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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의례 논쟁을 다시 생각함, 헤테로독시아와 헤테로글로시아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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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21 ㅣ No.677

의례 논쟁을 다시 생각함, 헤테로독시아와 헤테로글로시아 사이에서

 

 

1. 문제 설정 : 낱말에 대한 되새김질 

2. 왜 또다시 의례 논쟁인가?
3. 미신(Superstitio)과 이단(異端)의 변주곡
4. 자기라는 거울에 투사된 것들, 예절 혹은 정치
5. 번역(traductio)인가, 반역(traditio)인가
6. 글을 맺으며 : 장미라는 이름이 남긴 것



1. 문제 설정 : 낱말에 대한 되새김질 


평상시에 사용하는 언어 감각으로는 잘 해명되지 않는 경우들이 생긴다. 특히 되새김질을 약간 해야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이런 연습은 말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어떤 문제의식을 담고 이 글을 쓰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몇 가지 예를 드는 것으로 시작하겠다.

오늘의 앞날은 어제라고 한다. 어제의 앞날은 그제이다. 오늘의 다음다음 날은 모레이다. 날들에 대한 이름을 시간상의 순서대로 늘어놓아보자. 그제, 어제, 오늘, 모레가 되겠다. 그러면 오늘의 다음날은 무엇인가? 당연히 내일(來日)이다. 그런데 내일은 한자어다. 시간에 대한 다섯 낱말 가운데 유독 내일만 한자어라는 것이 이상하다. 원래 한국어에 내일을 가리키는 말이 없었을까?

그렇게 단정할 이유는 없다. 가령 중국의 북송시대에 손목(孫穆)이라는 사람이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서 쓴 일종의 견문록인 《계림유사》(鷄林類事)를 보면 11~12세기 고려시대 사람들이 쓰는 말 가운데 내일에 해당하는 고유한 낱말의 음가가 ‘轄載’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 실제 발음이 어떠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처럼 옛날 어느 시점에서 분명히 쓰였던 말이지만 지금은 다른 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경우에 ‘사라진 말’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완전히 사라진 말도 있지만, 새로 만들어 쓰는 말과 더불어 옛날부터 쓰던 말에 새로운 뜻을 담아서 쓰는 말도 있다. 앞엣것은 흔히 신조어라고 부르고, 뒤엣것은 많은 경우에 번역어로 자리 잡았다. 이런 말들은 특별히 조선에서 개항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많이 생겨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때까지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물이나 관념이 도입되면서 이를 지칭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을 것이다.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말들보다 기존에 있던 말을 변형시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말들이 더 우리의 흥미를 끈다. 진지한 성찰, 되새김질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자유(自由)와 평등(平等)이라는 말이 있다. 서구 근대사회에서 모든 시민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자신의 권리를 의미하는 ‘리버티’와 ‘이퀄리티’를 번역한 말이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이런 낱말이 없었는가? 있었지만 근대 계몽주의가 부여한 의미를 담아서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개항 이전 조선 후기 사회에서 쓰이던 어휘 용례가 개항 이후에 와서 달라지기 시작하였음을 알려주는 교회사 자료가 있다는 점이다. 바로 병인박해 직후에 저술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불자전》, 그리고 《불한사전》이 그것이다.

이 자료들을 일독하면 《한불자전》에는 ‘자유’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에 비해서 ‘평등’이라는 말은 있지만, 그 뜻이 현재의 쓰임새와는 약간 다르다. ‘같은 조건에 처한 사람, 같은 나이, 같은 신분에 속한 사람’(Homme de meme condition, de condition egale, semblable, de meme age, de meme rang)을 ‘평등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반면에 《불한사전》에서 ‘liberte’(자유) 항목을 찾아보면, ‘자쥬장, 임의, 쥬의’라고 나오고, ‘egalite’(평등) 항목에 대한 설명은 ‘갓기, 갓흠이’라고 나온다. 이것을 보면 근대적인 의미에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 내지 용어가 당시에는 아직 정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정한 시기에 새롭게 생겨난 낱말이나 기존 낱말에 판이한 뜻을 담아서 사용하기 시작한 낱말들을 역사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분석하는 연구를 개념사라고 부른다. 최근에 들어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개념사 연구가 주목받고 있다. 문학이든, 철학이든, 정치학 혹은 사회학 가릴 것 없이 개별 분과학문에서 예사로 사용하던 개념이나 용어들을 다시 점검하는 작업을 거쳐야만 자기 학문의 학문성을 정립하고 새로운 연구의 아젠더를 제시할 수 있겠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사실 교회사학이라고 해서 이런 문제의식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가 보편적 진리이자 인류 구원의 복음이기는 해도, 서구 문명의 역사 속에 그 소통의 언어들을 일구어 온 것 역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 한국과 같은 선교지역 교회의 역사는 서구 언어와 해당 지역 언어 사이의 상호 작용 속에서 의미론적 충돌과 창조적 변형을 직접적으로 겪어온 과정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교회사학 연구는 기존 교회사 사료들에 등장하는 언어적 구성물들(낱말, 개념, 텍스트, 담론 등)에 대해서 성찰적 재검토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리라고 본다. 그것을 굳이 개념사라고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학문적 서술의 도구가 되는 언어와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는 언어 사이의 간극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교회사학에서도 새로운 논의의 지평이 열리지 않겠는가.


2. 왜 또다시 의례 논쟁인가?

1643년부터 1742년까지 중국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행하던 몇 가지 관습과 중국식 용어 문제들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련의 논쟁을 중국 의례 논쟁 혹은 줄여서 의례 논쟁이라고 일컫는다. 이 논쟁의 결과로 반포된 베네딕도 14세 교황의 1742년 칙서(〈Ex quo singulari〉)에 따라서 동아시아 지역의 천주교회에서는 공자나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 및 기타 의례들에 참석하는 것이 전면 금지되었으며, 신의 명칭도 천주(天主) 한 가지로 통일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 국내와 국외에서 상당히 많은 연구들이 축적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1) 논쟁의 원인에 대해서도 선교단체들 사이의 경쟁의식, 유럽 국가들 사이의 알력관계, 중국어에 대한 선교사들의 무지 등이 지적되었다. 결국 “유럽인의 우월의식과 비그리스도교 문화에 대한 경시와 함께 정복적인 획일주의 선교정책이 작용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2)

이러한 평가가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종합적인 평가만으로 논의가 종결되는 것 역시 아니다. 의례 논쟁 과정에서 제출된 각종 문헌들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통해서 논쟁의 전개과정과 제기된 주요 논점들, 그리고 그러한 논점들의 이면에 깔린 사유방식들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중에서도 이 글이 유념하고자 하는 것은 의례 논쟁과 결부된 1차 자료들에 등장하는 주요 개념과 용어들의 의미망에 대한 분석적인 연구이다. 현재적인 관점과 언어로 그 당시의 논쟁을 재단하여 정리하고 넘어간다면, 겉보기로는 충분히 타당하고 설득력을 지니는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당대와 현재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예리하게 인지하면서 당대의 의미론적 맥락을 더듬는 작업은 제대로 달성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1백 년 동안 지속된 의례 논쟁의 주요한 국면들을 따라가면서 논쟁의 전체적인 흐름을 개괄하는 것부터 시작할 것이다. 이 작업은 새로운 연구 성과를 추가한다기보다는 기존 연구에서 제출된 바를 토대로 요약 정리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의례 논쟁 과정에서 등장한 여러 논지들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개념과 용어들을 추출하여, 그 속에서 담긴 찬반양론의 논리구조와 의미망을 다루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유럽과 중국으로 대별되는 두 문화권 내지 두 언어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1) 전개과정

복음 전파의 사명을 띠고 중국 대륙에 도착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풍습과 관습에 대해서 천주교회의 가르침에 직접적으로 어긋나지 않는다면, 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허용하는 입장을 세웠다. 그 대표적인 주창자는 주지하다시피 마테오 리치(M. Ricci)였다. 리치는 중국의 고전인 사서삼경을 숙독한 후에 중국인들의 사유체계에 대해서 몇 가지 결론을 내리고, 중국 고유의 의례문화들을 관용적인 자세로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다.3)

그러나 리치의 후임으로 예수회 중국 선교사들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은 롱고바르디(Niccolo Longobardi)는 의례 문제와 관련하여 리치의 전교방법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 역시도 중국의 고전들을 연구하였지만, 리치와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롱고바르디는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의례 문화를 허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예수회 내부에서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결국 중국 의례 문제는 예수회 내에서 리치의 전교방침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 후 예수회는 중국에 도착하는 선교사들에게 각자 자신에게 맞는 전교방침을 따르도록 용인하였다.

중국인들의 의례 문화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된 것은 예수회보다 약 50년 늦게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가 중국에 진출한 이후의 일이다. 1633년 중국에 도착하였던 도미니코회 선교사 모랄레스(Juan Bautista de Morales)가 1639년 박해로 중국에서 추방되자 로마로 돌아가서, 1643년 예수회의 관용적이고 적응주의적인 방침을 비판하는 〈17개 항의 질의서〉를 교황청에 제출하였다. 당시 교황이었던 우르바노 8세는 포교성성에서 이 문제를 검토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포교성성은 모랄레스의 질의 내용을 검사성성4)의 신학자들에게 전달하여 이에 대한 판단을 요청하였다.

우르바노 8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된 인노첸시오 10세는 1645년 9월 12일 모랄레스가 제기한 질의들에 대한 포교성성의 대답과 결정사항을 승인하였다. 이 훈령에 첨부된 문서를 보면 포교성성의 대답과 결정은 대체적으로 모랄레스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즉 중국의 의례 문화와 관련하여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이 조상제사나 공자 숭경 의례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교황청의 금지 명령에 대해서 로마와 중국에 있던 예수회원들은 큰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리하여 예수회 선교사들은 1651년 예수회원 마르티니(Martino Martini)를 로마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로마에 도착한 그는 교황청에 의례 문제에 관한 4개 항의 질문을 제출하고 다시 심의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질문서에서 마르티니는 중국 의례에 대한 예수회의 입장을 충실히 전달하였다. 그 결과 이번에는 정반대의 결정이 내려졌다. 즉 당시 교황이었던 알렉산데르 7세가 1656년 3월 23일에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방침을 허락하는 훈령을 내린 것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1664년에 벌어진 양광선(楊光先)의 선교사 고발사건으로 예수회,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중국 남부의 광동성 광주(廣州)로 추방되어 수년 동안 구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구금상태에 있었던 선교사들은 1667년 12월 18일부터 1668년 1월 26일 사이에 약 40일 동안 서로간의 이견들을 토론하고 단일한 선교 활동을 모색하기 위해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를 흔히 ‘광주회의’라고 부른다.

광주회의에서는 세례, 단식, 교리교수, 교회력, 우상의 소각 등 42개 항목의 다양한 내용들을 토론하였다고 한다. 그 중에서 34번 항목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장례에 관한 문제였으며, 41번 항목은 죽은 자에 대한 예식과 공자에 대한 예식 문제였다. 결국 광주회의는 42개 항목에 관해서 토론하고 수정한 뒤에 그 결정을 투표에 부쳤다. 회의에 참석한 선교사들 가운데 대부분이 예수회원이었다는 점에서 그 분위기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유일한 프란치스코회원이었던 카벨레로(Antonio Cabellero)는 결정사항에 서명하기를 주저하였으며, 모랄레스의 후임으로 도미니코회 중국 책임자 직책을 맡고 있었던 나바레테(Domingo Fernandez de Navarrete)는 처음에는 동의하기를 거부하다가 나중에 가서 마지못해 동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광주회의의 결론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나바레테는 로마로 돌아간 뒤에 1674년 예수회의 중국 선교방침에 대해서 교황청의 재검토를 제기하였고, 이어서 1676년 중국의 의례와 관련된 예수회의 선교방법을 비난하는 저서를 출간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중국 의례에 관련한 문제는 유럽에서도 논쟁거리로 비화되었다. 당시 유럽에서 널리 퍼져 있던 얀센주의자들은 나바레테의 주장에 힘입어 예수회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지금까지 개괄한 논쟁의 진행과정은 중국 의례 논쟁의 제1단계에 해당한다. 즉 예수회를 한 편으로 하고,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를 한편으로 하여, 양측이 중국 의례에 관한 논쟁의 당사자로 각기 상반되는 주장들을 펼쳤던 것이다. 그 결과 유럽에서는 중국 의례 문제를 둘러싸고 예수회의 선교방침에 대해서 찬반양론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지만, 중국에서는 거의 모든 프란치스코회원들과 아우구스티노회원들이 예수회의 방침에 동조하면서 도미니코회원들만 반대하는 형국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예수회 선교사들이 청나라 황실의 호의적인 태도에 기대어 놀랄만한 전교 성과를 이룩하였다.

하지만 1684년 파리 외방전교회가 중국으로 진출하면서 다시 문제가 복잡해지기 시작하였다. 즉 파리 외방전교회가 중국에 진출하고 의례 문제에 관하여 예수회의 입장에 반대하면서 의례 논쟁의 제2단계가 시작된 것이다. 1693년 복건 대목구장에 임명된 샤를 매그로(Charles Maigrot) 주교는 관할 지역 내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불일치를 종식시키고 공통된 견해를 확립하기 위하여 7개 항으로 이루어진 포고령을 내렸다. 이를 통해서 매그로 주교는 ‘데우스’(Deus)를 대신하는 말로 ‘천’이나 ‘상제’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중국의 천주교 신자들이 공자와 선조들에게 바치는 경배의식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였다.

매그로 주교가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고 중국 의례들을 엄금하면서, 이후에 중국에서는 강희제의 통치 아래서 천주교에 대한 금압 정책이 일어났다고 한다. 한편 유럽에서는 파리 외방전교회와 파리 대학(la Sorbonne) 신학부가 예수회의 신학적 입장을 공격하면서 중국 의례에 관한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로써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 의례 논쟁에 관련한 일련의 인쇄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하였으며, 다양한 논자들이 이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 와중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 의례에 관해서 중국인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함으로써 예수회의 입장을 변론하고자 시도하였다. 그 결과 북경에 있던 4명의 선교사들이 1700년 11월 30일 당시 중국 황제 강희제에게 서양의 학자들이 중국 의례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그것이 옳은지 틀렸는지를 밝혀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대해서 강희제는 예수회의 입장이 올바르다는 대답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강희제의 답변이 로마에 전달되자 이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하였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적인 논쟁에 대해서 판단의 권위를 외교인 황제에게 의탁하였다는 점에서 교황청의 분노를 샀던 것이다. 하지만 강희제의 답변 자체는 유념할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비록 선교사들 사이에서 촉발된 논쟁이기는 하지만 유럽인들이 타 문화권에 대한 이해를 둘러싸고 벌인 논쟁에 대해서 해당 문화권에 속한 유력한 인물이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발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격론과 검토 끝에 글레멘스 11세 교황은 1704년 11월 20일 훈령을 내려 의례 논쟁이 일단락되도록 하였다. 그 내용은 ‘천주’ 외에 ‘천’이나 ‘상제’와 같은 용어의 사용을 금지하며, 공자와 선조들에게 드리는 제사 및 사자의 이름 아래에 ‘신위’(神位)라고 쓴 신주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다만 단순히 죽은 사람의 이름만을 쓴 경우는 허락하였다.

글레멘스 11세 교황은 청나라 황실에 이 훈령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샤를 드 투르농(Charles Maillard de Tournon) 주교를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1705년 중국에 도착한 투르농 주교는 중국 문화에 대한 선입견과 외교술의 미숙으로 강희제의 분노를 유발하여 교황이 맡긴 사명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 채 오히려 중국 선교지에서 불화만 일으키고 말았다. 결국 글레멘스 11세 교황은 1715년 3월 19일 종전의 훈령보다 더 강경한 금지사항을 담은 칙서(〈Ex illa di〉)를 반포하였다.

교황의 이러한 강경한 칙서를 번역문으로 보고 들은 강희제는 크게 노하여 1717년 4월 16일 그리스도교 신앙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리고 지방에서는 천주교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관리들이 박해를 유발하였다. 그러자 중국에서 교회가 직면한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하여, 그리고 청나라 황실과의 화해를 달성하기 위하여, 글레멘스 11세 교황은 메차바르바(Carlo Mezzabarba) 주교를 특사로 임명하여 중국으로 파견하였다.
 
1720년 12월 25일 북경에 도착한 메차바르바 주교는 강희제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이끌어내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미 강희제는 교황의 1715년 칙서 번역문을 읽은 뒤였기 때문에 이것이 해제되어야 협상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으며, 또한 투르농 주교로부터 연유한 강희제의 부정적인 태도를 변경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메차바르바 주교는 하는 수 없이 8개의 타협안을 제시하고는 로마로 돌아갔다. 그 후 중국에서는 천주교에 호의적이었던 강희제의 뒤를 이어 옹정제가 등극하면서 박해가 다시 일어났다. 옹정제는 흠천감에 종사하는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카오 등지로 추방하였고, 중국인들의 천주교 신봉을 전면금지하였다.

