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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940년대 천주교회의 한국 선교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메리놀 외방전교회 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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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5 ㅣ No.890

1940년대 천주교회의 한국 선교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

 

 

국문 초록

 

이 연구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승인이 이루어지기까지 메리놀회를 중심으로 국제사회에서 천주교회가 전개한 활동을 검토하였다. 한국은 미-소의 첨예한 대립의 현장이었으며, 미국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에 따라 한국과 미국은 종교 분야에서도 긴밀한 연결을 맺고 있었다. 한국에 진출한 이래 메리놀회는 국제사회에 한국에 대한 후원을 호소하였고,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본국으로 강제 추방되자 더욱 여러 매체를 통해 한국 문제를 제기하였다. 특히 메리놀회는 한국의 주권 회복을 국제사회에서 공동의 ‘정의’(正義)를 이루는 문제로 규정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와중에 메리놀회는 교황청에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 재개를 요청 · 승인받았고, 트루먼 행정부에 한국 독립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취할 것을 적극 호소하였다. 천주교회는 미국이 우방으로 한국을 돕기로 명시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상기시키며 이제라도 카이로 선언을 이행하여 미국의 명예를 회복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정의를 추구하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한국을 위한 가톨릭’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미국의 일반 대중에게 한국에 대한 교육과 홍보를 전개했으며, 미국 내 주요 가톨릭 신자들의 서명을 받아 한국에 자치정부 수립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해방 뒤 정부 수립을 둘러싼 갈등이 오가는 가운데 교황청은 메리놀회의 미국인 번 주교를 초대 주한 교황사절로 전격 파견하였다. 주한 교황사절로서 번 주교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신의와 책임을 강조하며 정부 수립과 거국정부로의 승인을 위해 노력하였다. 즉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천주교회가 세계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방향에서 국제사회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적극 관여한 일이었다.

 

 

1. 머리말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의 강제 체결로 대한제국은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하였다. 일제의 침략으로 한국 민족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시련과 분열에 내몰렸으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더욱 가혹한 수탈과 강압에 시달렸다. 결국 종전되었지만 한국에는 38°선을 기준으로 미국과 소련이 각기 남과 북에 주둔하고 말았다. 미-소를 주축으로 한 국제적 대립이 깊어지는 가운데 종교는 양측이 극명하게 충돌하는 영역이었다. 여러 종교 가운데 특히 천주교회는 국제적으로 단일한 조직망을 갖춘 보편 종교로서 두 진영의 충돌에 긴밀하게 연관되었다. 냉전이 도래하면서 천주교회는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가장 조직적이고 유일한 세력으로 지목될 정도로 공산 체제와 대립했던 것이다.1)

 

한국은 냉전 속에 주변부 국가로서 내전의 현장인 동시에 열전을 직접 겪어낼 정도로 첨예한 갈등의 현장이었다. 이와 동시에 한국은 천주교 수용과 더불어 조선대목구 설정(1831년 9월 9일) 이래 세계 보편 교회의 지체였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역사적 사건에 국제적으로 단일한 조직망을 갖춘 천주교회가 무관할 수는 없었다. 이에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종전과 분단,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승인이라는 역사적 현장에 함께한 천주교회의 국제적 활동과 그 의의를 분석하려는 것이다.2)

 

이러한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먼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 천주교회의 반향과 그것이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을 고찰해 보려 한다. 다음으로 종전과 더불어 한국이 해방되고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천주교회가 전개한 활동을 검토하려고 한다. 특히 교황청의 주한 교황사절 파견이라는 결실이 이루어지기까지 진행된 천주교회의 한국에 대한 관심과 목표를 이해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천주교회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및 국제적 승인을 위해 전개한 활동과 그 의의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 문제는 특히 미국 메리놀회3)가 한국 선교와 관련해 남긴 문서를 분석하여 접근하고자 한다.4) 20세기 이후 한국에는 1910년대 베네딕도회에 이어 1923년 메리놀회, 1933년 아일랜드의 골롬반회 등 여러 선교회와 외국 여자 수도회가 새로이 진출해 왔다.5) 그 가운데 메리놀회는 아시아 전교를 주목적으로 창설된 미국 최초의 가톨릭 외방 전교회였다.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은 한국과 미국이 또 다른 통로에서 긴밀한 연결을 맺게 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일제의 한국 침략에 이어 제2차 세계 대전과 종전, 해방공간을 지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이어지기까지의 역사적 사건에 미국을 돌려놓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미국의 선교회인 메리놀회도 함께하고 있었다. 더욱이 메리놀회는 이 시기 국제사회에서의 한국 문제에 대한 비교적 풍부한 자료를 남겼다. 이에 메리놀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1940년대 천주교회의 한국 선교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둘러싼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2.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천주교회의 한국 선교 강조 : 1942~1945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메리놀회는 주로 아이들에 대한 선교와 교육, 노인 구호와 선교, 다양한 사람들의 개종 사례 등을 미국의 여러 매체에 사진과 함께 꾸준히 소개하며 한국에 대한 관심과 후원을 불러일으켰다. 평양의 신리 성당에는 주일이면 4백여 명의 아이들이 미사에 참석하는데 메리놀 수녀회 수녀의 도움으로 주일학교를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며6), 새로운 성당 건립을 위한 후원을 호소하였다.7)

 

선교사가 교사에게 월급을 주며 학교를 운영하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문을 닫게 된 사연과 함께 아이들의 교리 공부와 더 많은 개종을 위해 다시 학교가 운영되기를 하소연하였다.8) 수산나라는 여성 신자가 이교도뿐인 마을에서 신앙을 전하였고, 사람들이 천주교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허버트 신부9)가 그 마을에 도착해 보니 이미 수산나에게 배워 사람들이 “찬미 예수”라고 인사를 건넸다고 하였다.10) 미국의 채석장이나 교도소에서나 하는 일을 여기 한국의 여성과 아이들이 겨우 몇 센트 벌려고 돌을 깨는 일을 하고 있다는 등 굶주림과 가난으로 겪는 고통을 알리며 후원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11) 의지할 곳 없는 노인을 위해 노력하는 양로 활동도 소개하였다.12) 한국인 신부(홍용호 주교)를 사진과 함께 소개하며 그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13) 특히 메리놀회는 한국이 첫 번째 선교사가 활동을 시작한 곳이라는 각별한 의미를 강조하며,14) 선교 활동에 관한 소식과 더불어 선교지에 대한 관심과 후원을 호소하는 기고문을 지속적으로 게재하였다. 골롬반회도 박해기부터 당시에 이르기까지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소개하거나 한국의 집, 음식, 교회 등을 소개하면서 관심을 촉구하였다.15)

 

하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모든 메리놀회 선교사는 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고, 골롬반회에서는 일제의 적국이 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의 선교사들이 추방되었다. 춘천지목구장 퀸란 신부를 비롯해 11명은 춘천 감옥에 연금되었고, 1942년 아일랜드의 중립적 위치가 인정된 뒤에는 가택 연금되었다.16)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도 외부 출입이 금해지고 성당에서 미사만 집전할 수 있었다.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였을 때 남중국 · 홍콩 · 필리핀 · 일본, 그리고 한국 등 아시아에서 활동하던 메리놀회원은 203명이었고, 그 가운데 107명이 추방당했다.17) 메리놀회가 발표한 명단에 따르면 홍콩에서 신부 6명 · 수사 4명 · 수녀 12명, 일본에서 신부 10명 · 수사 1명, 만주에서 신부 13명 · 수녀 9명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오셰아 주교를 비롯해 모두 42명이 추방당했다(주교 1명 · 신부 30명 · 수사 1명 · 수녀 10명).18) 한국은 중국을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메리놀회 선교사가 활동하던 지역이었다. 한국에서 골롬반회 선교사는 30여 명이 21개 본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전쟁 직후 12월 8일에 이들 모두가 적성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본국으로 추방되거나 가택 연금 상태로 여러 고초를 겪었다.19)

 

상황이 이렇게 되자 메리놀회는 <전쟁 지역 메리놀 회원들의 마지막 소식>이라는 기사를 통해 남중국, 홍콩, 필리핀, 일본, 한국,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전쟁으로 인해 소식이 끊기거나 감금되는 등의 상황에 처하였음을 크게 보도하였다.20) 마산과 추와 두 본당을 맡았다가 본국으로 송환된 펠릭스 신부21)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때까지 경찰은 나의 모든 움직임을 미행하였다. 그것은 나를 매우 긴장하게 만들었다. 1941년 12월 8일, 나를 담당해 온 형사 가운데 한 명이 선교지를 찾아와 전쟁이 선포되었다고 말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양으로 보내졌고, 한국에 있는 거의 모든 메리놀 사제들은 1942년 6월까지 그곳에 억류되었다. …감금되어 있는 동안, 나는 자주 나의 그리스도인[신자]을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지금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와도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학교 아이들 한 무리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선교지에 줄 서 있었지만, 경찰이 아이들을 쫓아 버렸다.22)

 

일제는 전쟁 이전에도 서양 선교사를 감시해 왔으며, 전쟁 발발과 동시에 한국인과의 접촉을 금하고 구금하였다가 본국으로 추방하였다. 한국에서 10년간 선교하다 미국으로 송환된 클리어리 신부는 <동양의 밝은 별>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태평양 전쟁 뒤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될 때를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비록 일본 경찰이 신자들과의 접촉을 막았지만 신자들이 경찰 감시를 뚫고 음식 등을 가져오고, 떠나올 때 길을 따라 서서 울고 있었다고 하였다. 무모한 행동을 하거나 특정한 신호를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저 몇 정류장만이라도 떠나가는 사제들과 함께하기 위해 기차표를 끊어 따라왔다고 하였다.23) 골롬반회 소속 한국 선교사들도 “일제는 교회의 씨앗마저 파괴하였다”고 하며 일제의 종교 박해를 고발하였다.24)

 

