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동체ㅣ구역반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재발견하는 소공동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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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체 재발견]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재발견하는 소공동체 (1)
모태 신앙을 간직한 나에게 있어서 가톨릭교회의 신앙은 내 삶의 시작보다 더 앞서 있었다. 내가 잉태되었을 때에도, 태어났을 때에도,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유아세례를 받았던 때에도, 본당에서 보례(補禮)를 받았던 때에도, 첫 영성체를 받았던 때에도, 견진성사를 받았던 때에도, 그리고 사제로 살고 있는 지금도 나는 언제나 은총 아래에 놓여 있었다(로마 6,20 참조).
이른 새벽녘 부모님의 아침 신공 바치는 소리에 잠을 깨 하루를 시작했고, 밥상 앞에서 늘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식사를 하고, 판공이나 주일에 파공(罷工)을 하시는 부모님의 신심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법’을 배웠으며, 주교와 사제, 가정과 자녀를 위해 기도하기를 하루도 빠트리지 않으시는 부모님의 열심함 속에서 ‘교회에 대한 믿음’을 키워왔다. 교회의 전례를 비롯해서 본당의 대소사에 희생봉사하시고, 특히 죽은 이들을 정성껏 돌보시고 이웃과 작은 것이라도 나누는 선심(善心)과 선행에서 ‘이웃 사랑’을 배우고 체험했다. 바로 그 여정과 환경이 바오로 사도가 고백한 ‘은총 아래에 있었던 나’의 모습이었고, 거기서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온 삶을 던지며 살려는 사제로서의 성소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 사제가 되어 마주한 신앙과 교회의 현실은 불과 30년 전에 비해 참 많이 변했다. 그 변화를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겠지만, 그러나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신앙과 교회 생활은 위기(危機)에 처했고 험난한 것은 사실이다. 하느님께 대한 뿌리 깊은 신뢰와 신심, 교우들 간의 존경과 존중,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희생과 봉사가 믿는 이들에겐 자긍심이자 살아 있는 신앙의 표지가 되었고, 믿지 않는 이들에겐 부러움과 긍정적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 안에서 점점 그러한 자긍심과 표지가 사라지고 있음에 마음이 쓰라릴 때가 많다. 더욱이 나와 같은 모태 신앙을 가지고 수십 년, 여러 대(代)에 걸쳐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와 사제도 치밀하고 강력하게 밀어닥치는 세속화에 속수무책으로 물들고 무너지는 모습에 수많은 이들이 상처와 절망을 경험하기까지 한다.
이 나라 이 땅에서 ‘주님의 복음’이 믿는 이들에게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나 진리가 되고 의로움의 원천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세상이 휘두르는 재력과 공권력과는 다른 차원으로서 모든 이들의 양심과 정신과 영혼 안에 스며들어 힘이 되고 믿음이 되고 희망이 되었다. 복음의 힘은 그러한 것이다. 복음을 통해서 얻는 믿음의 힘은 그렇게 강하고 힘이 있다. 바오로 사도는 그 힘을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2코린 4,7-9).”
그래서일까? 나의 아버지는 종종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내게 말씀하시곤 한다. ‘박해(迫害)가 이 땅에 다시 일어나게 되면, 참된 믿음을 소유한 이들이 누구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말씀하신 그 박해가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신과 영혼을 혼탁하게 하여 ‘참 진리와 참 행복’을 식별(識別)하지 못하게 하는 온갖 사조(思潮)들이 교회 밖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가정과 교회 안 깊숙한 곳에까지 이미 들어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부부 생활 안에, 부모의 가치관에, 아이들의 생각과 즐거움 속에, 교회 활동과 신앙의 목적 속에,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관심과 분별력 속에 들어와 그리스도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복음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우리들. 하느님의 말씀이 낯설고 어색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현실. 하느님을 자비로운 아버지요 예수님을 마음까지 나눌 벗으로 살갑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처지. 그래서 기도하자고 하면 벙어리가 되고, 묵상하고자 하면 분심에 사로잡히고, 선교를 위해 봉사와 희생을 하자면 뒷걸음질 치는 우리들의 처지는 우리 자신과 가정과 교회 공동체가 복음의 기쁨을 잃은 결과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주님을 잃은 침통함 속에서 위로와 용기, 기쁨과 감동, 희망과 보람, 굳건한 믿음과 뜨거운 사랑 체험을 되찾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모습(루카 24,24,13-35 참조)은 지금으로서는 그저 동경(憧憬)만 할 수밖에 없는 모습일 뿐이리라.
본당에서 열성을 다해 사목하고 있는 사제들과 평신도 봉사자들의 입술에서조차 ‘소공동체’하면, ‘안 되는 것’ ‘실패한 것’ ‘현실에 맞지 않는 것’ ‘재고(再考)의 대상’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 현상에 대해 나 역시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되묻고 싶은 것이 하나가 있다. 소공동체가 추구하는 것 목적도 안 되는 것, 실패한 것, 현실에 맞지 않는 것, 재고의 대상으로서 지금 이대로 접어야 할 것인가? 나는 이 물음에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한다. 아마도 다른 사제와 봉사자들도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성령의 선물을, 복음 -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걸음은 절대로 포기하거나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구원을 바라는 신앙인의 믿음과 희망인 동시에 아직도 세상이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공동체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시도와 변화이다. 그리고 이미 소공동체가 추구하는 목적을 이루어 복음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복된 이들과 그들이 머문 공동체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나는 그 소공동체의 목적과 방법을 이루는 원천적인 바탕을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찾는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납니다(1항).”
* 강희재(요셉) 신부는 2003년 사제 수품 후, 시화성베드로 · 매곡 · 초월 본당 주임을 거쳐 현재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으로 교육과 소공동체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5년 12월호, 강희재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교육일반 · 소공동체 담당)]
[소공동체 재발견]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재발견하는 소공동체 (2)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베네딕토 16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 교황님의 이 말씀대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은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만남은 우리가 삶의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가지고 종전까지 우리의 보화와 가치와 목적과 행복이 되었던 것들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에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든 바로 지금 이 순간 새롭게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분과 만나려는 마음, 날마다 끊임없이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갖도록 권고합니다(복음의 기쁨, 3항)”. 그리고 말씀이신 분을 찾는 것은 어렵거나 힘들지 않습니다. 그분은 멀리 계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신명 4,7)’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증언대로, ‘사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의 입과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신명 30,14)’.
교황님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그 사건과 사람을 ‘말씀과 성사’에서 만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우리가 진정성 있게 말씀과 성사에 임함으로써 우리 삶의 시야와 방향을 결정짓는 사건과 사람을 만난다면, 우리의 기쁨은 충만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만남에서 말씀이신 분께서 우리에게 넘치는 자비와 사랑을 건네시고, 그것을 받은 우리는 자유와 해방, 치유와 구원을 깊이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머문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매우 일상적인 말씀과 성사의 자리에서 그 모든 것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새롭게’라는 표현을 사용하심으로써 무뎌진 마음과 완고한 정신으로 말씀과 성사에 임하는 우리를 일깨우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한 현실과 상황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꽤 멀어져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기쁨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도, 기도나 봉사를 할 때에도, 미사나 성사에 참여하고 나서도 기쁨과 위로, 평화와 안식을 얻기 보다는 의무 완수나 또 다른 답답함과 공허함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비신자나 새 영세자만이 아니라, 이미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금의 본당과 교회 전체의 분위기, 곧 형식적이고 타성에 젖은 신앙 공동체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당과 소공동체 모임과 신심 단체 모임에서도 하느님, 자비와 사랑, 구원과 은총, 선교와 증언과 같은 신앙의 핵심이 되는 단어들을 대화의 중심에 놓지 못하고 관심의 가장자리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에 닿지 못한 이들은 삶의 중심에서 신앙을 밀어내고 세상의 즐거움과 관심들과 불필요한 이야기들을 그 중심에 가득 채우려고 합니다.