한편 중국 교회 내에서 메차바르바 주교가 제시한 8개 조의 타협안을 둘러싸고 다시 논쟁이 벌어졌다. 타협안을 따르는 측과 이 타협안이 교황 칙서에 위배된다고 보는 측으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글레멘스 12세 교황은 천주교 전례의 순수성을 보전하고, 기존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메차바르바의 타협안에 대해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하였다. 교황은 신학자들과 검사성성의 추기경들이 이 문제를 주의 깊게 토론하도록 하였으며, 로마에 와 있던 중국인 신학생들과 중국에서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로마에서 살고 있던 과거 선교사들의 의견도 참고하였다.

결국 교황청에서는 의례 논쟁에 대한 재검토를 바탕으로 하여, 마침내 1742년 7월 11일 베네딕도 14세 교황의 결정적인 칙서(〈Ex quo singulari〉)가 반포되었다. 칙서는 과거의 그 어느 것보다도 강한 어조로 메차바르바의 타협안을 배격하고, 글레멘스 11세 교황의 1715년 칙서를 재천명하였다. 베네딕도 14세 교황의 칙서는 중국에 있는 모든 선교사에게 중국 의례와 관련하여 금지된 사항들을 준수할 것을 서약하도록 하였으며, 이에 불복하는 자에게는 중죄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추방하고, 또 그 수도단체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에 종사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중국의 의례 문화에 대한 선교사들의 상이한 견해에서 촉발되었던 의례 논쟁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중국과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천주교회는 교황청의 금지령으로 말미암아 대단히 고통스러운 박해와 시련의 역사를 겪었다. 이러한 사정은 대략 200여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1930년대 중반에 가서야 새롭게 전개된 상황 속에서 그 변화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2) 주요 쟁점들과 그에 따른 의문점들

이상에서 100여 년에 걸친 의례 논쟁의 전개과정을 매우 개괄적인 수준에서 요약하였지만, 사실 논쟁 자체는 대단히 다양한 논점들을 포괄하면서 진행되었다. 가령 모랄레스가 교황청에 제출한 〈질의서〉는 17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이에 대한 반론을 담은 마르티니의 〈질의서〉는 4개 항목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광주회의의 결정 사항은 42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었고, 매그로 주교가 선포한 금지령은 7개 조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편 의례 논쟁에 대해서 교황의 이름으로 반포된 두 가지 칙서들은 중국 의례 문제에 대한 결정사항을 대략 여덟 가지로 추려서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의례 논쟁을 둘러싼 찬반양론과 교황의 공식 칙서들은 다양한 문헌들 속에서 다양한 항목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논쟁의 핵심적인 쟁점들은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고 한다. 의례 논쟁의 주요 쟁점을 세 가지로 제시하는 것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취하는 통상적인 방식이다. 그 각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리스도교의 유일신에 대한 중국식 호칭으로 어떤 것을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천주’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지만, 그 밖에 유교 경점에 등장하는 ‘상제’나 ‘천’과 같은 명칭도 함께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찬성과 반대의 양론으로 갈렸다. 예수회에서는 ‘상제’와 ‘천’도 함께 사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지만, 반대편에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두 번째 쟁점은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행하던 공자에 대한 숭경의례에 천주교 신자들이 참석해도 되는가 하는 점이었다. 예수회에서는 공자에 대한 의례가 공자를 신적인 대상으로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존경을 표하는 예식이기 때문에 참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서 반대론자들은 이 의례가 담고 있는 여러 의례 동작이나 과정, 절차 등으로 볼 때 분명히 공자를 숭배하는 행위이므로 참석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세 번째 쟁점은 위의 쟁점과 연관된 것이기도 한데, 자손들이 죽은 조상을 위하여 드리는 제사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하는 점이었다. 예수회는 중국인들이 이미 죽은 조상들을 다른 어떤 신적인 숭배 대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조상제사는 공자 의례와 마찬가지로 존경과 기념의 의미를 담은 예식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는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조상제사는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교의 유일신에게만 흠숭과 존경을 바쳐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하였다.

의례 논쟁의 논쟁점과 관련하여 몇 가지 의문점들이 제기된다. 먼저 왜 그렇게 신의 이름에 집착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스도교 바이블의 논리 구조 속에서 보자면 의례 논쟁 당시 서구에서 사용하던 ‘데우스’(Deus)라는 명칭은 오늘날 한국의 신자들이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이름만큼이나 역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테트라그람마톤’(Tetragrammaton : 네 글자로 된 이름)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유대인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교 전체의 역사 속에서 신의 이름은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는 영역이었으며, 결국 그 이름의 음가 역시 역사의 두꺼운 먼지 속에서 묻힌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칠십인역에서 등장하는 그리스어 테오스를 라틴말로 번역하여 불가타 성서에서 데우스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에 비해서 의례 논쟁에서 신의 이름에 대한 중국식 명칭 문제가 부각되었던 것은 다른 맥락을 지닌 것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천이나 상제와 같은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는 그 명칭이 가리키는 대상이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신의 속성에 부합하는가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도미니코회나 프란치스코회의 반대자들은 한자어 천이나 상제는 물질적인 속성을 지닌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고, 물질세계를 창조한 창조주의 속성과는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신의 이름이 문제가 되는 맥락이 이와 같다면, 논리적인 연장선 위에서 영혼이라는 개념도 아울러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의 이름과 관련한 논점을 신과 영혼 개념이 지닌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해석 문제로 치환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드는 의문은 공자 숭경 의례와 조상제사를 변호하면서 예수회가 이 의례들을 ‘종교적인 의례가 아니라 시민적 내지 사회적 예식’이라고 주장하였다는 점과 관련된다. 오늘날의 언어적 감수성에서는 시민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은 종교적인 것과 별개의 영역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적인 관점으로 예수회의 주장을 바라보면, 문제가 된 의례들이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내지 시민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지닌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두 영역을 별개의 것으로 놓고 서로 상이한 성격을 지녔다고 보는 것은 정교분리라는 근대적인 사유체계를 토대로 하여 성립하는, 말하자면 지극히 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17세기 당시의 언어적 감수성에서 시민적 혹은 사회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면, 이것은 오늘날의 언어적 용례와 반드시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과연 예수회 선교사들이 그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변론하였다면,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담고 사용되었는지를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제기하고자 하는 의문점은 예수회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리에 등장하는 개념들이다. 즉 도미니코회나 프란치스코회, 나중에는 파리 외방전교회도 예수회의 주장과 반대로 중국인들이 행하던 공자 숭경 의례와 조상제사가 미신(superstitio)이라고 주장하였다. 의례 논쟁을 다루는 많은 연구들이 이 용어를 우상숭배(idololatria)와 혼용하고 있다. 하지만 미신, 우상숭배, 나아가서 이단(haeresis) 등과 같은 개념들은 결코 혼용될 수 없는, 나름의 독자적인 내포와 외연을 지닌 개념들이다. 게다가 괄호 속의 라틴말은 그 당시 유럽에서 통용되던 개념어이고, 괄호 밖의 한자어는 현재 우리가 정착시켜 사용하고 있는 번역어이다. 따라서 조상제사와 공자 숭경 의례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논리가 어떤 용어를 사용하여 이루어졌는지를 추적하는 일은 당대의 논리 구조를 밝히는 일이면서 동시에 현재 사용되는 번역어의 의미론적 변천 과정을 다루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하에서는 위에서 제기한 세 가지 의문점들을 바탕으로 의례 논쟁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담론들을 차례로 분석해 보자.


3. 미신(Superstitio)과 이단(異端)의 변주곡

중국 의례 문제에 관해서 예수회의 입장을 비판하였던 쪽의 논리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자. 최초로 중국 의례 문제를 교황청에 제기하였던 모랄레스의 1643년 〈17개 항 질의서〉를 보면, 그 가운데 공자에게 바치는 의례의 문제를 거론한 제8항, 조상제사 문제를 다루는 제9항, 그리고 신주 문제를 다룬 제11항 등이 비판론의 골격을 알 수 있는 자료들로 등장한다. 또한 복건 대목구장 매그로 주교의 1696년 포고령 제4항에 공자 의례 및 조상제사에 대한 교도권의 판단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글레멘스 11세 교황의 1704년 교령에서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지금까지 거론한 자료들 가운데 중국 의례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입장의 논리가 드러나 있는 부분을 차례로 제시하면서, 이에 대한 우리의 성찰적 접근을 시도하겠다.

먼저 모랄레스는 질의서 제8항에서 공자 의례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모랄레스의 질의서는 일단 중국 의례에 관한 일반적인 진술을 행한 다음에, 이에 대한 본인의 질문 사항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서 포교성성은 그 심사를 검사성성 신학자들에게 위임하였고, 검사성성의 결정사항은 각 항목의 제일 말미에 첨부되어 있다.

제8항. 앞서 말한 왕국에서 중국인들은 도덕철학에 학식이 깊은 어떤 스승을 모시고 있다. 그는 옛날에 죽었는데, 공부자(孔夫子)라 불린다. 그는 가르침과 규칙들, 그리고 저술들 때문에 왕국 전역에서 신분과 지위에 상관없이 여타의 모든 사람들과 심지어 왕들까지도 적어도 사변적인 부분에서는 본보기로 삼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인정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성인처럼 공경하고 칭송하고, 또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앞서 말한 스승에게 바치는 사원들이 건립되었다. 관리들은 실제로 일년에 두 번 그의 사원에서 성대하게 희생 제사를 바치는 것에 속박되어 있다. 바로 그 자신들이 사제의 의무를 수행하는 자들이다. 또한 일 년 내내 한 달에 두 번씩 성대한 예식 없이 희생 제사를 바친다. 학자들 가운데 몇 명도 협력하기 위해서 그와 함께 모인다. 그와 같은 희생 제사에서 그들이 바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즉 도살한 돼지 통째로 한 마리, 암염소 통째로 한 마리, 촛불들, 술, 꽃들, 향 등이 그것이다. 또한 모든 학자들은 자신의 직위를 받을 때, 그 스승의 사원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그의 제대 앞에 초와 향을 바쳐야 한다. 이 백성들 모두의 표준적인 생각에 따르면, 이런 숭배 전체, 즉 희생 제사와 공경은 그가 남긴 저술에 담긴 훌륭한 가르침에 대한 감사의 행위를 겨냥한 것이다. 또한 공부자 자신의 공덕으로 말미암아 공부자로부터 최고의 재능, 지혜 그리고 지성 등의 행복을 얻으려는 것이다.5)

모랄레스의 질의. 그리스도인이거나 혹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관료와 학자들이 부름을 받고 모였을 때, 앞서 말한 사원에 들어가서, 그러한 희생 제사를 드리거나, 혹은 이와 같은 희생 제사에 참석하거나, 혹은 그 제대 앞에 무릎을 꿇거나, 혹은 특히 그러한 우상숭배 제물과 봉헌물에 속한 어떤 것을 받을 수 있는지. 왜냐하면 저 불신앙인들은 그러한 우상숭배 제물에서 나온 것을 먹은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학문과 지위에서 큰 진전을 이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6)

검사성성의 결정.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의심스러운 어떤 구실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될 수 없다.7)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모랄레스가 문제를 제기하는 핵심 사항은 이러하다. 즉 중국에서 공자라는 인물이 성인으로 숭배되고 있으며, 그에게 봉헌된 사원이 존재한다. 그리고 공자에게 드리는 의례를 집전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로 따지자면 일종의 사제와 같은 직분을 가진 사람이다. 아울러 공자에게 제사를 드리는 목적은 그의 가르침에 대한 감사 행위와 더불어 의례 과정에서 봉헌된 음식물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학문적 성취나 사회적 지위의 획득과 같은 현실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조상제사에 관한 논의에서도 동일한 구조로 반복된다. 그러면 모랄레스의 질의서 제9항을 살펴보자.

제9항. 위에서 언급된 스승 공부자에 의해서 전승된 가르침은 중국인들에게 위반할 수 없이 준수해야 하는 관습이다. 그것은 중국의 모든 지방에서 자신의 돌아가신 조부모와 조상들에게 봉헌되는 사원이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원들 각각에는 이러한 가족들이 모두 1년에 두 번 모여서, 앞서 말한 자신의 조상들에게 예식의 많은 준비물들로 성대한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한다. 또한 많은 초과 꽃, 향들로 장식된 제대에는 돌아가신 부모 혹은 조부모의 그림이나 형상을 놓아둔다. 이 희생제사에는 사제의 의무를 행하는 사람과 그의 보조자들이 있다. 그들은 고기들, 술, 초, 향, 암염소의 머리 등을 바친다. 그런데 그 백성들의 공통된 생각으로는, 이러한 희생 제사는 앞서 말한 그들의 조상들에게 감사를 돌리고, 조상들로부터 받은 은혜들과 받기를 원하는 은혜들에 대해서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제대 앞에 엎드려서, 건강과 장수, 풍부한 수확, 많은 자손, 큰 번영, 그리고 모든 재난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청하며 많은 기원을 행한다.8)

모랄레스의 질의. 그리스도인은 거짓으로 그리고 외적으로만, 조금 전에 말해진 바와 같이, 불신앙인들과 섞여서, 사원 안에서 혹은 집에서 혹은 무덤에서, 공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그런 희생 제사에 참석하거나 혹은 그러한 제사에서 어떤 시중드는 일을 할 수 있는지, 혹은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이런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허용될 수 있는지.9)

검사성성의 결정.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거짓으로 혹은 외적으로도 조상들에 대한 존경심에서 희생 제사들에 참석하도록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조상들에게 바치는 기원들이나 혹은 그 조상들에 대한 동포들의 어떠한 미신적인 의례들에도 참석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앞서 말한 것들(희생 제사들) 주위에서 어떤 심부름을 하는 것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10)

우리는 모랄레스의 질의에 대한 검사성성의 결정 사항 안에서 처음으로 중국 의례에 대한 명시적인 지칭어가 등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미신적인 의례’, 줄여서 말하자면 ‘미신’(superstitio)이라는 개념어이다.11) 이후로 수많은 문헌들에서 서로 경합을 벌이는 몇 가지 상이한 개념들이 출현하지만, 기본적으로 중국 의례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기 위하여 수미일관해서 사용되는 용어는 역시 이 ‘미신’이었다. 앞서 말한 복건 대목구장 매그로 주교의 1693년 포고령에서도 중국인들의 공자 경배 의식과 조상제사를 미신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4. 선교사들은 어떤 이유로도 그리스도인들이 해마다 두 차례 공자와 조상들에게 바치는 장엄한 희생 제사들이나 봉헌식들을 관장하거나, 시중들거나 혹은 참석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런 봉헌식들이 미신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고 선언하는 바이다.12)

공자나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가 미신적인 행위, 혹은 미신에 오염된 의례들이라고 판단한 데에는 신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왜냐하면 각종 중국 의례들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어떻게 현존하며 그 의례 과정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하는 문제에서 신주가 바로 그 매개물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랄레스가 바라본 신주의 존재는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자.

제11항. 자기네 조상들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하여 중국인들은 작은 박판과 같은 것(즉 신주)을 사용한다. 그 신주에 자신의 돌아가신 조상들의 이름들이 새겨지고, 그들은 이것들을 영혼들의 거처라고 부른다. 그들은 죽은 이들의 영혼이 희생 제사와 봉헌물들을 받기 위해서 이 신주에 와서 자리 잡는다고 여긴다. 그리고 앞서 말한 신주들은 고유한 의미에서의 제대에 장미꽃과 초들, 등불들 그리고 향과 함께 배열된다. 이 신주들 앞에서 그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기원을 드린다. 그리고 자신의 위급한 일들과 고달픈 일들 속에서 그들 죽은 이들에 의해서 도움이 주어지기를 원한다.13)

여기서 보이듯이 의례가 바쳐지는 대상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신주라는 존재는 공자나 조상의 영혼이 현세의 공간으로 돌아와서 자리를 잡는 거처로 인식된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 신주에 내려와서 자리를 잡음으로써 제사의 봉헌물들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신주 앞에서 기원을 드리게 되면, 제사를 받는 존재들이 제사를 드리는 현실의 사람들에게 원하는 도움을 갖다 준다는 믿음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매그로 주교의 포고령 제5항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5. 우리는 복음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곳에서, 개인들의 집에서 죽은 사람에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세워진 신주들의 사용을 없애려고 노력하였던 선교사들을 크게 칭찬하는 바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한 발짝 내디딘 만큼 이후에도 계속하기를 권고하노라. 그러한 사용을 사실상 폐지하는 것이 어려운 곳에서는, 최소한 이러한 사태까지는 균형이 요구된다. 신조(神祖), 신위(神位), 영위(靈位)와 같은 글자들은 제거하고, 오직 돌아가신 분의 이름만 신주에 새기도록 하거나, 혹은 제일 끝에 위(位)자가 덧붙여지도록 한다.14)

그는 이처럼 신주의 사용에 대해서 분명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 그 핵심적인 결론은 신주 역시 미신에 오염되어 있으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다만 몇몇 경우에 교우들의 어려움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허용할 수 있는 범위도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신주에 새겨지는 글귀의 가감에 관련한 문제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신주의 사용에서 무엇이 핵심적으로 문제가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신, 영 등과 같은 글자가 새겨짐으로써 제사를 받는 대상의 속성이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글자가 들어 있는 한 그 의례는 미신 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처라는 뜻을 담은 ‘위’(位)자의 허용은 최소한의 양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신주의 속성과 그것이 표방하는 제사 대상의 존재론적 지위를 감안한다면, 거처라는 글자 역시 용납하기 어려운 문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훨씬 뒤의 일이지만 글레멘스 11세 교황이 1715년에 반포한 칙서(〈Ex illa die〉)에서는 이마저도 금지되었다.