선교 현장에서 추방된 메리놀회의 선교사들은 “선교사의 숙명을 완수하고자 한국 천주교회를 돕기 위해 돌아갈 그 날을 고대한다”고 하며 한국의 상황을 국제적으로 알려 나갔다. 메리놀회는 한국에서 일본의 강압 통치가 무너지고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국가가 수립되는 것을 추구하는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와중에 한국에 대해 메리놀회가 주장한 내용을 분석하면 잘 드러난다. 메리놀회가 강조한 것은 크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가장 주목할 점은 한국 문제를 국제사회에서 공동의 ‘선’(善) 내지 ‘정의’(正義)를 이루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한국인은 그래도 우리를 믿는 것을 선호한다. [미국은] 한국과 이전 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용납하였지만, 한국인은 늘 미국을 구원자처럼 간주한다. 선은 결국에는 승리하고야 만다. 두 세대 이전에 우리가 허락했던 악은 이제 바로잡아지고 있다. 미국은 국제사회 속에 합법적 위치를 갖게 하기 위해 다시 한 번 한국을 도울 것이다.25)

 

오셰아 주교가 지적한 한국과 미국이 이전에 맺은 조약은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1882)을 말한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전문에서 “대조선국과 대아메리카 합중국은 우호 관계를 두텁게 하기를 절실히 원하며 피차 인민을 은혜로이 돌아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어 제1조에서도 상대 국가가 다른 제3의 세력에 의해 불공정하게 모욕당하는 일이 있으면[不公輕侮] 반드시 서로 도와[必須相助] 잘 조치하여 그 우의를 표시한다고 명시하였다. 제11조에도 양국 생도가 왕래하여 언어 · 문자 · 법률 · 기술 등을 학습하면 피차 모두 마땅히 도와주어 우의를 두텁게 한다고 하였다. 즉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무엇보다 ‘양국의 우호를 두텁게 하기를 절실히 원하는’ 조약이었다. 특히 가장 먼저 명시한 제1조에 따르면 미국은 조선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을 때 반드시 도와야 할 우방이었다.26) 그러나 일본의 한국 침략 앞에 이 조약에 따른 미국의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천주교회는 한 국가의 이익을 넘어 세계의 ‘선’, ‘정의’의 승리를 추구하기 위해 한국과의 신뢰를 지켜나갈 것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한국의 주권 박탈과 그에 대한 암묵적 동의 내지 협조라는 과거에 저지른 ‘악’을 바로잡아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합법적 위치를 갖도록 도울 것임을 밝혔다.

 

둘째,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중요한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한국이 ‘깔때기’와 같은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오셰아 주교는 아시아에서 한국의 위상을, “어떤 면에서 한국은 중국보다 더 중국적이다. 한국은 마치 깔때기처럼 중국의 학문과 문화를 태평양 제도로, 일본으로, 자바로, 심지어 필리핀까지 전파하였다”27)라고 하였다. 한국인은 북경을 오가며 천주교를 비롯한 새로운 학문과 문화를 수용하였고, 이는 다시 한국을 거쳐 아시아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고 하였다.28) 이처럼 한국은 ‘깔때기’와도 같은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그 중요성은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셋째, 한국 천주교회사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사실이다. 메리놀회에서는 1920년대에 이미 영어와 불어로 한국의 천주교회사를 간행하여 영어권에 소개하였다.29) 무엇보다 선교사들은 한국 천주교회사가 세계 교회사에서 갖는 독특한 의미를 강조하였다. 스위니 신부30)가 쓴 <한국의 천주교도>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그렇다. 한국인은 한국의 최초의 천주교 선교사들이다. 천주교회의 긴 역사에 한국과 같은 경우는 없다. 이는 유일무이한 일이다. 이는 이러한 귀족[양반]과 인민들의 탁월한 특징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귀족에 의해 소개된 천주교 신앙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비록 정부는 그렇지 않았지만, 한국인은 이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고 그것에 빠르게 감사하였다. 정부는 천주교를 외국의 것으로 잘못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다. 천주교회의 고향은 온 세상이다.31)

 

이어 스위니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에는 영웅적인 용기를 가진 수많은 순교자가 장엄한 신앙의 본보기를 보였다고 하며, 초기 로마 교회의 성 세바스찬, 성 아녜스 등과 같은 사람들을 19세기 한국인 그리스도교인들 중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는 “한강의 모래는 순교자가 기꺼이 흘린 피로 물들었지만 그들의 신앙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다”고 하며 한국 천주교회는 만개할 것이라고 확언하였다.32) 뉴욕에 성당이 하나만 있던 때가 별로 오래전도 아닌데, 평양에는 벌써 3번째의 성당을 신축했다며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에 감격해 하였다.33)

 

오셰아 주교 역시 <한국의 미래>라는 글에서 한국인은 진실을 향한 타고난 열정을 갖고 있다고 하며 한국 천주교회사를 소개하였다. “한국에 그리스도교는 선교사에 의해 최초로 전해진 것이 아니다”고 강조하며 박해를 감내하며 신앙을 확산해 갔다는 역사를 정리 · 보도하였다. <한국을 위해 좋은 시절>이라는 제목의 긴 기고문에서도 오셰아 주교는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로 4천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설명하고,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순교로 박해를 이겨냈다고 소개하였다.34) 클리어리 신부는 한국인은 박해를 견디어 낸 진실한 신앙심이 있는 민족이며 그 바탕에는 우수한 한국 문화가 있었다고 하였다. 특히 한국 문화의 가족애, 높은 도덕적 기준 등이 천주교의 가르침을 수용하는 훌륭한 배경이 되었다고 소개하였다.35)

 

여러 기사를 통해 선교사들이 영어권에 한국 천주교회사를 소개하며 강조한 내용은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인 나라, 순교자의 나라, 열정적인 신앙의 나라, 약속의 땅, 한국인의 신심에 대한 감동 등이었다. 이와 동시에 오랜 독립국가로서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루어 낸 나라, 이순신의 거북선 등을 예로 들며 때로 국가가 흔들리는 위기가 있어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이겨온 나라임을 강조하였다.

 

넷째, 일제의 무력에 의해 선교사가 추방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반드시 한국에 돌아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펠릭스 신부는 자신의 심장은 여전히 한국에 있다고 하면서 사진과 더불어 한국에 대한 글을 발표하였고,36) 스위니 신부도 몸은 떠났지만 영혼은 한국에 있다고 하였다. 오셰아 주교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의 하나라고 하며 한국에 돌아가 한국인 성직자와 함께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기를 고대한다고 하였다.37) 요셉 기븐스 신부도 한국 선교지에서 추방된 이래 언제나 신자들이 떠오른다고 하며 그들과 함께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38) 클리어리 신부는 한국 신자들과의 이별을 말하면서 미국에 있지만 고국에 속해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이상할 것 없지 않으냐 하며, “일본인의 총이 우리의 몸은 철수하게 내몰았지만, 우리의 가슴은 그곳에 남아있다”고 하면서 한국에 돌아가 다시 활동하고 싶다는 글을 반복해서 발표하였다.39)

 

다섯째, 한국 교회를 독립적으로 이끌어 갈 교회의 지도자가 있음도 분명히 제시하였다. 오셰아 주교는 자신들은 추방되었지만 그 자리를 이끌어가고 있는 한국인 성직자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음을 밝혔다. 다만 그들을 돕기 위한 자신들의 ‘영광스러운 숙명’의 완수를 기원한다는 입장이었다.40) 그는 또한 <한국을 위해 좋은 시절>에서도 한국 천주교회는 시작부터 한국인 신부와 수녀가 있었으며, 그들이 선교 활동의 대부분을 수행하고 있기에 선택된 땅인 한국에 그리스도교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오늘날 한국에는 잘 교육받고 헌신적인 가톨릭 신자가 300,000여 명이 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국가의 직업적, 교육적 그리고 사업에 있어 지도자들이다. 그들의 영향력은 그 인원수보다 훨씬 크다”고 하며 평신도의 영향력 역시 높이 평가하였다.41)

 

여섯째, 선교사들은 일제가 한국 천주교회를 박해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근대 한국에서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더욱 교묘해졌지만, 역시 실재한다. 지난 십 년간 일본 통치자는 선교 활동에 대해 점진적인 규제를 가하였다. 속임수나 또는 다른 여러 수단으로, 그리스도교 학교와 기관을 정부 목적에 맞게 활용하려고 시도하였다. 정당하게 사례하는 어떤 시도도 없이 다양한 교회 기관들의 재산을 인수해 갔다. 바로 지난해에는 원산 베네딕도회의 숙련되고 헌신적인 노동으로 발달한 훌륭한 선교 재산이 사유재산 몰수를 위한 전주곡인 군사보호지역 안에 배치되었다.42)

 

오셰아 주교는 국가 지도자에 의한 박해를 이겨 온 한국 천주교회가 최근에는 일제 식민정부로부터 받고 있다고 거듭 일제의 종교 박해를 비판하였다. 이에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종교의 자유가 회복되기를 고대한다고 하였다.43)

 

결국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 한국에서 추방된 선교사들은 여러 매체에서 한국을 알리며 한국의 종교 자유와 선교 활동의 재개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 내용의 핵심은 이제 국제사회에서 ‘선’이 승리하고 ‘정의’가 이루어지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종교 통제를 종식시키고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정당한 지위를 얻는 일이 이루어져야 하였다. 특히 천주교회는 국제사회에서의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미국과 한국이 주권국가로서 체결한 조약의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종전 이후 한국 문제에 대한 천주교회의 관심이 한국의 주권 회복에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것은 국제사회의 정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3. 천주교회의 정부 수립 지원과 초대 교황사절 부임 : 1945~1947

 

일제에 의한 종교 통제와 박해의 벽에 부딪힌 메리놀회는 교황청에 중국, 한국, 만주 등지에 선교사를 다시 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포교성성의 승인이 내려졌다. 포교성성 장관 비온디 추기경은 메리놀회 총장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포교성성은 메리놀회의 역량을 특별히 신뢰한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동양에 대한 선교를 재개하기 위한 준비 여부를 숙고할 필요도 없다고 하며 메리놀회가 많은 선교사를 가능한 한 빨리 중국, 한국, 만주, 그리고 일본에까지 파견하고자 요청한 것을 승인한다고 하였다. 이 서신의 로마에서의 발송 날짜는 1945년 9월 19일로 종전 직후였다.44) 이어 메리놀회는 공동 서한을 통해 포교성성의 승인을 발표하였다.