교황님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적 생활이 자기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그분 사랑의 고요한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선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 식어버립니다. 이는 신앙인들에게도 매우 현실적인 위험입니다. 많은 이가 이러한 위험에 빠져 삶을 잃어버리고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찬 사람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도 아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성령 안에서 사는 삶도 아닙니다(복음의 기쁨 2항)”.
이러한 신앙과 삶이 지속되다보면 우리 안에서 몇 가지 질문들이 생겨납니다. ‘왜, 무엇을, 어떻게, 그래서?’라는 질문입니다. 이는 마치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님께 의심과 갈망이 뒤엉킨 마음으로 주일 아침에 묻는 물음과 같습니다. ‘왜 성당에 다녀야 해요? 무엇을 믿으라는 말이죠? 어떻게 하느님을 알고 만날 수 있어요? 그래서 믿어서 어떻게 되는 되요?’ 여러분들은 이 물음들에 어떻게 대답하실 수 있으십니까? 생각으로는 알겠는데 말로는 표현 못하시겠는지요? 아니면 시쳇말로 ‘영혼 없는 형식적인 교리 문답식’으로 대답해주실 것인지요?
소공동체가 여러 신심 형태들로 모임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 나누기’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온다(로마 10,17)’는 바오로 사도의 신앙의 기초와 원리를 결코 간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믿고 무엇을 믿고 어떻게 믿어 영원한 기쁨을 얻고자 하는 열망’은 모든 사람의 본성에서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영적 갈망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은 그 영적 갈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복음 나누기 자체가 어렵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과 언어와 실천들이 아직 복음에 익숙하지 못한 탓, 더 솔직하게 말하면 복음에 중심을 두지 못한 신앙생활 탓입니다. 복음을 내 입과 마음과 행동에 담기 전에 타인(성직자)이 시키고 정해준 대로만 따라했던 수동적인 신앙의 태도의 결과입니다. 그렇다고 유창하고 논리 정연한 신앙고백이나 신앙의 완벽주의가 성숙하고 완전한 신앙인의 표지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완전하고 중요한 표지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말씀과 성사들을 통해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복음의 기쁨이 가득한 사람은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참으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는 제쳐두고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전해 주려는 열정에 불타오릅니다(복음의 기쁨 10항)”.
복음 말씀을 중심으로 모이고 살아가는 소공동체는 그동안 됫박으로 덮어놓았던 바로 그 기쁨과 생명의 등불(복음)을 우리 삶의 등경에 올려놓음으로써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1월호, 강희재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교육일반 · 소공동체 담당)]
[소공동체 재발견]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재발견하는 소공동체 (3)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을 늘 새롭게 하십니다(복음의 기쁨 11항).” 교회는 언제나 새로워지려고 노력합니다. 그 새로움은 교회가 세상의 유행을 흉내 내려는 어설픈 시도와 사람들에게 잠깐의 호기심만을 안겨주기 위한 인기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 아닙니다. 오히려 변할 수 없는 진리의 새로운 그릇이 되기 위함이고,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모든 이를 품에 안아 주시는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증거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데서 요청되는 새로움입니다. 그러한 새로움이 맞닿은 곳에서는 실제로 복음의 힘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반대되는 판단 기준과 관심의 초점, 생활과 환경, 사상과 가치관 등이 변화되고 바로 잡히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화’입니다.(현대의 복음 선교 18-19항 참조) 그리고 복음화의 핵심과 본질은 언제나 같습니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신 하느님이십니다(복음의 기쁨 11항).”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 안에는 ‘새로움’에 대한 ‘신선한 충격’과 ‘거북한 마음’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현 교황님께서는 그 새로움에 대한 신선한 충격을 주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물론이고 비그리스도인까지도 그 충격으로 참된 기쁨과 희망을 새롭게 품게 하셨고, 문을 걸어 잠그고 잠들어있던 교회를 흔들어 깨우셨습니다. 한 동안 고요히 다물고 있었던 교회의 입은 다시 복음의 기쁨을 말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인의 심장은 생명력 넘치는 활동과 복음적 삶을 살기 위한 설렘으로 힘차게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교황님은 우리를 향해 확신에 차 이렇게 증언하십니다. “이러한 새로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삶과 우리 공동체를 늘 새롭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비록 교회가 어둡고 나약한 시기를 겪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결코 옛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당신을 가두어 두려는 우리의 진부한 도식(圖式)을 깨드리실 수 있고, 하느님이신 당신의 끊임없는 창조력으로 우리에게 놀라움을 주십니다. 우리가 원천으로 돌아가 복음 본연의 참신함을 되찾고자 할 때마다 새로운 길들이 드러나고 창조적 방식들이 보이며, 또 다른 형태의 표현들과 더욱 설득력 있는 기호들과 오늘날의 세계에 새로운 의미를 갖는 어휘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모든 참다운 복음화 활동은 언제나 ‘새로운’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1항).”
그러나 교회의 한 편에서는 그 새로움에 ‘거북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새로움을 부담스러워하거나 불편해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음 본연의 참신함을 얻기 위해 매일 새롭게 변화하고 용기 있게 도전하려는 마음을 포기한 채 ‘단순한 관리와 현상 유지’에만 골몰하려는 이들의 거북한 마음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안정된 제도나 구조라도 새로운 생명과 진정한 복음 정신이 없다면, 곧 교회 본연의 소명(복음화)에 충실성이 없다면, 이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일치 교령 6항 ; 복음의 기쁨 26항 참조)
여기서 ‘쓸모없는 것’이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불필요하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마비(痲?)된 상태와 무력한 상태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1980~2000년도까지 교회는 한국 사회 안에서 진리와 정의, 그리고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굳건한 반석이 되어왔습니다. 그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톨릭교회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관심과 호응을 보내고 있었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분의 자녀로서 살기 위해 스스로 교회 안으로 들어와 교회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하게 외적 성장을 크게 이루게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외적 성장을 이룬 교회는 사목적 필요성에 따라 기존의 ‘공소나 구역’을 ‘구역 반’이라는 행정적 조직으로 보다 체계화시킴으로써 유입되는 신자들을 관리하도록 하였고, 본당에서는 여러 신심 단체를 통해서 기본적인 신앙과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당시 사회 문화적 분위기 역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농촌에서 도시환경으로 변화되는 상황이긴 하였지만, 공동체적인 생활에 익숙한 세대들을 주축으로 희생, 봉사, 순명, 일치 등을 통해 교회 생활에 참여하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교회는 조직적으로 잘 정비되었고 빠른 시간 안에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안정 속에서도 교회의 위기는 이미 유럽 등의 타 지역 교회를 통해 감지되고 있었습니다. 교회 밖, 아니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머문 삶의 자리에서는 이기주의, 개인주의, 물질만능주의, 뉴 에이지, 신흥 종교의 현상들이 빠르게 번지고 있었고, 교회 안에서는 사제 수도자 성소의 감소, 냉담자의 증가, 영세율의 급감, 주일 미사 참례율 급감, 그리고 교회 내의 사상 및 이념적 갈등 등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보편 교회 안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의 구현과 새로운 복음화에 대한 연구와 노력들이 급박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유럽 등의 교회에서 나타난 교회의 위기가 한국 교회에 다다르게 된 것은 30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신학적인 분석과 쇄신의 요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 한 곳에서 키워 왔지만, 그것이 교구와 본당과 우리 자신이 문제의식을 느끼고 실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문제의식을 느끼고 새로운 사목구조와 정책을 만들어 내어 새 복음화를 하려고 하는 지금도 세상은 교회와 복음과는 상관없이 빠르게 자신만의 가치와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적지 않은 신자들이 복음이 아닌 단체 중심의 친목과 기복적인 신심에 의존해 있어 세상이 만들어내는 가치와 문화를 복음적으로 해석하고 변화시킬 수 없는 허약하고 빈곤한 신앙 상태를 가지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고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수원교구는 3년의 준비과정을 끝내고 1999년 9월에 변화하는 세상에 부응하여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교구 시노드>를 개최하였습니다. ‘새로움’ 그 첫걸음을 교구가 걷게 된 것입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2월호, 강희재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교육일반 · 소공동체 담당)]
[소공동체 재발견]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재발견하는 소공동체 (4)
수원교구는 시노두스를 통해 미래 비전을 보았습니다. “구역·반 공동체가 활성화되어 믿는 이들이 삶의 현장에서 함께 기도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듣고 공부하며, 함께 선교활동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단계까지 이르면 신자들이 체험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기쁨과 내적 평화를 맛보게 될 것이며,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하고 신앙생활에 활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때에 신앙인들이 질적인 성숙이 이루어져 성사생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선교 의지도 높아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역 반 활성화는 바로 본당의 대형화로 인한 익명화, 신앙과 삶의 유리, 냉담자 그리고 선교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길입니다(수원교구 제1차 시노두스 최종 문헌 p 7-8).”