마지막으로 돌아가신 조상들의 신주를 자신들의 개별적인 집에 모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 지방의 관습에 따르면, 이 신주에는 ‘자리[位]’ 혹은 ‘영혼의 거처’ 또는 ‘아무개의 영’을 의미하는 중국 글자가 새겨져 있다. 더구나 앞의 것과 마찬가지로 ‘거처’ 혹은 ‘자리’라는 훨씬 더 축약된 다른 글자가 새겨진 신주 역시도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15)

그렇다면 왜 모랄레스나 매그로 주교와 같은 이들은 공자와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 의례가 미신이거나, 혹은 미신에 오염되어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일까? 그 근거는 무엇일까? 물론 앞서의 인용문들을 다루면서 몇 가지를 제시하였다. 즉 숭배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로서 사원의 존재, 의례를 집전하는 사제의 존재, 참례자들이 그 의례를 통해서 기대하는 현실적인 목적의 존재, 숭배 대상이 의례 장소로 하강하는 구체적인 장소이자 의례 행위자와 의례 대상자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물인 신주의 존재 등이 주된 공격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런 내용들이 종합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1704년에 나온 글레멘스 11세 교황의 교령이다. 즉 이 교령은 매그로 주교가 복건 대목구 내의 반대 세력들과 충돌한 뒤 교황청에 자신의 포고령이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아니면 어긋나는지를 심의해 달라고 청원한 데에 대한 응답이었다.

매그로 주교의 청원이 있자, 그의 포고령에 대해서 인노첸시오 12세 교황은 검사성성에 그 검토를 위임하였다. 이에 1697년 검사성성은 매그로의 포고령을 연구하고, 의례 논쟁에 개입된 양측에 의해 제시된 다른 문서들을 재검하는 임무에 착수하였다. 1699년 이런 예비 작업이 완료되었으며 준비된 자료는 인노첸시오 12세 교황에 의해서 임명된 네 명의 전문적인 신학자들에게 제출되었다. 하지만 1700년 교황의 서거로 작업은 잠시 중단되었다가, 후임 교황 글레멘스 11세에 의해서 재개되었다. 글레멘스 11세 교황은 검사성성에 이 문제를 특별히 숙고하도록 지시하였고, 그 결과 1704년 10월 20일에 글레멘스 11세의 이름으로 교령이 선포되었다.

매그로의 포고령 가운데 제4항, 즉 공자 숭경 의례와 조상제사 문제를 검토한 검사성성은 글레멘스 11세 교황의 교령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하였다. 특히 제4항에 대한 검토는 제일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모두 여섯 가지의 하위 질문들을 다시 던지고는 이에 대해서 일괄하여 한꺼번에 답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한 해에 여러 차례 공자와 조상들에게 바쳐지는 성대한 희생 제사들이나 봉헌 제사들이 미신에 오염되어 있는지. 그래서 어떤 이유로도 그 제사들에 참석하는 것이 허락될 수 없는지. 의혹의 이유는 공자와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제국에서 으뜸가는 지위를 차지하는 학자 집단이 공자를 단지 스승으로서만이 아니라, 성인으로서도 공경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16)

그런데 위의 질문에서는 중국에서 공자가 성인으로 숭배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집중적인 검토가 이루어진다. 먼저 중국의 예서 한 권(Ta Ming Hoey Tien)을 인용하면서, 공자의 덕은 천지의 수준에 도달하였고, 가르침은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보다 더 뛰어나며, 더구나 사람들이 존재하게 된 이래로 아무도 그에 미치지 못했다고들 말하며, 그의 영은 지나간 성인들보다 더 탁월하다는 구절을 소개하였다.17)

한편 이 성이라는 용어는 지혜라기보다는 차라리 거룩함을, 혹은 지혜와 거룩함을 동시에 가리키며, 거룩함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공자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적어도 몇 명만은 더 높은 성이라 불리고 여기에 포함되었다는 점,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중국의 고전적인 책들에서 표현된 말들로 일컬어진다는 점, 그리고 죽은 뒤에 하늘로 높이 올라가서 하늘에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점, 또한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그들을 성인으로 공경하였고, 또 지금까지 그러한 존재로서 찬양하고 있다는 점 등을 거론하였다.18) 그리고 이 범주에 드는 역사적 인물들로서 요(Iao), 순(Xun), 문왕(Ven Vang), 주공(Cheu Kung), 공자 등을 거명하였다.

또한 검사성성은 공자에게 바치는 제사가 거행되는 장소에 대해서도 검토하였다. 이에 따르면, 개별 도시들에는 공자에게 바쳐진 건물이 있는데, 그것은 학교도 강당도 아닌 것으로 보이며, 차라리 소성당에 해당한다. 중국말로 묘라고 불리는데, 이 용어는 우상들의 사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몇몇 저술가들에 의해서 앞서 말한 건물은 사원 혹은 사당이라고 불린다. 이 건물 안에는 공자의 초상, 혹은 차라리 이런 말이 새겨진 신주가 있다. 즉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지혜로운 첫 스승 공자의 영의 거처’라는 말이 있는데, 중국 글자로는 ‘지성선사공자신위’(至聖先師孔子神位)이다.19)

검사성성의 검토 내용은 신학자들의 충분한 토론과 자료 참고를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단히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다양한 참고 문헌들이 제시되어 있다. 특별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제사를 바치는 대상, 즉 공자에 대한 성격 규명이다. 검사성성의 신학자들에 따르면 중국인들이 숭배하는 공자는 서양의 용어법, 특별히 그리스도교의 용어법으로 한다면 성인에 해당한다. 그러면서 한자어 성(聖)과 라틴어 상투스(sanctus)를 등치시키고 있다. 그래서 ‘성’은 거룩함을 나타내는 용어이고, 따라서 중국인들에게 ‘성인’은 ‘죽은 뒤에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에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권한을 가진 존재’이다. 이렇게 되면 분명하게 공자에게 바치는 의례는 기념이나 존경과는 거리가 멀며, 현대의 용어법으로는 종교적인 의례, 당시 유럽 그리스도교의 용어법으로 미신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또한 공자에게 바치는 제사가 진행될 때 공자의 신주에 내려오는 존재가 과연 누구인가의 문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즉 죽은 공자의 아니마(anima)가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스피리투스(spiritus)가 내려온다고 한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아니마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나중에 다시 다를 것이지만, 여기서는 흔히 영(靈)이라고 번역되는 스피리투스의 존재에 주목해 보자. 아니마와 스피리투스는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유대교 역사와 그리스도교 역사 전체를 통괄하여 논할 때 항상 논란이 되고 배격되었던 것은 이방신 혹은 잡신에 대한 숭배였다. 그런데 그 이방신이나 잡신을 묘사하는 교회 용어는 대개 스피리투스였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으면 육체로부터 아니마는 분리되지만, 나중에 미신행위 과정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다시 인간을 찾아오는 것은 아니마가 아니라 그의 변형체인 스피리투스라는 것이다. 결국 특정 숭배 현상이 미신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구분선은 그 숭배의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중국 의례의 경우에 공자나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에서 특정한 스피리투스가 의례 장소로 찾아온다고 말하게 되면, 그리스도교의 논리 속에서 이런 의례는 미신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처럼 아니마와 스피리투스의 관계는 본래 그리스도교 신학의 테두리 안에 들어 있는 신학적인 주제였다. 하지만 의례 논쟁을 거치면서, 그리고 그 이후 서구 사상사의 맥락 속에서 이 양자의 문제는 타 민족, 타 문화권의 현상들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중요한 논리체계로 활용되는 측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근대 인류학의 탄생과도 결부된 문제였다. 즉 19세기에 가서 탄생한 근대적 지식체계로서의 인류학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북아메리카 등지를 다녀온 여행자, 선교사, 군인, 상인들이 기록한 부족사회의 문화와 관습에 대한 기록과 관찰을 바탕으로 수립되었다. 훨씬 후대의 일이지만 프랑스의 에밀 뒤르켐은 에드워드 타일러의 애니미즘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친 적이 있었다.

아니마는 스피리투스가 아니다. 아니마는 육체에 붙어 있으며 예외적으로만 빠져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아니마는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한 그것은 어떤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반대로 스피리투스는 일반적으로 특정한 사물 속에 거주하고 있지만 그 사물로부터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다. 아니마는 변형되지 않고는 스피리투스가 될 수 없다.20)

즉 뒤르켐의 논법에서 비서구 부족사회의 다양한 숭배행위들은 죽은 사람의 몸에서 빠져 나간 아니마를 숭배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아니마가 특정한 형태로 변형됨으로써 인간에게 무언가 유익함이나 해악을 가져다줄 수 있는 존재인 스피리투스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뒤르켐은 비서구 사회에서 죽은 사람과 관련된 의례 문화를 다룰 때에 자신들에게 익숙한 개념 장치를 이용하여 낯선 것을 친숙한 것으로 변형시키는 행위를 통해서 이해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에서 직접적으로는 중국의 의례문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 평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것이 의례 논쟁이었지만, 그 과정에 개입된 몇 가지 개념장치들은 18세기 이후 서구인들의 자기 인식 및 타자 인식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다시 글레멘스 11세 교황의 1704년 교령으로 다시 돌아가서 조상제사를 미신으로 단죄하는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것은 교령 제4항의 둘째 질문에서 시작한다. 둘째 질문의 서두에서 공자에게 바치는 덜 성대한 예식들의 문제를 간단히 검토한 다음에, 본격적으로 조상제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둘째부터 여섯째 질문에까지 걸친 조상제사 문제는 글레멘스 교황의 1704년 교령에서 가장 긴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 조상제사에 대해서 판단하는 기본적인 논리 구조만을 추려서 정리해보자.

조상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첫 번째 질문에서 제기되었던 성대한 봉헌식들과 관련해서 의혹의 이유는 이러하다. 중국에서 돌아가신 부모 혹은 조상들은 4대까지 공적인 의례와 개별적인 의례로 예우를 받는다. 그들에게 건물을 봉헌하는데, 그 안에서 행해지는 것들로 보거나, 묘라는 이름으로 보거나, 이것은 단순한 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소성당 혹은 사원으로 보인다.21)

또한 《예기》라는 예식서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의례에 따라서 조상제사에서는 동물의 피를 바친다는 것 외에도, 봉헌 제사 혹은 희생 제사에 사용된 그릇들에 대해서는 이것들을 앞서 말한 사원 바깥에서 어떠한 용도로도 사용하도록 허락되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앞서 말한 봉헌식에서 귀족들과 특히 황제들이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고 또 그렇게 되어 있는 복식들은 동일한 《예기》에서 규정된 특별한 의례에 따라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못쓰게 되거나 헌것이 되면 세속적인 용도에 사용되지 않도록 태워야 한다.22)

또한 주당이라고 불리는 건물들에는 앞서 말한 죽은 이들의 영에 대한 숭배를 드러내도록 지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종묘라고 불리는 건물과 마찬가지로 주당이라고 이름 붙여진 건물 안에도 으뜸가는 조상들의 초상이나 동상이 발견되며, 혹은 그곳에는 공통적으로 조상들의 신주가 탁자 혹은 제대 위에 봉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주에는 ‘돌아가신 조상 아무개의 영의 거처’라고 새겨져 있다.23)

그리고 이 신주에 대해서는, 적어도 오늘날에는 단지 영들의, 혹은 죽은 이들의 무덤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영들 혹은 죽은 이들의 영혼들이 그 안에 거주하도록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24) 그래서 《가례》라고 불리는 중국의 의례서에 따르면, 신주 앞에 서서 무릎을 꿇고 말을 하면, 영들 혹은 영혼들이 초대받아 집으로 돌아와서 그 신주 안에 머문다고 한다.25) 이렇듯 많은 중국인들은 위에서 말한 예식들에 초대받은 조상의 영들이 와서 누린다고 여기거나 믿는다. 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도 영들이 실제로 현존하고, 도래하여 이 모든 것을 누린다기보다는 상상에 불과한 것 혹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고 하였다.26)

조상제사에 대한 최종적인 견해는 조상의 이름으로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이 이루어지는가의 여부이다. 즉 가례라고 불리는 의례에서 조상들의 이름으로 혹은 조상들의 명령에 따라서, 예식들을 총괄하는 지도자에 의해서 주요 집전자들에게 그리고 은연중에는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복들이 약속된다는 것이다.27)

또한 고전적인 의례서들에 따르면 더 많은 것들이 이야기되고 있다. 중국인들은 상제뿐만 아니라 산과 강의 다른 영들에 의해서도 인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실제로 죽은 자들의 영에 의해서 많은 복들이 잘 행해진 앞서 말한 봉헌 제사들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옛날부터 가르쳤고, 믿었거나 적어도 생각되었다.28)

셋째 질문에서 주목할 것은 문제가 되는 의례들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행동들이다. 이에 대해서 그러한 예식들이 진행되는 가운데 드러나는 구체적인 행동들을 열거함으로써 그 속성이 미신적인 관념에 기초한 것임을 보이고자 하였다.

특별히 《가례》 예식서에는 다음의 사항들이 의무로 기대되고 있다. 이른 아침에 지정된 훌륭한 옷을 입고서, 조상들에게 봉헌되었으며 그 전날 관습에 따라서 장식된 건물로 각자 간다. 건물 안에서는 자기 조상들의 신주들 앞에서 손을 씻은 다음에 여러 번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 절을 하고는 성궤에서 담당 제관들이 꺼내어 탁자 또는 제대 위에 놓는다. 밀초로 불을 켜고는, 향을 피우고, 술을 맛본 다음에 짚으로 만든 작은 다발 위에 붓는다(이 예식들은 영의 하강을 가리킨다). 다양한 과일들과 특별히 ‘차’라고 불리는 음료를 바치거나 그 신주들 앞에 차려 놓는다. 그리고는 여러 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서 떠나가는 영들에게 어떤 의미에서 잘 가라는 작별의 말을 한다는 것이다.29)

이상에서 개괄하여 소개한 매그로의 포고령 제4항에 대해서 여섯 가지 질문을 제기한 검사성성은 각각의 질문들에 대답하기보다는 제4항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답변하였다. 즉 이러한 여섯 가지 질문 조항들에 대해서 검사성성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어떤 식으로도 그리고 어떤 이유로도 그리스도교 신자가 매년 춘분과 추분에 공자와 조상들에게 바치는 성대한 희생 제사들 혹은 봉헌 제사들을 주재하는 일, 시중드는 일 혹은 참석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미신에 물들어 있다. …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은 미신과 분리될 수 없다.30)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논리적인 틀을 구축하여 공자와 조상에게 드리는 중국인들의 의례가 미신이라고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이 ‘미신’이라는 용어 자체는 특정한 입장을 정통으로 전제한 다음에 상대방을 경멸적으로 비하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용어임에는 분명하다. 즉 공평무사하고 객관적인 관찰을 토대로 제출되는 진술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도 자기가 신봉하는 대상을 우상으로 부르거나 예배 행위를 미신적이라고 일컫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타인의 종교 행위나, 다른 사람들이 공경하는 대상에 대하여 그릇됨을 지적하고 판단하는 뜻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게 된다.31)

더구나 의례 논쟁에서 중국 의례의 본질을 지칭하기 위하여 미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교황청과 동아시아 선교지에서 특정한 문화현상을 평가하는 용어로서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한정하여 그 유효성을 인정받았던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대적 조건이 변화하고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게 되면서 사용된 용어나 평가 내용도 달라졌던 것이다. 이렇게 바라보면 의례 논쟁 당시에 중국 의례를 미신이라고 평가할 때에는 상대방의 문화와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가르침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헤테로독시아(heterodoxia)의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게다가 미신, 즉 라틴말 ‘수페르스티치오’라는 개념은 서구 역사에서 형성해온 나름의 자체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래 이 말은 고대 로마 사회에서 ‘자식의 장수를 기원하며 기도와 제사로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 자들’을 지칭하였다. 그러니까 ‘신들에게 제사드리는 일에 알맞은 모든 일을 부지런히 재검토하고 다시 훑어보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담은 렐리지오수스(religiosus)와 대립되는 것, 즉 ‘정상적이지 않은 과장된 형식으로 신을 섬기는 자들’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특별히 고대 로마인들이 수페르스티치오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로마 바깥의 이방인들, 즉 이집트나 페르시아 지역 사람들의 점복술을 비하하거나 배타적인 시선으로 평가할 경우였다.32)

