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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복 70년 분단 70년10: 5·18 광주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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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0-17 ㅣ No.725

[사진 속 역사의 현장 광복 70년 분단 70년] (10) 5·18 광주민주화운동


교회, 광주항쟁의 비극적 원인이 신군부에 있음을 천명하다



광주민중항쟁 직전, 광주 전남대와 조선대생들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며 집회를 위해 전남도청 앞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1980년 광주민중항쟁 기록사진집 오월광주」(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펴냄)


“5월 19일, 6층 집무실에서 창밖으로 내려다본 골목에서 계엄군에게 폭행당한 젊은이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응급조치를 위해야 할 텐데, 생각하면서도 두려워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1980년 5월 19일. 당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 가톨릭회관(현 5ㆍ18 민주화운동기록관) 6층 집무실에서 금남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흰 셔츠를 입은 젊은이는 앞가슴과 등에 상처를 입고 유혈이 낭자한 채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일어나 몇 걸음을 옮기다 다시 쓰러지곤 했다. 길 한복판엔 뒤로 팔이 묶인 사람들이 엎드려 있었다. 여기저기서 옷을 벗기고 곤봉으로 내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생생한 증언이 「5월 항쟁 일지」에 남아 있다.

5월 18일 전남대 학생들과 계엄군이 충돌한 이후 열흘간 광주는 피로 물들었다. 계엄군이 부당한 국가 권력에 대한 광주 시민과 학생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165명의 민간인이 희생됐고, 400여 명이 행방불명됐다. 항쟁의 와중에 폭행과 고문으로 사망한 사람도 다수였고, 부상자와 연행자 또한 4300여 명에 이른다.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구속자 석방” 등 구호를 외치며 신군부의 집권 음모와 학살 만행에 맞선 대가였다. 

특히 21일 오후 자행된 계엄군의 10여 분간 ‘집단 발포’는 광주민주화운동의 분기점이었다. 시민들이 무장하면서 이후 공방은 시가전 양상을 띠게 됐고, 희생은 더 커졌다. 22일 광주대교구 조철현ㆍ정규완ㆍ이영수 신부 등 종교계와 언론계, 학생, 교수, 노동자 등 20여 명이 참여하는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꾸려져 계엄군과의 중재가 시도됐으나 합의는 무산됐다. 그러던 중 5월 27일 새벽 2시, 계엄군의 진압이 개시돼 총격전이 벌어졌고 계엄군이 다시 시가지를 장악했다. ‘충정 작전’이었다. 신군부는 2만여 명의 최정예 부대를 투입, 참혹한 살상을 저질렀다.

무고한 시민을 구타하고 강제연행하는 계엄군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동참하면서 상황은 갈수록 악화됐다. 사진=「1980년 광주민중항쟁 기록사진집 오월광주」(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펴냄)


계엄군의 진압 작전 직후, 윤 대주교는 교구 사제들과 함께 ‘광주사태의 진상’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 광주사태의 비극적 원인이 당시 신군부의 광적 살인행위에서 비롯된 것임을 천명했다. 이 성명서는 광주사태의 진상을 온 교회에 알리는 데 큰 구실을 했다. 26일 잠행을 통해 상경,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린 뒤 다시 광주로 내려갔던 김성용 신부는 ‘내란 중요 임무 종사자’로 지목돼 군사재판에서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해야 했다.

항쟁 소식을 듣고 21일 광주로 들어가던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 일행은 탱크에 가로막혀 장성에서 되돌아와야 했지만, 이틀 뒤 교구 긴급 사제총회를 열어 광주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 미사 봉헌과 함께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30일엔 서강대생 김의기씨가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살포하다가 추락사했다. 서울에서는 정양숙 국제가톨릭형제회원과 오태순ㆍ장덕필 신부가 옥고를 치렀다. 서울대교구 김택암ㆍ안충석ㆍ양홍 신부 등은 보안사에서 구타와 고문을 당해야 했고, 6월 25일엔 전주교구 여산본당 주임 박창신 신부가 테러에 중상을 입었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각 교구 정의구현사제단도 성명을 발표, 광주 사태의 진실을 밝힌 광주대교구 사제단과 연대를 표명하고 광주사태의 원인이 일부 군부의 광적 살인행위에 있음을 천명했다.

진실이 밝혀지기까지는 17년이 필요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1996년 3월에야 피고로 법정에 섰고, 이듬해 4월 대법원은 반란 수괴와 내란 목적 살인, 상관 살해 미수, 뇌물 수수 등 혐의로 피소된 두 피고인에 각각 무기징역과 17년 형을 선고했다. 국회는 또 ‘5ㆍ18 특별법’을 제정,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은 정당한 행위로 역사에 기록됐다.