 

포교성성의 장관 피에트로 푸마소니 비온디 추기경45)은 종전하자마자 최대한 빨리 메리놀회가 중국에 선교사를 증원하기 위한 열정적인 계획을 세워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표출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가능한 한 최대한 빨리 만주와 한국에 있는 우리 선교지에 새로이 선교사를 채우기 위한 준비를 하라고 조언하였다.

 

우리는 브루클린 소재 메리놀회에 신학교 설립을 허락해 주신 리처드 쿠싱46) 대주교님께 깊이 감사를 드린다. 50명의 후보자가 등록하여 이번 달에 개교하는 이 신학교는 뉴잉글랜드 소재의 새로운 소신학교가 될 것이다. 대부분의 교사는 동양에서 온 선교사일 것이며, 그들 가운데 일부는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일본에 의해 억류되었던 사람들이다.47)

 

메리놀회는 포교성성의 지원 아래 한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클리어리 신부는 <동양의 밝은 별>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인들이 그들 친구, 이제 독립을 위해 분투하는 용맹한 한국인들의 용기와 불굴의 용기를 잊지 않기 위해, 이 이야기를 말한다’는 글을 발표하였다. 해당 기사의 주요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최근 전 일본대사이며 동양 문제에 관해 매우 정통한 국무장관 요셉 그루가 매우 강한 어조의 성명을 반포하였다. 그 성명은, “미국은 자유를 향한 한국인의 열망에 깊이 공감한다”고 공표하였다. 그루 장관은, “한국인과 미국인과의 길고 친밀한 우정의 관점에서 볼 때, 미국 정부가 한국인이 국제사회(세상)에서 자유와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찾을 때를 고대하는 것은 상당히 흡족한 일이다”고 말하였다.

 

이는 가톨릭교회에 매우 관심 있는 문제이다. 그루 장관이 우리 정부를 대신하여 이 성명을 발표하기 불과 일주일 전에, ‘한국을 위한 가톨릭’으로 알려진 새로운 조직이 트루먼 대통령과 다른 고위 정부 관료들에게 한국 문제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분명하게 해 주기를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왜냐하면 그 나라의 처분과 관련하여 수많은 유언비어를 들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 전문을 선언한 것에 ‘한국을 위한 가톨릭’이 보낸 전문이 전체 또는 부분적이라도 원인이 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 해도 상황(분위기)은 분명하다. 그리고 ‘한국을 위한 가톨릭’ 조직은 그것의 다른 목적을 수행할 수 있는데, 즉 동양의 밝은 별인 한국에 관해 가톨릭 미국 대중의 교육과 인식 등과 같은 주된 일을 수행할 수 있다.48)

 

위에 보이는 요셉 클락 그루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도쿄 주재 외교관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감금되었다가 1942년 8월 미국으로 추방된 인물이다.49) 동양에 대해 정통하다는 평을 듣는 그는 종전이 되자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외교 정책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국과 한국과의 길고 친밀한 우정을 거론하며 자유와 독립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을 지지한다는 선언이었다. 한국과 미국과의 오랜 우정은 오셰아 주교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맺은 신뢰를 의미한다.

 

클리어리 신부는 이러한 정부의 선언을 적극 지지하면서 천주교회의 동향을 보도하였다. 여기에서 각별히 두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천주교회에서는 이제 막 해방된 한국을 위해 ‘한국을 위한 가톨릭’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그 목적은 교회만이 아니라 미국의 일반 대중에게 한국을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천주교회 내부는 물론, 전체 미국인으로부터 보다 광범위하게 한국을 위한 천주교회의 활동에 지지와 후원을 얻고자 함이다. ‘한국을 위한 가톨릭’이 결성 · 발전되는 것에 대해 클리어리 신부는,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형제들에게 점차 관심을 갖게 된 것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설명하였다.

 

둘째, 천주교회가 먼저 트루먼 행정부에 한국 문제에 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하기를 적극 요청하였다. 클리어리 신부가 제시한 것처럼 ‘한국을 위한 가톨릭’이라는 신생 조직에서 보낸 전문이 미국 정부 외교 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의 처리 문제를 놓고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천주교회는 미국이 한국에 대해 신의를 지킬 것과 한국이 독립국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음은 분명하다.

 

이어 “나는 여기 나의 고국에서 무언가 유배 온 것 같은 느낌이다. 나에게 고향은 한국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돌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하며,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소개,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 일제에 의한 추방과 한국인의 반응, 그리고 한국의 신자들에게 돌아가기를 바란다는 글을 발표하였다. 특히 선교사 없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한국 천주교회사를 소개하고 김대건 신부의 순교와 시복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클리어리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가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임”을 증명했다고 하며, 한국인 성직자의 활동과 신자들의 믿음을 소개하였다. 그는, “한국에서의 사제 생활 20년 동안 메리놀회만 해도 25,000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전쟁 발발로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 신자 수천 명을 뒤에 남겨야만 했다”고 하였다. “그루 국무장관의 성명은 우리 선교사들에게 희망을 주었다”고 하며, 동양의 밝은 별인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가능해질 때까지 지탱해 나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메리놀회를 중심으로 한 미국 천주교회는 한국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회 내부만이 아니라 트루먼 대통령과 정부 고위 관료들에게까지 전달하였다. 교황청 포교성성에 한국에서 선교 활동의 재개를 요청, 전폭적인 지지와 승인을 받았고, ‘한국을 위한 가톨릭’을 조직하여 일반대중에게까지 한국에 대한 관심과 정보를 확산시켜 나갔다. 한국에 대한 신의를 지켜 지난 잘못을 바로잡아 한국인의 자유와 독립을 지원하며 선교의 사명을 완수하기를 원하는 천주교회의 동향은 결국 한국의 정부 수립 지원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메리놀회는 보다 적극적으로 한국인에 의한 자치정부 수립을 강조하고 나섰다. <한국을 위한 자치정부>라는 제목의 논설을 발표하여, 한국이 자치정부를 운영할 역량과 자격을 갖추었음을 조목조목 논하였다.50) 한국인이 자치정부를 운영할 능력에 대한 한국인의 역량에 대해 회의적인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비판으로 시작하여, 첫째, 가장 먼저 한국인 대다수가 지적인 능력을 갖춘 교육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일부 저술가들과 비평가들은 한국 사람들이 그들 조국의 정권을 인수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우려를 표현하였다. 그러한 우려는 전혀 근거가 없다. 무엇보다 한국인들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나이가 많은 한국 남자 가운데 아주 극히 일부만이 읽고 쓸 줄 모르며, 지금 현세대 젊은이의 압도적인 수가 보통학교에 다녔고, 한자에 관한 지식이 있어 아주 잘 읽고 쓴다. 또한 수백 명이 단과대학과 종합대학 교육을 받았으며, 전문 직업, 공학기술, 농업기술, 그리고 다른 지식을 갖추었다.51)

 

미 루스벨트 대통령은 식민지 종속 지역 전후 처리 방식으로 다양한 신탁통치안을 구상해 왔다. 그런데 루스벨트 대통령이 독립 주권국가로서 자치정부를 운영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주요한 요인으로 지적한 것은 교육 보급이었다.52) 이러한 상황에서 메리놀회는 한국인의 지적 수준과 교육 보급을 강조하여 한국이 주권국가로서의 역량을 갖추고 있음을 역설하였다.

 

둘째, 한국인이 자치정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행정 능력과 경험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일제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인이 자치정부를 위한 준비를 하게 한 셈이라고 하며, 일제 강점기에 정부 활동과 모든 시정 조직에서 한국인이 활동했음을 들었다. 비록 한국인이 어떤 독립적인 조처를 취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한 지식과 경험은 자유를 회복하였을 때를 대비한 것이 되었다고 하였다.

 

셋째, 한국이 국제무역에서 독립국가로서의 역량을 갖추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것은 꼭 지적해야겠다. 한국은 국제무역에서의 곧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원이 풍부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양의 석탄, 철, 그리고 철강을 보유하고 있으며, 세기의 전환기에 이미 진취적인 미국 엔지니어들이 금, 납, 마그네슘, 크롬, 은, 흑연, 그 밖에 다른 자원을 개발하였다. 한국의 놋쇠 제품은 매우 독특하며 곧 시장을 찾을 것이다. 한국의 비단과 마는 확실한 질감과 문양을 갖고 있다. 연간 어획량도 미국을 능가한다. 다른 한편, 미국 생산품은 한국에서 큰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미국의 자동차, 기계, 의약, 농기구, 선로 장치, 플라스틱, 전자제품, 가죽제품, 그리고 다수의 다른 물건들을 수요로 할 것이다.53)

 

한국이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하는 국제시장에서 경제적 자주 독립체로 진입할 조건을 갖추고 있어 자치정부를 수립할 역량이 있음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며 역설하였다.54)

 

넷째, 한국인은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온 역량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자신들의 운명을 현명하게 직접 지휘해 갈 한국인의 능력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독립선언서>가 써졌을 때 이미 그들에게는 몇 세기에 걸친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55)

 

조선이 주권을 가진 독립국임을 선언한 <독립선언서>(1919)를 작성하였을 때 이미 몇 세기에 걸친 역사가 있었고, 그러한 능력을 갖추었기에 이제 자치정부를 세워 스스로의 운명을 직접 이끌어 가는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섯째, 임시로라도 정부를 조직 · 운영할 애국지사가 국내외에 이미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현재 워싱턴과 호놀룰루에는 한국 사람들의 신뢰를 누리고 있는 지적이고 애국적인 한국인 무리가 있다. 이 무리는 지금 한국에 있는 뛰어난 한국인들과 함께 자유선거를 위한 기계(장치)가 한국에 조정될 때까지는 임시정부를 시작할지도 모른다.56)

 

이미 한국인의 지지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자치정부를 이끌어 갈만한 역량을 갖춘 애국지사들이 국내외에 있으며, 이들이 정부 수립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을 시사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들은 즉시 자신들의 자치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무한한 희망을 갖고 미국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더 나아가 천주교회는 본격적으로 한국에 자치정부 수립을 지원하면서 사회 각계의 유명 인사에게 한국 문제에 대한 선언에 서명을 받아 <한국에 대한 천주교 성명서>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성명서에 명시된 각계 유명 인사들로부터 서명을 받은 날은 한국이 해방되기 전인 1945년 6월 7일이었고, 잡지에 게재된 날짜는 1946년 3월이었다. 이 성명을 통해 한국 문제에 관해 선언한 내용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57)

 

첫째, 카이로 선언은 자유를 빼앗긴 2천3백만 한국인의 상황을 가능한 한 널리 미국에 알려 한국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하였다. 둘째, 그리스도인이 된 동양의 이 한국인들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집권 당시 발표한 네 가지 자유, 특별히는 종교의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임을 확약할 수 있다 하였다. 셋째, 한국의 독립과 한국인이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것 등은 한국에 대한 정의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극동아시아의 미래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하였다. 넷째, 한국의 독립이 갖는 의미를 강력하게 호소하며 한국을 위한 가톨릭 조직을 적극 지지한다고 밝혔다.