그 뒤 이 용어는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이 그리스도교를 비하하기 위하여 사용된 적도 있었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당시 포고령에서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 미신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이제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다신 숭배 관습을 미신으로 공격하게 되었으며, 제국 변방의 게르만적 관습이나 시골 농민들의 민속신앙을 미신이라고 지칭하면서 잘못된 믿음에서 오는 잘못된 숭배 행위들로 근절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중세말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16세기에 들어와서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 등 이른바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다시 변하기 시작하였다. ‘오직 성서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를 모토로 내세운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지도자들이 성인공경과 성체성사를 비성서적이며 비합리적인 미신이라고 비판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공격 속에서 가톨릭교회 역시 내적으로 자기 혁신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를 개최하여 인문주의자들의 비판에 대응하여 교회의 전례 가운데에서 신빙성이 없거나 근거가 희박한 요소들을 삭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33)

이처럼 의례 논쟁이 벌어지기 이전까지 서구 역사에서 ‘수페르스티치오’는 수시로 그 공격 대상이 바뀌면서도 줄곧 특정한 입장을 정통적인 가르침으로 간주하고 이에 비추어 다른 문화나 관행에 속한 의례행위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일반적인 용례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그 외연과 내포가 어찌되었든 진정한 신앙, 믿을 만한 근거를 지닌 가르침을 한쪽에 두고 다른 한쪽에 그 반대물을 배치하는 양분법적인 사유의 축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이 ‘수페르스티치오’라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례 논쟁 이전까지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라틴어라는 공통의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 문화적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그러므로 용어의 변경은 필요하지 않으면서, 그 속에 담을 내용물만 재점검하면 되는 일이었다. 때로는 이집트나 페르시아의 점술가,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 추종자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흔히 바바리안이라고 지칭되는 로마제국 변방 사람들, 혹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바라본 가톨릭 교회 등 시니피에(signifie)는 수시로 변경되었지만, 시니피앙(signifiant)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의례 논쟁에서 ‘수페르스티치오’는 중국 문화를 서술하고 분석하기 위해서, 그리고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중국어로 번역되어야 하는 새로운 사정에 직면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당연히 ‘미신’이라는 번역어를 여기에 대응시키겠지만,34)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페르스티치오’의 번역 과정에는 헤테로글로시아(heteroglossia)라는 뜻밖의 사태가 도드라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 경위는 이러하다. 앞서 의례 논쟁의 전개과정에서도 살펴보았지만, 글레멘스 11세 교황이 중국 교회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하여 두 번째로 파견한 특사 메차바르바가 중국에 도착하여 강희제를 알현하였을 때, 이미 강희제는 측근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번역한 글레멘스 11세 교황의 1715년 칙서(〈Ex illa die〉)를 읽은 뒤였다고 하였다. 이 번역문이 현재 남아 있는데, 그 속에서 중국 의례에서 문제가 되는 요소로 가리키는 용어인 수페르스티치오가 이단(異端)로 번역되어 있다.35) 오늘날의 번역 관행에서는 이단이라는 용어는 흔히 라틴말 헤레시스(haeresis)의 번역어로 사용된다. 하지만 18세기 당시에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의 가교 역할을 하였던 황실 측근의 선교사들은 수페르스티치오를 이단으로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페르스티치오가 서양 역사에서 정통적인 신앙에 의해서 경멸당하고 배제되던 범주였다면, 이단은 중국 경학의 역사에서 줄곧 비판적인 평가의 대상을 범주화하는 개념이었다. 즉 유교의 입장에서 볼 때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된 실마리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종국에 가서 엄청난 오류에 빠진 학파나 주장을 지칭하는 개념이 바로 이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맹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비판한 이래로, 불교, 도교, 양명학 등 시대에 따라서 다양한 존재들이 이단이라는 범주에 포괄되었다.

이처럼 수페르스티치오와 이단은 각기 다른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지닌 낱말들이다. 그런데 두 말을 하나로 엮어서 등치시키는 순간에 예기치 않은 효과가 발생한다. 뒤엣 낱말이 앞엣 낱말을 자신의 맥락 속으로 끌어들이면서 용어의 의미 효과를 자신의 방식으로 전변시켜 버리는 것이다. 즉 강희제는 글레멘스 11세 교황의 칙서를 읽은 뒤 자신의 느낌을 글로 달았는데, 자신이 교황의 금지령을 읽어 보니 이것은 필경 화상(和尙 ; 불교를 지칭)이나 도사(道士 ; 도교를 지칭)와 같은 이단(異端) 혹은 소교(小敎)들과 서로 같더라고 하였다. 이처럼 강희제는 공자제사와 조상제사를 수페르스티치오, 중국어로 번역하여 이단으로 단죄하는 논리를 보고는, 곧바로 그렇게 주장하는 그리스도교가 이단이라고 맞받아친 것이다. 이런 경우에 앞엣 낱말은 원래 자신의 의미 내용이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맥락 속에 들어가서 와전되는 길을 막을 수가 없게 된다.

또한 강희제는 서양인들 자신이 이단의 처지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고 돌이켜 중국의 도리를 가리켜 이단이라고 말한다고 하였다.36) 즉 중국의 경천지도는 언제나 경외심을 갖고서 하늘을 본받고 상제의 명을 받드는 데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지만, 서양인들은 조물주를 위하는 줄만 알고 구구하게 복을 빌고 편안만을 구하니 어찌 비할 바가 있을 것이며, 하물며 불교와 도교의 이치(즉 이단)와 다를 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37) 아울러 강희제는 너희 서양인들은 일자무식이고 한 구절도 통하지 못하는 주제에 입만 열면 불경이나 도장은 이단 소교의 말이라고 하지 않으면서 왜 거꾸로 공자의 도리를 가리켜 이단이니 죽일 무리니 어그러진 도리라고 하느냐고 힐난하였다.38)

강희제는 이단이라는 용어와 관련해서만 중국적인 방식으로 그 의미를 전유한 것이 아니었다. 성인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중국적인 논리로 교황청의 입장을 뒤집는 말을 하였다. 즉 1720년 12월 17일에 메차바르바를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하였다. “공자를 성인이라 부르며 공경하는 것은 오상과 백행의 큰 도 때문이다. 이것이 지성선사께서 마땅히 존경받는 이유이다. 너희 서양에도 성인이 있지 않느냐. 그 행실로 말미암아 본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존경하고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투르농과 매그로 등은 지식이 편협하고 얕아서 하늘에 대해서도 말할 줄을 모르고 성인을 존숭할 줄도 몰랐다.”39) 그러니까 중국이나 서양이나 모두 성인을 존숭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데, 왜 유독 우리의 성인에 대해서 문제를 삼느냐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국적인 사유와 언어적 감수성에서 성인이라는 개념을 전유하여 이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들을 왜 헤테로글로시아라고 말하는 것인가? 원래 헤테로글로시아라는 말은 언어의 불확정성 또는 상이한 언어들 사이의 혼효 현상을 가리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용어로 미하일 바흐친이 처음 사용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언어에서 낱말들은 절반 정도는 타자의 것이다. 즉 화자가 자신의 의도, 자신의 액센트를 가지고 그 낱말을 조작할 수 있을 때에만 온전하게 그 자신의 것이 된다. 이런 전유의 순간에 선행한 때에는 그 낱말이 중립적이고 비인격적인 언어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타자의 입술, 타자의 맥락 속에서 타자의 의도에 종속되기도 한다.40)

이렇게 본다면 의례 논쟁에서 모랄레스와 매그로 주교 그리고 검사성성의 신학자들이 공자 의례와 조상제사를 비판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수페르스티치오’라는 용어와 이 용어의 중국 번역어 ‘이단’은 어느 한 편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전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부각된다. 즉 양자 모두에 의해서 자신의 맥락 속에서 재전유되는 순환적인 과정을 거치고 있음이 나타난다. 이것은 흔히 동양과 서양의 본격적인 만남으로 묘사되는 의례 논쟁 과정이 실제적으로는 대단히 역동성을 지니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주지하다시피 당대의 의례 논쟁은 비판과 경멸의 언어들을 생산하는데 머물고 말았다. 하지만 만약 헤테로글로시아적 상황이 연출하는 언어적 역동성이 서로 상대방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이어졌더라면 훨씬 더 풍부한 사유의 가능성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의 과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 한국사회에서 천주교나 개신교가 유교식 조상제사에 대해서 취하고 있는 태도를 보자면, 과거 의례 논쟁 당시의 인식 수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천주교가 상대적으로는 수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두 언어, 서양의 언어와 동양의 언어, 그리스도교의 언어와 유교의 언어 사이에서 이종 언어 간의 혼효를 기피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언어적 가능성, 말하자면 보편적 복음의 진리를 한국어라는 특수한 지역 언어로 표현하려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의 한계를 안고 있다고 하겠다.


4. 자기라는 거울에 투사된 것들, 예절 혹은 정치

위에서는 의례 논쟁에서 제기된 쟁점들 가운데 비판론의 핵심을 구성하는 개념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보고, 그 속에 담긴 의미론적 맥락을 추적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것은 바로 ‘수페르스티치오’, 현재의 용어법으로 미신 개념이었다. 의례 논쟁에서 미신 개념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자기 언어(수페르스티치오)로 타자의 모습(중국 의례)을 그려내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번에는 의례 논쟁 과정에서 중국 의례를 용인하자는 입장의 주된 논리가 무엇이었는지를 찾아보자. 이것은 앞서의 작업과는 반대로 타자의 모습으로 자기의 언어를 재구성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수회가 중국 의례를 긍정적으로 묘사할 때에 사용되는 용어법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언어적 감수성과 결부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치빌리스’(civilis)와 ‘폴리티쿠스(politicus) 또는 푸블리쿠스(publicus)’라는 개념이다.

모랄레스의 논박이 이루어지자, 이에 대해서 예수회는 중국 의례에 관한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랄레스의 질의서에 대해서 검사성성의 결정이 내려지고, 교황의 이름으로 교령이 선포되자, 당황한 예수회에서는 마르티니를 로마로 파견하여 다시 교황청에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고 재심을 청구하였다. 1656년 3월 23일자로 나온 검사성성의 답변서에는 마르티니의 의견개진이 실려 있다.

제3항의 질의: 공자의 방에서 행해지는 직위수여의 예식을 그리스도인 학자들이 합법적으로 거행할 수 있는지. 왜냐하면 거기에는 어떠한 하급제관도, 혹은 우상숭배적인 분파에서 나온 하급 심부름꾼도 개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우상숭배자들에 의해서 실행되지 않으며, 다만 학생들과 철학자들만이 모인다. 공자를 자신의 스승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처음 제정될 때부터 순전히 예의상의 공경을 나타내기 위하여 제정된 예절과 관련된 의례이자 정치적인 의례들로 인정한다.41)

이에 대해서 포교성성은 다음과 같이 허가하였다.

성성은 이상에서 제출된 바에 따라서, 앞서 지칭한 그 예식들을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되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그 공경이 단순히 예절이고, 정치적인 것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42)

위에서 보듯이, 마르티니는 모랄레스와 사뭇 다른 어조로 중국 의례들, 특히 공자 의례를 묘사하고 있다. 즉 모랄레스가 성인, 사원, 제대, 희생 제사, 사제, 공덕 등과 같이 그리스도교에서 전례상의 의미를 담아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차용하여 중국 의례들을 묘사하였던 것에 반해서, 마르티니는 사원 대신 방, 예절상의 공경, 예의, 정치적인 의례 등의 용어로 묘사하고 있다.43) 또한 마르티니는 아니마와 신성의 관계와 관련하여 중국인들의 사유 방식을 지적하였다. 즉 마르티니는 재심을 청구하는 질의서의 제4항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중국인들은 죽은 자들의 아니마(영혼)에 어떠한 신성(神聖)도 부여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의 아니마로부터 어떤 것을 바라지도, 간청하지도 않는다.”44)

그러니까 마르티니는 중국 의례들의 성격이 모랄레스가 주장하는 바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즉 그리스도교와 유사한 어떤 신앙적인 내용을 지닌 것도 아니며, 특정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행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르티니는 독특한 용어법을 제시한다. 즉 모랄레스의 주장과는 달리 중국의 의례들이 특정한 대상을 신앙적으로 경배하는 행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서 답변을 던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공경은 단순한 예절상의(civilis) 의례이자, 정치적인(politicus) 의례일 뿐이라는 것이다.

의례 논쟁을 다루는 대부분의 한국인 연구자들은 이 ‘치빌리스’(civilis)라는 용어를 ‘시민적’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으며,45) ‘폴리티쿠스’(politicus)를 ‘정치적’이라고 번역한다. 후자의 경우는 그 외연과 내포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한 번역어 자체를 크게 논란거리로 삼을 수는 없다. 다만 무엇이 폴리티쿠스한 것인지, 당대의 유럽인들이 생각하던 폴리티쿠스, 푸블리쿠스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자의 용어, 즉 ‘치빌리스’를 ‘시민적’이라고 번역할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의례 논쟁이 벌어지던 1640년대 유럽에서는 시민적이라고 규정할 만한 행동양식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세 도시를 중심으로 도시에 살던 소상공인들, 즉 시민 집단은 형성되어 있었겠지만, 시민혁명이 벌어진 것도, 시민적 가치가 유럽 사회에서 삶의 중심적인 규범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현재 우리가 시민적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대상물들이 사회적 삶의 전면에 부상한 것은 18세기 후반에 가서야 비로소 시작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치빌리스’와 ‘폴리티쿠스’라는 용어로 중국 의례를 설명하기 시작한 것은 어디에서 연유할까? 이미 모랄레스의 질의에 대해서 평가하면서 검사성성은 일부 사안, 즉 제대상과 신주 문제와 관련하여 예절과 관련된 의례 내지는 정치적인 의례일 경우에는 허용한다는 규정을 내린 바 있었다.

모랄레스의 17개 항 질의서 가운데 제12항 장례식

그 왕국에서는 누군가가 죽는 일이 생겼을 때,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건 이교도이건 상관없이, 위반할 수 없이 준수해야 하는 관습에 따라, 죽은 자의 집안에 일종의 제대와 같은 것을 준비하고, 죽은 자의 영정이나 혹은 위에서 언급한 신주를 향과 꽃과 초들로 이루어진 장식과 함께 놓는데, 뒤에는 시신을 관에 담아서 모셔둔다. 한편 슬픔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그런 집들에 들어가는 모든 이들은 미리 준비된 제대와 죽은 자의 영정 앞에서 서너 차례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서 머리를 바닥에까지 낮춘다. 어떤 사람들은 초와 향을 가지고 가서, 미리 준비된 그 제대에서 죽은 사람의 영정 앞에서 불에 태운다.46)

질의된 바: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호의와 사랑의 표시로 생각하면서 위에서 말한 일들을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특별히 거룩한 복음의 봉사자들에게 허락될 수 있는지. 특히 죽은 사람이 좀 더 저명한 사람일 때에.47)

결정한 바: 준비된 제상(祭床)이 일종의 널판일 뿐이며, 결국 진정하고 고유한 의미에서 제대가 아니라고 친다면, 그리고 기타 사항들도 예절상의 것이고 정치적인 공손함의 한계들 안에 포괄된다면, 용인되어야 한다.48)

제15항 신주에 관한 질의

결정한 바: 희생 제물들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리고 사실상 고유하게 제대라고 말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 예절상의 공경이라는 냄새만을 풍기거나 혹은 그것에로 축소될 수 있는 기타의 것들은 허용될 수 있다.49)

마르티니의 변론도 그러하거니와 그에 앞서 검사성성이 모랄레스의 문제제기에 대해서 유보 조건으로 제시한 것도 중국의 의례들이 특정한 대상을 신앙적으로 숭배하는 행위가 아니라 일반적인 예절이거나 정치적인 의례일 경우에는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마르티니의 변론 이전에, 그리고 모랄레스의 문제제기가 이루어지던 당시부터 중국 의례에 관련하여 ‘치빌리스’나 ‘폴리티쿠스’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주장들이 이미 제기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지적이 한 가지 있다. 미나미키에 의하면, 모랄레스의 질의에 대해서 검사성성이 응답하면서 “ ‘시빌리스’와 ‘폴리티쿠스’의 한계들 안에 포괄된다면(intra limites obsequii civilis et politici)”이라고 단서를 단 것은 의례 논쟁에 관련한 교회 문헌들 가운데 최초로 ‘폴리티쿠스’라는 표현을 사용한 사례인데, 그때나 그 이후의 교령들에서 이 용어는 정부나 정치에 관련된 근대적인 용례에 한정된 것으로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폴리티쿠스’라는 용어 사용의 기원에 대해서 미나미키는 1615년에 니콜라 트리고(Nicolas Trigault)가 마테오 리치의 장례식을 묘사하면서 사용한 것이 최초라고 보았다. 즉 트리고가 묘사하기를, 그리스도교 예절에 따라 마테오 리치의 장례 예식을 모두 끝낸 뒤에 중국의 신입교우들이 ‘정치적인 의례들’을 행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사회적 관습에 따라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것과 같은 행위들이었다는 것이다.50) 아마 짐작컨대 황제, 혹은 총독이나 태수와 같이 중화 제국의 지방 관료들에게 바치던 일반 백성들의 관례적인 인사법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행위들을 ‘국가와 관련되거나, 공적인 사무와 관련된’ 행위 규범에 따른 것으로 보고, 이를 ‘폴리티쿠스’라고 판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치빌리스’라는 표현에 대한 천착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과연 우리는 이 말을 시민적이라고 번역하고 넘어가도 될 것인가? ‘치빌리스’를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시민적인 것으로 보고, 또 ‘폴리티쿠스’를 국가적인, 정치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은 아무래도 의례 논쟁 당시의 인식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것은 1930년대 만주국에서 공자 숭경 의식이 문제로 대두되고, 그 이후 일본 및 식민지 조선에서 신사참배가 부각되었을 때에 만주국 정부와 일본 제국 정부가 내놓은 답변, 즉 국가의 정체성을 고양하고 시민으로서의 단결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행하는 국민의례라는 주장과 더불어 출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의례 논쟁 당시의 논의와 주장들을 번역할 때 시민적, 정치적이라는 용어법을 사용하는 것은 20세기 중엽의 사고방식을 17세기에 그대로 대응시키는 오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따져 보아야 할 문제가 한 가지 더 있다. 즉 만약 ‘치빌리스’를 시민적이라고 번역하고, ‘폴리티쿠스’를 정치적이라고 번역한다면, 이것은 종교적인 영역과 정치적인 영역 혹은 시민사회적인 영역을 나누는 근대적인 정교분리의 사고방식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지어 보자면, 매그로 주교의 포고령, 제6항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어 있다.