공동체가 비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함께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힘을 모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다. 게다가 그 꿈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서로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선(善)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문제 혹은 어려움을 제기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비전-꿈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16년 전 수원교구가 어렵고 힘겨워진 현실에서도 복음의 기쁨을 서로 나누고 선포할 수 있는 꿈과 의지를 간직했었다는 것은 참으로 은혜로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가톨릭교회의 신앙생활에 입문하는 이들의 꿈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시노두스는 그 꿈을 소공동체를 안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적인 신앙생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공동체 안에서 기쁨과 내적 평화를 맛보는 신앙생활’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생활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기쁨과 내적 평화를 맛본 사람은 그 맛을 언제나 추구하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왜 함께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는지, 왜 바쁘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미사에 참례하고 봉사하는지, 왜 나의 소중한 이들에게 신앙을 건네고 물려주는지에 대한 이유를 그 맛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켜야 하는 의무나 계명이 있기 전에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과 평화가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쁨과 평화를 체험한 사람은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의무가 아닌 자발적인 의무감으로 복음의 기쁨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이에게 선포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의무를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을 나누는 사람,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주는 사람, 그리고 풍요로운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개종 강요가 아니라 ‘매력’이기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 14항).”
교황님의 말씀대로 기쁨이 있고 전망이 있고 풍요로운 잔치가 있는 곳은 누구에게나 매력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그곳에서 머물러 함께 하고 싶어 하고, 아무리 힘들고 기나긴 길이라도 그 기쁨과 전망과 잔치에 동참하고자 하고 또 함께 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리하여 필요하다면 자신의 수고와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 공동체가 바로 그러한 매력을 주기에 충분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好感)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2.46-47).”
교구에서 발행하는 ‘나눔의 소공동체’에서는 매달 교구 내 다양한 소공동체 모임과 활동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주교회의 차원에서도 매년 소공동체 활성화의 모범적인 사례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본당을 소개하고 실제로 탐방합니다. 그들 역시도 처음에는 잘 맞지 않는 그래서 한 동안 어색하고 불편한 옷을 입은 것 같은 모습으로 소공동체를 꾸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돌보고 이끌어주었던 분은 말씀으로 현존하시는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각 사람의 마음과 입에 담아주심으로써 함께 모인 서로에게 기쁨, 위로, 평화, 용기, 격려, 사랑을 나누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비추어진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구성원은 그것을 서로 소중히 받아들이며 존중해 주도록 성령 안에서 섭리해주신 것입니다.
똑똑하고 잘 난 사람들이 다투어 자신을 주장하는 자리에서는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과 존재를 존중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들의 자리에는 매력이 발산됩니다. 그 매력이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기쁨, 위로, 평화, 용기, 격려, 사랑과 같이 우리 자신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은총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보며 그것을 서로 나누는 사람들의 자리, 체험적인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는 소공동체가 그러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루는 중심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헤아릴 수 없는 힘이 담겨져 있습니다. 복음서는 씨앗이 뿌려지면 농부가 잠을 잘 때에도 저절로 자라난다고 말합니다(마르 4,26-29 참조).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속셈과 생각을 넘어 그 뜻을 이룹니다(복음의 기쁨 22항).”
소공동체는 바로 그러한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모여 그 매력적인 공동체, 체험적인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는 공동체라는 비전-꿈을 이루고자 합니다. 이미 그 비전이 성취되어 매력을 발산하는 공동체도 있겠고, 그 비전을 위해 첫걸음을 내딛은 이후 오늘도 한걸음 한걸음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공동체도 있을 것입니다. 그 과정과 모습은 서로 다를 수 있어도 궁극적인 목적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징은 ‘기쁨’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숙하고 매력적인 공동체의 표징도 ‘기쁨’입니다. 먹고 놀고 즐기는 기쁨이 아니라 공동체의 돌봄을 받으며 말씀과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용기, 치유와 회복, 사랑을 체험하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 간절하고 매력적인 기쁨을 마다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그 기쁨을 간직하고 계신지요?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3월호, 강희재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교육일반 · 소공동체 담당)]
[소공동체 재발견]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재발견하는 소공동체 (5)
그리스도인의 표징은 기쁨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사도들을 통해 주신 ‘부활과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 우리가 그분께 받은 ‘복음-기쁜 소식’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게 하는 원천이며 이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세상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임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복음의 기쁨’을 간직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선교(宣敎)’입니다!
교회가 자신의 본질로서 수행하는 선교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는 것(루카 4,18 참조)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따뜻이 맞이하고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병든 이들과 허약함과 부족함에 짓눌린 이들을 찾아가 돌봐주는 것입니다(마태 25,35-37 참조).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복음의 기쁨을 살고 있는 우리를 통해 주님의 부르심을 듣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끊임없이 쇄신하고 적응해야합니다. 시대와 민족과 문화와 정신에 복음의 기쁨을 침투시켜 변화시키기 위해서 교회는 자신의 모습을 늘 새롭게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 새로움을 거부하고 과거 혹은 현재의 것에 안주하고 자신의 안위와 방어에 심취된 교회는 정체(停滯)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도태(淘汰)되고 사람들에게는 무관심 속에 소외(疏外)되어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 곧 짠맛을 잃은 소금과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넣어 둔 존재(마태 5,13-15 참조)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교구 본당 소공동체 가정 개인 포괄)는 과연 선교를 위해 새로움에 대해 시선을 돌려 마음을 열어놓았는지를 진지하게 물어볼 일입니다. 16년 전, 바로 그 물음 앞에서 수원 교구 시노두스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교구의 쇄신을 이야기하였었습니다. 그리고 16년이 지난 지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더욱 교회와 본당의 사목적 쇄신을 더욱 강력하게 피력하고 계십니다.
“저는 교회의 관습과 행동양식, 시간과 일정, 언어와 모든 교회 구조가 자기 보전(保全)보다는 오늘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적절한 경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곧 사목 쇄신을 요구하는 구조개혁은 이러한 의미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곧 모든 구조를 더욱 선교 지향적으로 만들고, 모든 차원의 일반 사목 활동을 한층 포괄적이고 개방적인 것으로 만들고, 사목 일꾼들(사제 평신도 봉사자)에게 ‘출발’하려는 끊임없는 열망을 불러 일으켜, 예수님께서 우정을 맺도록 부르신 모든 이에게서 긍정의 대답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27항). 선교를 핵심으로 하는 사목은 ‘우리는 늘 이렇게 해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안이한 태도를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기 공동체가 지닌 복음화의 목표와 조직, 또 그 양식과 방법을 과감하게 창의적으로 재고하도록 권유합니다. 목표만 제시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들을 함께 찾지 않는다면 순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33항).
수원 교구가 시노두스의 결과물로서 소공동체 사목을 선택했을 때 그것은 유행(trend)을 따르거나 시험 삼아 해보는 운동(movement)이 아니었습니다. 소공동체 사목은 말씀 중심의 삶과 공동체의 친교를 위한 새로운 사목 모델로서 선교적인 삶을 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복음에 반하는 강력한 세속화에 부딪혀 신앙의 원천인 복음(말씀)중심적인 확고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 상태로, 공동체의 친교가 빠르게 와해되었으며, 실제로 내적 외적 복음화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내린 절박한 결정이었습니다.