 

카이로 선언의 수행은 우리의 국가적 명예가 걸린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우선 ‘선언’ 그 자체이기 때문이며, 둘째 1882년에 미국이 결코 취소할 수 없는 상호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을 한국과 체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카이로 선언의 이행은 늘 희망을 갖고 미국에 기대하는, 그리고 단지 끊임없이 우리 국가를 친구로 여기는 국가에 대한 뒤늦은 배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국무부의 탁월한 관료가 선언하였다. “한국 독립의 회복과 함께, 20세기 중대 범죄의 하나가 바로잡아지게 될 것이며, 또 다른 안정된 요인이 태평양에 건설되어야만 하는 새로운 국제 시스템에 추가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사람들의 이러한 열망은 국제 정의의 문제이며, 미래의 세계평화에 있어서 최선의 이익이 될 것을 믿는다. 우리는 진실로 이러한 원칙, 그리고 미국 대중에게 그들을 알리는 방안을 모색하는 ‘한국을 위한 가톨릭’으로 알려진 조직인 교육적 프로그램을 지지한다.58)

 

이미 오셰아 주교가 지적한 것처럼 미국은 일본의 한국 침략 앞에 한국과 체결한 약속을 저버렸다. 이제라도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여 ‘20세기 중대 범죄’를 바로잡아 국제 정의와 세계 평화를 도모하며 미국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우방 국가인 한국에 대한 뒤늦은 배상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미국 대중에게 이러한 문제에 대한 교육을 수행하는 천주교회가 조직한 ‘한국을 위한 가톨릭’ 프로그램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때를 맞추어 메리놀회는 “오늘의 표제는 한국이다. …동양 최고의 그리스도교 국가의 하나이다”고 하며 <터널을 통과한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특집기사를 게재하였다.59) 이벽 · 이승훈을 시작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활동을 소개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한국 교회에는 125명의 외국인 사제, 121명의 한국인 사제, 298명의 신학생, 31명의 외국인 수사, 12명의 한국인 수사, 49명의 외국인 수녀, 252명의 한국인 수녀, 그리고 1,687명의 평신도 교리 교사가 있었다”고 하며 지금 20만 명 이상의 신자가 있다고 보고하였다. 천주교회는 더 나아가 한국을 지원하기 위한 조직까지 결성하여 활동에 들어갔다.

 

메리놀회 오셰아 주교는 한국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추방되어 ‘추방 중’에 미국에서 선종하였다. 선종하기 전에, 그는 (한국을) 그리워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미국 선교사들이 그 운명을 완수하기 위해 한국 교회의 한국인 성직자를 돕기 위해 돌아갈 날이 올 것이다.” …우리 조국에 ‘한국을 위한 가톨릭’으로 알려진 조직이 스펠만 추기경의 후원 아래 최근 결성되었다. 이 조직의 주요한 목적은 미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극동에서 최고의 그리스도교 국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이다.60)

 

스펠만 추기경의 후원으로 ‘한국을 위한 가톨릭’이 조직되어 미국 일반 신자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활동에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해방공간에서 천주교회는 한국의 독립과 자치정부 수립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소련의 종교 탄압, 한국 공산주의자의 활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61) 이와 더불어 메리놀회를 중심으로 서양 선교사들은 분단의 상황에서 국제 정세에 대한 정확한 안목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남쪽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므로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 예견하였다. 이 때문에 한반도가 또다시 순교자의 피를 흘리게 할 수 없다고 하며 트루먼 행정부의 미군 철수를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62)

 

그런데 바로 이러한 시기에 일본 교토 초대 지목구장으로 활동 중이던 번 주교가 집중적으로 한국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다. 여름에 섭씨 40도까지 오르는 무더운 날씨와 7월 이후 장마에 관한 <한국인의 여름철>(1946. 9), 김 바오로라는 신자가 한 겨울 만주를 통과하는 일정을 성모님의 도움으로 이겨낸 일화인 <바오로는 계속 그의 고개를 숙였다>(1947. 2),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이 종종 5~6명이 동사한 것을 발견하기도 하는 등 혹독한 겨울에도 얼음물에 들어가 목욕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추위를 이겨내는 생활을 소개한 <한국의 추위>(1947. 3), 한국어의 특징을 소개한 <한국어로 말해보자>(1947. 6) 등이 그것이다.63) 바로 이 무렵에 번 주교는 급기야 1947년 4월 7일 한국의 초대 교황사절로 임명되었다. 번 주교는 물론 메리놀회 본부에서조차 갑작스러운 인사 발령에 당황했지만,64) 교황청이 한국 선교를 위해 사절을 파견하고자 했을 때 메리놀회 소속 미국인 사제인 번 주교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한국에서의 선교 경험까지 있었으므로 더욱 그러하였다.

 

한국은 번 주교의 부임을 “외국으로부터의 첫 번째 외교관”으로, 교황청이 “한국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여 크게 환영하였다.65) 《경향잡지》는 “조선이 아직 독립되지는 못하였으므로 순찰사라는 직명으로 부임하나 그의 권한은 교황사절과 동등으로서 조선 내에서 교황청을 대표할 것”66)이라 보도하였다. 한국의 여러 언론은 정부도 없이 반으로 나뉜 나라이지만 교황사절의 파견은 교황청으로부터 외교적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논평하였다.67) 앞에서 검토한 것과 같이 오셰아 주교 등 메리놀회 한국 선교사는 미국이 한국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것을 지적하며, 한국의 주권 회복을 지원하여 미국의 명예를 지킬 뿐만 아니라 국제 정의와 세계 평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한국에 교황사절의 파견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로 해석할 수 있겠다.

 

 

4. ‘거국정부’ 승인을 위한 천주교회의 활동 : 1948~194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 정권은 천주교회에 대한 탄압을 가중해 갔고, 이는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북한 정권은 서구와 단일한 조직망으로 연결된 천주교를 제1의 정치적 불신분자로 간주하며 탄압을 가중하였다.68) 한국에서 본래의 선교지를 잃은 메리놀회에 북한의 종교 탄압은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번 주교는 부임 즉시 평양과 원산을 방문하게 해 달라고 소련에 요청했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메리놀회 총장에게 보고하였다.69) 번 주교는 방송 등 매체를 통해 공산주의와 공산주의 체제를 비난하였고, 메리놀회 캐롤 몬시뇰이, “번 주교는 한국에 온 이래 계속해서 공산주의를 호되게 비판했기 때문에, 빨갱이들이 그를 매우 힘들게 할 것 같아 걱정입니다”라는 우려를 드러낼 정도였다.70) 북한 공산 정권도 평양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번 주교를 공격하고 그를 체포하면 엄중히 다스릴 것이라고 위협하였다.71) 번 주교는 오히려 한국에서 공산주의는 여전히 위협적인데, 미국이 소련을 너무 너그럽게 봐주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라고 하였다.72)

 

마침내 유엔의 결의에 따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1948년 1월 9일 서울에 입국하였다. 위원단은 이어 12일에 첫 회의를 열고 총선거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으나, 소련이 협력을 거부하여 북한 입국은 거절되었다. 번 주교는 임시위원단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유엔 임시위원단이 도착하였다. 우리는 그들이 엄청난 일을 해내기를 바란다. 이미, 그들이 여기[한국]에 단순 존재한다는 것은 소련의 위상이 “단지 미국에 맞서는 러시아”로부터 “전 세계에 맞서는 러시아”로 바뀐 것이며, 그 자체가 이미 이루어졌다.73)

 

주한 교황사절로서 번 주교는 유엔 임시위원단이 전 세계를 대표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에 대한 찬-반을 전 세계-소련의 대립으로 규정하였다. 한국이 주권을 회복하는 일은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메리놀회가 본격적으로 주장해 온 국제사회의 정의에 대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유엔 임시위원단의 활동은 전 세계가 이를 함께 추구하기 위한 노력이며, 이에 대한 반대는 세계의 선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번 주교는 임시위원단이 두 동강 난 한국을 국가로 수습하는 일에 성공을 거둘 것이며, 이 모든 혼란 속에서 군정이 일을 잘 마칠 수 있도록 조력할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74)

 

선거는 결정되었지만 새로 탄생할 정부의 대표성이 문제였다. 총선을 거쳐 수립된다고 하지만 선거를 치르는 지역이 38선 이남에 국한되므로 ‘거국정부’(The National Government)로 인정하는 여부는 논란이 예상되는 문제였다. 선거를 앞두고 번 주교는, “저의 이 임무를 언제까지 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 소련이 물러가지 않는 한 사람들이 희망하는 ‘거국정부’는 가능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75)라는 우려를 드러내었다. 미군정 법령으로 1948년 3월 17일에 국회의원선거법이 공포되기 바로 4일 전인 3월 12일, 번 주교는 메리놀회 총장에게 “한국은 지금 나라 전체가 어떻게 하든 하나가 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있다”고 전하였다. 하지만 이곳 모두가 ‘거국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임시위원단 캐나다 대표가 총선을 반대하고 있다며 아쉬워하였다.76)

 

임시위원단의 캐나다 대표 패터슨(George Patterson)은 1948년 3월 19일 하지 장군과 나눈 대화에서 유엔의 목적, 선거와 거국정부로 인정하는 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소련은 더 이상 영토 확장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며 다만 이미 점유한 지역에서 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할 뿐이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소련은 전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원한다고 하며, 이제 새로운 전쟁이 다시 발발하면 문명이 궤멸하리라는 것을 러시아도 잘 안다고 하였다. 또한 패터슨은 미국이 한국에서 자국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 유엔을 활용한다고 지적하였다. 미국이 유엔을 반공 블록의 형태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조직을 잘못 선택한 것이라 하였다. 그는 특히 선거의 대표성에 이의를 제기하여, 이 정부를 거국정부로 인정하기 곤란하다고 하였다.77) 캐나다 측은 유엔에서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한편, 남한 지역에 국한된 선거로 탄생하는 정부를 ‘거국정부’로 인정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입장이었다.