즉 매그로 주교는 말이나 글로 유포되어 경솔한 사람들을 오류로 이끌고 미신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는 어떤 것들을 나열하였는데, 그 중에서 세 번째로 지적된 것이 바로, 공자가 정령들에게 바치는 공경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예절이라는 주장이었다.51) 그러니까 매그로 주교는 중국 의례를 일종의 예절이라고 보는 논리에 대해서 사람들을 오류로 이끄는 잘못된 주장이라고 논박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매그로 주교는 중국 의례가 종교적인 것이라고 보았다는 말인가? 이 역시도 문제가 될 소지를 안고 있다. 17세기 유럽에서 이미 종교와 비종교, 즉 ‘렐리지오’와 ‘렐리지오 아닌 것’을 구분하는 분류체계가 존재하였다는 말일까? 물론 고대 로마 공화정 하에서 살았던 치체로(Cicero)의 저술에서 이미 ‘렐리지오’를 정의하는 모습이 등장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불교, 힌두교, 유교 등을 총칭하는 유적(類的, generic) 범주로서 ‘렐리지오’가 성립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아직 유럽에서 생겨나지 않았거나, 대단히 생경한 범주였다. 그러므로 매그로 주교의 언급에서 등장하는 ‘렐리지오수스’라는 표현 역시 ‘종교적’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차라리 ‘교회적, 그리스도교적, 내지는 신앙적’이라는 의미를 담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52)

사실상 과연 중국 의례를 미신이나 우상숭배가 아니라, 예절 내지 정치적인 의례를 볼 수 있느냐의 문제에 대해서 검사성성측도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1704년 10월 20일에 나온 글레멘스 11세의 교령에서 검사성성은 매그로 포고령 제6항에서 공표된 명제들에 대해서, 그 명제들에 포함된 사실들에 관하여 더 풍부하고 필수적인 지식들이 없다면 아무런 결정도 확언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즉 판단 유보를 했던 것이다. 아울러 검사성성은 앞서 언급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투르농 주교)에게 주교들과 대목구장들,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좀 더 경험이 많은 선교사들로부터 의견을 청취하도록 일임하였다.53)

또한 글레멘스 11세 교황의 1704년 교령에는 매그로 포고령 제4항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따라서 결정사항을 공표하였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논의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포고령 제4항에 관한 질문에서 다섯째와 여섯째 질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질문: 앞서 말한, 죽은 자들 위한 건축물 혹은 사원에서, 그리고 가정이나 무덤에서도 마찬가지로 거행하는, 간혹 더 성대하기도 하고 또 간혹은 덜 성대하기도 한 봉헌식들, 그리고 다른 의례들과 예식들을 위에서 보고된 바대로 거행하는 일, 혹은 외교인들과 함께 그 의례들에 참석하는 일, 또는 그 의례에서 시중을 드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되는지. 최소한 미리 제시된 공개적인 또는 은밀한 확언으로 그 의례들이 종교적이지 않고, 돌아가신 조상들에 대한 예절이자 단지 공적인 의례이며, 그리고 그 의례들을 통해서 아무것도 구하거나 바라지 않는다는 것 등 이 모든 것을 보증한다면 말이다.54)

여섯째 질문: 위에서 말한 장소들, 최소한 집과 그리고 별도로 만들어진 죽은 사람들의 무덤들에서 동일한 모든 봉헌물들을 각자가 저마다 바치거나 외교인들과 함께 바치고, 다른 의례들과 예식들을 거행하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되는지, 혹은 행하도록 용인될 수 있는지. 오로지 미신적인 것으로만 지탱되거나 또는 미신의 외양을 드러내고 있더라도, 이것이 왕국의 관습에 따라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것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행해지거나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만 사용된다면 허용되는지. 그리고 최소한 이것이 위에서 말한 확언으로 미리 제시되었거나 제출되었다면 허용되는지.55)

이런 질문에 대해서 검사성성의 대답은 단호한 것이었다. 즉 미리 공개적인 혹은 은밀한 확언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해 종교적이지 않고, 시민적이고 정치적인 예절임을 보증하더라도, 그리고 그 의례를 통하여 아무것도 구하거나 바라지 않는다고 보증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허락될 수 없다.56) 그런데 검사성성은 마지막 문제에 대해서 한 가지 의견 표명을 첨가하였다.

비슷하게, 동일한 대답들로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다른 것들이 행해질 수 없도록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 다른 것들이 그 민족의 관습들에 따른 것이며, 참으로 미신적이지 않다면, 그리고 미신의 외양을 드러내지 않고 예절 그리고 정치적 의례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의례들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주의들을 기울여야 용인될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은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이자 중화제국의 총순시관인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 그리고 이들 지방의 주교들 및 대목구장들의 판단에 묶여 있어야 한다.57)

여기서 우리는 ‘치빌리스’나 ‘폴리티쿠스’라는 용어에 담겨 있는 함의는 중국 의례에 대한 설명과 해석에서 찾을 일이 아니라, 어쩌면 17세기 당시 유럽 사회에서 그 단서를 발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된다. 즉 다음과 같은 상황을 연상해 볼 수 있다. 먼저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의례는 미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반대자들은 그러한 주장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이에 대해서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 의례는 바로 예절이며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 의례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반대자들은 만약 그것이 정말 그러하다면 용납할 수 있지만, 자기들이 보기에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여기서 예수회 선교사들과 그 반대자들이 모두 공유하는 인식 틀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치빌리스’와 ‘폴리티쿠스’의 범주에 대해서는 교황청이든 선교사들이든 문제 삼을 수 없다는 태도이다.

이처럼 중국 의례가 예절이거나 정치적인 의례라는 논리에 대해서 분명하게 논박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혹은 여기서 예절상의 그리고 정치상의 의례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충분한 논변이 제출된 바가 없거나, 그러한 자료를 아직 입수하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회의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자료에서 이 예절, 정치라는 말의 함의를 짐작하게 해주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반대자의 주장에 실린 내용이지만, 당대인들의 사유 속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의미망이라고 판단된다. 즉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 따르면, 이 말은 “사회 속에서 사람들을 결속시키고, 그 정신을 공유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58)

당시 유럽에서 사람들을 신분에 따라 결속시키고, 그 시대정신을 공유하기 위하여 유년기부터 훈육시켜야 하는 행동의 규범이라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개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치빌리타스’(civilitas)이다. 이 말은 고대 로마 사회에서 쓰이던 ‘시민다움’, ‘시민적인 자질’, ‘시민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권리’ 등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즉 그것은 ‘예절바름’ 혹은 현대적인 어법으로 ‘에티켓’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 적절하게 처신해야 하는 제약된 행동의 법규들이었다. 이 치빌리타스의 형용사형이 바로 치빌리스인 것이다. 그러니까 앞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치빌리스라는 표현에 대해서 사용한 의미 규정은 바로 이 치빌리타스의 뜻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에 따르면, 치빌리타스라는 개념이 고유한 특성과 기능을 얻은 것은 16세기 후반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기사사회가 붕괴하고 그리스도교의 통일성이 해체되던 때였던 것이다. 새로운 사회적 토대 위에 이룩된 유럽의 통일과 새로운 사회구성체, 즉 이른바 궁정사회가 이 치빌리타스라는 언어 속에 표출되고 있었다. 따라서 궁정사회의 상황과 자아의식과 특성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는 것이다.59) 그리고 이 개념이 특별한 의미로 각인되고 또 사회에 수용된 것은 1530년에 에라스무스가 《어린이들의 예절에 관하여》(De civilitate morum puerilium)라는 소책자를 간행하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아울러 16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어 17세기에 접어들어 본격화된 서유럽의 새로운 풍조는 강력한 세속 군주들이 출현하여 봉건 영주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절대왕정을 구축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국가 체제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즉 17세기에 들어와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국가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한 질서의 한복판에는 세속 군주와 궁정사회, 상비군, 관료제도 등이 놓여 있었다.

이와 더불어 유럽 사회에서 교회와 교황권의 쇠퇴 역시도 유념할 문제였다.60) 즉 16세기까지만 해도 교회와 교황은 세속 권력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절정에 달한 권위와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이 등장하고,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교황권과 심각한 분쟁들을 벌이는 사태가 지속되었다. 게다가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프랑스 왕실 등 유럽 외교 무대에서 교황이 영향력을 행사하려다가 실패로 끝나면서 오히려 교황권이 약화되는 사태를 경험하였다.

특히 의례 논쟁이 벌어지던 기간 동안에 우르바노 8세 교황부터 베네딕도 14세 교황까지 13명의 교황이 재위하였는데, 그 사이에 세속사에 대해서 교황권의 영향력은 빠른 속도로 약화되어 갔다. 교황의 봉토들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6세가 병합하였던 일이라든가, 폴란드 왕위 계승전, 스페인 군대의 교황령 침공 등등을 거치면서 교황이 세속군주들 사이에 개입하여 중재를 하거나 지도 내지 통제하는 권한은 날로 축소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루이 14세 이후로 프랑스가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여 서유럽 전체를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교황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이렇게 되자 교회와 교황의 가르침이 모든 것을 좌우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세속 국가의 틀 속에서 교회로부터 상대적인 독립성을 획득한 삶의 영역들이 증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궁정사회를 중심으로 귀족이나 상류층 자제들의 행동 규범들이 치빌리타스라는 이름으로 재구획되면서, 중세적인 삶의 질서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근대적인 양식으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가 형성되었다. 또한 세속 국가 내에서는 세속적인 성격을 띤 엄숙한 의식들이 활발하게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왕의 사신이 보낸 메시지를 맞이하는 영주들의 의식들, 왕의 출정식이나 왕태자 영접식, 혹은 국왕들 사이의 회담이나 국왕의 장례식 등이 교회가 주관하는 방식과는 별도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아마 여기서 폴리티쿠스라는 용어법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평민들이 영주에 대해서, 그리고 영주나 기사들이 국왕에 대해서, 또는 하급 관료들이 고위 관료들에 대해서 신분에 맞게 주어진 예법에 따라서 경의를 표하는 행위가 정교하게 구성되었고, 또한 국가적인 사무나 기타 공적인 영역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활동들을 의례의 수준에서 진행하는 일들이 증가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의례를 예절이나 정치적 의례라고 말한 것은 사실상 공자나 조상에게 바치는 제사와 같은 중국인들의 의례나 관습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유럽의 변화상을 반영한 논법이 아닌가 한다. 말하자면 이미 16세기 이후로 세속권력과 교회당국의 세력 불균형이 심화되고, 세속 군주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교회는 더 이상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인간들의 삶 전체를 통일적으로 이끌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였고, 궁정사회의 에티켓(말하자면 치빌리스)이나 세속 국가의 공적인 사무(말하자면 폴리티쿠스)와 관련된 의례들에 대해서 교회 당국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 의례 논쟁에 투영되면서, 중국 의례를 긍정적으로 용인하는 입장이든 비판적으로 배격하는 입장이든, 양자 모두가 치빌리스와 폴리티쿠스에 해당하는 의례에 대해서는 그것이 미신이냐 아니냐를 물을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지 않나 생각한다.


5. 번역(traductio)인가, 반역(traditio)인가

의례 논쟁에서 세 번째로 점검할 문제는 번역의 문제, 즉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하느님, 즉 ‘데우스 옵티무스 막시무스’를 중국어로 어떻게 옮길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사실상 모랄레스의 질의서와 마르티니의 재질의서에는 데우스의 중국식 명칭 문제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모랄레스는 17개 항 질의서 가운데 제14항에서 신의 속성을 나타내는 어휘 가운데 ‘상투스’(sanctus) 즉 거룩함에 해당하는 중국어 어휘 ‘성’(聖)의 용법에 대해서만 질의하였다.

말하자면 중국인들이 말하면서 사용하는 성(聖)이라는 낱말은 ‘상투스, 상타, 상툼’과 같은 말인데, 그리스도교 교리서에서도 천주성삼이나 주 그리스도, 복되신 성모 마리아, 그리고 기타의 성인들을 지칭할 때에도 이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대행자들, 즉 선교사들이 불신자들이나 우상숭배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말을 사용해도 되냐는 것이었다.61) 이에 대해서 검사성성은 분명한 지침을 내리지는 않는다. 아직 그 말의 용어법에 대해서 충분한 지식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그 낱말이 광범위한 용례를 지닌 것이면 사용해도 될 것이고, 참되고 완전하신 거룩함을 의미하는 것에 국한되어 있다면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한다.62) 그러므로 ‘상투스’의 번역어로서 ‘성’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확정적인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중국어 ‘성’(聖)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한 선교사들과 교황청의 인식에 대해서는 앞서 ‘수페르스티치오’에 대한 논란을 다루면서 글레멘스 11세 교황의 1704년 교령과 함께 언급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넘어가도록 하겠다.