‘새로운 천년기를 맞이하는 교회의 당면 과제는 복음화이다. 그러나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교회가 복음화 사업을 지속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게만 느껴지고 있다. 이러한 추세로 말미암아 전통적인 사회에서 누리던 관계나 인간적인 친밀감, 그리고 소속감은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 되었다. 교회 안에서는 대다수의 신자들이 방관자(익명화)로 머무를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시대의 요청이자 징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원 교구는 이러한 시대의 요구와 징표들을 직시하면서 구역반 공동체(소공동체) 활성화를 통하여 세상의 복음화(외적)와 공동체의 복음화(내적)를 이루려고 한다’(수원교구 제1차 시노두스 최종 문헌, p13-14 참조).
그와 같이 수원 교구는 시노두스를 통해 교구의 새로운 내적 외적 복음화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필요성, 소공동체를 통한 내적 외적 복음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사목 구조의 변화 등 단계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4월호, 강희재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교육일반 · 소공동체 담당)]
[소공동체 재발견]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재발견하는 소공동체 (6)
교회, 구체적으로는 본당의 내적 외적 새 복음화를 위한 사목 구조의 변화는 단순히 조직 개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과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 사목 구조를 변화시켜야 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속한 본당 공동체는 오히려 지나치게 행정적이고 조직적이어서 신자들이 교회의 정체성과 목적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달리말하면 적지 않은 신자가 매 주일에 미사를 참례하고 매달 교무금이나 기타 봉헌금을 납입함으로써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자의 의무를 다했다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공동체로는 하느님을 만날 수도, 하느님을 증거할 수도 없습니다!
본당 공동체는 ‘생활한 공동체’입니다. 각 동(洞)에서 행정과 복지를 담당하고 있는 주민센터나 복지회관 같은 곳이 아닙니다. 본당 공동체에는 하느님 안에서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이 실제로 선포되고 실현되는 곳이 본당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본당을 이렇게 정의하셨습니다.
“본당(本堂)은 가정들과 사람들의 생활과 실제로 맞닿아 있는 곳으로서, 그 지역에서 사는 교회의 현존(現存)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인 생활이 성장하는 장소이며, 대화와 선포, 아낌없는 사랑 실천, 그리고 예배와 기념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 모든 활동을 통하여 본당은 그 구성원들이 복음 선포자가 되도록 격려하고 교육합니다. 본당은 공동체들의 공동체이고, 길을 가다가 목마른 이들이 물을 마시러 오는 지성소이며, 지속적인 선교의 중심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당은 사람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살아 있는 친교와 참여의 장소가 되고 온전히 선교를 지향하여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28항).
본당의 핵심 개념은 ‘신자들의 공동체’이며 ‘하느님 말씀과 예배와 사랑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복음화와 선교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교종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이 점을 분명하게 확인하셨습니다. ‘제도(制度), 영토, 건물 등이 본당의 원리일 수 없습니다. 본당은 말씀에 의해 생겨났고,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살아가며, 애덕 실천으로 고무됩니다. 또한 본당은 가정 다음으로 교회의 제일 기초 단위의 공동체요 신앙 학교입니다.(La parrochia non e principamente una struttuna, un territorio, un edificio. La parrochia e in primo luogo una comunita di fedeli e pertanto essa nasce dalla Parola, ha per centro e culmine la celabrazione dell Eoucaristia, e animata dalla carita. La parrochia e la prima comunita ecclesiale : dopo la famiglia, e la prima scuola di fede.)’
‘말씀에서 태어난 공동체’가 본당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본당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이루는 신자들의 삶의 원리이자 중심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본당 공동체와 그 신자들은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양육(養育)됩니다. 이는 단순히 성체를 자주 모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체성사 안에 담겨진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가슴에 새기며 실제로 그 신비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깊이 매료되고 성체성사의 신비 안에 머문 사람은 하느님 사랑에 자주 그리고 깊이 참여하려고 합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사랑이며 친교이고 나눔(희생-봉헌)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성체성사에 마음을 다해 깊이 참여하고 그 신비를 깨달았다면 그의 삶 역시 사랑과 친교와 나눔의 삶으로 변화될 것이며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머물러 있는 본당 공동체를 들여다봅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무엇보다도 세상이 여러분이 머물러 살고 있는 본당 공동체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헤아려봅시다. 혹시 주민센터나 복지회관과 같지는 않습니까? 잘 갖추어진 행정기관처럼 정시에 미사와 성경 공부가 이루어지고, 전산화로 증명서 발행 및 봉헌금 수납 처리는 원활하게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의 체험과 나눔을 말하기조차 조심스럽지는 않은지요? 오히려 미움과 단죄가 독버섯처럼 곳곳에 생겨나고, 배려와 나눔과 희생은 사라지고 개인의 지향과 축복만을 위해 기도하고 정성을 다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기심과 배타주의로 분열과 불목이 일어나 상처입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와 같이 공동체가 와해되는 상황에서도 사제와 신자들이 포기할 수 없는 바는 서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이 모든 현상이 일어나는 가운데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편 매일 본당을 지나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목말라하며 그것을 배우고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굳게 닫힌 성당 문과 우리들의 무관심, 그리고 입교 절차만을 말해주는 사무적 태도로 그 목마름을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역 반 소공동체는 지금 우리 본당의 현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표징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복음 말씀에 낯설어하고, 함께 모여 친교를 이루며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꺼려하고, 같은 삶의 자리에서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하느님의 한 형제자매’라는 인격적인 관계를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 그 현실이 지금 목적과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본당의 현실이며 신자 개개인이 처한 현실로써, 소공동체가 그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고 가장 가까운 삶의 현장에서 겪고 있는 것입니다.
‘구역 반 공동체는 교회의 교회 됨을 지향한다. 그 공동체는 단순히 제도적 차원의 행정 구역 단위가 아니라 공동체 자체가 교회요 교회가 설 마당이다. 복음화에 초점을 맞춘 하나의 교회이면서 보다 큰 교회인 본당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수원교구 제1차 시노두스 최종 문헌 15p 참조).
따라서 ‘소공동체 중심 사목 구조로의 변화’는 바로 이 모든 것을 수용하고 감수하여 새로운 복음화를 이루기 위한 변화입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5월호, 강희재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교육일반 · 소공동체 담당)]
[소공동체 재발견]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재발견하는 소공동체 (7)
“저는 사목 일꾼들이 도움을 받고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자리, 자신의 개인적 사회적 선택이 선과 아름다움을 향하도록 자신의 삶과 경험을 복음에 비추어 더욱 깊이 식별하는 자리’가 필요합니다”(복음의 기쁨, 77항).
사제들,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둘이나 셋이 모이면 무슨 내용의 말을 나눌까요? 요즘 주님을 믿는 이들이 모여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대화의 결론을 어떻게 맺고 있는지요?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속에 살고 있으면서 정치, 경제, 사회, 가정, 문화 등의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주요 관심사가 아닐 수 없고 또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이니 ‘그리스도인’인 이유는 그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면서도 그 모든 것들을 복음의 정신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해석하고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해석하고 식별하여 행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비추어 해석하고 식별하여 따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지난 4월 국회의원 선거 전에 교구에서는 후보자들에게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몇 가지 주제들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그 응답을 주보에 실었습니다. 몇몇 신자들은 ‘이렇게 민감한 시기에 왜 그런 난처한 질문을 던지고 주보에까지 실고 있느냐?’고 의아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면에서 교회가 완전히 선을 긋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대답할 뿐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당연히 복음 선포의 첫 수혜자는 그리스도인인 자신이어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져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넘치는 자비, 인간의 존엄함과 피조물과의 조화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깊고 충만히 담긴 복음의 기쁨과 정신을 세상에 나아가 선포하고 실현해야 합니다. 만약 그 선포와 참여에 방해되거나 반대되는 것들이 있다면 복음의 힘으로 물리쳐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 혹은 세상의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복음의 정신과 그것에 바탕을 둔 판단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이들이 주님의 한 형제자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한마음 한 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한 분이신 주님과 하나의 복음을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간직한 그러한 다양함이 풍요로움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면 곳곳에서 그 다양함이 ‘갈등과 불목’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복음보다는 자신의 가치관과 이해득실이 모든 것의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그들의 가치관과 이해득실을 복음과 영적인 삶으로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방증입니다.