◇ 5ㆍ18광주민주화운동 일지

△ 1980년 5월 16일 전남대에서 첫 시위, 광주 10개 대학 3만여 명이 시위ㆍ집회 참여.
△ 5월 17일 밤 12시 비상계엄 전국 확대, 광주엔 7ㆍ11공수여단 진입.
△ 5월 18일 전남대 정문에서 학생들과 계엄군 충돌.
△ 5월 19일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 상경,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에 공수부대 만행 알려. 이후 윤흥정 전라남ㆍ북도 계엄분소장(21일 소준열로 교체)과 장형태 전남지사 만나 과잉진압 인정과 사과 요구.
△ 5월 20일 차량시위를 계기로 광주 시민들 적극 항쟁.
△ 5월 21일 계엄군의 금남로 시민을 향한 작전 개시, 광주 외부에서 고립. 광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 시민군 조직 및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다각적 노력 전개.
△ 5월 22일 광주대교구 조철현ㆍ정규완ㆍ이영수 신부 참여, 시민수습대책위원회 결성.
△ 5월 26일 광주대교구 김성용 신부, 광주를 탈출해 9번 검문을 통과한 후 27일 서울 명동에 도착해 광주사태 진상 알려.
△ 5월 27일 계엄군의 광주시민 해산 작전.
△ 5월 광주대교구 구호대책위원회, 부상자와 가족에 대한 위로 담화문 발표.
△ 6월 2일 주교회의 상임위원회, 최규하 대통령에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서한 전달.
△ 6월 2일 윤공희 대주교, 광주사태 수습을 위한 서한 발표 등 10여 년간 서울ㆍ전주교구 등 교구별로 광주사태 해결 촉구 미사 봉헌과 시국담화, 성명서 발표와 단식 잇따라.
△ 1994년 5월 5ㆍ18 민중항쟁연합, 진압 책임자 35명 서울지검에 고소하면서 법정 투쟁.
△ 1996년 3월 대법원, 전두환ㆍ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게 각각 무기징역과 17년 형 선고.

 

 

“광주 정신, 지역주의 · 편파주의에 호도돼서는 안 돼”

5·18 당시 시민수습대책위 위원으로 활동했던 조철현 몬시뇰

 

 

- “5ㆍ18항쟁은 우리나라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초석이 됐다”고 강조하는 조철현 비오 몬시뇰. 오세택 기자


“5ㆍ18은 민주화를 위한 한 점 부끄럼 없는 투쟁이었습니다.”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수습위원으로 활동했던 조철현(광주대교구 원로사목자) 몬시뇰은 이같이 밝히고, “민주화를 위해 항거한 5ㆍ18항쟁은 우리나라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초석이 됐다”고 강조했다.

당시 광주대교구 계림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했던 조 몬시뇰은 요즘도 35년 전 그날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총부리를 겨눈 계엄군의 저지에도 맨손으로 부딪쳤던 학생들과 시민들, ‘폭도’라는 누명을 쓴 채 두드려 맞고 체포되고 죽어갔던 이들, 그 억울한 죽음은 아직도 그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정말 불행한 나라였고, 불행한 시대였습니다. 민주주의의 봄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다가 체포되고 투옥되고 죽어간 이들은 우리의 형제였습니다.”

조 몬시뇰은 5ㆍ18 당시 수습위원으로서 유혈사태를 우려해 평화적 방법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고, 끝까지 계엄군과 직접 대화를 나눴다고 전했다. 그러나 끝내 군은 27일 새벽 진압을 선택했고, 진압 뒤 수배령이 떨어지자 일시 피신했던 조 몬시뇰은 김성용ㆍ정규완 신부와 함께 자진 출두해 군사재판을 받고 8개월간 실형을 살아야 했다. 처음엔 12년 형이 구형됐고, 훗날 3년으로 줄어 최종심에선 3년을 선고받았다가 사면됐다.

그렇지만 그 뒤로 강요된 침묵과 절망이 짓누르는 가운데서도 조 몬시뇰은 5ㆍ18 추모 미사와 시국집회, 시국강연회를 통해 광주의 진실을 알리려 했다.

요즘 사회 일각에서 5ㆍ18 시민군에 북한에서 내려보낸 간첩이 끼어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데 대해 조 몬시뇰은 “당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도 십수 년 집권 기간 밝혀내지 못한 북한 간첩을 지만원이라는 개인이 밝혀냈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하고 “당시 전남도청에서 광주 시민들과 시민군이 간첩 2명을 잡았는데, 그 사람들은 당시 정보기관에서 보낸 사람들이었다”고 전했다.

은퇴 뒤에도 여전히 사회복지법인 소화자매원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조 몬시뇰은 “5ㆍ18은 민주주의가 지역주의나 편파주의, 집단이기주의에 호도돼서는 안 된다는 것, 참된 민주주의를 위해선 모든 국민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확고한 신념과 의지, 충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오늘에도 보여준다”고 거듭 강조했다. 
[평화신문, 2015년 10월 18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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