신의 명칭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예수회 내부에서 중국 의례에 관한 논의가 벌어졌을 때에 롱고바르디가 이미 제기한 바 있었다. 그래서 당시 예수회,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도 이런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게다가 황제가 하사한 ‘경천’(敬天)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편액들이 중국의 각 성당에 걸려 있는 모습을 보면서, 선교사들은 ‘천’이라는 글자에 담긴 함의를 고민하였을 것이다. 또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지만, 그 속에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주가 곧 중국말로 상제(上帝)라고 한 주장이나, 천(天)이 곧 상제라고 이해해도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63) 선교사들은 의문점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의례 논쟁의 과정에서 데우스의 번역어 문제가 공식적인 문서에서 처음 제기된 것은 매그로 주교의 포고령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신의 이름을 중국말로 어떻게 부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의례 논쟁의 제2단계에서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왜 공식적으로 제기되지 않았는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아마 시급한 문제는 공자제사나 조상제사와 같이 구체적인 의례 행위에 대한 지침을 내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중국어의 어법에 대한 문제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나중에 제기되었지 않나 생각된다. 매그로 주교는 복건 대목구의 모든 선교사들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명령을 내린 자신의 포고령 제1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유럽식 이름들은 중국 글자와 발음으로는 어느 정도 미숙하게만 표현될 수 있으므로 이를 제외한다면, 우리는 ‘데우스 옵티무스 막시무스’(가장 훌륭하시고 가장 크신 하느님)를 오랫동안 관례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이름인 천주, 하늘의 주인이라 불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두 가지 다른 중국식 단어들, 천(하늘)과 상제(지고한 황제)는 철저히 배격하기로 한다. 중국인들이 앞서 말한 천과 상제라는 이름으로 이해하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경배하는 데우스라고 주장해서는 결코 안 된다.64)

매그로가 이해한 천의 개념에 대해서는 그가 내린 포고령 제2항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교회 안에 ‘경천’(敬天)이라는 글자가 쓰여진 편액을 진열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두 달 안으로 그것들을 제거하도록 명령하였다. 아울러 천과 상제라는 이름이 하느님으로 나오는 다른 편액들과 시구절들도 제거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 경천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들은 우상숭배의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 어떤 교회 안에도 다음의 두 글자, 경천(하늘을 경배함)이 새겨진 현판이 붙여지지 않도록 우리는 엄격하게 금지한다. 그리고 어디에 붙여져 있든지 두 달 안에 떼어낼 것을 명령한다. 아울러 천과 상제라는 이름들이 데우스에 첨가된, 동일한 의미의 다른 글판들과 시구(詩句)들도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우리의 판단으로는, 모든 그러한 현판들과 더불어, 특별히 무엇보다도 경천이라는 글자들을 담고 있는 것은 우상숭배로부터 면제될 수 없다.65)

아울러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다른 지역 선교사들도 매그로의 이러한 입장에 찬동을 표시하였다. 특히 통킹과 코친차이나 지역의 선교사들이 보기에 이들 지역에서도 천이라는 한자어를 물질적인 하늘로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견해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였던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66)

1704년 11월 20일에 반포된 글레멘스 11세 교황의 교령에서 검사성성의 신학자들이 제출한 문서는 매그로의 포고령 7개 항에 대해서 검토하는 순서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항의 내용 즉 신의 명칭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질문을 던졌다. 그런 다음에 이에 대해서 답변 항목에서 총괄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우선 하느님(DOM)을 표시하기 위해서 유럽식 이름들은 제외되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왜냐하면 데우스라는 이름 혹은 지고 존재를 가리키는 다른 유럽식 낱말들은 중국 글자로는 거의 표현되기 어려우며, 또한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에 관해서 아무런 관념도 중국인들에게 일깨워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67) 이에 대해서 검사성성은 동일한 어조로 하느님을 가리키기 위하여 유럽식의 이름들을 사용하지 말도록 결정하였다.68)

매그로 주교의 1693년 포고령이나 글레멘스 11세 교황의 1704년 교령에서 유럽식 이름을 그대로 발음만 따와서 중국 글자로 표기하는 것을 금지한 데에는 몇 가지 사정이 있었다. 원래 중국에서 처음으로 신의 이름을 번역할 때에는 데우스를 음차하여 두사(斗斯)라고 쓴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이 글자는 아무런 뜻을 지니지 않은 채 발음만 따 온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 명칭은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에 관한 어떠한 관념도 심어주지 못하였다. 그래서 위와 같은 결정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신의 명칭에 관한 두 번째 물음은, 그렇다면 하느님을 가리키기 위하여 천 혹은 상제라는 말들은 배제되는지 하는 것이다.69) 이 물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보충 설명이 주어진다.

의혹을 가지는 이유는 이러하다. 몇몇 유럽 선교사들이 고대 중국인들은 앞서 말한 천이나 상제와 같은 이름들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을 부르고 기도했다고 여겼으며, 또 지금도 여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교양 있는 중국인들(자기 집단의 가르침을 표명하고 또 이를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들은 중화 제국에서 으뜸가는 집단이다)은 최소한 400년 전부터 무신론에 빠져 있었으므로, 모든 이들이, 혹은 더러 보이듯이 거의 모두가 천과 상제라는 이름으로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하늘에 불과한 것, 또는 기껏해야 같은 하늘에 결합되어 있는 일종의 천상적인 힘, 그리하여 만물의 원리 차라리 공동원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지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인정된 하늘에, 그리고 그와 같이 땅, 별, 산, 강 등에 각자 희생 제사를 드린다. 또한 북경 및 남경과 같은 왕도(王都)에서는 사원을 방문하여, 한 해의 정해진 때에, 특히 북경의 사원에서는 황제가 직접 하늘에 성대하게 희생 제사를 드린다.70)

이에 대해서 검사성성은 (배제된다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만약 학자들이라 불리는 중국의 으뜸가는 집단에게 그 하늘에 결합되어 있는 천상적인 힘만이 이 낱말들로 지시된다면,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하늘 혹은 그 밖의 다른 어떤 뜻도 동일한 낱말들에 부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철저히 이 말들을 금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경배하는 하느님은 물질적인 하늘 혹은 그 하늘의 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이 백성들에게 핑계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71)

여기서 유럽인 선교사들과 교황청의 검사성성 신학자들이 가장 경계하던 문제가 무엇인지 잘 드러난다. 즉 그리스도교에서 숭배하는 신은 만물의 창조주이며, 따라서 물질적인 속성을 초월한 존재이다. 그런데도 그 신의 이름 아래에 다른 신이 숭배된다면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물질적인 영역에 속한 존재를 초월적인 존재의 이름 아래에 둔다는 것은 물질숭배 혹은 자연숭배로 전락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 이들의 인식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신의 명칭과 관련한 물음의 최종 도달점은 그렇다면 하느님은 천주라는 이름으로 불려도 되는지의 문제이다. “이유는 이러하다. 즉 천주라는 용어는 중국의 모든 선교사들에 의해서 하느님을 가리키기 위하여 오랜 관습으로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여러 분파들이 의견을 달리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72) 이에 대해서 검사성성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천주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의견의 불일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73)

아울러 검사성성은 매그로 포고령의 제2항 그리스도 교회에 경천이라는 편액을 거는 문제에 대해서도 답변을 제시하였다. 편액 속에 들어있는 경천이라는 문구를 허용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현재에 와서 중국의 학자들에게는 천이라는 말이 물질적인 하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위에서 천과 상제의 용어법에 대한 검토에서 보았듯이 여전히 문제가 된다고 진술하였다.74) 결국 검사성성은 경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과 그 용어가 들어간 편액을 교회 내부에 거는 행위를 모두 금지시켰다.75) 아마 이것은 천이라는 글자를 물질적인 영역에 국한된 것이라고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과 교황청의 포교성성 및 검사성성과 같은 관련 부서의 신학자들은 중화문명이라는 판이한 환경 속에서 살아온 중국인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신의 존재와 속성을 이해시키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자칫 중국적인 언어 관념에 대한 철저한 이해 없이 섣불리 신의 이름을 중국 글자로 옮긴다거나 할 경우에 신앙의 순수성과 복음의 완전성에 흠결이 생길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유럽식 용어를 발음만 그대로 옮기는 형태의 번역도 거부하고, 물질숭배의 혐의가 짙게 배어 있는 중국 전래의 신앙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는 일도 거부하였던 것이다. 특히 천이나 상제와 같은 용어가 문제시되었던 것은 물질의 영역과 비물질의 영역(또는 영적인 영역)을 구분하고 후자를 더 우위에 두는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에서 용납될 수 없는 관념이 그 속에 들어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가장 안전한 방책은 지금까지 사용되어온 용어들 가운데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용어, 즉 천주라는 명칭을 번역어로 선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물질과 비물질을 나누는 이원적 세계관의 설명력이 더 큰 난관에 봉착한 것은 신의 명칭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지평을 지닌 문제와 충돌하였을 때였다. 그것은 바로 아니마 개념을 전통적인 유교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혼(魂) 내지 영혼(靈魂)으로 번역하는 문제였다. 중세 스콜라 신학에서 말하는 아니마란 육체와 함께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며, 그리스도교의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으로서 비물질적인 실체였다.

하지만 중국 전래의, 혹은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물질과 비물질을 나누지 않고, 모든 세상 만물을 기(氣)의 다양한 형태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 기의 작용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원리가 바로 리(理)인 것이다. 이런 세계관을 흔히 일러 이기론(理氣論)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혼 또는 혼백이라는 것도 육신과 더불어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기는 하다. 하지만 육신보다 좀 더 가볍고 수승한 성질을 지녔다는 점에서만 육신과 구별된다. 즉 육신이든 혼백이든 모두 기의 운행 과정 속에 들어 있는 특정한 형태일 뿐이다.76)

이렇게 볼 때에 육체와는 별도의 속성과 기원을 갖는 아니마라는 신학적 개념을 혼 또는 혼백이라는 이기론적 개념과 등치시켜 번역한다는 것은 그러한 가르침을 전하는 측과 받는 측 모두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받아들여 식물의 아니마[生魂, anima vegetativa]와 동물의 아니마[覺魂, anima animalium], 그리고 인간의 아니마[靈魂, anima hominis]를 구별하였던 아퀴나스 신학의 명제를 따라서 인간의 아니마를 영혼이라고 옮겼을 경우에는 그 혼란이 더욱 심각해진다.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용어법에서 영이라는 말과 혼이라는 말을 결합시켜 영혼이라는 특별한 개념을 구성하여 사용하는 사례는 마테오 리치의 창안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중국과 조선 사회에서 유학자들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둘러싸고 논쟁을 벌일 때에 가장 서로에게 이해시키기 어려운 문제가 바로 영혼 개념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영혼이 불멸하는 존재이며 물질적인 기원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인식시키고자 하였다. 한편 유학자들은 혼이든 백이든 모두 기의 작용으로 형성된 것이며,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유지되다가 천지시방으로 흩어질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어느 한편이 옳고, 다른 편이 그르다는 식으로 정리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각기 판이한 세계관과 사고방식을 가진 양측이 상이한 두 가지 언어를 통해서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아니마의 언어가 혼백의 언어를 자신의 방식으로 전유함으로써 창출한 개념이 바로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두 언어 사이에는 언제나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며, 어떤 형태로 만나든지 상호 오해와 오독의 과정만이 존재한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건널 수 없는 간극, 즉 번역 불가능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상호 이해의 가능성을 부정하게 되며, 종국적으로는 복음의 선포와 이방 민족에의 선교 자체를 불가능한 것 내지는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는 결과에 도달하고 말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번역은 언제나 완결된 궁극적인 상태가 아니며, 이해와 오해 그리고 재이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교정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사실 영혼 개념은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 큰 성공을 거둔 특이한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중국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각국에서 그리스도교의 교세에 상관없이 언어 대중 전체의 일상적인 용어법 속에 널리 정착되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아시아 현대인들의 언어적 감수성 속에서 영혼 개념이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로만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영향력의 자장만큼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바 있는 헤테로글로시아적 상황은 영혼 개념과 관련해서도 유효하다. 즉 영혼이라는 단일한 언어 구성물 내에 서구 그리스도교의 맥락과 전통 유교적 맥락이 서로 교차하고 있으면서, 창조적인 혼효 현상을 펼칠 가능성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의 출발점은 신앙의 전래 이후 다양한 형태로 실험하고 논쟁하였던 여러 가지 개념들에 대한 재검토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교 자체로 볼 때에도 지금까지 논의한 영혼 개념은 지극히 역사적인 범주에 불과하다. 즉 중세 스콜라 신학의 테두리 내에서 형성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개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그리스도교는 ‘사도신경’을 본질적인 신앙고백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는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 모두를 아우르는 구원, 즉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 전체를 구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심판이 이루어지는 때에 부활하게 되는 육신과 영혼의 상호 관계는 어떤 것이며, 그때까지 영혼의 존재 방식은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는 아직 확정된 바가 없다.

아울러 천과 상제 개념을 부정하고 천주라는 용어만을 그리스도교적인 신의 명칭으로 선택하였던 의례 논쟁의 결과에 대해서도 현대적인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천주교는 지금도 천주교라는 용어를 고수하고 있지만, 공동 번역 성서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천주라는 전통적인 신의 명칭을 버리고 ‘하느님’을 공식적인 명칭으로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이 하느님이라는 용어에 대한 신학적, 교회사적 성찰을 지속시켜 나가기 위해서라도 과거 의례 논쟁 당시에 충돌하였던 여러 입장들에 대한 재해석과 재성찰의 작업, 그리고 특히 교회 용어의 번역어 성립 경위에 대한 검토 작업은 계속 요청될 것이라고 본다.


6. 글을 맺으며: 장미라는 이름이 남긴 것

로미오를 만나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줄리엣은 그의 성이 몬타규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절망적인 심정으로 발코니에 나와서 서성거리며 혼자 중얼거린다. “당신의 이름만이 내 원수입니다. 몬타규 집안이 아니라도 당신은 당신. 대체 몬타규가 뭐예요? 손도 아니고, 발도 아니도, 팔도 아니고, 얼굴도 아니고, 사람의 몸 어느 부분도 아니잖아요? 오, 다른 이름이 되어주세요. 이름에 뭐가 있죠?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역시 향기로울 거예요.”

장미를 장미라고 부르지 않더라도 장미의 향기는 변함없을 것이라는 줄리엣의 독백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이름이 어떻게 불리건 그 대상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는 믿음, 이름이 어떻게 불리는가에 따라서 그 대상은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다가온다는 믿음. 이 두 종류의 믿음은 낭만적 사랑과 가문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심정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동아시아 지역에 전파되고, 선교사들에 의해서 교회의 가르침을 지역 언어로 옮겨서 새로이 보편교회의 일원이 된 신입교우들에게 전달하려는 노력들이 비등하던 시기에 우리는 말과 이름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그 하나는 이름을 어떻게 변경하건 본질적인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과 말을 손쉽게 바꾸다 보면 그 진의를 상실할 위험이 있으므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의례 논쟁 과정에서 허용론과 배격론의 기본적인 에토스를 이루는 것은 이름과 말에 대한 상이한 입장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들이 부딪치면서 마치 오색의 불꽃이 튀듯이, 다양한 담론적 효과들이 빚어졌다. 우리는 위에서 의례 논쟁에서 파생되었던 다양한 담론들을 세 가지 주제로 묶어서 다루었다. 이를 서구라는 자아와 중국이라는 타자의 상호관계로 정식화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통상 미신으로 번역되는 수페르스티치오 개념이 낳은 갑론을박은 서구라는 자아가 동아시아라는 외부의 타자를 관찰하고 평가하는 방식이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주된 흐름은 자아의 언어로 타자를 예단하고 평가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 진행 과정에서는 오히려 타자의 언어가 자아 속으로 역류하는 헤테로글로시아적 현상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수페르스티치오가 이단으로 번역되면서, 중국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던 이단이라는 개념이 오히려 역으로 서구 그리스도교를 자신의 언어적인 그물망 속에 포섭하는 논리가 타자의 언어 속에서 발생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담론은 서구라는 자아가 외부의 타자와 맺는 관계 방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왕정과 궁정사회라는 내부의 타자를 거울로 하여 외부의 타자와 만나는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중국 의례에 대한 허용론이든 배격론이든 만약 그 의례들이 예절에 관련된 것이고, 국가의 공적인 차원에서 행하는 것들이라면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배치된다고 보기 어렵다는 논리가 그 속에 들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평가하는 인식의 근저에는 17세기와 18세기 유럽 사회에서 교황권이 쇠퇴하고 세속군주들의 국가질서가 부상하면서 교회의 가르침과 통제에서 벗어난 새로운 행동 양식들이 출현하고 있다는 상황이 가로놓여 있다. 이 때문에 중국 의례를 ‘치빌리스’나 ‘폴리티쿠스’의 영역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인가, 아닌가의 쟁점이 부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 의례 허용론은 1930년대 이후 만주국과 일본 및 식민지 조선에서 유포되었던 시민의례론 내지 국민의례론과는 역사적 맥락을 달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 번째 담론은 서구라는 자아가 중국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외부의 자아를 향해서 발언하고 재정의하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전적인 타자일 수가 없다. 동일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받아들인 형제들이기 때문에 외부에 속한 자아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양쪽의 자아 사이에는 이질적인 언어라는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즉 보편적 복음을 특수한 언어로 번역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었다. 이런 문제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서구쪽의 자아가 선택한 방식은 외부의 자아가 속한 중국이라는 문화적 맥락에서 그들을 이탈시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외부의 자아, 즉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중국어를 버리고 서구 언어를 다시 습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트리덴틴 전례의 정신에 따라서 핵심적인 사항은 전례 속에서 라틴어라는 보편 언어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천주의 존재와 권능, 영혼불멸설 등 교리문답상의 여러 가르침은 결국 중국어로 번역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어의 전통적인 개념과 용어들이 교회 속으로 들어오면서 다양한 의미작용을 양산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의례 논쟁 당시에 국한된 상황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지속되는 진행형의 사건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이 서구라는 자아의 구성물, 즉 그리스도교라는 것이 언제나 변할 수 없이 확고한 형태로 자리 잡은 고정적인 실체로 역사상에 존재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되는 초세기의 모습, 지중해 지역에 전파되면서 이방의 관습과 문화들과 대면하던 시기의 변화상, 로마 제국 하에서의 질적인 변모, 중세 유럽에서의 융성과 쇠퇴를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유동하면서 변화하였을 것이다. 어느 특정 시점의 모습, 또는 특정한 패러다임을 토대로 구성되었던 신학적 교설을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의례 논쟁 과정에서 표출되었던 주장들이나 논리구조가 이미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움직일 수 없는 확고부동한 신조 혹은 교리적 정설에 토대를 두고 나왔다고 보지는 않는다.