소공동체 사목이 추구하는 ‘교회의 교회 됨’이 ‘복음화’의 다른 표현이라면, 그 복음화는 ‘복음’으로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자리, 자신의 개인적 사회적 선택이 선과 아름다움을 향하도록 자신의 삶과 경험을 복음에 비추어 더욱 깊이 식별하는 자리’가 바로 교회의 교회 됨의 자리, 복음화의 자리, 소공동체 모임입니다.
구역 반 소공동체는 그것을 위해 <만남, 기도, 복음 나누기, 교회의 가르침 공부, 본당 공동체와 일치, 선교활동, 친교 - 수원교구 제1차 시노두스 최종문헌 p18-20>라는 요소를 가지고 운용합니다. 기존의 신심단체들이 주로 정해진 틀에 따라, 국한된 시간과 장소에서, 간접적으로 복음말씀에 접근하여 부분적인 내용만을, 주입식으로 읽고 외우고 수동적으로 실천하는 것에 그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사목 대안으로서 소공동체 사목이 16년이 지난 지금 교회 안에서 사목자를 비롯하여 평신도들에게서 적지 않은 회의(懷疑)를 갖게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는 만남 곧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 둘째는 복음나누기가 여전히 부담스럽고 어렵다는 것, 셋째는 염경기도에 익숙한 이들에게 자유기도와 묵상기도는 힘들다는 것, 넷째는 속지적인 원칙에 따라 구성원의 참여 있어서 자발성과 자율성이 제한되었다는 것, 다섯째는 소공동체 모임과 활동이 다른 모임이나 활동과 겹쳐 신앙생활에 부담이 가중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사목구조로의 변화를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일까요? 아니면 시노두스 이후로 교구와 사목자들의 인식 부족과 관심 결여의 문제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신자들이 복음화가 되기 전에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이기적인 나태, 무익한 비판주의(복음의 기쁨, 81-86항 참조)’에 빠져든 것일까요?
“수많은 복음화 일꾼들에게서, 비록 그들이 기도하고 있지만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정체성의 위기를 겪으며 열의가 식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78항).
“세상에 빛과 소금을 가져다줄 선교 활력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데도, 많은 평신도가 사도직 활동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자유 시간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며 책임 맡기를 꺼려합니다”(복음의 기쁨, 81항).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6월호, 강희재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교육일반 · 소공동체 담당)]
[소공동체 재발견]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재발견하는 소공동체 (8)
“어떤 사람들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고, 노력해 보았자 소용없다는 생각으로 선교에 투신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정작 나는 아무런 뜻 깊은 결과도 보지 못할 터인데 왜 내 안위와 즐거움을 포기해야만 하는가?’ 이는 안락함과 게으름과 막연한 불만과 공허한 이기주의에 갇혀 벗어나지 않으려는 나쁜 핑계일 뿐입니다. 이는 자신을 해치는 태도입니다. 인간은 희망이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바뀌지 않으리라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물리쳤고 전능하신 분이심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깨닫도록, 이를 체험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희망의 깊은 원천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도움을 아낌없이 주실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275항).”
개인주의, 정체성 위기, 식어가는 선교적 열정은 지금 교회가 당면한 문제입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의 10년, 20년 후의 모습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당 마다 주일 미사를 참례하는 신자들은 급격히 줄어들 것이고, 봉사자들은 지금보다 더욱 찾기 어려울 것이며, 교우들끼리 복음이 아닌 자신들만의 생각과 가치관의 충돌로 인해 갈등과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이고, 공동체의 영적인 기쁨과 활력은 메말라 신앙생활을 포기하거나 그릇된 신심에 더욱 현혹될 신자들은 늘어날 것입니다. 그런 비관적인 생각의 중심에 바로 그 세 가지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예감하고도 적지 않은 성직자, 평신도들은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려하는 가운데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에 꽁꽁 묶여 있습니다. 그저 현실을 유지관리하거나 간신히 그 자리와 그 시간을 버티어내고만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현장에 서 있는 소공동체는 교회의 그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있고, 그것들과 부딪히고 있으며, 그런 교회의 고민과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로 인해 새로운 복음화가 간절한 현 시점에서 많은 성직자, 평신도가 사목 형태를 다시 과거의 형태로 회귀하고 싶어 하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제도적이고 행정적인 관리 체계, 곧 단체 중심 사목이나 소수의 봉사자와 함께 성직자 홀로 모든 것을 운영하려는 사목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사목자 입장에서는 관리 차원으로 가장 쉬운 선택이고, 평신도 입장에서는 복음화에 대한 고민과 활동에 대한 부담을 털어버릴 수 있는 편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는 예수님의 제자 됨과 하느님 말씀으로 불타올라 성령의 다양한 은사로 그리스도의 지체를 쇄신하고 성장시키는 것과 세상을 복음의 힘으로 변화시켜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일을 멈추게 하는 최악의 선택이며 위험입니다.
더 이상 과거의 사목적인 형태는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불어 닥치는 세속화의 다양한 현상들인 개인주의, 교회와 신자들의 정체성 위기, 차갑게 식어가는 선교적 열정에 대응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주의’는 삼위일체 친교와 사랑에 기초한 교회의 공동체성을 파괴할 것이고, ‘정체성의 위기’는 복음의 기쁨을 잃은 채 신앙을 사사화시키고 하느님께 대한 오롯한 신앙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며, ‘차갑게 식은 선교적 열정’은 교회 안에서는 교회의 운영과 신앙생활의 침체를 일으키고 외부에서는 세속화의 거세고 다양한 도전으로 곤욕을 치르게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목자 혹은 열심한 평신도 홀로 감당할 수도 없고 교회 공동체 안에 충만하신 성령의 은사와 하느님의 말씀(성전과 성경)에 힘입지 않고서는 견디어낼 수 없습니다. 소공동체는 새로운 복음화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세속화가 가져온 비(非)복음적이고 반(反)교회적인 문화와 도전에 대응하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소공동체는 개인주의 신앙에 교회 공동체의 친교로, 정체성의 위기에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심으로, 식어가는 선교적 열정에 십자가의 승리를 앞세운 다양한 복음화 활동으로 대응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말씀 안에서 예수님과 하느님의 사랑 체험이 있습니다. 바로 그 만남과 체험이 우리를 ‘선교적인 제자’로 거듭 태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은 그들이 받은 세례에 힘입어 선교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세례 받은 모든 이는 교회 안의 역할이나 신앙 교육의 수준에 상관없이 복음화의 능동적인 주체입니다. 따라서 복음화 계획은 전문가들이나 수행하는 것이고 나머지 신자들은 그저 수동적인 수용자라고 여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세례 받은 모든 이의 주도적인 참여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에서 적극적인 복음화 활동을 하라고 요구를 받습니다. 분명히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진실로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밖으로 나아가 그 사랑을 선포하는 데에 오랜 준비나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만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입니다(복음의 기쁨, 120항).”
이어서 선교하는 제자인 그리스도인과 교회 생활의 원천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소공동체의 목적이자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 스며든 생명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죽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또다시 곳곳에 부활의 싹이 돋아납니다. 이는 막을 수 없는 힘입니다. 가끔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둠 속에서도, 폐허가 된 땅 위로 끈질기고도 강인한 생명이 솟아납니다. 인간은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늘 다시 일어납니다. 이것이 부활의 힘이고, 모든 복음 선포자는 그 힘의 도구입니다(복음의 기쁨, 276항).”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7월호, 강희재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교육일반 · 소공동체 담당)]
[소공동체 재발견]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재발견하는 소공동체 (9)
“인간은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늘 다시 일어납니다. 이것이 부활의 힘이고, 모든 복음 선포자는 그 힘의 도구입니다(복음의 기쁨, 276항).” 다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이 말씀에 머물 때마다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리고 매일 매순간 그 시간 그 자리를 포기하지 말고 지켜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소공동체 봉사자를 비롯하여 모든 교회의 봉사자들의 지치고 꺾인 마음을 바로 세워주고 식어진 가슴을 다시 뜨겁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기도 안에서 마주하는 하느님의 말씀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땅은 말라 시들고, 누리는 생기를 잃어 시들며, 하늘도 땅과 함께 생기를 잃고 있었습니다(이사 24,4).’ 우리의 열심, 우리의 수고, 우리의 기대들도 이러저러한 일들로 인해 자주 마르고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느님의 백성은 매일 새롭게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목자들이 깊은 실의와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조차도 기도 안에서 하느님 말씀과 만나고, 주님과 성실한 대화를 나누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 온 덕분입니다. 세속화와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복음화 현장에서 과중하리만큼 엄청난 수고와 희생으로 인해 병들고 아파하고 지쳐 쓰러진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께서 다가오시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하며 그분을 자신들의 마음과 삶에 모신 것입니다.
