은 로마의 라테라노 성당의 기둥을 프란치스코가 떠받치고 있는 꿈을 꾸자 구두로 회칙을 인준했다. 교황은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전 교회를 개혁하기보다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청빈운동을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라는 신생 탁발 수도회로 순치함으로써 탁발운동의 ‘교회제도화’를 시작했다.

프란치스코 자신도 교황에게 순종을 약속했을 뿐만 아니라 형제들도 그렇게 하도록 이끌었다. 교황청은 탁발 수도자들을 정치적-교회적 목적들과 개혁을 위해 기동성 있는 효과적인 군사로 이용했는데, 그들은 이단 색출을 위한 교황청 심문관으로 임명되었고(1233년), 이교도와 이슬람교인들에게 선교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아마도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교황이었던 인노첸시오 3세가 프란치스코를 교회체제로 끌어들이는 대신에 만일 복음을 새롭게 받아들여 그가 강조하던 요점들을 교회에 적용했다면? 또 만일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복음정신에 입각해 교회개혁을 시도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한스 큉은 이런 역사적 가정들을 하면서 만일 교황이 그랬더라면 아비뇽 교황직(1309-1377년)과 서구 대이교(western schism, 1378-1417년), 나아가 종교개혁(1517-1551년[독일] / 1559년[영국])과 같은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안타깝고도 마음 아프다. 다시는 이런 역사적 가정이 필요 없는 교회가 되기를.

* 오윤교 아브라함 - 성베네딕도회왜관수도원 신부. 로마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교회사를 전공했으며, 성베네딕도왜관 피정의 집 책임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5월호, 오윤교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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