아마 중국 선교라는 새로운 상황, 중국 문명이라는 새로운 타자와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분명하다고 간주하였던 유럽 그리스도교의 자기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과정도 있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흔적들을 추적하지는 않았다. 다만 중국 의례를 평가하는 찬반양론들 속에 들어 있는 다양한 논리들을 몇 가지 테마로 간추려서 새롭게 출현하였거나 재평가된 개념들을 중점적으로 검토하였을 뿐이다. 결국 중국 의례를 미신(수페르스티치오)으로 단죄하였건, 하나의 이견(헤테로독시아)으로 보아 용인하였건, 언어의 역동성은 어디서나 뜻하지 않은 혼효 현상(헤테로글로시아)을 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성찰이야말로 의례 논쟁이라는 동아시아 천주교회의 역사적 경험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곱씹어 보아야 할 이유를 제공해 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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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2005년 정부재원(교육인적자원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KRF-2005-079-AS0071).”

1) 먼저 국내 학계에서 이루어진 의례 논쟁에 관한 연구들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최기복, 〈유교와 서학의 사상적 갈등과 상화적 이해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9 ; 신의식, 〈의례 논쟁 (1)〉, 《교회와 역사》 195,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8 ; 신의식, 〈의례 논쟁의 전개과정〉, 《교회와 역사》 197,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10 ; 신의식, 〈의례 논쟁의 경과와 종결〉, 《교회와 역사》 19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11 ; 한윤식, 〈17·8세기 중국 의례 논쟁을 통해 본 로마가톨릭 교회의 선교의 문제점〉, 부산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 아울러 국외 학계에서 이루어진 의례 논쟁에 관한 연구들 가운데 주요한 것들만 추려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Francois Bontinck, La lutte autour de la liturgie chinoise aux XVIIe et XVIIIe siecles, Louvain: Editions Nauwelaerts, 1962 ; George Minamiki, The Chinese Rites Controversy from Its Beginning to Modern Times, Chicago: Loyola University Press, 1985 ; D.E. Mungello, ed., The Chinese Rites Controversy: Its History and Meaning, San Francisco: The Ricci Institute for Chinese-Western Cultural History, 1994.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앞의 연구소(중국명 이마두중서문화역사연구소)에서 1992년에 의례 논쟁에 관련된 교황청 자료 100편을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는 사실이다. Donald F. St. Sure, trans., Ray R. Noll, ed., 100 Roman Documents Concerning the Chinese Rites Controversy (1645~1941), San Francisco: The Ricci Institute, 1992.

2) 최기복, 〈조상제사 문제와 한국 천주교회〉,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83쪽.

3) 이하에서 서술한 의례 논쟁의 전개과정은 최기복, 신의식, 한윤식 등의 연구들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관계상에서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책임에 속한 일이다.

4) 1843년 당시 교황청 부서 명칭으로는 검사성성이었다. 이는 1908년에 성무성성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며, 1965년에 가서 지금과 같은 신앙교리성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5) In praedicto Regno habent chinenses quemdam magistrum in philosophia morali litteratum, qui olim discessit a vita, vocatum Kum-fu-ciu, qui ob doctrinam, regulas et documenta, adeo in toto Regno acceptus est, ut tam reges, quam omnes alii cuiuscumque conditionis et gradus sint, sibi proponant imitandum et sequendum, saltem quoad speculativum; tamquam sanctum venerantur et laudant, in omnique civitate et villa, praefato magistro templa sunt erecta: gubernatores vero bis in anno tenentur in eius templo solemne sacrificium offerre, sacerdotis ipsimet gerentes officium; et sine solemnitate, in anni decursu, bis in mense, concurruntque cum illo aliqui ex litteratis pro administratione eorum, quae in tali sacrificio offerunt, quae quidam sunt: sus unus integer mortuus, capra una integra, candelae, vinum, flores, odores, etc. Item omnes litterati quando accipiunt gradum, debent ingredi templum istius magistri, et facere genuflexiones, et offerre ante eius altare ex candelis, et odoribus. Totus iste cultus, sacrificium et reverentia secundum omnium illarum gentium formalem intentionem, dirigitur in gratiarum actionem pro bonae ipsius relictis doctrinae documentis, atque ut ab eo impetrent ex ipsius meritis, optimi ingenii felicitatem sapientiae et intellectus (Collectanea S. Congregationis de Propaganda Fide seu Decreta Instructiones Rescripta Pro Apostolicis Missionibus, Vol. 1, Ann. 1622~1866(이하에서는 Collectanea라 약칭함), Romae: Ex Typographia Polyglotta, 1907, p. 33).

6) Quaeritur, utrum gubernatores, qui christiani sunt vel fuerint et litterati, vocati et coacti possint ingredi praefatum templum, facere tale sacrificium, vel assistere huiusmodi sacrificio, vel facere genuflexiones ante altare illud, vel accipere aliquid de idolothytis et oblationibus illis, maxime, quia putant illi infideles, quod quicumque manducaverit ex talibus idolothytis, habebit progressum magnum in suis litteris et gradibus(Collectanea, p. 33).

7) Censuerunt, non licere, nec posse aliquo praetextu contento in dubio christianis permitti(Collectanea, p. 33).

8) Inviolabilis observantiae mos est apud chinenses tamquam doctrina a supradicto magistro Kum-fu-ciu tradita, quod in omnibus Chinae populis, templa constructa habeant, avis et progenitoribus suis defunctis dicata; et in unoquoque eorum, omnes qui eiusmodi familiae sunt, bis in anno congregantur, ut praefatis suis progenitoribus solemnia sacrificia faciant magno coeremoniarum apparatu, et in altari multis candelis, floribus et odoribus adornato, imaginem, sive effigiem parentis, vel avi defuncti collocant, in quo sacrificio invenitur et qui facit sacerdotis officium et ministri illius, offeruntque carnes, vinum, candelas, odoramenta, capita caprarum etc. Hoc autem sacrificium ex communi illarum gentium intentione, dirigitur, ut praefatis eorum progenitoribus gratias reddant, honorem et reverentiam exhibeant ob beneficia ab eis accepta et ob illa, quae ab eis accipere sperant: unde ante altare prostrati deprecationes multas faciunt, postulantes sanitatem, longam vitam, abundantiam fructuum, filiorum multiplicationem, prosperitatem magnam, et ut ab omnibus adversitatibus liberentur (Collectanea, p. 33).

9) Quaeritur, utrum christiani ficte et exterius tantum, ut supra dictum est, possint assistere huiusmodi sacrificio, vel exercere aliquod ministerium in illo cum infidelibus commixti, sive in templo, sive in domo, vel sepulchro, publice, vel privatim, vel quonam modo hoc poterit permitti christianis illis (Collectanea, p. 33).

10) Censuerunt, christianis chinensibus nullatenus licere, ficte, vel exterius ssistere sacrificiis, in honorem progenitorum, neque eorum deprecationibus, aut quibuscumque ritibus superstitiosis gentilium erga ipsos; multo minus licere circa praefata ministerium aliquod exercere(Collectanea, p. 33).

11) ‘수페르스티치오’(superstitio)를 미신(迷信)이라고 번역한 것은 현대의 번역 관행을 따른 것이다. 지금도 교회사 관련 연구자들 가운데에는 이 용어를 ‘우상숭배’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우상(idolum)에 대한 숭배(latria)라는 조어법을 생각한다면 우상숭배는 ‘이돌로라트리아’(idololatria)의 번역어로 사용되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어떤 번역어를 선택하는가의 문제는 사실상 관행의 문제이지, 유일무이한 정답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해당 용어가 당대의 맥락에서 왜 그러한 낱말로 번역되었는가를 따지는 것은 개념의 역사를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 글 역시 그러한 문제의식을 늘 염두에 두고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12) 4. Missionarii nullatenus, nullaque de causa Christianis permittant solemnibus, quae semel & iterum, singulis annis Confucio & Progenitoribus offerri solent, sacrificiis seu oblationibus praeesse, ministrare aut interesse, quas oblationes superstitione imbutas esse declaramus (Historia Cultus Sinensium, seu Varia Scripta de Cultibus Sinarum, inter Vicarios Apostolicos Gallos aliosque Missio narios, & Patres Societatis Iesu controversis (이하에서는 Historia Cultus Sinensium이라 약칭함), Coloniae: [n.s.], 1700, p. 335).

13) Ad memoriam progenitorum suorum conservandam utuntur chinenses quibusdam tabellis, in quibus nomina suorum defunctorum scripta sunt, quas vocant esse animarum sedes, existimantes animas defunctorum venisse et assistere in illis tabellis ad recipiendum sacrificia et oblationes, et praefatae tabellae sunt collocatae in propriis altaribus cum rosis, candelis, lampadibus et odoramentis, et coram ipsis tabellis, genuflexiones, orationes et deprecationes faciunt, expectantque auxilium ab illis defunctis concedendum in suis necessitatibus et laboribus (Collectanea, p. 34).

14) 5. Missionarios, qui in locis, ubi Evangelio operam navant Tabellarum in Defunctorum honorem, privatis in domibus erectarum usum abolere studuerunt, magnopere laudamus; atque ut eo, quo coeperunt pede, in posterum pergant, adhortamur. Ubi vero hunc usum tollere difficilius erit, ad hoc saltem res temperamentum revocetur, ut sublatis literis Xin chu, Xin Goei, Ling Goei, solummodo defuncti nomen Tabellae inscribatur, aut ad summum litera Goei superaddatur (Historia Cultus Sinensium, pp. 335~336).

15) Demum permittendum non esse christifidelibus, tabellas defunctorum progenitorum in suis privatis domibus retinere, iuxta illarum partium morem, hoc est cum inscriptione sinica qua thronus, seu sedes spritus, vel animae N. significetur; imo nec cum alia, qua sedes, seu thronus, adeoque idem ac priori, licet magis contracta inscriptione designari videatur (Collectanea, p. 134).

16) I. Quaeritur, an superstitione imbuta sint solemnia quae semel et iterum singulis annis Confucio et progenitoribus offerri solent sacrificia seu oblationes, itaut iis praeesse christianis nullatenus nullaque de causa permitti possit. Ratio dubitandi est, respectu Confucii, quia secta litteraria, quae primas obtinet in illo imperio, Confucium non solum uti magistrum, verum etiam uti sanctum colere videtur (Bullarium Diplomatum et Privilegiorum Sanctorum Romanorum Pontificum, Taurinensis Editio(이하에서는 Bullarium Diplomatum이라 약칭함), Augustae Taurinorum: A. Vecco et Sociis Editoribus, 1871, p. 209).

17) in quibus Confucii virtus caelo terraeque aequiparatur, doctrina antiquis modernisque praefertur, imo, ex quo homines esse coeperunt, nemo illum aequasse dicitur, et quod eius spiritus praeteritos Xing seu sanctos excellit (Bullarium Diplomatum, p. 209).

18) Quod autem haec dictio Xing sanctitatem potius quam sapientiam, vel sapientiam simul et sanctitatem significet, infertur ex hoc, quod inter illos qui Confucium praecesserunt, et Xing superius appellantur, comprehenduntur saltem nonnulli, de quibus expressis verbis in classicis Sinarum libris dicitur, quod post mortem in caelum evolarunt, et in caelis potestatem habent favendi hominibus, eosque etiam Sinenses antiquitus ut sanctos venerati sunt, et hactenus celebrant ut tales (Bullarium Diplomatum, p. 209).

19) Ipse Confucius in singulis civitatibus aedes habet ei dedicatas, quae gymnasia non sunt, nec aulae tantum esse videntur, sed potius capellae, eo quod Sinice vocentur Miao, quo vocabulo idolorum templa designantur, et a nonnullis auctoribus aedes praedicatae templa seu fana dicantur. In quibus aedibus extat effigies Confucii, vel saltem tabella cum hac inscriptione: Sedes spiritus sanctissimi vel sapientissimi protomagistri Confucii, quae verbis sinicis est huiusmodi: Cni Xing Sien Su Kunc chu Xin Goey (Bullarium Diplomatum, pp. 209~210).

20) 에밀 뒤르켐,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 민영사, 1992, 86쪽. 이 번역본은 지나치게 오역이 많다. 그러므로 인용하기에 적합한 책은 아니다. 하지만 더 나은 번역본이 나오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 번역본의 해당 부분을 인용하였다. 나중에 원문을 찾아서 확인한 다음에 더 완전한 형태로 인용문을 다듬을 계획이다. 한 가지 더 부기할 것은 뒤르켐의 원 저서에는 아니마나 스피리투스라는 라틴말이 들어 있지 않다. 대신에 아니마와 스피리투스에 해당하는 불어 낱말 암(ame)과 에스프리(esprit)가 사용되고 있다. 논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용어를 약간 바꾸어 라틴식으로 해석하였다. 참고로 말해서 앞의 번역본에는 영혼과 영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21) Respectu vero progenitorum, ratio dubitandi circa solemnes oblationes, quae in primo quaesito proponuntur, est, quia Sinae defunctos parentes seu progenitores, saltem usque ad quartum gradum, publico ac singulari cultu prosequuntur, aedes eis dedicant, quae potius capellae et templa quam simplices aulae videntur esse, tum ex his, quae in eis geruntur, tum ex nomine Miao (Bullarium Diplomatum, p. 211).

22) quo pariter nomine etiam idolorum templa communiter designantur, ut supra dictum est, et animailum quoque sanguine ex antiquissimo ritu in rituali Li Ki praescripto, uti etiam oblationum seu sacrificiorum vasa, quae nulli usui extra templa praedicta applicari licet, dedicari solent. Vestes vero, quibus proceres ac praesertim imperatores uti solebant aut solent in praefatis oblationibus, speciali ritu in eodem Li Ki praescripto fieri debent, ac consumptae obsoletaeque cremari ne profanis usibus inserviant (Bullarium Diplomatum, p. 211).

23) ad eosdem cultus erga defunctorum praefatorum spiritus exhibendo destinari videntur, quia tam in in aedibus Chung Miao dictis, quam in Chu Tang nuncupatis, imagines seu statuae primariorum progenitorum reperiuntur, aut saltem et communiter ubique tabellae progenitorum asservantur supra mensam vel altare, cum hac inscriptione: Sedes Spiritus N. defuncti progenitoris (Bullarium Diplomatum, p. 211).

24) Quae quidem tabellae, saltem his temporibus, ideo fieri videntur, ut non tantummodo loco spirituum, seu defunctorum adhibeantur, sed etiam ut iidem spiritus seu defunctorum animae quodammodo in eis resideant (Bullarium Diplomatum, pp. 211~212).

25) Ex rituali sinico Kia Li nuncupato constat, ad dictas tabellas, flexis genibus et expressis verbis, spiritus seu animae praefatae invitantur ut in illis resideant et domum revertantur (Bullarium Diplomatum, p. 212).

26) unde multi Sinenses eosdem progenitorum spiritus caeremoniis supradictis invitatos venire et frui putant aut credunt. Non pauci tamen ad imaginariam vel dubiam potius quam realem spirituum praesentiam, adventum et fruitionem haec omnia (Bullarium Diplomatum, pp. 212~213).

27) necnon progenitorum nomine, seu de mandato eorumdem, ut in rituali Kia Ly dicitur, a magistro caeremoniarum ministris primariis, et implicite adstantibus omnibus, plurimae felicitates promittuntur (Bullarium Diplomatum, p. 213).

28) Item ex classicis ritualibus plura referuntur, unde deduci videtur Sinenses non tantum a Xang Ti, aliisque spiritibus, montium scilicet, fluminum, etc.; verum etiam a spiritibus defunctorum felicitates plurimas concedi ob praefatas oblationes bene peractas docuisse, credidisse ab antiquo tempore, aut saltem finxisse (Bullarium Diplomatum, p. 214).

29) ac praecipue in rituali Kia Ly, ex officio spectat, summo mane debitis ac speciosis vestibus indutae, aedes progenitoribus dicatas, ac pridie pro more ornatas, respective adeunt, in eis coram tabellis eorumdem progenitorum post ablutionem manuum cum variis inclinationibus et genuflexionibus e tabernaculis per ministros designatos extractis et super mensam seu altare collocatis, cereis accensis, odores ac thura cremantur, vinum libatur, et super palearum manipulum effunditur (quae caeremonia indicat descensum spirituum), fructus varii, ac potio Cha dicta offertur seu apponitur coram qualibet ex eisdem tabellis, ac tandem, cum aliis genuflexionibus et inclinationibus, spiritibus abeuntibus quodammodo vale dicitur (Bullarium Diplomatum, pp. 214~215).