 

마침내 임시위원의 감독이 가능한 지역, 즉 남한 지역에서 선거가 치러졌고, 그 결과에 따라 198명의 제헌의원이 탄생하여 5월 31일에 제헌국회가 열렸다. 미국에서는 즉시 신생 대한민국이 가톨릭교회의 축복 속에 탄생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다.78) 새로운 정부가 한국에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인 남한에 세워졌으며, 교황 비오 12세가 새 정부에 대한 기도를 전했다고 밝혔다. 맥아더는 한국 분단이 “현대사의 최대의 비극”이라고 하며, “언젠가 이 인위적인 장벽은 반드시, 그리고 분명히 무너질 것이다”는 말을 전했다.79)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식에서 번 주교는 교황의 축하와 강복을 전하고 천주교회가 특별히 한국에 관심을 가져왔음을 강조하며 연설을 시작하였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에는 순교자가 셀 수 없이 있음을 말하며, “지구 위의 어떤 나라도 한국보다 영적인 확신을 위해 자신의 삶을 더 많이 내어놓은 나라는 없다”고 하였다. “하느님과 영혼과 영생이 있다는 영적인 진실을 믿는 한국인이 그러한 진실 위에 기초한 체제인 민주주의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였다. 번 주교는 또한 한국인의 자유로운 선거로 이루어진 이 정부 수립이 유엔 총회에서 전적으로 승인될 것을 확실하게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 하였다. 그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이 새로운 정부를 한국으로 인정해 줄 국가들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는 것을 기대하고 희망한다고 밝혔다. 교황도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주권을 가진 국가로 승인되는 일을 추진한 유엔의 관심과 전적으로 일치해 왔다고 전하였다.80)

 

이어 번 주교는 <신생 한국 정부의 취임,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제목의 이 연설문을 The New York Times에 기고했다. 메리놀회에서도 번 주교의 연설을 언론에 제공하였으며 미국의 모든 가톨릭 신문 1면에 게재되었다.81) 천주교회는 한국에 유엔의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알리며 신생 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위한 여론을 형성하는데 적극 나섰다. 교황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환영한다고 발표하였고, 교황사절인 번 주교를 최초 주한 교황대사(Apostolic Delegate)로 격상 · 임명하였다.82) 이는 교황이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 것으로 이해되었다.83)

 

국제사회에서 신생 대한민국 정부가 ‘거국정부’로 승인받는 문제를 위해 번 주교는 여러 경로로 외교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캐나다의 동향을 우려하여 7월 30일에 캐나다 외무장관 생 로랑, 8월 1일에 캐나다 교황사절 안토니우티 대주교 등에게 장문의 서한을 보내 신생 대한민국을 한국의 거국정부로 지지해 줄 것을 청하였다. 여기에서 번 주교가 교황사절로서 신생 대한민국 정부를 거국정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의 핵심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84)

 

첫째, 유엔 임시위원단의 도덕적이고 대표적인 성격을 제시하였다. 한국 사람들은 독립국가에 대한 희망을 안고 열광적으로 위원단을 환영하였다고 하였다.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한국인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위원단이 소련의 눈치를 본다면 스스로의 도덕성을 소멸시키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위원단은 ‘세계의 의견’을 대표하는 조직이라 하였다. 그런데도 그 대표성을 저버리고 소련의 눈치를 보아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위원단의 대표성과 국제사회의 정의는 소멸하기 직전으로 약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유엔의 위임을 받아 도덕적이고 전 세계를 대표하는 위원단의 활동에 의해 수립된 정부는 거국정부로 인정할 만하다는 것이다.

 

둘째, 남한 인구는 전체 한국 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며, 그 가운데 91%의 유권자가 투표를 하였고 처음으로 여성도 참정권을 행사한 선거를 통해 탄생한 정부이므로 ‘거국정부’로 인정할 만하다 하였다.85) 북한에서 약 2,500,000명의 피난민이 남쪽으로 내려와 남한에 거주하는 인구는 현재 전체 한국 인구의 2/3가 조금 넘는다고 하였다. 남한에 2천만 명가량의 인구가 있고, 북한에 850~900만으로 추산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지역적으로 한계가 있지만 2/3 이상의 한국인이 참여한 선거를 통해 탄생한 정부이므로 ‘거국정부’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셋째, 한국을 거국정부로 승인하는 일은 완전히 무력해져 버린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보다 유엔이 효과적이고 성공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첫 시험이라고 하였다. 국제연합 기구로서 유엔의 첫 시험 사례가 한국을 승인하는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만일 소련이 한국에 대해 굳은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한다면 유엔은 국제연맹처럼 무기력한 조직으로 끝장나 버릴 것이고, 뉴욕에 세우기로 한 멋진 건물도 무덤에 지나지않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넷째, 한국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조약을 체결한 미국의 신의와 책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이미 태평양 전쟁 이후 한국 선교를 강조하면서 오셰아 주교를 비롯해 천주교회가 누누이 지적한 내용이었다.86) 번 주교는 미국이 우방으로서의 신의와 책임을 저버리고 한국을 두 번 - 일본과 소련에 = 이나 팔았다고 하였다.

 

누가 나라를 두 개로 분할되게 하였는가? 나의 유일한 대답은 루스벨트 대통령이다. 그리고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대답한다. …첫 번째는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한국에 대한 통치권을 요청한 포츠머스 조약을 성사시켰다. 그 당시 우리는[미국은] 한국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을 한국과 체결하고 있는 상태였다. 테오도르 루스벨트는 이것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고, 일본에 통치권을 주었고, 한국은 45년간 일제 치하에 있었다. 두 번째는 현재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스탈린으로 하여금 한국 국토의 반을 가져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그때부터 끔찍한 분규가 계속되어왔다.87)

 

미국은 한국의 주권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있었고, 우방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반드시 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가 침탈하도록 한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다른 곳에서도 번 주교는 지난 반세기 한국에 일어난 가장 나쁜 일은 루스벨트가 소련에게 38선을 나누도록 허락한 일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런 벌을 받아야 할 아무 짓도 한국인은 한 적이 없다고 하며, 아마 지금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루스벨트가 알게 된다면 무덤에서 [놀라서] 되살아나올 것이라고 하였다.88) 정부 수립 이전부터 번 주교는 분단으로 인한 한국의 혼란은 미국의 책임이라고 비판해왔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소련을 나라 반쪽에 들어오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남쪽의 곡식과 북쪽의 연료를 비롯해 그 어떤 것도 소통되거나 교환될 방법이 전혀 없는 등 이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고 하였다.89)

 

미국의 스펠만 추기경도 루스벨트 대통령이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영향권’에 한국을 포함시킬 것을 약속하였다는 기사와 관련해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해명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클리어리 신부는 1882년 미국이 한국과 맺은 조약이 있으므로 한국의 독립 문제는 미국 입장에서 큰 관심사라고 지적하였다.90) 이처럼 천주교회는 미국이 우방으로 지켜야 할 한국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고 일제의 침략을 허용하였으며, 이제 또 분단이 되도록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은 미국의 정의와 연결되는 문제였다.

 

다섯째, 거국정부의 수립과 인정에 대한 프랑스 대표의 이중적인 태도와 소련의 부도덕성을 질책하였다.91) 프랑스 대표 조제프 폴 봉쿠르92)는 “미국과 소련 사이의 직접 협상을 통해 한국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질 것을 강력하게 희망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번 주교는 ‘강한 희망’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반문하였다. 번 주교는 소련의 부도덕성을 지목하여 비판하였다. 선거에 불만을 품고 남한으로 가는 모든 전력을 중단하는 등 소련이 자행하는 정책의 부도덕성을 지적하였다. 베를린의 분할은 강도 높게 비난했으면서 한국은 미-소가 직접 해결하라고 하며 희망을 품는다고 말한 속뜻이 무엇이냐고 질책하였다.

 

여섯째, 선교사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신생 정부를 한국의 거국정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캐나다 안토니우티 대주교에게 보낸 서신에서 캐나다가 소련 공산당에 대항하여 신생 한국 정부를 지지하기 위한 어떤 기회라도 주어진다면 캐나다는 그렇게 할 것을 희망한다고 밝혔다.93) 캐나다 외무장관에게 보낸 서신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중대한 관심사, 즉 믿음의 선교가 한국에서 방해받지 않으리라는 점에 공감하리라 믿으며 기회가 된다면 이러한 귀중한 목표를 위해 외교적 중재를 거절하지 않으리라 믿는다고 하였다.94)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양의 여러 나라와 그 대표단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유물론과 공산주의를 인정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한국 천주교회의 수장인 노기남 주교는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여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에 통신문을 보내어 신생 정부로 인해 한국이 마침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하며, 이를 위해 한국의 천주교 성직자들은 적극 협조해 왔다고 밝혔다. 또한 오래도록 억눌려 온 종교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라 하였다.95)

 

장면은 천주교회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3차 유엔 총회 파견 수석대표로서의 외교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교황 비오 12세는 장면이 이끄는 한국 대표단을 지원해 줄 것을 바티칸 국무장관 몬트니 대주교,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 대주교에게 명하는 등 한국 정부의 승인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96) 또한 장면이 이끄는 대표단은 캐나다 대표 패터슨의 부정적 입장을 고려하여 캐나다 수도 오타와로 가서 수상대리 살로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살로는 패터슨의 견해는 오해에 기인한 것이라 하며 앞으로 적극 지지할 것을 암시했다고 한다.97)

 

 

5. 맺음말

 