지금도 소공동체 봉사자들은 매일 매순간 무관심과 편견,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 젖어 든 신앙, 격렬한 반대와 힘겨운 상황을 마주하면서도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부여하신 복음 선포자요 선교사로서 그 몫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상황이 더욱 강해질 때마다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 힘입지 않고 척박한 복음화 현장에 오아시스를 마련하듯, 기도의 자리와 말씀의 샘을 더욱 깊이 마련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바로 이 점을 모든 복음 선포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투신과 활동에 그리스도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적인 공간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성체 조배를 하고 기도 안에서 말씀과 만나고, 주님과 성실한 대화를 나누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쏟지 않으면, 우리의 활동은 쉽게 무의미해지고, 우리는 노고에 지치고 열정도 사그라지고 맙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허파가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263항).”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화의 동인(動因)은 근본적이고 본질적으로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 그분께 구원받은 우리의 경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사랑과 경험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 날 이후부터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었지만 꾸준한 기도 안에서 새롭게 체험할 수 있고, 바로 그런 체험이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과 수고에 의미와 힘을 불어 넣어 줄 수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나누려는 강렬한 열망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사로잡아 주시도록 꾸준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은총을 청하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시고 생기 없고 피상적인 우리 삶을 흔들어 주시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열린 마음으로 서서 그분의 시선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때, ‘우리는 그분 사랑의 눈길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어루만지시고 당신의 새 생명을 나누도록 우리를 이끄실 때 우리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때 일어나는 일이 바로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선포하는(1요한 1,3 참조)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을 불러일으키는 최선의 동기는 복음을 사랑으로 관상하고 조금씩 찬찬히 마음으로 읽는 것입니다. 관상은 날마다 우리에게 보화가 맡겨져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도록 해 줍니다. 이 보화는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만들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줍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것 가운데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264항).”
이와 같이 우리가 다시 기도 안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가서고 그분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면 말라버렸던 열정은 생기를 되찾고 시들었던 희망들은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엠마오의 두 제자가 경험한 부활 체험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봉사자는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걸으시고 이야기하시고 숨 쉬시고 함께 일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활동 가운데에서 자신과 함께 살아가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선교 활동의 중심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노력은 곧 시들해지고, 우리가 전하는 것에 대해서도 더 이상 확신하지 못하게 됩니다. 확신과 열정과 신념과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합니다(복음의 기쁨, 266항 참조).”
그러므로 교회의 봉사자들이 복음화 혹은 복음 선포를 위한 첫 번째요 마지막 활동은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 안에서 주님을 뵙는 일입니다. 성체 앞으로 나아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4-5).” 주님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엠마오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가슴을 뜨겁게 태우는 확신과 열정이며, 빵(성체)을 떼어 나누듯 복음의 기쁨을 형제들에게 나누는 사랑입니다. 바로 그것이 구역 ? 반 소공동체가 맺고자 하는 열매입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8월호, 강희재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교육일반 · 소공동체 담당)]
[소공동체 재발견]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재발견하는 소공동체 (10)
저는 이제 소공동체의 현실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소공동체의 필요성과 목적, 그리고 그 역할을 말하였다면 지금부터는 교회의 민낯이 되는 본당과 구역 반 소공동체의 현실(現實), 특별히 봉사자들이 처한 현실을 먼저 직시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봉사자의 역할이 소공동체 활성화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소공동체 봉사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모임과 활동 중에 상처를 받습니다. 구성원의 책임감 없는 표현들,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는 거부와 비협조, 후임 봉사자의 부재, 사목자의 무관심, 신심단체들과의 갈등 등을 홀로 감당해내려다가 결국에는 상처를 입고 지쳐서 봉사직을 내려놓는 일이 허다합니다.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 이상을 구역 반 소공동체를 위하여 열정을 다해 쏟아 봉사하였지만, 보람과 의미를 느끼며 임기를 마치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목 분과 봉사자나 신심 단체 봉사자보다 새로운 후임 봉사자 선발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또한 소공동체 봉사자들이 겪는 어려움 중에는 직무에 대한 이해 부족과 교리적인 지식의 부족함,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을 이끄는 리더십의 부재가 있습니다. 소공동체 봉사자들은 대부분 신심 깊은 신자 생활을 하는 중에 타의(他意)에 의해 봉사자로 선발되어 임명됩니다. 문제는 힘겨워하면서도 하느님께 순명하는 마음으로 그 직무를 받아들이지만, 대부분 직무에 대한 설명과 함께 제대로 된 직무 매뉴얼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쳇말로 그냥 맨땅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봉사직은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 교리와 성경 지식, 인격적 관계, 리더십 등에서 자신의 부족함만을 드러내는 어둔 경험을 안겨주기에, 자긍심과 자신감도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맙니다. 게다가 속지적인 특성을 지닌 구역 반 소공동체이기에 구성원의 자발성이 떨어지는 가운데, 모임도 활동도 어려워지게 되면 봉사직만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 자체에도 회의(懷疑)를 품게 됩니다.
또한 구역 반 소공동체는 본래 구성원 안에서 반장, 서기, 진행자, 교육, 선교, 봉사, 전례 등 각자의 고유한 직무가 있습니다(수원교구 「소공동체 교육 2단계」, 제3과 5장 ‘소공동체 구성하기’ 참조).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소공동체 참여 인원이 적다보니 그 모든 것을 구역장 혹은 반장이 수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구역 반 일로 그치지 않고 본당의 각종 행사 준비나 일들에도 동원(動員)되어, 같은 공동체 구성원이 적극적으로 동참해주지 않는 한, 봉사자들이 일의 과중함으로 느끼는 부담과 힘겨움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소공동체 봉사자 외에도 교구와 본당의 사목구조도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교구장 중심 사목으로 ‘소공동체 중심 사목’을 지향하고 있지만, 적지 않은 사목자들이 소공동체에 대한 이해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학생 때부터 보좌 신부 기간 동안 소공동체 사목 현장을 경험하고 학습을 할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본당 사목구 주임이 되면 소공동체 봉사자를 행정적 협력자로 여기는 데에 그치고, 봉사자 교육이나 회의도 의견 수렴과 공감의 장(場)이 되기보다는 업무를 보고 받고 지시하는 정도로 그치고 맙니다. 그런 이유로 사제들을 대상으로 소공동체 현황과 사목 운영 등에 대해서 정기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시급하고 절실합니다.
더 큰 문제는 본당 사목구 주임을 도와 본당 사목 정책을 기획하는 본당 상임위원 봉사자들이 소공동체 교육이나 모임에 함께하지 않는 사례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총회장과 다른 상임위원들은 구역 반 소공동체 모임과 활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소공동체에 적합한 사목 기획과 운영에 도움과 협력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소공동체 활성화를 위해서는 상임위원과 사목분과 위원들이 솔선수범하여 공동체 모임과 교육과 활동에 참여하고 협력하도록 본당 사목구 주임은 정확하고 분명하게 주지시켜 주어야 합니다.