30) Ad sex quaesita huius articuli sacra Congregatio respondit: Christianis nullatenus nullaque de causa esse permittendum praeesse, ministrare aut interesse solemnibus sacrificiis seu oblationibus quae in utroque aequinoctio cuiusque anni Confucio et progenitoribus defunctis fieri solent, tamquam superstitione imbutis. … imo praedicta omnia, tanquam a superstitione inseparabilia (Bullarium Diplomatum, p. 218).

31) 최창무, 〈우상과 미신숭배 -경신례를 중심으로-〉, 《사목연구》 3,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1996, 181쪽.

32) 최화선, 〈로마 공화정 말기의 ‘종교’와 ‘미신’ 개념〉, 《서양고전학연구》 17, 한국서양고전학회, 2001, 141쪽.

33) 서양의 역사에서 수페르스티치오라는 낱말의 쓰임새에 대한 논의는 Mary O’Neil, “Superstition”, Mircea Eliade, Encyclopedia of Religion, Vol. 14, London: Macmillan Publishing Company, 1987, pp. 163~166을 참조하였음.

34) 사실 이 미신(迷信)이라는 번역어 역시 문제 삼을 만한 소지를 안고 있다.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아니지만, 대략적인 추정에 따르면 아마 19세기 일본에서 서구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처음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직 연구가 진척된 바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 근대 동아시아의 개념사 연구에서 밝혀야 할 부분이다. ‘미신’이라는 용어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는 이 글의 목적에서 지나치게 벗어나 있기 때문에 논외로 하고자 한다.

35) 글레멘스 11세 교황 칙서(〈Ex illa die〉)의 한문 번역본은 1721년 1월 18일에 작성되었으며, 北平故宮博物院編, 《康熙與羅馬使節關係文書影印本》, 民國 21年 3月 出版, 제14번 문서로 들어 있다.

36) 北平故宮博物院編, 《康熙與羅馬使節關係文書影印本》, 康熙?筆刪改嘉樂來朝日記第十三, “爾西洋人 自己流入 異端之處 自己不知 反指中國道理 爲異端.”

37) Ibidem, 且中國稱上帝人人皆知 無不敬畏 卽朕躬膺大寶 凡事法天罔敢或? 六十年來 朝乾夕? 祇承帝命 中國敬天之道如此 豈爾西洋 只知爲造物主 區區祈福求安者 所可比擬哉 況祈福求安 與佛道之理 何異.

38) Ibidem, 爾等西洋人 一字無識 一句不通 開口 非佛經卽道藏 異端小敎之言 如何倒指孔子道理 爲異端殊屬悖理.

39) 北平故宮博物院編, 《康熙與羅馬使節關係文書影印本》, 康熙於嘉樂來時面諭西洋人第十, “敬孔子乎聖人 以五常百行之大道 君臣父子之大倫 垂敎萬世 使人親上 死長之大道 此至聖先師之所應尊應敬也 爾西洋亦有聖人 人其行事可法 所以敬重 多羅함?當等 知識扁淺 何足言天 何知尊聖.”

40) Mikhail Bakhtin, The Dialogical Imagination, ed. by Michael Holquist, trans. by Caryl Merson and Michael Holquist,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1981, pp. 293~294 ; Richard King, Orientalism and Religion, London: Routledge, 1999, p. 133에서 재인용.

41) Tertio quaeritur: Num accipiendorum graduum caeremoniam, quae fit in aula Confucii, christiani litterati licite agere valeant. Nam nullus intervenit sacrificulus, vel ex idololatrica secta ministellus, nihil omnino sit ab idololatris institutum, sed soli studiosi et philosophi conveniunt. Confucium tamquam magistrum suum agnoscentes, civilibus, ac politicis ritibus ex sua prima institutione ad merum cultum civilem institutis (Collectanea, p. 38).

42) Sacra Congregatio iuxta ea, quae superius proposita sunt, censuit permittendas sinensibus christianis praenomatas caeremonias, quia videtur cultus esse mere civilis et politicus (Collectanea, p. 38).

43) 이 점은 이미 한윤식에 의해서 지적된 바이다 (한윤식, 〈17 · 8세기 중국 의례 논쟁을 통해 본 로마가톨릭 교회의 선교의 문제점〉, 26~29쪽.). 물론 그의 글은 영어로 번역된 문헌들을 주된 분석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사실 이 글은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한국의 학계에 관련 문헌들의 원문 자체를 제공하고자 하는 목적과 의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모랄레스와 마르티니의 질의서에 나타난 용어상의 차이점들을 예리하게 포착한 것은 그의 탁견이라고 할 수 있다.

44) Sinenses nullam divinitatem animabus defunctorum concedunt, nihil ab illis sperant, aut petunt (Collectanea, p. 39).

45) 유일한 예외는 최창무 대주교이다. 그는 베네딕도 11세 교황의 1742년 칙서(〈Ex quo singulari〉)를 인용하면서 시빌리스에 해당하는 부분을 “주민들의 예의(禮儀)”라고 옮겼다(최창무, 〈한국 천주교회와 조상제사의 공인〉, 《사목연구》 3,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1996, 211쪽).

46) Quando in illo Regno aliquis mori contingat, sive christianus sit, sive gentilis, pro inviolabili more habetur, in domo defuncti quoddam altare praeparare, in eodemque imaginem defuncti, seu tabellam supradictam collocare cum ornatu odorum, florum et candelarum, retroque cadaver feretro inclusum ponere: omnes autem, qui ad condolendum domus illas ingrediuntur, coram praeparato altari et defuncti imagine, ter, vel quater genuflectunt, humi sese prostrantes, capitibus usque ad terram demissis, aliquas secum candelas asportantes et odoramenta, ut in praeparato illo altari, coram defuncti imagine consummentur et comburantur (Collectanea, p. 34).

47) Quaeritur, utrum licitum sit christianis et praecipue ministris sancti Evangelii, attento mutuo benevolentiae signo et amoris, supradicta facere, maxime quando defuncti sunt ex nobilioribus populi (Collectanea, p. 34).

48) Censuerunt, posito quod mensa parata sit quaedam tabula, non autem verum et proprium altare, si coetera continentur intra limites obsequii civilis et politici, esse toleranda (Collectanea, p. 33).

49) Censuerunt, exclusis sacrificiis et altari vere et proprie dicto, coetera, quae redolent tantummodo cultum civilem, aut possunt ad illum reduci, permitti posse (Collectanea, pp. 34~35).

50) George Minamiki, S.J., The Chinese Rites Controversy from Its Beginning to Modern Times, Chicago : Loyola University Press, 1985, pp. 267~268.

51) 6. Cum nonnulla seu verbo seu scripto evulgari animadverterimus, quae incautos in errorem inducunt, & viam ad superstitionem patefaciunt verbi gratia: … Cultum quem Confucius spiritibus adhibuit, civilem potius, quam religiosum fuisse (Historia Cultus Sinensium, pp. 336~337).

52) 중세말과 근대초기 유럽 사회에서 근대적인 범주로서 ‘렐리지오’라는 분류체계가 출현하게 되는 과정과 다양한 문헌들 속에서 그 특수한 용례들을 분석하는 일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53) Super sexto articulo. Nihil certi firmari posse quoad propositiones enunciatas in hoc sexto articulo, nisi praehabitis plenioribus et necessariis rerum in eis contentarum notitiis. Interea tamen committendum esse praefato domino patriarchae Antiocheno, ut auditiis episcopis et vicariis apostolicis, necnon peritioribus missionariis illarum partium (Bullarium Diplomatum, p. 219).

54) V. Quaeritur, an christianis liceat praefatas omnes oblationes, tum solemniores, tum minus solemnes, necnon alios ritus ac caeremonias, tam in aedibus seu templis defunctorum, quam domi et in sepulchris, prout supra relatae sunt, peragere, aut eis simul cum gentilibus interesse, vel in eis ministrare, saltem praemissa publica vel secreta protestatione, eos non religioso, sed civili tantum ac publico cultu erga defunctos progenitores haec omnia praestare, nec ab eis quidquam petere aut sperare (Bullarium Diplomatum, p. 215).

55) VI. Quaeritur, an liceat seu permitti possit christianis easdem omnes oblationes respective in locis supradictis, vel saltem domi ac defunctorum sepulchris seorsim vel etiam cum gentilibus offerre, aliosque ritus ac caeremonias peragere, sublatis omnino superstitiosis vel superstitionis speciem praeseferentibus, hoc est ea tantummodo offerendo, quae, iuxta regni morem, vivis offerri solent, et cum caeremoniis ac ritibus erga vivos fieri vel adhiberi solitis: et an hoc saltem liceat, praemissa seu adhibita supradicta protestatione (Bullarium Diplomatum, p. 216).

56) ne quidem esse permittenda christianis praemissa publica vel secreta protestatione se non religioso sed civili ac politico tantum cultu erga defunctos illa praestare, nec ab eis quidquam petere aut sperare (Bullarium Diplomatum, p. 218).

57) Similiter nec per eadem reponsa vetari, quominus erga defunctos peragi possint alia, si quae sint iuxta earum gentium mores, quae vere superstitiosa non sint, nec superstitionis speciem praeseferant, sed intra limites civilium ac politicorum rituum contineantur. Porro quaenam haec sint, et quibus adhibitis cautelis tolerari valeant, tum domini patriarchae Antiocheni commissarii et visitatoris generalis in imperio Sinarum, tem episcoporum ac vicariorum apostolicorum illarum partium iudicio religuendum esse (Bullarium Diplomatum, p. 218).

58) “… comme des choses purement civiles & politiques, etablies par bien seance pour servir de lien dans la societe des hommes, les esprits se sont partages …” (Lettre de Messieurs des Missions Etrangeres au Pape sur les Idolatries et les Superstitions Chinoises, Cologne: [s.n.]. 1700, pp. 153~154.).

59)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문명화 과정 1》, 한길사, 1996, 172쪽. 궁정사회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었던 새로운 행위 규범이자 인간 관계의 의미망으로서 치빌리타스 개념에 대해서는 그 외에도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궁정사회》, 한길사, 2003 ; 요한 호이징가, 《중세의 가을》, 문학과지성사, 1988 등을 참조할 것.

60) 17세기 교황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맥스웰-스튜어트, 《교황의 역사》, 갑인공방, 2005를 참조.

61) Chinarum sermone haec vox (King) idem est quod Sanctus, Sancta, Sanctum: et in libris doctrinae christianae a quibusdam sancti Evangelii ministris praelo mandatis reperitur ista vox (King) ad nominandam Sanctissimam Trinitatem, Christum Dominum, Beatam Mariam et coeteros Sanctos. Quaeritur, utrum quando in praefatis libris sese offert occasio, ut nominetur magister Chinarum Kum-fu-cu vocatus, vel mandatum Regis Chinarum, vel coeteri Reges, qui communiter in illo Regno ut sancti reputantur, cum sint infideles et idololatriae, possimus ne, et sit licitum nobis Christi ministris nominare supradictos hoc nomine (King) (Collectanea, p. 34).

62) Censuerunt, non posse aliquid firmari circa vocem hanc, eiusve usum, nisi praehabita cognitione idiomatis, eiusque verae et propriae significationis: coeterum si eadem vox in Regno Chinarum habet latitudinem, posse ministros ea uti; si vero restringatur ad significandam veram et perfactam sanctitatem, nullatenus posse (Collectanea, p. 34).

63)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99~104쪽.

64) 1. Exclusis nominibus Europaeis, quae nonnisi barbaro quodam modo Sinicis literis & vocibus exprimi possunt, Deum Optimum Maximum longo usu recepto nomine Tien chu, Coeli Dominum appellandum esse statuimus. Ita ut duae aliae Sinicae voces Tien Coelum, & Xangti Supremus Imperator, prorsus repellantur; multo minus affirmentur id, quod Sinae praefatis nominibus Tien & Xangti intelligunt, Deum esse, quem Christiani colimus (Historia Cultus Sinensium, p. 334).

65) 2. Districte prohibemus, ne in ulla Ecclesia, tabella quaedam, cui hae duae literae Coelum colito, King Tien inscriptae sunt, appendatur, & ubicumque appensa fuerit, intra duos menses auferri mandamus, cum aliis ejusdem sensus tabellis & versibus, in quibus nomina Tien & Xangti Deo affinguntur; ac nostro quidem iudicio, cum omnes illae tabellae, tum ea in primis, quae literas King Tien continet, ab idololatria excusari non possunt (Historia Cultus Sinensium, pp. 334~335).

66) Pour le Tonquin & la Cochinchine, le Pere Alexancre de Rhodes Jesuite temoigne que les peuples de ces deux Royaumes ne reconnaissent par le Ciel que le ciel visible, & que non plus que les Chinois ils n'ont jamais eu de connaissance du vrai Dieu (Lettre de M. Marin Labbe nomme par le S. Siege Eveque de Tilopolis et Coadjuteur au Vicariat Apostolique de la Cochinchine, au Pape, sur le certificat de l'Empereur de la Chine, et sur la necessite de condamner sans delai toutes les Superstitions Chinoises, Anvers: Chez les Heritiers de Jean Keerberg, 1702, p. 62).

67) I. Quaeritur, an excludi debeant nomina europaea ad significandum Deum oprimum maximum. Nomen enim Deus, aliave vocabula europaea, quibus supremum Ens significatur, sinicis characteribus exprimi vix posse, nullamque rei significatae ideam apud Sinas excitare videntur (Bullarium Diplomatum, p. 208).

68) Ad primum quaesitum sacra Congregatio censuit non esse adhibenda nomina europaea ad significandum Deum Optimum Maximum: inutilis siquidem esset eorum usus, posito quod illa sinicis characteribus exprimi vix possint, nec ullam apud Sinas rei significatae ideam excitare valeant (Bullarium Diplomatum, p. 217).

69) II. Quaeritur, an ad significandum Deum optimum maximum repellendae sint voces Tien, caelum, vel Xang Ti, spremus imperator (Bullarium Diplomatum, p. 208).

70) Ratio dubitandi est, quod, licet aliqui missionarii Europaei existimaverint et existiment antiquos Sinas praefatis nominibus Tien et Xang Ti indigitasse Deum vivum et verum; nihilominus missionarii fere omnes asserunt, quod Sinenses litterati, quae est praecipua in Sinae imperium secta, quatenus eiusdem sectae doctrinam exponunt et sequuntur, saltem a quingentis annis, cum in atheismum deciderint, vel omnes, vel, ut aliquibus videtur, fere omnes, nominibus Tien et Xang Ti nil aliud nisi caelum materiale et visibile, vel ad summum quamdam caeli virtutem eidem caelo insitam, quam rerum omnium principium seu potius comprincipium esse putant, designant. Unde caelo sic sumpto, quemadmodum et terrae, planetis, montibus et fluviis respective sacrificant; et in regiis urbibus Peching et Manching templa visuntur, in quibus, statis anni temporibus, praesertim in templo Pechinensi, ipsemet imperator caelo solemne sacrificum offert (Bullarium Diplomatum, p. 208).

71) Ad secundum respondit affirmative. Si enim illis vocibus apud praecipuam Sinensium sectam, quae litteratorum nuncupatur, nonnisi caeli virtus eidem caelo insita designatur, caelum corporeum et visibilie, vel quaedam quaecumque alia tandem eisdem vocibus significatio attribui valeat, abstinere ab eis prorsus debent missionarii, ne ansam praebeant illis gentibus existimandi nihil aliud esse Deum, quem christiani colunt, quam caelum corporeum, aut eius virtutem (Bullarium Diplomatum, p. 217).

72) III. Quaeritur, an Deus optimus maximus sit appellandus nomine Tien Chu, caeli dominus. Ratio est, quia ab omnibus missionariis Sinensibus vocabulum Tien Chu ad significandum Deum optimum maximum longo usu receptum est. Et in hoc partes dissentire non videntur (Bullarium Diplomatum, p. 208).

73) Ad tertium similiter respondit affirmative; praesertim cum nulla hac in re adsit inter partes controversia (Bullarium Diplomatum, p. 217).

74) Quaeritur, an permitti possit appendi in ecclesiis christianorum tabellam inscriptam King Tien, Caelum Colito. Ratio dubitandi est, quia praedicta vox Tien nunc temporis a Sinensibus litteratis accipitur pro caelo materiali, ut supra dictum est in ratione dubitandi ad tertiam quaesitum super primo articulo (Bullarium Diplomatum, p. 209).

75) Attentis iis, quae dicta sunt in responsione ad secundum quaesitum primi articuli, sacra Congregatio respondit permittendum non esse in ecclesiis christianorum appendi tabellam de qua agitur, nec iam appensam retineri (Bullarium Diplomatum, p. 217).

76) 그리스도교의 아니마 개념이 영혼이라는 용어로 유입되면서 혼백 개념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현상에 대한 유학자들의 인식 태도에 대해서는 안영상, 〈천주교의 천주(상제)와 영혼불멸설에 대한 영남 퇴계학파의 대응 양식〉, 《시대와 철학》 16,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05가 참고할 만하다.

[교회사 연구 제32집, 2009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조현범(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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