한국은 냉전이 형성되면서 주변부 국가로서 내전인 동시에 국제전을 직접 겪어낼 정도로 국제정치에서 첨예한 갈등의 현장이었다. 또한 한국은 천주교를 수용하여 교회가 창설된 이래 독립 교구가 설정된 세계 보편 교회의 지체였다. 1940년대 몰아닥친 국제정치의 긴장과 충돌에는 종교가 연관되었고, 냉전이 종교와 긴밀하다는 문제의식 아래 천주교는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렇다면 주변부 국가로서 마침내 열전을 치를 정도로 냉전의 현장이면서 보편 교회의 지체로서 천주교회가 활동하고 있던 한국에서의 일련의 사건도 좀 더 국제적인 종교의 관점으로 조망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1940년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종전과 분단,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승인이라는 현장에 함께한 천주교회의 활동을 메리놀회를 중심으로 주목하여 보았다. 아시아 전교를 주목적으로 창설된 미국 최초의 가톨릭 외방 전교회인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은 한국과 미국이 또 다른 통로에서 긴밀한 연결을 맺게 된 일이다. 그러므로 미-소를 주축으로 한 긴장의 무대였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둘러싼 문제를 분석하는 일에 메리놀회를 주목함은 매우 유용한 접근인 것이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메리놀회는 선교 활동과 더불어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심을 보이며 영어권에 한국에 대한 관심과 후원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모든 메리놀회 선교사는 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고, 골롬반회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도 추방되거나 감금되었다. 본국으로 추방된 메리놀회 선교사는 미국을 중심으로 여러 매체를 통해 한국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고 나섰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점은 한국이 주권을 회복하고 종교와 선교 활동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공동의 ‘선’ 내지 ‘정의’를 이루는 일이라고 주장한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갖는 중요성과 정부 수립의 당위성을 조목조목 주장하였다.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메리놀회는 국제사회에서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먼저 교황청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가능한 한 빨리 선교사를 다시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대한 승인을 획득하였다. 또한 미국 국내에서 천주교회는 트루먼 행정부에 한국 문제에 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하기를 적극 요청하였다. 전후 한국의 처리 문제를 놓고 온갖 논의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천주교회는 미국이 한국에 대해 신의를 지킬 것과 한국이 독립국가로 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지키고, 카이로 선언을 이행하는 일은 미국의 명예를 회복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정의를 이루는 문제이며 극동아시아의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라 주장하였다. 또한 ‘한국을 위한 가톨릭’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미국의 일반 대중에게 한국에 대한 교육과 홍보 활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각계에서 활동하는 주요 가톨릭 신자들의 서명을 받아 한국에 자치정부 수립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해방 뒤 정부 수립을 둘러싼 갈등이 오가는 가운데 교황청은 메리놀회 소속의 미국인 번 주교를 초대 주한 교황사절로 전격 임명하였다. 이는 천주교회가 한국의 주권 회복과 선교 활동의 재개를 국제 정의의 추구로 주장해 온 바탕 위에서 이해되는 조처이다. 주한 교황사절로서 번 주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지원을 위한 외교적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어 총선을 거쳐 수립되었다고 하지만 선거를 치른 지역이 38선 이남에 국한되므로 대한민국 정부를 한국의 ‘거국정부’로 인정하는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번 주교는 국제사회에서 신생 대한민국 정부가 ‘거국정부’로 승인받는 문제를 위해 여러 경로로 외교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생 대한민국을 한국의 거국정부로 지지해 줄 것을 청하였다. 가장 먼저 그는 유엔 임시위원단이 한국인의 열망을 수렴한다는 의미에서 도덕성을 실현하는 기구이며, 전 세계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지닌 단체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므로 위원단의 활동에 의해 수립된 정부는 거국정부로 인정할 만하다는 것이다. 또한 지역적인 한계는 있었지만 남한 인구는 전체 한국 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며 그 가운데 91%의 유권자가 투표를 하였고, 처음으로 여성도 참정권을 행사한 선거를 통해 탄생한 정부라는 사실을 들었다. 이어 번 주교 역시 한국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조약을 체결한 미국의 신의와 책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태평양 전쟁 이후 한국 선교를 강조하면서 오셰아 주교를 비롯해 천주교회가 누누이 지적한 내용이었다. 정부 수립 이전부터 번 주교는 분단으로 인한 한국의 혼란은 미국의 책임이라고 비판해왔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소련을 나라 반쪽에 들어오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고 비판하였다. 뒤늦었지만 이제라도 한국의 독립정부를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거국정부로 승인하는 일은 완전히 무력해져 버린 국제연맹보다 유엔이 효과적이고 성공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첫 시험 사례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신생 정부를 한국의 거국정부로 인정해야 한다는 점도 역설하였다.

 

노기남 주교는, “한국 정부가 파리 유엔 총회에서 한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을 받는데도 방 주교의 숨은 공로가 많았던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방 주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숨은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고, 또한 “한국의 발전을 위해, 대한민국 수립을 위해 초대 주한 교황사절 방 주교를 한국에 보내주시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다른 어느 나라보다 앞서 승인해 주신 사실은 당시 5억의 교우를 대표하는 은혜로운 축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회상하였다.98)

 

한국은 세계 교회사에 유례가 없게 스스로의 노력으로 교회를 창설한 이래 독립 교구가 설정된 보편 교회의 지체였다. 그와 같은 한국 천주교회가 가진 역량과 가치 위에 그것을 지키고 돕겠다는 바티칸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회의 국제적 지원과 관심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승인을 얻어내는 데 큰 의미를 갖는다. 천주교회는 20세기에도 여전히 자행된 종교 박해를 이기고 아시아에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는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조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국제적 승인으로 이어지는 이 모든 일은 천주교회가 세계의 공동선을 추구하고 국제사회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적극 관여한 일이었다.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 재원(교육부)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습니다(NRF-2014S1A5B5A02011717).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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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 지부

Maryknoll Mission Archives, biograph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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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냉전’과 종교와의 문제, 공산 정권과 천주교회와의 갈등 등에 관한 기존 연구의 정리 · 소개와 필자의 견해는 최선혜, <한국 전쟁기 천주교회와 공산 정권 - 초대 주한 교황사절 번 주교(Bishop Byrne)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44, 2014, 361~369쪽 참조.

 

2) 해방공간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승인에 이르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역할과 의의에 대해서는 여러 선학에 의해 이루어진 우수한 연구들이 있어 그에 관한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한 학문적 도움이 있었기에 이 발표를 준비라도 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필자는 이 글에서 주로 서양 선교회의 문헌을 활용해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를 중심으로 보다 국제적인 관점에서 천주교회의 동향을 검토하는 데 집중하였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회의 동향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관한 한국 천주교회의 활동에 대해서는 가장 최근의 연구인 여진천, <천주교회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대한 인식과 기여>, 《교회사연구》 32, 2009를 참조하라.

 

3) 메리놀 외방전교회(이하 메리놀회)는 1911년 4월 27일 전미주교회의(全美主敎會議)의 인가를 얻고, 6월 29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하여 인준, 창설되었다. 1922년 교황청으로부터 평안도의 포교권을 위임받아 1923년 한국에 전교 신부를 파견하면서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에 들어갔다.

 

4) 이 글에 주로 활용한 메리놀회 문서에 대한 소개는 최선혜, 앞의 논문, 364쪽 각주 9) 참조. 이 자리를 빌려서 다시 한 번 문서의 활용을 위해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도와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에 계신 신부님과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표한다.

 

5) 방상근, <선교회 수도회의 정착과 활동>, 《한국천주교회사》 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참조. 1930년대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과 활동에 대해서는 김수태가 발표한 일련의 연구가 크게 참고된다.

김수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진출과 활동>, 《부산교회사보》 29, 1999.

- - -, <1930년대 평양교구의 가톨릭 운동>, 《교회사연구》 19, 2002.

- - -,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활동>, 《교회사연구》 29, 2007.

이러한 연구를 통해 김수태는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의 의의를 지적하고 일제 강점기에 메리놀회가 전개한 가톨릭운동, 문서 선교 활동,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신사 참배 문제와 프로테스탄트와의 관계 등을 집중 검토하였다.

또한 평양교구에서 전개된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 거부운동에 대해 분석한 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신사참배거부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8, 2004와 메리놀회의 사목지였던 평양교구의 문서 선교와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김수태,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활동>, 《한국사학사학보》 11, 2005와 <1930년대 천주교 평양교구의 문서선교 - 《가톨릭연구》 · 《가톨릭조선》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7, 2006 등도 일제 강점기 메리놀회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6) 패트릭 더피(Patrick J. Duffy) 신부의 활동에 관한 “Letting Down the Nets”, The Field Afar 4, 1940. 1,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p. 2. 이 글에서 활용한 메리놀회에서 발간한 잡지인 The Field Afar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에서 총 9권으로 편집 · 제본한 것을 이용하였다.

 

7) “Maryknoll Want Ads”, The Field Afar 4, 1940. 2, p. 9. 한국 평양에 새로운 성당 건립을 위해 $6,000가 필요하니 후원을 원한다는 기사.

 

8) The Field Afar 4, 1940. 12, p. 50.

 

9) 허버트 포스피칼(Hubert M. Pospichal, 1887. 9. 6~1968. 3. 27). 메리놀회 소속 선교사. 1920년 9월 1일 메리놀회에 입회, 1925년 5월 31일 사제로 서품되고 즉시 한국에 파견되었다. 1942년 태평양 전쟁으로 추방될 때까지 한국에서 선교하였고, 1956년 다시 돌아와 1962년까지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0) “Apostle in White”, The Field Afar 4, 1940. 3, p. 12.

11) “Korean Close-up”, The Field Afar 4, 1940. 4, p. 17.

12) The Field Afar 4, 1940. 3, p. 13.

 

13) The Field Afar 4, 1940. 7~8, p. 35. 평양교구 순천 본당 4대 주임으로 재직 중인 홍용호 신부가 부모님과 함께하고 있는 사진을 소개하며 그의 사목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고 있다.

 

14) The Field Afar 4, 1940. 2, p. 10 ; The Field Afar 4, 1940. 4, pp. 18~19.