또한 시노두스 시행 세칙에 따라 지구 단위로 특정 요일을 소공동체 날을 정함으로써, 다른 신심 단체 모임과 중첩되지 않고 소공동체에 집중하도록 했던 취지도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소공동체 활동과 신심단체 활동이 중첩되어 서로 불편함을 가지게 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으며, 특별히 선교활동과 본당 행사에 있어서는 정확한 직무 분장(分掌)이 되지 않아 갈등과 불목의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본당 사목구 주임이 소공동체 위원회와 평신도 사도직 단체 협의회와 함께 조정 분담을 이끌어 내지 않는 한, 지속적이 갈등의 원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수원교구는 지금 30~50대 교우들을 가장 많이 품고 있음에도 교회 생활로부터 가장 멀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사회 환경에서 처한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그들에게 복음의 기쁨과 하느님의 은총이 깊이 체험될 수 있도록 소공동체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지난 16년 동안 교구장 중점 사목으로 시행한 소공동체 중심 사목은 지금 개선과 변화가 필요합니다. 소공동체 중심 사목을 하는 가운데 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났다는 것은 단순히 부정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교회가 이 시대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 소중한 과정이고 열매입니다. 왜냐하면 소공동체는 그 동안 언급한 대로 교회의 민낯이고 신앙살이의 현장이기 때문이며, 교회가 원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복음의 기쁨, 231항)”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씀에 따라 소공동체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말씀과 애덕 실천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지향합니다. 이를 위해 소공동체는 고정된 틀이나 프로그램을 거부하고, 복음화에 합당한 모습으로 쇄신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여 변화할 수 있고 그래야 합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9월호, 강희재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교육일반 · 소공동체 담당)]
[소공동체 재발견]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재발견하는 소공동체 (11)
소공동체 모임과 활동의 중심은 ‘말씀(복음)나누기’입니다.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마주하며 위로와 용기, 희망과 결심을 품게 됩니다. 복음화를 위한 선교 활동은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에서 비롯되고 그것을 향하기 때문에 소공동체는 ‘말씀 나누기’를 가장 중심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교우들에게 단시간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나누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것은 많은 훈련이 요청되는 부분입니다. 물론 적지 않은 교우들이 소공동체 모임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과의 감동적인 만남을 체험하고 형제자매들 안에서 깊은 친교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교우들이 말씀 나누기에 대한 부담감이 커서 모임에 함께 하는 것을 꺼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더 나아가 염경기도와 정해진 ‘회의식 신심활동’에 수십 년간 익숙했던 교우들에게 마음을 열고 자유롭게 묵상을 나누고 기도한다는 것은 부담을 넘어서 흥미를 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사 어렵지만 말씀 나누기에 적극적으로 임하려고 해도 앞서 말한 대로 잠재된 부담과 함께 명확한 활동을 통한 보람을 얻기 어려운 모임이기에 쉽게 무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말씀 나누기는 형식적으로 진행되고 ‘다과(茶菓) 시간’으로 그 아쉬움을 대신하려는 노력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다과 시간은 친교라는 차원에서 그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지나치고 또 길어짐으로써 차기 모임에 부담과 소외를 가중시키는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또 말씀 나누기를 한다고 하여도 복음과는 상관없는 ‘생활 나눔’으로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한 생활 나눔은 자연스럽게 함께 하고 있는 구성원들에게 지루함과 스트레스를 제공함으로써 본질에서 멀어진 모임을 꺼리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모임 안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문제는 구성원 간의 얽혀 있는 관계성과 세대 간의 차이입니다. 30대부터 80대까지 함께 모이는 자리에는 모녀(母女) 혹은 고부(姑婦)가 같이 모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경우에는 복음 묵상에 토대를 둔 나누기가 부담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말씀나누기를 통해서 세대별로 다르게 다가오는 복음 묵상의 풍요로움을 얻을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반대로 그 차이를 넘지 못해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또한 개개인의 자유로운 복음 묵상은 긍정적이지만 명확한 기준과 원칙이 없다보니 말씀 나누기의 분위기와 나눔의 균형이 소수에 의해서 좌우되는 상황도 생기는데 이는 부담과 소외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소공동체 모임과 활동의 중심이 되는 ‘말씀 나누기 프로그램의 다양성’이 요청됩니다. 현재의 복음 나누기 7단계는 주된 프로그램으로 유지하되, 각 공동체의 상황과 환경에 맞는 말씀 나누기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보급되어야 합니다. 신자 재교육을 위한 교리교육 주제에 따른 말씀 나누기, 소공동체의 조직화를 도모하는 회합식 말씀 나누기, 노인과 육아 부부들을 위한 속인적 말씀 나누기, 성경 통독 모임, 특별한 지향을 둔 고리기도 모임 등을 통해 말씀에 맛들이면서도 선정된 말씀 주제에 집중하도록 이끌어 주는 말씀 나누기 프로그램이 개발 보급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방법은 묵상과 나누기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을 제한할 수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현재 소공동체 모임 자체에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을 해소하고 본격적으로 복음 나누기 7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 운영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새롭고 다양한 말씀 나누기를 운영하면서도 공통적이면서도 필수적인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교리교육과 복음화 활동’입니다. 소공동체 모임은 복음화의 현장으로서 말씀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형제자매들 간의 친교를 이루는데,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일반 신심 모임이나 단체 활동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공동체 모임과 활동 목적 가운데에는 새복음화라는 목적도 있기 때문입니다.
소공동체 구성원들은 믿을 교리부터 지킬 계명, 그리고 영성생활에 관한 교리교육을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내적으로 새로운 복음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소공동체 모임과 활동이 개인의 신심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 또 생생한 복음화의 현장을 이루기 위해 명확하게 복음화 활동이 배당(配當)되어 실천되어야 하고, 사명감과 성취감을 위해 철저한 보고(報告)도 이행되어야 합니다. 이는 선교, 자선, 전례, 봉사 등 규칙적이고 정기적인 복음화 활동이 공동체 차원과 개인적인 차원으로 부여되어 말씀의 육화(肉化)가 가정과 직장과 본당과 사회에서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이 모든 것에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복음화의 첫 번째 동인은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 그분께 구원받은 우리의 경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더욱 더 사랑하도록 언제나 이끄십니다. 사랑하는 이에 대하여 말하고 그를 보여주며 그를 알리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사랑을 나누려는 강렬한 열망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사로잡아 주시도록 꾸준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은총을 청하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시고, 생기없고 피상적인 우리 삶을 흔들어 주시도록 간청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열린 마음으로 서서 그분의 시선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때 우리는 그분 사랑의 눈길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을 불러일으키는 최선의 동기는, 복음을 사랑으로 관상하고 조금씩 찬찬히 마음으로 읽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265항).”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10월호, 강희재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교육일반 · 소공동체 담당)]
[소공동체 재발견]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재발견하는 소공동체 (12)
지금 각 본당은 대부분 봉사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는 최근 여러 실태 조사 결과가 말해주듯이 많은 신자들이 교회의 공동체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기복적이고 자신의 안위만을 찾는 개인주의적 신앙생활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안에 있는 사회 현실이 교회 공동체에도 그대로 스며들은 것입니다. 그 결과 개인의 신심을 키우기 위해서는 정성을 다하지만 구역 반이나 단체에 얽매이기는 싫어합니다. 성경 공부를 비롯해서 매일 미사 참례, 성체조배, 영성 및 신학강좌 수강 등에는 열심히 임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제직 예언직 왕직에 기반을 둔 의무와 직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거부감을 표현합니다. 그런 이들은 교회 생활에 있어 최소한의 의무만 지키며 개인 신심에만 열을 올릴 뿐, 봉사와 희생과 애덕 실천에 대해서는 인색합니다(루카 11,42 참조). 실천이 없는 죽은 믿음의 길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야고 2,26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사랑의 계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3,16.18; 4,7-8).”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이 점을 더욱 강조하셨습니다.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주는 영적인 힘입니다. 참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에게서 도망치고 숨고 나누는 것도 주는 것도 거부하고 자신의 안위에 갇혀 있다면 그러한 삶은 서서히 이루어지는 자살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복음의 기쁨, 272항).”