 

15) 골롬반회 선교 잡지인 The Far East에 한국 관련 기사를 보면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Brian Geraghty, “Memories of the Persecutions in Korea”, The Far East 24-2, 1941, pp. 27~29 ; 한국의 집과 음식, 복장 등과 의자가 없는 교회의 모습 등을 소개한 Patrick Devlin, “The Korean Way”, The Far East 25-2, 1942, p. 20 ; 한국 남성과의 만남을 소개하면서 선교 활동에 관한 Thomas Kane, “Korean Mission Station”, The Far East 25-9~25-10, 1942, p. 106 등이 있다.

 

16)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1943년 2월 9일에서야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국적의 선교사 3명이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다른 선교사들은 모두 안전하다는 보도가 실렸다. “Our Missionaries in Korea”, The Far East 26-4, 1943. 4. 태평양 전쟁 시 제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골롬반 선교사들이 겪은 고초에 대해서는 윤선자, <1940년대 전시체제와 제주도 천주교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5, 2005 참조.

 

17)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의 홈페이지 참조. http://mr.catholic.or.kr/marynol_kr/marynol_kr.htm

 

18) “The Exiled Maryknollers”, The Field Afar 4, 1942. 7, pp. 102~103 · 107에 보도된 홍콩, 일본, 만주, 한국 등의 지역에서 추방된 메리놀 선교사 명단.

또한 1950년 중국의 공산화로 그곳에서 활동하던 99명의 선교사는 어려움 끝에 중국 본토에서 철수하였으며, 총장 월시 주교는 유일하게 그곳에 남아 있다가 공산 정권에 의해 12년간(1958~1970) 상해 감옥에서 고초를 겪었다.

 

19) 호주, 미국, 뉴질랜드 출신 7명의 신부는 본국으로 추방되었고, 아일랜드 신부들은 가택 연금되었다가 광주를 거쳐 강원도 홍천 지역으로 이송되었다. 병에 걸려도 치료를 받지 못해 병사한 신부를 비롯해 첩보와 불온사상 소지자라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년간 구금되기도 하였다. 오기백 신부, 《한국선교 60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지부, 1993, 10~12쪽.

 

20) “Latest News of Maryknollers in the War Zone”, The Field Afar 4, 1942. 5, pp. 102~103.

 

21) 펠릭스 화이트(Felix. R. White, 1909. 11. 30~1966. 4. 22). 뉴욕 출생으로 1937년 6월 16일 사제로 서품되었고, 바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전쟁 발발로 억류되었다가 1942년 8월에 송환되었다. Maryknoll Mission Archives, biographies.

 

22) 펠릭스 화이트, “Kim Gabriel of Chuwa”, The Field Afar 4, 1944. 1, pp. 129~130.  

 

23) 패트릭 클리어리, “Bright star of the Orient”, The Field Afar 4, 1945. 10, pp. 150~151. 클리어리 신부에 대해서는 《한국가톨릭대사전》 11, 8567~8568쪽 참조.

 

24) 해롤드 헨리(Harold Henry), “Korean Episode - The vicissitudes of a new Christian Community during the War years in Japanese-controlled Korea”, The Far East 31-3, 1948. 3. 헨리 신부는 전쟁 이후에 구금되었지만, 그전에도 일제가 자신과 접촉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체포하여 마침내 교리문답을 위해 마을을 방문하는 일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오웬 맥폴린(Owen McPolin), “The Church in Korea - A Missionary Report on the War Years and After”, The Far East 31-4, 1948. 맥폴린 신부는 선교사들이 일제로부터 스파이로 의심받고 수감되어 옥살이를 하고,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종전이 될 때까지 체포되어 있던 상황 등을 보도하였다. 그러나 수감되어 있는 선교사들에게 한국인 신자들은 여유가 없는데도 돈과 음식을 가져왔다고 하였으며, 늘 헌신적이고 신실한 한국인 사제와 수녀, 신자들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다.

 

25) “Bishop O’Shea”, The Field Afar 4, 1945. 6, p. 146.

 

26) 조미수호통상조약은 1882년 5월 22일(음력 4월 6일) 체결되어, 1883년 1월 9일 상원 비준을 거쳐 2월 13일에 대통령 비준, 5월 19일에 비준안 교환이 이루어져 6월 4일 공표되었다. 이 조약은 최혜국 조항(제14조)으로 모순도 있지만 서로 동등하게 치외법권을 인정하였고(제4조), 무관세를 누리던 일본과 달리 미국은 조선의 관세부과권도 인정(제5조)하는 등 비교적 우호적인 조약으로 이야기된다. 무엇보다 고종은 천하의 대세가 옛날과 다르게 되었다고 하면서 미국과 조선은 ‘우호를 두텁게 하기를 절실히 원하는 대상’이었으며, 서로의 우호 관계 증진을 약속하였다. 조약에 관한 설명은 최덕수 외, 《조약으로 본 한국 근대사》, 열린책들, 2010, 63~99쪽 참조.

 

27) 오셰아 주교(William F. O’Shea), “Better Days for Korea”, The Field Afar 4, 1944. 7~8, p. 134.

28) 위와 같음.

 

29) 1924년 드브레(Devred) 주교가 홍콩에서 프랑스어로 《한국의 천주교 - 그 기원과 발전》이라는 소책자를 간행하였고, 이를 번 주교가 영어로 번역하여 The Catholic Church in Korea, HongKong, 1924로 출간하였다. 드브레의 책은 그 당시까지 나온 대표적인 책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원순, <한국천주교회연구소사>, 《한국천주교회사연구》, 1986, 366쪽 참조.

 

30) 레오 스위니(Leo W. Sweeney, 1902. 8. 11~1944. 8. 26). 미국 뉴브리튼 출생. 1926년 6월 13일 사제로 서품되었고, 곧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진남포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추방되기 전까지 매년 400명 이상에게 세례를 주었고, 1,300여 명을 수용하는 초등학교와 양로원을 운영하였으며, 시약소도 운영하는 등 그의 선교 활동은 매우 성공적으로 평가되었다. 일제에 의해 추방된 뒤 The Field Afar에 기고한 글은 그가 얼마나 한국을 잘 알고 사랑했는지가 잘 드러나 있으며,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다고 한다. Maryknoll mission archives, biographies. 

 

31) 레오 스위니, “Catholic Korea”, The Field Afar 4, 1943. 1, pp. 117~118. 스위니 신부는 조선의 양반을 ‘귀족’(noble)이라 기록하였다.

32) 위와 같음.

 

33) 평양 기림리 성당을 소개한 The Field Afar 4, 1941. 3, p. 66. 앞에 보인 스위니 신부의 “Catholic Korea”, The Field Afar 4, 1943. 1, pp. 117~118 참조.

 

34) “Korea Tomorrow”, The Field Afar 4, 1943. 6, p. 121 ; “Better Days for Korea”, The Field Afar 4, 1944. 7~8, pp. 135~136.

 

35) 메리놀 R2 F10 ff. 699-670, <클리어리 신부가 한국에서 돌아오다 - 한국인에 대한 찬사를 보내며 선교지에서 활동을 계속하고 싶은 희망을 표현하였다>.

 

36) 펠릭스 화이트, “Kim Gabriel of Chuwa”, The Field Afar 4, 1944. 1, p. 129.

 

37) 오셰아 주교, “Korea tomorrow”, The Field Afar 4, 1943. 6, p. 121.

- - - - -, “Better Days for Korea”, The Field Afar 4, 1944. 7~8, p. 134.

 

38) 요셉 기븐스(Joseph P. Gibbons), “Korea from the Subway”, The Field Afar 4, 1943. 9, p. 123.

39) 패트릭 클리어리, “Bright star of the Orient”, The Field Afar 4, 1945. 10, p. 150.

40) 오셰아 주교, “Korea tomorrow”, The Field Afar 4, 1943. 6, p. 121.

41) 오셰아 주교, “Better Days for Korea”, The Field Afar 4, 1944. 7~8, p. 134.

42) 오셰아 주교, “Korea tomorrow”, The Field Afar 4, 1943. 6, p. 121.

43) 오셰아 주교, “Better Days for Korea”, The Field Afar 4, 1944. 7~8, p. 134. 

 

44) The Field Afar 4, 1945. 9. 19, p. 155. 포교성성은 메리놀회에 보낸 공문에서 “당신 선교회의 요청을 ‘확인하고 승인’(confirm and approve)한다”고 하였다.

 

45) 피에트로 푸마소니 비온디(Pietro Fumasoni Biondi, 1872. 9. 4~1960. 7. 12) 추기경은 1933년부터 선종하는 1960년까지 포교성성 장관을 역임하였다.

 

46) 리처드 제임스 쿠싱(Richard James Cushing, 1895. 8. 24~1970. 11. 2) 추기경은 미국 보스턴 출생. 1921년 5월 26일에 사제 서품, 1944년 9월 25일 대주교, 1958년 12월 15일에 추기경에 올랐다.

 

47) The Field Afar 4, 1945. 9. 19, p. 155.

48) 패트릭 클리어리, “Bright star of the Orient”, The Field Afar 4, 1945. 10, p. 150.

49) 요셉 클락 그루(Joseph Clark Grew, 1880. 5. 27~1965. 5. 25).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하였을 때 그루는 도쿄 주재 미국대사였다.

 

50) 이하 자치정부 수립에 관한 메리놀회의 주장은 “Self-Government for Korea”, The Field Afar 4, 1946. 2, pp. 158~159의 기사를 정리한 것이다.

 

51) 위와 같음.

 

52)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식민지 종속 지역 전후 처리의 방식으로 식민지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신탁통치를 구상해 왔다. 그는 1942년 11월 15일에 행한 연설에서 “지난 40년간의 필리핀의 역사는 매우 실제적인 측면에서 세계의 다른 작은 국가들과 인민들의 미래를 위한 모형을 제공하고 있다”고 역설하면서, 그는 2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첫째는 교육의 보급과 물질적, 사회적, 경제적 필요의 안정과 충족을 위한 준비 기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지방자치를 시작으로 완전한 국가의 지위에 이르는 다양한 단계들을 통과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독립 주권국가에 도달하는 자치(自治) 훈련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 과도정부 구상과 중간파 정책을 중심으로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3, 19~62쪽 참조.

 

53) 앞의 각주 50)과 같음.