그럼에도 본당은 봉사자 부족과 신자들의 소극적인 참여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한 봉사자의 부족은 본당의 여러 측면에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봉사 직무를 맡아야 하고, 더 나아가 신심 단체들에서는 단원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결국 현재 봉사하는 이들을 섭외하여 입단(회)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그로인해 모임과 회합과 활동 시간이 서로 중첩되어 봉사자와 신자들끼리 난감한 상황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본당 봉사와 활동은 시쳇말로 ‘하는 사람만 죽도록 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현재 활동 중인 봉사자들과 신자들마저도 과중한 업무와 활동으로 피로와 힘겨움이 누적되어 봉사와 활동을 그만두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을 아는 이들은 더욱 본당 안에서 봉사하기를 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이 본당은 악순환이 심화되고 곧바로 본당과 교회 전체의 침체로 이어지며, 결국에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복음화에 심각한 어려움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이제 쉽게 볼 수 있고 또 예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앞서 여러 차례 본당과 교구 차원에서 보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과정을 마련하여 봉사자 양성은 물론이고 신자들의 복음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본당 안에서 구역 반 소공동체와 여러 사도직 단체 간에 업무(직무)분장을 정확히 나누되 복음화와 본당 활성화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유기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본당과 교구 차원에서 이루어진 교육은 대부분 신자나 봉사자의 의무와 직무에 관한 교육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또한 성경 및 성사 등 교리교육 역시도 이론적인 것에 치우쳐 체험과 삶으로까지 이어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본당의 현실과 교구의 정책과는 거리가 있는 교육들이 비일비재하였고, 본당과 교구에서 많은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지만 일관된 과정과 체계가 없이 이루어져 수강하는 신자들이 교육의 효과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육 대상도 늘 받는 사람만 받을 뿐 보편적이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교육들부터 수강하는 신자들에게 맞추어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의 병폐에 대응하는 새 복음화라는 주제 하에 교구의 전체적인 틀 안에서 조정 정리 보완되어야 합니다. 필수 교육과 자율적인 선택 교육이 있어야 하고, 단계별 신자 양성 교육이 본당과 교구가 유기적으로 또 보편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보완하여 마련되어야 합니다.
소공동체와 사도직 신심 단체의 업무 분장에 관한 부분은 상당히 어렵고 부담스러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새 복음화와 공동체의 활성화라는 차원에서 보면 소공동체도 사도직 단체들도 자신의 분명한 몫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카리스마(은사)가 정리되어야 합니다. 소공동체는 교회와 본당의 복음화를 위한 사목 정책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현장입니다. 세속화의 맞바람에 맞서 교회가 복음 정신으로 교회다운 모습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복음화의 실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은사와 신심을 지닌 이들이 공동체 안에서 협력하고 제 몫을 다해 주어야 합니다. 교구 평신도 사도직 단체 협의회와 본당 신부와 그에게 협`력하는 본당 사목 평의회 임원들은 각 사도직 신심 단체들의 고유한 카리스마와 역량을 분명하게 알고 그것을 공동체 안에서 발휘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카리스마가 공동체 안에서 올바 로 발휘될 수 있도록 그 자리와 역할을 정확하게 잡아주어야 합니다. 소공동체 중심 사목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이 부분이 항상 문제가 되었고, 그런 이유로 가장 큰 필요성으로 대두되었습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11월호, 강희재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교육일반 · 소공동체 담당)]
[소공동체 재발견]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재발견하는 소공동체 (13)
저는 한국 가톨릭교회 교우들, 그 가운데 수원교구 교우들은 참으로 선하고 열심하며 성실하다고 확신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가톨릭교회 사제들, 그 가운데 수원교구 사제들 역시도 선하고 열심하며 성실하다고 확신합니다. 수원교구는 작은 교구였을 때부터 오늘의 큰 교구로 성장하기까지 그러한 사제들과 교우들의 하느님 사랑과 교회 사랑이 있었고, 지금도 그 사랑에 바탕을 두고 끊임없이 성숙하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 교구는 이제 ‘새로운 국면(局面)’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타 교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거대 신도시의 형성과 그에 따른 전국에서 유입되는 인구로 인해, 타 교구 신자 전입에 따른 교구민이 증가하는 교구, 젊은층이 가장 많은 교구, 도시와 시골이 공존하는 교구로 수원교구의 ‘외적인 모습과 상황’을 시시각각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내적인 위기도 마주하고 있습니다. 거세게 불고 있는 물질만능과 경제 제일주의 등의 다양한 ‘세속화’ 바람, 상대주의와 개인주의로 인한 ‘가치관의 대립과 갈등’ 등이 복음화를 위해 진력하는 교구의 안팎에서 장애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교구는 외적인 성장에 따른 긴 시간 건축과 부채 상환을 진행하면서, 또 본당이 대형화되면서 본당 공동체 안에서 사제와 교우 모두 영적인 갈증과 인격적 관계의 상실이라는 ‘공동화 현상’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적지 않은 사제들과 교우들이 전례나 교회 생활에 형식적으로 임하고 그릇된 신심 등에 빠져 신앙의 본질과 그리스도인의 본분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본당 사제들과 교우들이 스스로 자구책을 찾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구와 본당의 사목에 관한 근본적인 이해와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사목의 근본적인 목적은 ‘하느님 백성에 대한 영적인 돌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교회 됨이 필수적입니다. 교구와 본당은 교회의 교회됨을 위해 진력(盡力)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 됨’이란 친교의 공동체, 인격적인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구가 마주한 새로운 국면은 사제나 봉사자 개인 혹은 소공동체나 몇몇 신심 단체의 자체적인 노력만으로는 감당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열쇠를 저는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1서 12장에서 나타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親交)의 교회관을 통해서 찾아봅니다.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라고 하고, 그 몸은 다양한 지체들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그 지체들이 ‘같은 성령’께 받은 ‘고유한 은사(恩賜)와 다양한 활동’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4-7)”.
‘머리는 하나, 몸도 하나! 그러나 몸을 이루는 지체는 많다. 그러나 그 지체들은 하나인 머리를 따른다’는 사도의 교회관은 이 시대에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과 그 원인과 해결책을 모두 말해 주고 있습니다. ‘같은 성령’에게서 다양한 은사를 받아 다양한 활동을 하는 많은 지체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하나입니다. 공동선입니다. ‘공동선(some benefit)’이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만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같은 성령에게서 받은 다양한 은사를 지닌 지체들의 통합(한 몸이 되는)의 원리는 공동선이고, 그 공동선의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복음)에 대한 믿음과 따름입니다. 결국 강생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인 복음’이 다양한 지체들이 한 몸을 이루는 ‘기초이자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코린 3,11)”.
그 통합을 본당의 세포인 소공동체가 실현하는 것입니다. 소공동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을 통해 공동선을 실현하는 ‘공동의 장(場)’입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은사를 지닌 지체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소공동체이며, 그들을 공동선으로 이끄는 분은 같은 성령이시고, 공동선을 이루게 하는 핵심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복음입니다. 따라서 소공동체 안에서 각자가 받은 고유한 은사와 활동은 다양하지만 공통의 목적에서는 일치합니다. 교회의 지체로서 소공동체 구성원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삶의 자리에서 다른 지체들과 더불어 공동의 직무로서 정기적으로 공동선(지역 복음화)을 실현하고, 이어서 각자 고유한 은사에 따라 규칙적으로 봉사하며(신심 단체 봉사), 특수한 경우 소공동체들의 통합체인 본당 활동에도 협력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관건(關鍵)은 신자들의 은사의 계발(啓發)과 그것을 조율(調律)하고 통합(統合)하는 사목자의 역할입니다. 사목자는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성령의 바람이며 도구입니다. 사목자는 구역 반 소공동체나 특정 신심에만 집중하기 보다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 안에서 모든 교우들이 각자 받은 은사들을 계발시키고(양성), 그 은사들을 본당과 소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복음)에 합당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시간 장소 활동 등을 조율하고 통합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령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곳에서 활동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께 간청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보다 더 큰 자유는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계십니다(복음의 기쁨, 279-280항 참조)’.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12월호, 강희재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교육일반 · 소공동체 담당)] 0 4,762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