 

54) 전후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구상은 한국 경제의 일정한 자립과 세계 경제로의 재편입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강대국의 자본 제공과 기술적 원조로 한국 경제의 점진적 발전을 기획하였으나, 한국 경제의 급격한 구조 변화를 막기 위해 일정 기간 한국 정부의 완전한 경제활동의 자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정병욱, 앞의 책, 2003, 47쪽 참조. 이러한 상황에서 번 주교는 한국이 세계경제체제에 편입될 역량을 갖추고 있음을 역설하였다.

 

55) 앞의 각주 50)과 같음.

56) 앞의 각주 50)과 같음.

57) “A CATHOLIC STATEMENT ON KOREA”, The Field Afar 4, 1946. 3, p. 162.

58) 위의 각주 57)과 같음.

59) 플로렌스 데이비드(Florence D. David), “Faith through a Tunnel”, The Field Afar 4, 1946. 6, pp. 168~171.

60) 플로렌스 데이비드, “Faith through a Tunnel”, The Field Afar 4, 1946. 6, p. 171.

 

61) “Korea-a Country Divided”, The Field Afar 4, 1946. 9, p. 173. 분단된 한국의 상황을 전하며 소련의 종교 탄압을 비판하고, 메리놀 선교사들이 본래의 선교지로 돌아가기를 기다리며 현재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특히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이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보다 훨씬 악하다”고 한 증언을 소개하며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합법적인 지위를 되찾기 위해서는 여러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62) 최선혜, <서양선교사의 한국전쟁 예견>, 《교회사연구》 23, 2004 참조.

 

63) “Korean Summertime”, The Field Afar 4, 1946. 9, p. 174 ; “Paul Kept His Head”, The Field Afar 4, 1947. 2, pp. 184~185 ; “It’s Cold in Korea”, The Field Afar 4, 1947. 2, pp. 186~188 ; “Say it in KOREAN”, The Field Afar 4, 1947. 6, p. 189.

 

64) 1947년 8월 12일 로마 포교성성의 푸마소니 추기경이 번 신부를 주한 교황사절(또는 교황 순찰사, Apostolic Visitor)로 임명한다는 전보를 받았다. 교황은 번 몬시뇰을 한국 주재 교황사절로 임명함과 동시에 가제라의 명의주교(Titular Bishop of Gazera)로 서임함으로써 그의 주교직은 영구하게 되었다. 레이먼드 A. 레인 지음, 박준영 옮김, 《기억의 돋보기 - 패트릭 번 주교의 생애》, 성바오로 출판사, 1994, 184~187 및 194쪽.

 

65) R20 F6, 번 주교의 1947년 10월 29일 서신. 교황사절 파견을 단독정부 승인으로 의의를 부여한 한국 천주교회의 반응에 대해서는 강인철, <해방정국과 한국 천주교회>, 《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0 참조.

 

66) 《경향잡지》 41-9(통권 990호), 1947. 9, 140쪽.

67) 레이먼드 A. 레인 지음, 박준영 옮김, 앞의 책, 193쪽.

 

68) 동유럽 교회에 대한 소련의 침학, 북한 공산 정권 수립 이후 북한 교회의 상황과 피해에 대한 필자의 정리는 최선혜, 앞의 논문, 364~365쪽 참조.

 

69) 1947년 10월 29일 번 주교가 메리놀 총장에게 보낸 서신.

70) 메리놀 R2 F4 2 246~248(1950년 6월 말 내지 7월 초), 캐롤 몬시뇰이 메리놀회 총장 신부에게 보낸 보고서.

71) 레이먼드 A. 레인 지음, 박준영 옮김, 앞의 책, 188쪽.

72) 1948년 3월 9일 번 주교가 메리놀 총장에게 보낸 서신.

73) 1948년 1월 17일 번 주교가 메리놀 총장에게 보낸 서신.

74) 1948년 1월 16일 번 주교가 메리놀 총장에게 보낸 서신 ; 1948년 2월 4일 번 주교가 프레드(Fred) 신부에게 보낸 서신.

75) 1948년 3월 12일 번 주교가 메리놀 총장에게 보낸 서신.

76) 1948년 3월 12일 번 주교가 메리놀 총장에게 보낸 서신.

 

7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대한민국사자료집 39 > UN의 한국문제처리에 관한 미국무부문서 2 > ‘유엔한국위원단 캐나다대표 패터슨의 견해’(1948. 3. 29) · ‘하지와 패터슨과의 대화 비망록’.

 

78) 해방 이후 정부 수립까지 이승만 정권과 천주교회와의 관계는 강인철, <미군정기와 이승만 정권 하에서의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 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7, 631~632쪽.

- - -, <해방공간의 명동성당과 서울교구 : 1945~1950>, 《민족사와 명동성당》, 2000, 130~131쪽 등 참조.

 

79) 메리놀 R20 Box4 F7, 1948년 6월 30일 신문기사 스크랩.

80) 번 주교의 영문 연설문은 메리놀 R20 Box4 F8, “Inauguration of the New Korean Government”(Aug. 15, ’48)를 정리한 것이다.

 

81) 1948년 8월 30일 메리놀회 총장이 번 주교에게 보낸 서신. 번 주교에게 그가 보낸 8월 10일과 17일 두 편지를 오늘 받았다고 밝히고, 취임식에 연설하였음을 축하하며 그 연설을 언론과 기타 여러 공적인 프로그램에도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82) 번 주교는 조선이 아직 독립국가로서 주권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므로 교황 순찰사(Apostolic Visitor)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권한은 교황사절(Apostolic Delegate)과 동등하였으며,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4월 7일 교황사절이 되었다. 교황사절은 지역 교회를 위해 파견되는 사람들을 말하며, 이 사절에게 국가에 대한 임무가 더 주어지면 교황공사 또는 교황대사로 불린다. 최석우, <한국 천주교와 로마 교황청>, 《한국교회사논총》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731~733쪽 참조. 주한 교황사절은 1963년 12월 11일 교황공사로, 1966년 9월 교황대사로 승격되었다. 한국 천주교회 역대 주한 교황사절은 번 주교 이래 5명의 교황사절, 1명의 교황사절 서리, 1명의 교황공사, 그리고 현 10대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에 이르기까지 10명의 교황대사가 있다.

 

83) 레이먼드 A. 레인 지음, 박준영 옮김, 앞의 책, 204쪽.

 

84) 메리놀 R20 f. 264, 1948년 8월 1일 번 주교가 캐나다 교황사절 안토니우티 대주교에게 보낸 서신 ; 메리놀 R20 ff. 265-272, 1948년 7월 30일 생 로랑 캐나다 외무장관에게 보낸 서신, 1948년 3월 12일 번 주교가 메리놀 총장에게 보낸 서신, 1948년 3월 13일 번 주교가 메리놀 총장에게 보낸 서신.

 

85)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한민국선거사》 1968년 증보판, 70쪽에 따르면 투표율은 95.5%로 집계되었다.

86) 앞의 각주 25)와 이 글 132 및 146쪽 참조.

 

87) 루스벨트 대통령을 언급하며 미국이 한국을 팔았다는 내용은 메리놀 R20 ff. 469-691, 1949년 5월 11일 또는 12일(5월 11일과 12일 서한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별도의 날짜 표기가 없다) 번 주교가 Carrie & Louise에게 보내는 서한 ; 메리놀 R20 f. 715, 1949년 12월 13일 번 주교가 Carrie & Louise에게 보낸 서한 ; 메리놀 R20 Box5 F1, 1949년 5월 14일 또는 15일(5월 14일과 15일 서한 사이에 위치) 번 주교의 서신(Mother, Carrie & Louise, Sister Okkie, Stemelly 등에게 보낸 서한) 등에 나온다.

 

88) 메리놀 R20 Box5 F1, 1949년 5월 14일 또는 15일(5월 14일과 15일 서한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별도의 날짜 표기가 없다) 번 주교의 서신(Mother, Carrie & Louise, Sister Okkie, Stemelly 등에게 보낸 서한).

 

89) 1948년 3월 13일 번 주교가 메리놀 총장에게 보낸 서신. 번 주교는 Plain Talk(쉬운 이야기)라는 잡지에도 논평을 통해 미국이 한국의 반을 러시아에 넘겼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비판하였다. 레이먼드 A. 레인 지음, 박준영 옮김, 앞의 책, 174쪽. 이 기사의 복사본은 미국, 일본 등 여러 곳으로 배부되었다.

 

90) 메리놀 R2 F10 f. 667(1945. 11. 9), New World에 실린 기사 “The World on the Move”. 스펠만 추기경은 미국 대중에게 한국을 알리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인 ‘한국을 위한 가톨릭’의 후원자였다.

 

91) R20 ff. 265-272, 1948년 7월 30일 생 로랑 캐나다 외무장관에게 보낸 서신. 임시위원단 가운데 거국정부로 인정하는 데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 국가는 호주, 캐나다, 인도였으며, 프랑스는 불분명하다고 보고되었다.

 

92) 조제프 폴 봉쿠르(Augustin Alfred Joseph Paul-Boncour, 1873. 8. 4~1972. 3. 28).

93) R20 f. 264, 1948년 8월 1일 번 주교가 캐나다 교황사절 안토니우티 대주교에게 보낸 서신.

94) R20 ff. 265-272, 1948년 7월 30일 생 로랑 캐나다 외무장관에게 보낸 서신.

 

9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대한민국사자료집 7 > 유엔한국임시위원단관계문서 7, ‘서울대교구 노기남 주교로부터 온 통신문’(1948. 7. 1).

 

96) 장면의 외교 활동과 천주교회의 지원에 대해서는 이에 특히 주목한 허동현의 일련의 연구가 참조된다.

《건국 외교 민주의 선구자, 장면》, 분도출판사, 1999 ; <정계진출 이전 장면의 삶과 활동에 관한 연구>, 《경희사학》 23, 2001 ;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푸른역사, 2005 ; <장면, 천주교 지원아래 초창기의 외교를 이끌다>, 《한국사시민강좌》 43, 2008.

 

97) 손세일, <“대한민국은 한국의 유일한 합법정부”>, 《이승만과 김구》 7, 조선뉴스프레스, 2015, 503쪽.

98) 노기남, 《나의 회상록》, 가톨릭출판사, 1967, 357~358쪽.

 

[교회사 연구 제47집, 2015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최선혜(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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